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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리스트 님의 서재입니다.

폐급 용사는 사람을 찢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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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리스트
작품등록일 :
2024.02.04 22:42
최근연재일 :
2024.03.06 21:44
연재수 :
18 회
조회수 :
493
추천수 :
19
글자수 :
78,450

작성
24.02.14 20:47
조회
20
추천
2
글자
9쪽

6화. 양치기 소년(2)

DUMMY

말이 씨가 되어 나무가 자랐다. 거짓도 노력하면 진실이 될 수 있다. 여전히 바뀌지 않는 내 신념이다.


물론, 천운이 따라줘야 하겠지만.


머릿속엔 이놈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마을 사람들에게 신뢰를 더 깊이 살 수 있을지 관심사는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고작 두세 번 방문한 풋내기가 이런 고민까지 하고 있는데 본인 살자고 내빼는 촌장 꼬락서니하고는 참.


“에휴. 이래서 어르신 공경도 적당히 해야한다니까.”


단전에서부터 깊은 한숨이 절로 뿜어져 나온다.


늙은 촌장 놈을 향한 충성심은 지금으로부터 끝날 것이다. 제대로 사고가 박혀있는 사람들이라면 당연지사. 속된 말로 나가리.


무력한 노인네의 면모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으니 X세대를 향한 마지막 선처이자 희망퇴직을 권고하는 바이다. 어쩌면 협박 섞인 경고일지 몰라. 꼰대 양반.


오차 없이 완벽한 타이밍에 벌어진 돌발상황. 사람들 앞에서 비참하게 무릎 꿇은 양치기 소년의 임기응변은 찬사 받아 마땅했다.


“제발. 죽고 싶지 않으시다면 쥐구멍에라도 숨으세요!!!!!”


불과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판이 뒤집혔다. 늙은 촌장 놈을 경배하듯 고블린을 찬양하라.


위기를 타개해준 녹색 군단의 몰골은 은인이라 칭하기에 달갑지 않지만 든든한 동료애가 느껴졌다.


‘사장님. 나이스 샷.’


하지만 기쁨은 잠시뿐이었다. 내게는 자랑스러운 유토피아 용사로서의 긍지가 활활 타오르고 있어 텅 빈 마을에 홀로 남아 사람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흉악한 경쟁자 녀석들에게 애써 계획한 사냥감을 모조리 뺏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용사와 고블린, 생김새는 달랐으나 목적이 같았다. 인간 사냥과 약탈.


‘얼핏 봐도 수적으로 많이 밀리겠어. 다구리에 장사 없다던데..’


고블린 패거리라 외쳤더니 정말 고블린 떼거지가 왔다. 그중 한 놈은 내가 우두머리라고 이마에 쓰여있을 만큼 눈부시게 화려한 치장에 박수를 보낸다.


짝짝짝짝짝.


날렵해 보이는 잔챙이들과 다르게 우람한 덩치를 자랑하는 대두. 괜스레 머리가 크다는 느낌보다는 수장이라는 말로 화려한 치장에 뜻을 보태어본다.


주변을 둘러보니 느닷없이 펼쳐진 고블린의 습격에 나를 제외하고 쓰러져있던 늙은 촌장 놈이고 뭐고 할 것 없이 마을 사람들은 쏜살같이 사라졌다.


“쥐새끼도 이것보단 느릴 거야. 그렇지?”


조금, 아주 조금 서러웠다. 아무리 밉다 해도 같이 좀 챙겨주지.


오만하기 짝이 없는 촌장 놈을 향해 활시위를 당긴 영웅은 대두 고블린. 치사하게 녀석만 원거리 무기를 껄렁하게 매고 부하들에게는 근접 무기를 권유한 모양이다.


권력은 손에 쥘수록 목소리만 커지고 그에 따른 위용은 작아지기 마련.


“세상엔 왜 이렇게 못된 놈들이 잘 먹고 잘사는 거야?”


급하게 계획을 변경하기로 했다. 미천한 종족 가릴 것 없이 전부 다 쓸어버리기로.


“일석삼조다. 이 머저리 같은 새끼들아.”


다 쓰러져가는 판국에 자신감 넘치는 이유는 단 하나.


의기양양하게 확인해보는 본좌의 비공개 스펙은 「LV.89」


악취 나는 낡은 장비와 투박한 몽둥이 차림이지만 외형과 맞지 않게 과하게 쌓여 있는 능력치!


고블린이 나름대로 지능이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이건 아마 생각 못 했을 거야.


“미안하지만 진짜 변수는 나였어.”


신명나게 판을 깔아주었으니 강심장 암행어사는 시퍼런 이마에 광나는 놈들을 낚아채 신나게 두들겨 팰 것이다. 빨랫감 마냥.


손에 쥔 무기보다 맨주먹이 더 강할 수 있다는 것을 오만방자한 놈들에게 체감시켜주자.


자리에서 일어나 고블린들을 향해 소리쳤다.


“마을 사람들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면 다 죽여 버린다!!!!!”


고블린은 들었겠지? 우렁찬 도발을.

사람들은 보았겠지? 진솔한 마음을.


다음 계획으로 도약하기 위한 밑밥은 모두 던져졌으니 있는 힘껏 싸우자. 허접한 고블린을 상대로 패배할 근거가 없다.


도발에 반응한 고블린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해 있었다.


하나둘씩 겁없이 뛰어들기 시작하는데 어딘가 처량했다. 타격이 전혀 아프게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한 놈은 몽둥이로 사정없이 두들겨 팼다.


또 다른 한 놈은 양손으로 머리를 짓이겼다.


다음은 굳이 말 안 해도 알만하지만, 다 얘기하지 못하면 섭섭하지.


닳고 닳아서 조각난 몽둥이로는 납작한 가슴을 꿰뚫었고 두 발로 걷는 놈들을 네발로 걷게끔 만들어 주었으며 시끄럽게 구는 놈은 혀를 뽑아 버렸다.


“이게 사냥이지.”


내심 다구리를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자존심이 센 건지 한 놈씩 들어오는 게 의아하긴 했으나 다뤄보지 못한 전투력을 측정하기엔 안성맞춤이었다.


안전불감증이 사냥의 장애물이라 생각했는데 이토록 즐거운 활동의 순간만큼은 이상하리만큼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재밌다.”


혼자 피식거리고 부러진 몽둥이를 집어 던지며 죽어 나간 고블린이 뿌려놓은 칼자루를 쥐었다.


아이템을 획득했습니다.

「고블린 소드」

공격력 +5

공격속도 -5


“이름 구려.. 성의 없어.. 분위기 다 깨지네..”


녹색 잔챙이들이 들고 다닐만하다. 크기에 비해 더럽게 무겁기만 하고 실용성은 제로였으니까.


새로 득한 아이템 설명은 뒤로하고 남아 있는 우두머리에게 고블린 소드를 겨눴다. 용사는 겸손해야 하니 정신 차리고 재차 표현하자면 이 모양새는 그냥 ‘칼’이라 부르는 게 어울린다.


아무리 멋진 포즈를 취해도 도무지 폼 나지 않았다. 장착한 장비 문제가 시급하다. 사냥도 중요하지만 약탈이라는 동일선상의 목적을 잊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문득 다음 목표가 번뜩였다. 잡상인 자재 창고. 명성에 걸맞은 치장. 즉, 레벨에 맞는 구색을 갖추는 것.


똥폼 잡을 새도 없이 분노한 대두 고블린이 무수히 많은 화살을 내게 겨누고 활시위를 힘껏 잡아당겼다.


“야. 우두머리. 너만 원거리 무기 쓰기 있어?”

“네가 그러고도 대장이라 할 수 있는 노릇이냐?”

“못났네. 진짜.”


쿠에에엥!

녀석이 안 그래도 울퉁불퉁한 인상을 찡그린 채 요란한 소리를 내며 활을 쏴 재꼈다.


뿌에에엥!

마냥 질 수 없어서 나도 요란한 소리를 냈다. 상식을 바꿔보자. 근접 무기라고 꼭 가까이서 싸워야 할 타당한 이유는 없으니까.


쉬익! 푹.

대두 고블린 놈이 쏜 화살 중 하나가 왼쪽 허벅다리에 명중했다. 한 여름밤, 모기에 물린 정도의 가벼움.


쉬익! 푹.

내가 던진 칼이 대두 고블린의 시퍼런 이마빡에 명중했다. 한 겨울밤, 불곰에 찢긴 정도의 묵직함.


“후우. 구경꾼들이 없으니까 마음 편하네.”


낯부끄러움 많이 타는 내겐 굉장히 편안한 전장이었다.


이제 남은 임무는 온갖 꾀병을 동반해 늑대와 맞서 싸운 티를 내며 목장에 숨어있는 양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 그것뿐이었다.


불편했지만 왼쪽 허벅다리에 꽂힌 화살을 뽑지 않았다. 어느 때보다 실감 나는 연기를 보여주기 위해 감내해야 할 투철한 사명감 덕에.


“모두들.. 이제.. 밖은 안전합니다.. 누군가 보고 계신다면 도와주세요..”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며 걷다 이전처럼 무릎 꿇은 채 주저앉았다. 모두 숨죽여 지켜보고 있는 마을 한복판에서. 미친놈으로 붙잡혀 끌려갔던 단상 위에서와 똑같이.


덜컥!

덜컥!

덜컥!


여러 차례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헐레벌떡 뛰쳐나온 마을 사람들의 눈빛은 늙은 촌장을 바라보듯 총명했다.


“다친 용사님을 도와줍시다!!!!!”

“다들 어서 나와요! 용사님 덕에 밖은 안전합니다!”

“혼자서 마을을 습격한 고블린들을 모두 해치우셨어요!”


양들의 안전을 지켜낸 양치기 소년은 마을 사람들의 관심에 보답하듯 고개 숙여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수줍은 미소를 그렸다.


와락!


누군가 말없이 흐느끼며 차갑게 식어가고 있는 몸뚱어리에 따뜻한 온기를 안겼다.


‘으윽. 숨 막혀.’


로이어 마을 사람들의 숨이 막힐듯한 애정 표현에 몸 둘 바 몰랐지만 잠시라도 끌어 안아준 포근함은 복잡한 감정을 심어주었다.


실존하는 천사인 줄 알았던 페일. 그녀였다.


“저희가 큰 오해를 한 것 같아요. 용사님은 거짓말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요.”

“아니에요. 울지 마세요. 저는 괜찮..!”


쿨럭.


‘어..?’


늙은 촌장 놈이 화살을 맞고 뱉었던 기침과 비슷한 소리가 목청에서 튀어나왔다. 바닥에 흩뿌려진 시뻘건 액체와 함께.


‘지금 내 입에서 튀어나온 불그스름한 거.. 이거.. 피야..?’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고 온몸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어지러워.


‘왜지?’


자연스럽게 부축받으며 일어나려 했는데 정신이 아득해지고 시끄러운 이명 소리가 들려온다. 그렇게 양치기 소년은 양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거짓 없이 의식을 잃고 제자리에 고꾸라졌다.


작가의말

이전 정상 연재하지 못했던 1회차 분량을 추가해서 업로드 합니다.


독자분들께서 주시는 관심에 늘 감사드립니다.


선호작과 추천은 사랑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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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15화. 헤파이토스 망치(3) 24.02.29 10 0 11쪽
15 14화. 헤파이토스 망치(2) +2 24.02.27 14 1 9쪽
14 13화. 헤파이토스 망치(1) 24.02.26 12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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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1화. 휴먼 헌터(3) 24.02.23 10 1 10쪽
11 10화. 휴먼 헌터(2) 24.02.19 16 1 9쪽
10 9화. 휴먼 헌터(1) +2 24.02.18 21 1 12쪽
9 8화. 양치기 소년(4) 24.02.18 18 1 9쪽
8 7화. 양치기 소년(3) 24.02.17 20 1 10쪽
» 6화. 양치기 소년(2) 24.02.14 21 2 9쪽
6 5화. 양치기 소년(1) 24.02.12 19 1 10쪽
5 4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4) +2 24.02.09 21 1 9쪽
4 3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3) 24.02.08 20 1 11쪽
3 2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2) 24.02.05 34 1 13쪽
2 1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1) 24.02.04 79 1 11쪽
1 0화. 프롤로그 +2 24.02.04 127 4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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