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10년 전. 공허의 차원문이 처음 균열을 일으켰을 그 때.
세상에는 던전이 나타났다.
‘던전 폭발’이 일어나면 공허의 존재들이 던전에서 기어 나왔다.
그들은 신비로운 힘을 가진 몬스터들.
인간들의 힘으로는 놈들을 상대할 수가 없었다.
인류는 좌절했다.
한 줄기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공허의 ‘위대한 자’들이 인간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뻗었다.
일곱 명의 위대한 자들은 계약을 통해 인간들에게 독특한 힘을 나누어주었다.
몬스터와 맞서 싸울 수 있는 힘.
세상을 멸망으로부터 구해낼 힘.
인간들은 환호했다.
위대한 자의 권능과 자비를 숭상했다.
위대한 자로부터 힘을 얻어낸 ‘헌터’들은 던전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던전 공략에 성공하면 던전은 사라졌다.
몬스터도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던전의 수는 점점 줄어들었고, 인류는 명맥을 이을 수 있었다.
하지만 누가 알았겠는가.
위대한 자들 중 한 명이 배신할 줄은.
티탄의 위대한 낫, 크로노스.
크로노스는 인간들을 배신했다.
그가 인간에게 힘을 나누어준 데에는 다른 목적이 있었다.
주인이 없는 이 땅을 정복하기 위해.
인간들의 위에 군림하기 위해.
애초에 그는 인간들의 안위에 관심이 없었다.
이 세상에 자신의 권능을 행사하기 위해 인간에게 힘을 나누어주었던 것이다.
“후후후, 이제 너만 죽으면 끝이야.”
크로노스의 화신, 김재권.
크로노스의 힘을 나누어받은 ‘전사’ 클래스 중 가장 강력한 자.
동시에 헌터들 중 가장 강력한 자.
그가 내 눈앞에서 칼을 겨누고 있었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녀석의 눈빛을 바라보았다.
광기에 가득 찬 눈.
그는 이미 인간이라 할 수 없었다.
화신이라는 말 그대로 크로노스 본인이 내 앞에 현현한 것 같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위대한 자여.’
나는 나와 계약을 한 위대한 자에게 말을 걸었다.
김재권이 크로노스의 화신이라면 나는 형가荊軻의 화신.
동시에 ‘암살자’ 클래스 중 최상위 랭커였다.
그러나 나는 이 전쟁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그래서 이렇게 초라하게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겠지.
[역수의 위대한 협객, 형가가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역시나, 별다른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래도 뭔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내가 바보지.
이 상황에서는 아무리 위대한 자라도 별 수가 없을 테다.
이미 세상은 크로노스의 손에 넘어갔다.
다른 위대한 자의 화신들은 모두 목숨을 잃었다.
나만이 홀로 남아 최후의 저항을 하고 있었을 뿐.
이미 세상은 크로노스 휘하의 전사들에게 짓밟히고 정복당했다.
“자, 마지막으로 할 말 있나? 이현민.”
칼끝이 내 목을 향해 더 깊숙이 다가온다.
저항할 힘조차 없다.
“무슨 할 말이 있겠나. 그냥 죽여.”
“진작 우리 말을 따랐으면 사태가 이 지경까지는 오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너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어.”
“그게 왜 나 때문인가. 나와 사람들은 그냥 이 세상을 지키고 싶었을 뿐이야. 위대한 자니 뭐니 하는 놈이 인간들을 짓밟고 그 위에 군림하려는 걸 눈뜨고 지켜볼 수 없었던 거지. 그러니 그들의 희생이 왜 나 때문이라고 하나. 세상을 이 꼴로 만든 그 잘난 크로노스 새끼 때문이겠지.”
“무엄하군.”
“아무래도 좋아. 이제 난 죽은 목숨이니까. 뭐하나? 얼른 안 죽이고.”
“소원대로 해주지.”
김재권이 칼을 치켜들었다.
서슬 퍼런 칼날이 희미한 햇빛에 닿아 빛이 났다.
검이 쇄도한다.
그러나 나는 눈을 감지 않았다.
최후의 순간까지도 결연하게 상황을 묵도했다.
[마즈다의 위대한 예언자, 자라투스트라가 당신을 불쌍히 여깁니다.]
잠깐. 방금 내가 무엇을 들은 거지?
나는 두 귀를 의심했다.
방금 내가 들은 메시지는 형가의 것이 아니었다.
마즈다의 위대한 예언자, 자라투스트라.
나는 그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
공허의 위대한 자들은 총 일곱 명.
그들의 이름 중에 자라투스트라는 없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굽니까? 왜 이제야 모습을 드러내는 거죠?’
[마즈다의 위대한 예언자, 자라투스트라가 이 상황에 유감을 표합니다. 진작 인간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은 것을 후회합니다.]
[마즈다의 위대한 예언자, 자라투스트라가 단 1회 사용 가능한 ‘시간 회귀’ 마법을 시전합니다.]
시간 회귀라니.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거지?
[역수의 위대한 협객, 형가가 경악합니다. 자라투스트라의 결단에 존경심을 표합니다.]
[티탄의 위대한 낫, 크로노스가 분노합니다. 자라투스트라의 결단에 모욕감을 느낍니다.]
파아앗-!
그때 갑자기 모든 것이 느리게 보이기 시작한다.
이 세상 최고 레벨의 헌터인 그 김재권의 검조차도.
아. 이것이 시간 회귀인가.
실제로 모든 것은 느려졌다.
점점 느려지더니 얼마 못가 아예 멈춰버렸다.
나는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다.
[마즈다의 위대한 예언자, 자라투스트라가 당신에게 ‘시간의 증표’ 스킬을 선사합니다.]
시간의 증표? 이건 또 뭐지.
이제 곧 내 모가지가 떨어지는 마당에 웬 스킬인가.
화아아아-
갑자기 태양의 빛이 강렬해지기 시작했다.
태양으로부터 튀어나온 빛무리는 온 공간을 뒤덮었다.
세상은 한없이 밝아졌다.
빛으로 온 공간이 채워졌다.
점차 시야가 하얗게 변했다.
이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시각도 청각도 촉각도.
모든 감각이 마비되었다.
꼭 죽은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죽지 않았다.
잠시 후, 모든 감각이 돌아왔다.
나는 내 방 침대에 누워있었다.
날짜는 2018년 3월 3일.
내가 처음으로 헌터가 되었던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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