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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 님의 서재입니다.

02 서발과 도깨비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현대판타지

ccamagui
작품등록일 :
2022.10.30 23:32
최근연재일 :
2023.03.07 21:20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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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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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10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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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0211 담비요괴 여지루

DUMMY

0211 담비요괴 여지루


내일 오후 비행기가 귀국을 위해 예약이 되어 있었다. 그 때까지 돌아올 수 있을 지는 알 수 없다. 모든 일이 잘 마무리되어 그 때까지 돌아 온다면 아무 일이 없었던 듯 귀국하면 된다. 그러나 거의 하루동안 연락도 없이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면 최과장은 분명 실종신고 같은 것을 할 것이다. 이미진은 그런 불편한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저... 최과장님, 제가 급한 일이 생겨서..."

"예?"


최과장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본다.


"무슨 일인데요? 해외여행을 다녀 본 적도 없다면서요."

"개인적인 일이라 설명드리긴 좀 곤란하고요. 내일 비행기 시간에 늦지 않게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이미진은 정말 미안하고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두 손을 모으고 최과장을 올려다 본다. 발표회의를 준비했던 기물이며 문서들은 이제 모두 정리되어 정리된 서류뭉치와 가방들을 한 곳에 모으고 있던 최과장은 그런 이대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한다.


"개인적인 일이라니 더 묻지는 않을께요. 제가 도와줄 일은 없나요?"

"... 네...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너무 걱정마시..."

"알았어요. 하지만 일이 마무리 되면 바로 연락주세요. 내일 비행기 시간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큰일나요. 어째든 이번 출장의 모든 책임은 저에게 있는 겁니다. 거기에는 이대리를 아무 탈없이 복귀시키는 것도 포함되어 있어요. 알죠?"

"..."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잠시 뜸을 드린 최경훈과장이 웃으며 짐을 챙긴다.


"그럼 마무리는 나 혼자 해야 되는 겁니까? 대리가 되서 제대로 서포트한다더니 과장에게 잡일을 맡기고 자기는 개인적인 일을 보러 간다는 겁니까?"

"헤헷... 죄송해요 그리고 고맙습니다. 금방 갔다올께요. 무슨 일 있으면 꼭 연락드릴께요."


이미진이 허리를 직각이 되도록 구부려 감사 인사를 하고는 호텔 로비를 달려 밖으로 나간다. 호텔 현관을 나서기 전에 한 번더 돌아본 곽대리는 최과장을 향해 다시 허리를 굽혀 인사한 후 밖으로 나간다.



"핫!" 콰광!

"킁!" 슈아아악!

"으협!" 터덩!

크르르르르 그그그그엉!


같이 싸워 줄 난사람을 부르고, 식솔을 대비시키라고 보낸 어린 사제 둘을 빼고도 표운장주 공기덕의 제자는 열 세명이나 되었지만, 힘을 모으러 나간 후 아직 돌아오지 않은 두 명의 제자와 모용용은 외국에 있고, 장천은 제갈태룡에 의해 갇혀 있어 지금 이 자리에서 이리도깨비 요모대왕과 드잡이 중인 제자가 아홉 명이다. 그 중 넋틀을 열어 온전한 힘부림이 가능한 이는 제갈태룡을 포함하여 넷 뿐이었다.

아무리 오랫 동안 수련하고 연공하여 보통 사람을 능가하는 몸의 조건과 몸부림을 할 수 있다 해도, 선급의 싸움에서 몸부림은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맞추던 합은 싸움이 시작되고 몇 분이 지나지 않아 깨어졌고 그저 살기 위한 본능적이 싸움이 이어지고 있었다. 제갈태룡이 보기에 얼마 버티지 못할 일이었다.


'도대체... 도대체... 장로님들은? 백사부는 뭐하는 지...'


요마대왕의 몸에서 뻗어나온 검붉은 힘덩어리를 쳐내면서 제갈태룡은 속으로 절규하고 있었다. 그들 뒷 편의 장주의 처소는 마치 딴 세상인 듯 고요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요마대왕이 노리는 것은 난사람인 듯했다. 넋틀이 열리지 않은 사제들은 귀찮은 듯 쳐 낼뿐 난사람을 향해 이빨을 들이민다.

짧은 난전 중에 제자들의 상처는 늘어가고 있었지만, 요마대왕의 진로를 막는 것에 급급할 뿐 털 한톨 제대로 건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꺼엉컹!


싸움에 변화를 주려는 듯 요마대왕이 엄포를 실은 포효를 퍼트렸다. 그로 인해 드잡이 중이던 제자들은 잠깐 움추러든다. 그렇지 않아도 불리한 싸움에서 이것은 위험했다. 요마대왕이 그 틈을 노려 그를 둘러싸고 있는 제자들 중 난사람 하나의 목털미에 이빨을 박는다.


"사형!"

"사제!"


제갈태룡이 힘이 실린 칼을 교묘히 흔들어 막아보려 했지만 요마대왕은 앞 발로 그것을 쳐 내며 끝내 목적을 달성했다. 이리의 긴 송곳니가 박힌 몸의 상처를 통해 반짝이는 찌끼가 흘러나와 요모대왕의 코와 입으로 스며든다. 요모대왕은 이미 넋이 부서진 제자의 몸을 입에 문 채 머리를 흔들며 노랗게 번들거리는 눈으로 다음 먹이감을 찾는다.


"사형!"


그 모습을 견디지 못한 사람 제자가 하나가 몸부림으로 긴 창을 신묘히 흔들며 요모대왕의 목을 노려 치쳐들었다. 요모대왕은 먹잇감에서 눈을 떼지도 않은 체 그 창의 끝을 간발의 차이로 흘리며 몸통박치기로 뭇사람인 제자를 날려 버린다.


"크아아악!"


수 미터를 날아간 그는 돌벽에 부딪쳐 정신을 잃으며 널부러진다.


크르르르...


이미 몸뚱이만 남아 있는 난사람이었던 몸을 뱉어낸 요모대왕이 엄포를 흘리며 먹잇감을 향해 천천히 발을 옮긴다. 제자들은 그 기세에 눌려 추춤 추춤 물러선다.


"이이이이잇"


애써 요모대왕의 엄포를 털어낸 제갈태룡이 칼에 힘을 실을 때였다.


츠츠츠츠츠층!

콰콰콰콰콰광!


예상치 못한 커다란 존재감이 장주의 처소 지붕을 박살내며 안으로 파고 들었다. 이에, 먹잇감을 노리던 이리도깨비, 그와 대치 중이던 제자들이 소리가 난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파고 든 존재감의 주인이 흘리는 듯 장주의 처소를 중심으로 테투리가 검고 황금색으로 빛나는 힘이 꾸물꾸물 퍼져 나간다.


키잉?

<뭐지? 뭐야?>


요모대왕은 당황스럽다. 갑자기 낌새도 없이 나타난 존재감은 먹잇감이 아니다. 피해야 할 포식자였다.


쿠다다당! 쿵! 쿵!


혹은 가부좌를 틀고, 혹은 서 있는 채, 여러 가지 자세로 자신들이 만든 기관을 수정하고 힘과 뜻을 덧대며, 혜원선사의 넋을 찾도록 애쓰던 표운장의 장로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피 거품을 물려 사방으로 날려가 쳐 박힌다. 장주가 누워있던 방 문이며, 지붕과 벽의 일부가 그 여파로 산산조각이 났기 때문에 입가의 피를 옷소매로 닦으며 일어서는 이원의 눈에 방 안의 모습이 훤히 보인다.


까만 동공, 황금색 홍채, 까맣게 내려 앉는 긴 머리. 팔과 다리는 끝으로 갈수록 까맣고 몸 전체가 짙은 노란색으로 빛나는 존재. 단아하게 눈을 내리감고 앉아 있는 혜원선사의 앞에 착지한 자세 그대로 엄청난 살기를 뿜으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것의 몸에서는 몸이 품기에는 감당할 수 없다는 듯 노란 힘덩이가 꿀렁꿀렁 흘러나오고 있었다. 흘러나오는 힘이 닿은 주문이든, 태산동검을 이어주던 힘빛이든, 촛불에 초가 녹아 내리듯 녹아 흩어진다. 그 힘이 얼마나 짙으면 지나간 자리에도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표운장 장로 이원은 이런 힘에 대해서 읽거나,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 존재감 앞에서 자신이 벌레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틈이 처음 열렸을 때 현신해 주었던 토의 으뜸조각 서황에 버금가는 존재감이었다. 본능적으로 그것을 향해 엎드렸다. 감히 쳐다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머릿속은 하얗게 탈색되고, 손발이 덜덜 떨린다.



호텔을 나온 이미진대리는 인적이 없는 후미진 곳을 찾았다. 난사람들처럼 땅접기를 하지 못하는 담비도깨비는 빠르게 달려가야 한다. 눈에 띄지 않고 빠르게 달리기 위해 가장 편한 모습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몸의 모양을 바꾸는 일. 어쩌면 힘부림 중에 가장 쉬운 일일 것이다.

몸은 물질로 이루어 졌고, 물질은 힘에 말미암았다. 물질의 가장 작은 단위를 구성하는 힘의 가닥 수나 양을 바꾸면 물이 쇠가 되고, 쇠가 물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원하는 물질로 바꾸기 위해서는 특정한 힘의 가닥 수와 양에 대한 정확한 가늠이 필요하다. 능숙해지는 것은 고사하고 원하는 물질로 바꾸는 데까지 공부는 얻는 것에 비해 너무 깊고 넓어 누구도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에 비해, 넋이 만든 씨앗에 심어진 새김에 따라 물질을 변형하여 구성한 몸을 바꾸는 것은 새김에 대한 몇 가지의 공부만으로 가능하다. 새김의 조합을 바꾸는 것만으로 태초에 몸을 지은 넋의 뜻에 따라 자잘한 부분은 알아서 바꿔주기 때문이다.

담비도깨비는 태백선인처럼 몸의 수명에 대한 씨앗의 새김은 깨닫지 못했지만, 형태에 대한 새김은 일찍이 깨달아 이미 능숙하다. 몸을 싸움에 편한 형태로 바꾼 담비도깨비는 가림새를 몸에 둘러 주변으로 녹아든다. 그렇게 한 참을 가림부의 낌새를 따라 달렸다.


'어?... 이런 곳이?'


산 전체가 갖가지 찌끼들로 가득찬 곳에 도착했다. 찌끼는 힘이다. 아니, 모든 것은 힘이다. 또한, 힘부림은 힘을 쓰는 것이 아니라. 힘의 흐름을 뜻한 바 대로 바꾸는 것이다. 아주 큰 넋조각의 찌끼로 시작되어 거의 넋의 시간 만큼이나 존재했던 담비도깨비 여지루는 아주 오래 전에 이것을 터득했다.

최근 수 백년 동안 넋을 잡아 먹거나, 힘을 삼킬 필요를 느끼지 않았고, 뭇사람의 틀이 단단해져 흘러나오는 찌끼도 없었기에 그녀의 힘은 광에 비해 할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힘부림을 해야 할 일이 생겼고, 나헤윰을 갖지 못한 찌끼라면 그녀가 삼켜도 태백선인이 탓하지 않을 것이었다. 표운장까지 태산을 타고 오르면서 걸리는 모든 찌끼들을 삼켰다. 개 중에는 수 천년 동안 쌓여 그 양이 적지 않은 것도 있었고 표운장의 가림새를 뚫었을 때쯤 그녀의 광은 이미 오할 정도 차 있었다. 오랫만에 뿌듯하게 차오르는 힘. 그로 인해 일어나는 기분 좋은 고양감.


촤촤촤촤촤

드드드드득


담비도깨비는 앞을 가로막는 기왓장을, 지붕을 힘을 넘치게 두른 발톱으로 찢어 발기며 혜원선사가 있는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언니...'


겉 모습은 단아하고 편하게 앉아 있는 듯 하지만, 그 넋의 당혹감과 배신감, 패배감이 오롯이 전해졌다. 감정은 넋을 들끓게 한다. 즐거움과 같은 좋은 감정은 끓어도 당기는 힘이 있어서 흩어지지 않지만, 안 좋은 감정은 넋이 증발하여 힘으로 돌아가 흩어져 버리게 한다. 넋틀이 단단한 뭇사람은 넋틀이 흩어지지 않도록 막아 주지만, 명상과 공부를 통해 감정을 다스릴 수 있게 되어 넋틀을 연 난사람인 혜원은 극히 위험한 상태인 것이다. 다행히, 태백선인의 염주가 넋을 숨기고 흩어지는 것을 단단히 막아 주고 있었다. 끓고 있는 넋이 가라앉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넋의 연배로 따지면 한참 후배인 착한 넋이 감정으로 들끓어 아파하는 모습이 안스럽다. 안스러움은 분노로 분노가 다시 살기로 변하는 것은 순간이었다. 엄포가 깃든 포효도 사치였다. 여지루는 진득한 살기를 사방으로 흘린다. 주변에 느껴지는 도깨비는 하나. 넋틀이 열린 난사람 열 댓명이다.

혜원선사를 아프게 한 것은 분명 가까이 있는 이들일 것이니 멀리 있는 사람들은 건들이지 않는다. 죽음의 뜻을 담은 힘. 담비도깨비의 살기가 사방으로 흘러가며 조잡하기 그지 없는 주문을 녹인다. 주문에 의해 빨아드여 봉인되었던 동검 안의 찌기가 압력을 못이겨 터져 흘러나온다. 여지루는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찌기를 삼킨다. 칠 할. 이 만큼 채워진 적이 있었을까?

여지루가 살기를 거두지 않은 채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네 놈이 한 짓이냐?"

<네 놈이 한 짓이냐?>


여지루의 몸과 넋이 한 소리로 엎드린 채 떨고 있는 토의 조각에게 뜻을 보낸다.


<...>

"네 놈이 한 짓이 맞느냐?"

<네 놈이 한 짓이 맞느냐?>

<... 죄... 죄송합니다... 사... 살려주십시요...>

<살려달라? 네 놈의 죄를 네가 알렸다.>


이원이 마지막 넋심을 짜내어 겨우 대답하였다. 이원을 추궁하던 여지루가 슬금슬금 도망치려는 요마대왕의 낌새를 느꼈다.


<흥! 의도가 참 가상쿠나!>

<!...>


엄포가 실린 여지루의 뜻에 요마대왕은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다. 경험상 이런 존재에게서는 도망쳐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 댓거리가 아니라 어찌 잘되어 먹어 삼키기에도 감당할 수 없는 힘이다.


<네 놈은 어찌된 것이 도깨비도 아닌 듯 하구나? 네 놈은 무엇이냐?>

"끼잉~"

<어찌 하는 짓은 이리와 같은가?...>


요마대왕의 꼬리를 말고 엎드리는 모양새가 영락 없이 겁 먹은 개였다. 멀리 있던 난사람들이 다가오는 것을 느낀 여지루가 가벼운 손짓으로 요마대왕과 제자들을 힘빛에 감아 이원과 한 자리에 모으고, 둘래에 가림새를 세워 안으로 멀리서 다가오는 난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나는 너희들을 믿지 못하겠다. 하여, 변명을 들을 생각도 없다.>

<...>


존재감과 살기에 억눌려 대답할 수 있는 존재가 없다. 여물지 못한 제자들, 기관의 붕괴와 함께 나가 떨어진 장로들은 이미 정신줄을 놓은 상태라 대답할 수도 없다.


<언니가 넋을 추스려 안정된 후에 그 분이 앞뒤를 설명하고 나면 죄를 따질 것이다.>


그리 말한 여지루가 살기를 거두고, 혜원선사의 옆으로 가 앉는다. 이원은 이 어마어마한 존재가 혜원선사와 어떤 관계인지 궁금했지만 차마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요마대왕은 빠져나갈 구멍을 찾느라 분주하게 눈알을 굴린다.



정일우부장은 오랫 만에 가족들이 있는 집으로 갔다. 이번 주말은 집에서 지낼 생각이었다. 항상 들고 다니는 등산용 백팩에는 연오랑이 선물한 마고신복이 들어 있다. 혹시 몰라서 가족들이 있는 집에서 입어 볼 요량이었다.


디디디디디딕!


도어락의 암호를 넣어 열고 들어선다.


"나 왔어~"

"어어, 왔어. 고생했어요."


쇼파에 앉아서 티브이를 보고 있던 아내가 웃으며 그를 맞는다.


"어째 살이 쫌 빠진 것 같네. 밥은?"

"응? 아직."

"알았어. 씻어. 밥 차려 줄께."

"응, 얘들은?"

"아직 안 들어왔어."

"응."


샤워와 식사를 마치고, 서재 겸 옷방으로 쓰고 있는 자신을 위한 방에 들어온 정일우부장은 백팩에서 마고신복을 꺼낸다. 옛날 옷이라는 데 바지까지 연결되어 있는 작업복같은 모양이었다. 하얀색에 붉은 문양이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방 밖에서는 티브이 소리가 약하게 들려온다. 창 밖에서는 매미소리가 들려온다. 여름날의 낮은 참 길다.


'정말 입어 볼까?'


얇은 면인 듯, 종이인 듯 그 재질이 분명치는 않다. 그렇다고 종이처럼 쉽게 찢어질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세탁을 말끔히 했다고 웃는 연오랑의 말이 틀리지 않은 듯 바삭거리는 느낌이 좋았다. 양 손에 들고 펼쳐 보았다. 몸에 대어 크기도 가늠해 본다. 색감이나 무늬나 겉 옷으로 입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스스스스스승


몸 안 어디에선가 상쾌한 낌새가 퍼져나간다. 틈을 벌린 것과는 다르다. 벌어진 틈으로 흘러나오는 것과 다르게 더운 여름날 땀이 차오르 듯이 넋심이 스며나오며 차오른다. 신복이 그의 신체에 피부인 것처럼 떨어짐없이 달라 붙는다.


'오오오...'


늙은 정일우의 몸에 들어차는 넘치는 힘에 머리 속이 맑아진다. 몸을 이루는 근육과 근육사이에 힘이 들어찬다. 오랜 세월 사용해서 틀어졌던 뼈가 재자리를 찾아간다.


뿌드드득

'아... 상쾌하다.'


안경을 벗고 손을 들어 힘껏 쥐어본다.

문득, 방 밖 거실의 아내가 느껴진다.

불규칙한 심장소리가 들린다. 아내는 원래 심장이 약하다고 했었다. 왜 그런지 알 것 같다. 아내의 무릎 밑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핏줄이 보인다. 막고 있는 불순물을 제거하며 순환을 도울 수 있을 것 같다. 머리를 감싸는 가는 핏줄과 힘의 흐름이 막혀 있다. 아마도 두통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감각을 더 확장한다.

아파트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의 건강한 심장.

그 옆을 지나는 관리인 아저씨의 때가 낀 관절.

나무 위에 푸덕거리는 이름 모를 새의 날개 짓.

찻 길을 달리는 자동차의 힘부림과 그 찌꺼기.

평상시 입는 운동복을 신복 위에 입었다. 겹쳐 입은 부담스러움은 전혀 없었다.


"또... 담배피러가?"

"..으응.."

"못 끊나?"


아내의 핀잔.


"쓰레기.."

"그래..."


그를 부르는 말이 아니다. 나가는 김에 쓰레기를 버려 달라는 말이다. 쓰레기를 버리고 아파트 단지 내의 유일한 흡연장소로 간다. 담배를 꺼내 불을 붙히려다 말고 아파트 벽면을 따라 이십삼층 높이의 꼭대기를 본다. 뛰면 한 번에 올라갈 수 있을 것 같다. 주위를 둘러 본다. 놀이터의 아이들과 그 곁에서 바닥을 쓸고 있는 경비원. 이 쪽엔 관심이 없다.


'해 봐?'


담배를 집어 넣었다. 주위를 한 번 더 둘러보며 자신에게 닿아 있는 의식이 없음을 확인한 그는 바로 다리를 굽힌다. 아파트 옥상. 아니 그 보다 한 층이 더 높은 엘리버이터 기계실 위에 서서 눈 앞에 펼쳐진 도시의 정경을 감상한다. 마치, 계단 한 칸을 오르는 듯 올랐다. 너무나 당연한, 별거 아닌 일이었다. 이십삼층 높이에서 지상의 놀이터를 내려다 보는 것도 자신의 발을 보는 것처럼 높이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문득, 아파트 단지 옆을 흐르는 천변이 궁금했다.


'여기서는 안 보이는 데...'


맞은 편 아파트의 엘리베이터 실 위로 가볍게 건너뛰었다.

펄럭이는 운동복.

스치는 바람.

뻥 뚫린 듯한 감각의 확장.

자유로움.

엘리베이터 실 위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 개천을 따라 흐르는 물비늘을 보는 정일우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여지루는 걱정이 되었다. 혜원선사를 노리던 태산동검의 기관은 이미 부숴졌다. 그럼에도 그녀의 넋을 잠근 태백선인의 염주에서 말미암은 가림새는 풀리지 않고 있었다.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혜원선사의 넋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거나 아직 그녀를 노리는 무엇인가가 남아 있어 발동을 멈추지 않는 경우, 염주의 새김이 잘못되어 발동이 멈추지 않는 경우. 하지만, 후자는 생각할 가치가 없다. 무려 태백선인이 직접 새긴 새김이 잘 못 새겨졌을 리가 없다.


'그렇다고 언니의 넋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을 리는 없고, 아직 남아 있는 위험이 있다는 건데... 그게 뭐지?'


여지루의 생각이 깊어가는 동안, 요마대왕은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 가림새 내벽을 뛰어다니고 있어고, 가림새의 바깥에는 표운장의 난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다. 정신이 돌아온 장로와 제자들은 한 쪽에 서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저희끼리 쑤근거리고 있다. 이원장로는 그들과 떨어져 머리를 굴린다.


'이대로 혜원이 깨어나면, 저 요과이가 나를 그냥 둘 것 같지 않은데...'


존재감과 힘의 크기에 대한 내성은 금방 생긴다. 마치 오물 냄새와 같다. 내성이 생겨 자유로워진 생각은 이 예상치 못한 난관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 지에 대한 것으로 미친다.


'일단, 이 곳에서 빠져나가야 한다. 그리고, 토의 조각들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는 수 밖에 없겠어.'


그런데, 공기덕을 집어삼켜 힘을 키운 요마대왕도 가림새의 구멍을 찾지 못하고 있다.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아무래도,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챵쥬께서는 이미 소멸한 듯 하외다."

"크으으윽!"


한 장로가 장주의 몸을 돌아보며 하는 말에 이미 그리 생각하고 있던 제갈태룡이 눈시울을 붉히며 요마대왕을 쏘아본다.


"요모다왕!"

"쉿! 조용! 타이롱, 지금은 아니다."

"..."


장로의 말에 혜원선사를 지키듯이 앉아 있는 담비도깨비를 돌아본다.


"아... 장로어르신, 어디서 저런 것이 나온 겁니까?"

"글쎄, 나도 알지 못한다. 혜원선사에게 기르는 요과이가 있다는 말은 들은 바가 없는데..."

"저 정도의 존재감이면, 전성기의 우리가 다 덤벼야 겨우 대적할 만 할 거외다. 허헐..."

"그러게나 말일 쎄... 요모다왕도 꼬리를 내리고 도망칠 궁리만 하고 있지 않은가."


옆에 있던 다른 한 장로의 말에 다른 장로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가림새의 내벽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이리도깨비의 분주함과 표운장의 장로와 제자들의 쑤근거림에 관심이 없는 듯, 담비도깨비는 혜원선사만을 바라보며 고민에 빠져있다. 생각에 빠져있는 담비도깨비가 모르는 사이에 여덟 줄기의 힘빛이 꾸물거리면 바닥을 기어 그녀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그 힘빛의 모양새가 태산동경의 그것과 닮았다.


"으응?! 뭐냐?"


거의 담비도깨비에 닿을 듯이 다가갔을 때, 여지루는 위화감을 느끼고 돌아본다. 순간, 꾸물대며 다가가던 힘빛이 빠르게 여지루를 향해 지쳐 들었지만, 광에 칠 할의 힘을 채운 담비도깨비의 민첩함을 따라갈 수가 없다.


"치잇!"


어느새 왜에게서 배운 수결을 맺고 있던 이원이 힘빛의 공격을 흘리는 담비도깨비를 보고 잇소리를 냈다. 장주의 처소. 태산동검으로 힘을 모으기 위한 무른기관을 설치하기 전에 장주의 안전을 고려하여 태산동경을 이용한 굳은기관이 벽을 따라 설치되어 있었다. 천정의 팔방에 설치되었던 태산동검의 무른기관은 이미 여지루에 의해 파괴되었지만, 벽을 따라 설치된 태산동경의 굳은기관은 그대로 있었던 것이었다. 이원은 이것을 발동시켜 도깨비의 힘을 흩어 버리려했다.


"이런 간사한 늙은이.."


여덟 개의 힘빛이 이원의 수결에 이끌려 담비도깨비 여지루를 쫓기 시작했다.


"백사부..."

"이장로..."


쑤군거리던 장로와 제자들 역시 예상치 못한 이원의 행동에 당황한다. 이원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힘빛을 이끌어 여지루를 쫓는다.


'언니는 괜찮아, 이것은 동경의 힘빛이다. 동경만 깨면 된다. 못된 늙은이...'


힘빛을 피하며 여지루는 생각했다. 태산패 조사 우태천에 의해 만들어진 신물 태산동경, 힘의 크기나 존재의 크기와 관계 없이 일단 동경의 힘빛을 맞게 되면 갖고 있는 힘이 흩어지는 것은 피할 수가 없다. 방법은 단 하나. 힘빛을 피해 동경을 파괴하는 것이다.


'전면에 힘부림했다가는 그냥 흩어져 버린다. 동경의 후면을 쳐야 한다.'


담비도깨비는 동경의 힘빛을 피하며 동경의 위치를 가늠한다. 그러는 새에 그녀가 세워 놓은 가림새가 헐거워진다. 요마대왕이 이를 놓치지 않고, 틈새를 찾아 찢어버린다. 찢어진 틈새로 몸을 우겨 넣더니 가림새를 벗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친다.


"요모다왕이..."


제갈태룡의 탄식과 함께 요마대왕은 찢긴 가림새의 틈으로 빠져나와 태산의 중턱으로 사라져 간다.


<못된 늙은이, 너 때문에 놓쳤잖아!!>


힘빛을 피하여 동경을 두 개째 부수고 있던 여지루도 이원을 보며 으르릉거린다.


'이젠 돌이킬 수 없다. 마지막 한 수...'


이원은 자신에게 있는 모든 힘을 쥐어 짜서 수결을 맺는다. 여섯 개의 동경에서 비롯된 힘빛이 그물망처럼 여지루의 둘레를 감싼다. 이것은 여지루를 공격하지 않고, 진로를 방해하는 형상이다. 힘빛의 끝이 아닌 옆면을 드러냈으니, 담비도깨비의 손톱에 찢길 일이다.


"이 늙은이 어디 갔어? 크아양아!"


여지루가 동경의 힘빛을 찢어내고 나왔을 때, 이원은 그 자리에 없었다. 여지루의 가림새는 거두어져 표운장의 난사람들이 지척에 있었다. 나머지 원로와 제자들은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해 우왕좌왕한다.

혜원선사는 여전히 눈을 감고 다소곳이 앉아 있다.

원흉이라 예상되는 이원과 이리도깨비는 도망쳤다.

지붕이 날아간 장주의 처소는 팔방의 벽 중에 두 개가 박살이 나 있다.


"갸우우우우우웅!"


화가 몹씨 난 담비도깨비의 포효와 함께 퍼진 엄포에 모두가 두려운 눈 빛으로 몸을 굳히고, 태백선인의 염주는 가림새를 더욱 단단하게 여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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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서발과 도깨비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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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0218 백두패 한어른 23.03.07 24 0 26쪽
17 0217 어제의 돌마루 23.02.26 14 0 26쪽
16 0216 돈찌와 유끼메 23.02.20 15 0 25쪽
15 0215 백두패 매화무리 23.02.13 22 0 26쪽
14 0214 꽃재비 림태수 23.02.06 19 0 26쪽
13 0213 도깨비 내꼬마다이 23.01.28 22 0 24쪽
12 0212 태산패 제갈태룡 23.01.24 20 0 26쪽
» 0211 담비요괴 여지루 23.01.10 22 0 24쪽
10 0210 태산패 이원장로 23.01.01 22 0 27쪽
9 0209 라지기르 쌈마온까르 22.12.27 18 0 25쪽
8 0208 모울루싼 쎄하니야 22.12.18 19 0 25쪽
7 0207 도깨비 요마대왕 22.12.11 23 0 24쪽
6 0206 영주패 돌하르방 22.12.04 20 0 24쪽
5 0205 태산패 표운장주 22.11.28 22 0 25쪽
4 0204 야마또 도꾸가와 22.11.20 22 0 25쪽
3 0203 백두패 태백선인 22.11.13 25 0 24쪽
2 0202 태산패 태천신인 22.11.06 24 0 21쪽
1 0201 백두패 혜원선사 22.10.30 48 0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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