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화. 연예기획사 대표 한영진. 5
두려운 마음을 안고 나는 김지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지현이니? 왜 전화했어?"
-오빠! 흑흑흑!
“왜 그래? 혹시 아버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흑흑흑! 오빠!!
“도대체 무슨 일이야? 울지만 말고 말을 해봐!”
-오빠! 아빠가, 아빠가······.
“아빠가 왜? 뭐가 잘못됐어?”
아이고, 답답해!
말을 하라고, 말을!!
-오빠, 아빠가 몸을 움직이셨어요!
“.....!”
-오빠가 가시고 두 시간쯤 뒤에 아빠 방으로 들어갔는데, 잠에서 깬 아빠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셨어요. 흑흑!
“....!!”
젠장, 괜히 놀랬잖아!
그럼, 좋은 일인데 울기는 왜 울고 난리야!
사람 간 떨어지게!
-좀 전에 아빠가 혼자서 식사도 하셨어요. 항상 우리가 밥을 먹여 드려야만 했는데, 지금은 혼자서 식사를 하셨다고요.
“......”
-오빠!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오빠!
“......”
-오빠가 우리 아빠를 구해주신 거예요.
“......”
그렇게 김지현의 부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날 이후 나는 몇 번 더 김지현의 집을 찾아가 그녀의 부친을 만났다.
그리고 이제 김지현의 부친은 건강을 회복하고 가게에서 부인이 하는 일을 도와주고 있다.
그의 몸이 완전히 정상을 되찾은 것이다.
김지현의 부친 김윤성은 나를 생명의 은인이라고 부르며 진심으로 내게 감사를 표했고, 김지현의 모친인 박영애도 눈물을 흘리며 내게 고마워했다. 그날 이후 내가 그녀의 가게를 찾아갈 때마다 그녀는 내게 치킨을 튀겨주며 남편을 구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하곤 했다.
그리고 김지현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날 이후 김지현은 마치 내가 무슨 외국영화에 나오는 히어로라도 되는 것처럼 존경과 흠모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볼 때마다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더할 나위 없이 친근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곤 했다.
연습실에서나 회사에서 내가 그녀의 옆을 지나갈 때면 나는 항상 그녀의 눈빛을 느끼곤 했다. 그런데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내 마음은 점점 무거워져 가고 있었다. 그녀가 내게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나는 그녀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밝은 모습은 정말 보기가 좋았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도 나는 정말 좋았다. 그녀가 정이 듬뿍 담긴 아름다운 눈으로 나를 바라볼 때면 나도 그녀를 향한 뜨거운 감정이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이 자꾸만 내 눈에 들어올수록, 그녀를 향한 내 마음이 조금씩 뜨거워져 갈수록, 내 마음은 점점 더 무거워지고 있었다.
나는 정윤희를 처음 보는 순간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녀를 내 마누라로 삼겠다고 마음먹었다.
내가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영혼이 아닌 한 명의 평범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내게 강한 동기를 심어 준 사람이 그녀였고, 평범한 인간이 되어 죽을 때까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고 간절히 원한 사람도 바로 그녀였다. 지금도 그녀를 생각하면 미칠 것처럼 가슴이 떨려오고 있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지현이 그런 내 마음에 돌을 던진 것이다. 아니 돌이 아니라 바위를 던진 것이었다. 김지현의 아름다움과 나를 향한 그녀의 뜨거운 눈빛은 정윤희를 향한 내 마음을 심하게 흔들어 놓고 있었다. 나는 점점 김지현을 두려워하면서도 그녀의 매력에 빠져들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정윤희를 생각하며 애써 그런 감정을 뿌리치고 있었다.
나는 혼란에 빠졌다.
이 모든 것은 나 때문은 아니었다. 나는 바람둥이는 아니다. 문제는 김지현이 심하게 예쁘다는 것이다. 그녀가 너무나 매력적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그녀의 거부할 수 매력이 이렇게 나를 엄청난 혼란에 빠트리게 하는 원인이었다. 나도 남자니 그녀의 매력에서 벗어 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바람둥이가 아니다. 모든 것은 그녀의 잘못이었다. 예쁘게 태어난 그녀의 잘못이고, 그렇게 아름다운 매력을 지닌 그녀의 잘못인 것이다. 나는 그냥 피해자일 뿐이다. 감당할 수 없는 그녀의 매력에 힘없이 끌려버린 불행한 피해자가 나로 나라는 것이다.
*****
-영진아! 내 아들아.
-영진아! 불쌍한 내 아들!
‘내가 또 꿈을 꾸고 있구나.’
요즘 들어서 나는 자주 꿈을 꾼다.
그리고 꿈속에서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계속 들린다.
처음에는 엄마가 나를 찾는 건가 하고 생각했지만, 그건 엄마의 음성이 아니었다.
이제는 가끔 집에 들렀다 오기도 하지만, 엄마의 얼굴이 꿈속에서 들리는 목소리처럼 그렇게 슬퍼 보이지는 않았다.
‘내가 요즘 지현이 때문에 마음이 괴로워서 그런 것일까?’
나는 며칠 전까지 매일 퇴근할 때면 내 차로 김지현을 집으로 데려다주고 난 뒤에야 나도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배가 고플 때는 가끔 그녀의 집에 들러 밥을 얻어먹기도 했다. 한동안 그녀의 부친을 살펴보기 위해 퇴근 후에 그녀와 함께 집으로 간 것이 습관 비슷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나중에는 그녀가 늦은 시간에 집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이나 택시를 타는 것이 마음이 놓이지 않아 태워주기 시작한 것이 한동안 그렇게 되어 버렸다. 그 때문에 내 퇴근 시간도 많이 늦어졌었다. 할머니가 걱정을 많이 하셨지만 나는 내 건강은 이제 아무 문제 없다고 할머니를 달랬다. 그 뒤부터는 경호원들도 데리고 다니지 않았다. 먼저 퇴근을 시켜버린 것이다.
며칠 동안 김지현은 내 옆에 앉아 그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보며 이런저런 수다를 떨곤 했지만, 그때마다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을 보게 되면 내 마음이 더욱 힘들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그녀를 멀리할 수는 없었다. 회사에서 그녀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 내 마음은 더 괴로웠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렇게 나 자신과 힘든 싸움을 하고 있었다.
차 안에서 점점 내가 그녀의 눈을 피하기 시작하고 또 머리가 복잡해 가끔 건성으로 그녀의 말에 대답하는 일이 늘어나자, 어느 순간부터 그녀도 단둘이 있을 때는 말이 없어졌다. 머리가 좋은 그녀는 아마 내가 그녀를 피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어쩌면 그녀의 생각이 맞는 건지도 몰랐다. 아니, 그녀의 생각이 맞았다.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을 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와 가까워지면 안 된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그때 나는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입을 닫고 있자 내 마음은 더욱 괴로워졌다. 답답해 미칠 것만 같았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김지현은 더는 내 차를 타지 않았다.
혼자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그녀에게서 오빠라는 말을 더는 들을 수 없었다.
그녀의 환한 미소도 볼 수가 없었다.
나는 더욱 힘들어졌다.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은 정말 무서운 것이었다.
특히 이성을 향한 감정은 더욱 힘들고 무서운 것을 나는 그렇게 알게 되었다.
그런 일로 내 마음이 많이 약해져서 그런 것일까?
그때부터 나는 꿈을 꾸었다.
며칠 간은 내 마음이 우울해져 내가 그럼 꿈을 꾼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은 꿈속에서 나를 부르는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슬픈 얼굴을 한 여자가 너무나 애처롭게 나를 부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나는 가슴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을 느꼈다.
그녀의 슬픔이 내게 전해진 것일까?
아니면 그녀의 모습이 나를 슬프게 한 것일까?
그런데 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 나는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내가 눈을 뜬 건지, 아니면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슬프게 내 이름을 부르던 그녀가 갑자기 창밖으로 몸을 날려 사라지는 것을 본 순간 나는 그게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게 되었다.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를 부르던 그녀는 꿈속에서 나를 부른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내 방안에서 잠들어 있는 나를 내려다보며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녀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바로 영혼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모습을 나는 본적이 있었다.
할머니의 팔순 잔치 때 할머니가 가족들과 함께 찍은 거실에 걸려있는 커다란 사진에서 나는 그녀의 모습을 본 것이다. 그녀는 바로 이 몸의 주인인 한영진의 어머니였다.
그녀의 영혼이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아니, 그녀의 아들을 찾아온 것이었다.
그녀의 영혼이 잠들어 있는 나를 보며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니, 나를 부른 것은 아닐 것이다.
내 얼굴을 내려다보며 아들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머리카락이 바짝 곤두서는 것 같은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지금까지 수많은 영혼을 봤지만 나는 그들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나는 그녀가 두려웠다.
그녀의 모습을 확인한 나는 심한 충격에 빠져들었다.
읽어 주시고 추천과 선작, 댓글을 달아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Comment '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