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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너머 몽환의 역

본 베히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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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토
작품등록일 :
2016.12.27 22:52
최근연재일 :
2017.02.21 12:09
연재수 :
34 회
조회수 :
18,481
추천수 :
326
글자수 :
174,063

작성
16.12.27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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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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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글자
9쪽

서장. 방황의 운명

DUMMY

[대공황 시작 하루 전, 성운 조각 플레이아데스의 세계에서]



"예로부터 사람들은 운명을 두려워했다. 수많은 영웅들조차 파멸로 이끈 세상의 인과 고리는 경외의 대상이자 공포의 대상이다."


책에 쓰인 한 글귀였다. 아이는 바닥에 펼친 책을 촛불에 의지해 또박또박 읽어 나갔다.


원형의 서재는 오직 아이만의 장소였다. 수많은 책들이 책장이고 바닥이고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아늑한 어둠 속 불빛이 일렁이는 이곳엔 아이의 작은 목소리만이 속삭이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오해와 달리, 운명은 저울의 기울기에 불과하다. 인과가 기우는 쪽으로 움직일 뿐이다."


아이는 감정없이 중얼거렸다. 평소 의미심장하게 느껴 재해석을 붙이던 글귀였음에도 감흥이 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느 쪽이 얼마나 무거운지 모른다. 우리는 언제나 불안하기에 잘못 가벼웠던 파멸의 방향을 누르고 만다......"


문구를 끝마치자 아이는 천천히 책을 덮었다. 그 뒤 서재라면 당연할 정적이 아이를 괴롭혔다. 이질적인 공기에 가슴이 답답했다.


아이는 신경질적으로 책을 집어 던졌다. 건조한 소리로 벽에 부딫인 책에서 종이 몇장이 힘없이 공중에서 펄럭였다.


가슴을 부여잡고 인상을 찌푸렸다.


최근 들어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는다.


익숙했던 장소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에 아이는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침실, 목욕탕, 정원, 식당 그리고 가장 애용하던 서재마저 아이의 공백감을 채워주지 못했다.


그때 서재의 문이 열렸다. 적막감을 사라지게 한 장본인은 천천히 아이를 향해 걸어왔다.


"소리가 들려서 왔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어께가 파인 검은 드레스의 여인이 따뜻하게 미소지으며 다가왔다. 윤이나는 검고 치렁치렁한 머리칼과 대조되는 새하얀 피부의 여인이었다. 각선미를 드러낸 우아한 걸음걸이 만큼이나 매력적인 손길이 아이의 볼을 어루만졌다.


아이는 매달리듯 그녀를 끌어 안았다. 그녀의 품 안에선 어느 정도 불안감이 잦아드는 듯 했다. 여인은 처음엔 놀랐으나 다정한 눈빛으로 아이의 등을 토닥였다.


"천천히 말해봐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뭔가 이상해. 내가 살아있는 것 같지 않다고 해야 할까. 어딜 가도 원래의 익숙한 장소가 아니야. 왜 이럴까, 나."


"흠, 살아있지 않은 것 같다니요? 좀 더 말씀해보세요."


여인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아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모르겠어. 어딜 가도 전혀 익숙하지가 않아. 그것말곤 말로 표현할 수 없겠어. 그냥 몹시 답답해."


아이의 대답에 여인은 곰곰히 뭔가를 생각하는지 대답이 없었다. 아이는 명쾌한 해답을 기대했다. 책에서 모르는 게 나올 때마다 가슴 속이 시원해지는 대답을 해준 게 여인이기 때문이다.


여인이 뭔가 떠올랐는지 아름다운 비취색 눈을 빛냈다. 적극적으로 뭔가를 말해주려고 노력해는게 보였다.


그러나 대답은 그런 의지만큼 훌륭하지 못했다.


"살다보면 그런 날들이 있답니다. 가끔씩 울적한 날들이 있지요. 분명 내일이면 좋아질거에요."


오히려 먹구름처럼 답답함을 증가시키는 두루뭉실한 대답.


안타깝게도 여인은 아이의 상황을 이해 못하는 듯 했다. 아이가 실망으로 고개를 떨어뜨리자 여인은 어쩔줄 몰라 했다. 아이를 들어 의자에 앉힌 후 던져진 책과 종잇장들을 주웠다.


"하아, 원래 책을 던지거나 하는 사람은 아니었지 않나요? 저번엔 사이러스가 책을 베고 잔 걸 나무라셨잖아요."


여인의 말에도 아이는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던 중 한 단어가 심히 마음에 걸렸다.


"원래?"


"예, 제가 아는 당신은 책을 아꼈어요. 물론 기특하게도 종잇장이 아닌 그 속의 지혜를 좋아했지요."


"그런가. 전혀 그런 거 같지가 않아서."


"생일 소원으로 매년 고서를 말하신 분이 그런 말씀을 하시다뇨. 앗, 어딜 가시는 거에요?"


아이는 여인을 놔두고 서재 밖을 뛰쳐 나갔다. 복도를 걷던 하녀들이 놀라 비명을 질렀고, 무슨 일인지 달려온 하녀장을 지나쳐 도망치듯 달렸다.


숨을 헐떡이며 달려온 곳은 정원이었다. 낮엔 만개한 꽃들로 다채롭던 정원은 이젠 달빛을 받아 은은한 색을 띄고 있었다.


아이는 숨을 고르며 하늘을 올려다 봤다. 그리고 미소지었다. 무엇이 달라졌는지 맞춘 것이다.


하늘엔 우수로 반짝이는 별들이 끝없이 수놓여 있었다. 빛나는 보석들의 장관에 빠져든 아이는 감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마음을 움직인 건 별들의 운행이었다. 대지를 띠로 둘러싸려는 의지를 가졌는지 유성우가 서로의 꼬리를 따라 날았다. 수만개의 별들이 아이의 머리 위를 지나갔다.


아이가 황홀경에 젖어 있을 무렵, 누군가 재미없다는 듯의 감상을 흘렸다.


"겨우 이런 걸 보기 위해 독서를 멈추신 겁니까. 그저 유성우일 뿐이지 않습니까."


언제 왔는지 여인은 아이의 뒤에 서있었다. 숨을 가쁘게 내쉬는 아이와 달리 호흡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아이는 여인의 흥미없다는 감상에도 불구하고 분위기에 젖어 들었다. 그러나 별들을 따라 눈을 향한 곳은 거대한 벽이었다. 별의 계곡이 끊긴 그 곳 너머를 아이는 볼 수 없었다.


그 순간 가슴이 턱 막히는 것 같은 답답함이 밀려 들었다. 서재에서도 느낀, 갇혀 버린 것 같은 폐쇠감이었다.


아이는 풀이 죽었다. 아이의 시선을 따라간 여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께를 으쓱였다.


"그래요. 오늘은 견학인 셈치죠. 당신이 계속 저들을 별과 같게 볼 수는 없으니까요. 그건 별에게 상당한 실례지요."


"무슨 뜻이야, 그게? 저건 별이 아니야?"


"별은 순수합니다. 어떤 것에도 젖어 있지 않지요. 욕심, 시기, 분노, 자만의 그 어떤 것도 없는 무생물에 불과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더 행복할지도 모르지만."


여인은 심오하게 말을 시작하려 했다. 평소 아이가 깊이있는 말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는 지루한 듯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에 비해 저것들은 살아있습니다. 움직이기 위해 존재하는 자들이지요. 신은 그들이 자유롭게 살아가길 원했지만, 그들은 자유의 뜻을 곡해하고 남용하여 저렇게 떠돌고 있지요."


가는 손가락이 유성우의 강을 따라 천천히 호를 그렸다. 결국 그 호선조차 벽에 막혀버려 갑갑했지만 말이다.


"좀 쉽게 말해 줘.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아이의 부탁에 여인의 비취색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그러나 곧 헛기침을 한 후 다시 말을 이어갔다.


"정말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군요. 좋아요, 직접적으로 설명하지요. 저들은 우리와는 반대 편에 존재하는 세계에서 온 자들입니다. 정확히 말해선 곧 올 자들이지만 말이죠."


"그럼 저 별들이 다 사람이란 말이야?"


"예, 오직 정해진 방황을 위해 이 땅을 밟는 자들. 그들은 모험가입니다."


모험가. 그 세글자의 단어가 아이의 마음 속에서 고동쳤다. 위험을 무릅쓰는 도전인 모험과 전문인을 부를 때 쓰는 '가'. 처음 들었음에도 끓어오르는 무언가가 가슴 한가득 느껴졌다.


그 때, 서리같은 오한이 온 몸을 꽤뚫었다. 싸늘한 기운을 따라 시선을 옮긴 곳엔 여인의 비취색 눈동자가 있었다. 그녀의 눈은 마음을 꽤뚫어 보기라도 할 것 같이 섬뜩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방황은 저들만의 전유물. 절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시련도 고통도 모두 저들만을 위한 것이에요. 우린 그저 그들을 위해 준비해야할 운명일 뿐입니다."


여인의 말은 소년이 이해하기엔 너무나 어려운 것이었다. 그럼에도 마음속을 후벼파는 기분에 아이는 침울해졌다.


보드라운 손이 아이의 손을 잡고 뒤를 돌아 천천히 걸어갔다. 강제로도 아닌, 상냥한 동작임에도 아이에겐 족쇄처럼 느껴졌다. 고풍스런 벽화와 웅장한 기둥들을 지나는 동안에도 아이의 마음은 오로지 별들에게 가 있었다.


"저기 있잖아."


"네, 말씀하세요. 더 궁금한 것이 있나요?"


아이가 작게 말하자 여인이 뒤돌아 온화하게 웃었다. 살포시 잡은 손은 놓아주지 않은채로.


그녀의 미소는 알게 모르게 아이를 죄어왔다. 다음 말로 싸늘하게 바뀔 표정이 아이의 머릿속을 스쳐갔다. 침이 마르고 시선을 마주치기 어려웠다.


그러나 별들의 비가 눈에 아른거릴 무렵, 아이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미안해."


아이는 여인의 손을 뿌리친 후 힘껏 달렸다. 다시금 숨 가쁘게 달렸음에도 전혀 지치지 않았다. 자유롭게 된 손엔 공기의 감촉이 어느 날보다도 기분 좋게 느껴졌다.


정원에 다다랐을 때, 아이는 별들이 자신을 감싸 안는 상상에 빠졌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포근하고 따뜻한 포옹에 몸을 맡겼다.




[대공황 시작 하루 전, 어느 성의 1시 30분]


[하늘이 열렸다.]


작가의말

[대공황 시작 하루 전, 어느 성의 1시 30분]

[하늘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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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 불순물 +5 16.12.28 1,014 17 12쪽
» 서장. 방황의 운명 +8 16.12.27 1,417 19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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