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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빚진 이, 글을 빚는 이

멸망을 씹어먹는 국가권력급 헌터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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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등록일 :
2024.02.23 22:34
최근연재일 :
2024.04.05 12:20
연재수 :
45 회
조회수 :
5,676
추천수 :
245
글자수 :
268,969

작성
24.02.24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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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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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마지막 작전 : 회귀

DUMMY

직접 무친 산나물, 손수 빚은 막걸리.

세상이 망해 참기름 없는 건 아쉽지만,

이 정도면 그를 맞기 딱 좋다.


"때가 되었는데···."


해는 꼭대기에서 살짝 내려오고,

그림자가 다시 길어지기 시작할 무렵.

산골 오두막에 길손이 찾아들었다.


"처음 뵙겠네. 하지만 반갑군."


어색한 첫 만남에 어울리는 엉망 인사.

손님은 웃으며 평상에 걸터앉았고,

도현은 술병을 기울였다.


"우리 사이에 뭐 그리 쑥스럽게. 잔이나 받으셔."


꼴꼴꼴,

이 나간 사발에 차오르는 시큼함.

지구인이라도 마다할 수준이지만,


"훌륭한 술이군."


예의를 아는 손님인지,

꺼림 없이 잔을 든다.


"그래, 이젠 구경하기도 힘들어."


술이 어찌 막걸리만 있을까마는,

지구가 멸망했는데 한국의 전통주라고 살아남았으랴.

식초가 된 것이라도 감사하지.


"감사히 마시겠네. 자, 건배···."


귀가 긴 손님은 술잔을 들어 올리다 멈추고, 그를 바라봤다.

마지막 지구인, 도현을.


"이럴 때 건배하는 게 맞는가?"

"나도 모르지. 지구가 망해봤어야지."


정확히 말하자면, 지구 최후의 인간이 되어 봤어야지.


"나도 모르겠군. 지구의 문화는 다 아는 줄 알았는데."

"그런 거 같더라."


적을 알고 나를 아는 건 병법의 기본.

도현이 보기에도, 랙턴의 지구 지식은 대단했다.


“···.”


둘은 입을 다물었다.

서로 잔을 들고, 가볍게 부딪힌 뒤,

한 번에 주-욱.


"캬아!"


속 깊은 감탄을 토해낸 엘프는,

젓가락으로 나물을 잘도 집는다.

우적우적, 꿀꺽.


"으음. 이 나물이란 건···. 정말이지 완벽하게 멋져."


미련이란 건가, 랙턴의 눈에 절절히 흐르는 저건.


"내 제안은 아직도 유효하네."


차원 연합군 총 참모의 말에, 도현은 미간을 살짝 구겼다.


"항복하면 전속 요리사로 고용해주겠다는 거? 농담 아니었어?"


3차 침공의 제주방어전 때,

도현은 손수 만든 나물무침을 보냈다.

부인과도 같을 단백나무로 만든 함선.

그걸 타고 온 각오가 대단하니,

아들딸 같은 풀들도 한 번 맛 나게 먹어보라고.

숲의 엘프들에게 딱 맞춘 극강 패드립이었다.


"그땐···그래. 솔직히 눈 뒤집혔지. 그런데 생각해보니 웃기잖은가. 동족의 시체도 밟은 주제에, 그깟 지구의 풀로 만든 요리에 발끈한다는 게."

"빡돌아줘서 고마웠어."


나물 선물 세트에 돌아버린 엘프 해군(!)이 제대로 트롤 짓을 해준 덕분에, 차원 연합군을 격퇴할 수 있었다.

그때 밀렸으면 3차 침공에서 멸망했을지도.

도현의 감사에, 렉턴은 허허 웃으며 나물을 더 들었다.


"그러게. 이 땅의 모든 걸 미워하면서 왜 죽은 풀 보고 그랬을까? 이것도 지구의 것인데."


증오.

이겼어도 사라지지 않는.

지구에서 게이트를 강제로 열고,

쳐들어와서 착취한 역사를 잊지 않는.


우적우적.

맛있어서 씹는다기엔, 랙턴의 턱 근육이 불끈거린다.

종족의 원한을 담아,

세계의 분노를 담아.


"맛있냐?"


도현의 비아냥을, 렉턴은 가벼이 받았다.

전쟁 중 주고받은 모독에 비하면, 이 정도는 코웃음도 안 나올 수준이니까.


"맛있어. 이렇게 맛있다니."


나물의 맛일까, 승리의 맛일까.

아니면 지구인을 싹 죽여 원수를 갚은 맛일까.


"목표 달성 축하해."


도현은 한 잔 더 마시고, 또 마셨다.

민족의 마지막 막걸리는 그렇게 사라졌다.

그 모습을 빤히 보던 랙턴이 고개를 저었다.


"목표 달성? 아직이지."


그렇게 말하고 도현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너까지 죽여야지.'


말은 안 했지만 랙턴도, 도현도 아는 것.

4차 침공이자 지구 멸망전의 끝은?

지구연합군 총 참모, 마지막 지구인 도현이 죽어야 완성되는 것.


랙턴은 가지고 온 것을 탁자에 올렸다.

영롱한 은빛 돌.


"직접 준비한 걸세."

"호오, 과분한걸."


지구인들은 현자의 돌이라고 부르는 것.

엘프들은 차원석이라고 했다.


"드시게."

"먹으면, 난 아예 사라지는 건가?"

"잘 아는군. 마지막 배려라고 생각하시게."


죽으면 시체와 이름이라도 남지만,

이 돌로 차원 추방을 당해버리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존재했다는 시간선조차.

도현이 직접 지은 이 오두막마저 사라지리라.

지구 탄생 때부터 아예 없었다는 듯이.


"딱 한국인 맞춤 처형이네."

"그래.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맞나?"


랙턴의 눈이 이글거렸다.

지구의 그 어떤 문명도,

찌꺼기 하나마저 남길 수 없다는 듯.


"기억해줄 사람도 없는데."

‘지구인 다 죽였으면서. 누가 기억한다고 그래?’


"내가 있잖은가."

‘차원 연합군에 널 모르는 이가 있겠는가? 그것조차 싫다네.’


"그렇군."


완벽한 말살.

평범한 지구인은 목을 자르는 걸로 충분하지만,

멸망의 예언자, 지구의 인도자 도현에겐 그거론 부족하다 생각했나 보다.


"오늘만 해도. 안 그런가?"


차원 연합군 총 참모, 세계수의 마지막 열매,

모든 것을 아는 자.


지구방위군에 장도현이 있다면,

차원 연합군에는 랙턴이 있었다.

둘 다 미래를 읽는 예언자이며, 전략가.

4차에 이른 차원 전쟁에서 서로 얼마나 많이 엿을 권했던가.


"너 혼자 올 거라는 거? 내가 아니어도 다 알았을걸?"


손님이 혼자 올 줄 알고, 안주로 나물을 2인분만 준비한 도현.

이 신 내린 예지력에, 꾸준히 엿을 먹은 쪽은 랙턴이었다.


"그래···. 그 자신감, 인정. 주역이랬나?"


도현은 웃었다.

얼마나 이기고 싶었으면, 적에 대해 이리 공부할 수 있었을까?


"사주, 관상, 손금, 주역, 작명."


운명의 다섯 손가락.

도현이 자신 있어 하는 기술이면서,

사주카페 사장을 멸망의 예언가로, 끝내 지구방위군 총 참모로 만들어준 지혜였다.


그 다섯을 되뇐 도현은, 억눌렀던 짜증을 살짝 드러냈다.


"솔직히, 내가 각성했으면."


랙턴은 여유롭게 웃었다.

도현이 전쟁 내내 달고 살았다던 말을, 직접 듣게 되었으니.

한국어 표현으로, ‘감개가 무량했다.’


"너흰 게이트를 건너올 꿈도 못 꿨어."


푸하하하.

승자의 웃음소리는 호탕했다.

숨을 돌린 렉턴은 대답했다.


"답답하면 니들이 뛰던가, 라는 속담이었지?"

"속담 아니고, 인터넷 밈."

"현대식 속담 맞네."


누군가 말했다,

내가 경기하는 게 답답하다면, 니들이 직접 뛰라고. 욕만 하고 앉았지 말고.

도현이 딱 그 지경이었다.


아무리 주역으로 점친 미래를 알려주면 뭐 하나?

권력자들이 말을 안 들어 처먹는걸.


사주, 손금, 관상을 봐서 최적의 인선을 뽑아주면?

실무자들이 지들 입맛대로 뜯어고치고.


천지의 운을 가득 담아 군대 이름을 지어줘도,

자본가들 마음대로 결정되는 세상이었다.


게다가 비각성자이기까지 했으니,

각성자로 이루어진 군대가 그의 말을 들을까?

이 전쟁을 4차까지 끌고 온 게 용했다.


"짜증내지 말게. 세 번이나 막았잖아?"


지구 하나 대 차원 수만 개.

네 번의 전쟁이 아니라 한 번의 전투로 끝날 차이였다.

도현이 없었다면.


"자네가 각성자가 아닌 건, 세계수께 항상 감사드린다네."


도현의 정체조차 모르고 완패한 1차.

될 것 같을 때마다 주저앉은 2차.

지구연합군의 실세를 알게 된 3차에,

대 도현 전략을 들고나와 결국 성공한 4차.


완벽한 예언가는 무서운 존재였으나,

그자가 무력하단 점은 역린이었다.

파고들면, 반드시 이기는.


"대단하게 생각해줘서, 눈물 나게 고맙다."


하고 싶은 말도 했겠다,

도현은 차원석을 집어 들었다.

이걸 먹으면, 세계에서 완벽히 배제되겠지.


"자네는 대단해. 이 몸의 호적수니까."


오늘 처음 만났지만, 서로를 부부보다 잘 아는 한 쌍.

평생의 원수란 그런 것이다.


"배웅 나와줘서 고마워."

"별말씀을."


꿀꺽.

도현은 돌을 삼켰다.

그리고 상큼하게 미소 지었다.


“···?”


마주 웃던 랙턴은, 갑자기 묘한 생각이 들었다.

말도 안 되는 예지로 자신을 물 먹인 상대다.

그가 이렇게, 죽음보다 심한 배제를 쉽게 받아들이다니?


랙턴의 눈빛이 이상해지자,

도현은 입꼬리를 올렸다.

한쪽만.


"너, 차원석에 대해 잘 알아?"

"내가 너보다 모를 리가···."


랙턴은 입을 닫았다.

차원석으로 집행하는 차원 배제형.

돌을 삼킨 자를 세계선에서 삭제한다는 것밖에 몰랐다.


"니들의 세계선에서 삭제하면 그만이야? 그 영혼, 어디로 갈까?"


불멸하는 영혼.

세계수의 아이들이라면 모를 리 없는 진리다.

그래서 '소멸'이 아니라 '삭제'해오지 않았던가?


"뭐? 어디로 가냐니, 그야···."


모른다.

아니, 몰랐다.

지금은? 알 것도 같다.


"잠깐, 그럼 혹시?!"


랙턴은 경악했고, 도현은 웃었다.


"다시 말하지만,"


차원석이 위에서 녹는지, 도현의 몸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손으로 얼굴을 가려도, 랙턴의 눈에는 박혔다.

가증스럽게 웃고 있는 원수의 얼굴이.


"내가 각성했으면 너흰 똥도 아니었어, 개조팝병신들아."


엘프의 차원에서 영혼을 삭제하는 차원석을,

지구에서 지구인이 쓴다면?

세계선이 다른데?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랙턴의 비명은 도현 귀에 캔디.

그는 '이 세계선'에서 마지막 말을 남겼다.


"또 보자, 짜바리새꺄."


도현은 알았다.

랙턴이라면, 증오해 마지않는 상대에게 무슨 '선물'을 줄지,

그리고 그게 '지구인'에게 어떻게 작용할지.


차원석을 복용한 지구인은 그가 처음이었고,

마지막이 될 터였다.


'답답해 죽을 뻔했다. 이젠 내가 뛰러 간다.'


엘프의 세계선에서 삭제당한 영혼은 지구로 온다.

일종의 차원 전이다. 지구는 모든 차원의 끝이니까.

그러니, 지구에서 삭제당한 영혼은 다시 지구로 올 수밖에.

차원석의 시공 조작 에너지를, 삼킨 자에게 죄다 넘기고.


'엘프라면 이 에너지, 세계선 이동하고 환생하는 데 쓰겠지만.'


그러고도 부족해 생전의 힘까지 소진하여, 지구에선 완벽히 백지상태의 아기로 태어난다.

지구인인 도현은? 이동과 환생, 즉 존재 매김에 에너지 쓸 필요가 없다.

이미 지구고, 이미 존재하고 있었으니.


'난, 시간을 거스른다.'


차원 침공이 일어나기 전, 그러니까 사주카페 사장 시절이 좋다.

수백 번을 생각해도 그때가 최고였다.

역재생처럼 돌아가는 세상을 보며 계획을 떠올렸다.


'아, 뭘 각성할지 고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남을 에너지를 보니 하고도 남겠지만,

능력을 선택할 수 없는 게 아쉬웠다.

뭐, 각성을 해 봤어야 알지.

이것만큼은 운에 맡길 수밖에.


'그래도 다행이야. 이 양 좀 봐.'


국가대표 A급?

지구방위대 S급?

아니, 이 정도면 초월, 우주권력급이다.

S가 백 개 있어도 부족할, EX급.


'이크, 너무 많은걸.'


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

처음부터 눈에 띄어 집중 견제당하면, 될 일도 안 된다.


시간을 거스르며 에너지를 뿌려두었다.

적절한 시기, 딱 좋은 곳에 먹기 좋은 형태로.


'내 힘은 때에 맞춰 적절해야 해. 많아도, 적어도 안 돼.'


그래야 외부와 내부의 적을 동시에 속일 수 있으니.

안배를 다 하고, 시간 역행을 마쳤다.

사주카페를 오픈했던 그때, 그 자리.


"돌아왔다···. 진짜로!"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지만, 정말로 되니 눈물이 나려고 했다.

되라는 대로 된 게 얼마 만인가?


"이···이야아악!"


그래, 이제부터다.

답답했으니, 직접 뛸 거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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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팔대세가록 - 여남평가전 (3) (삽화 투표) +2 24.03.29 51 3 14쪽
37 팔대세가록 - 여남평가전 (2) 24.03.28 42 3 13쪽
36 제1회 범죄기업 척결 월드컵 - 중국전 (7) 24.03.27 49 2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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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간사하고 우직한 덩치 24.03.25 47 2 13쪽
33 제1회 범죄기업 척결 월드컵 - 중국전 (5) 24.03.25 53 3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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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킬 더 북부대공 (2) 24.03.23 50 2 13쪽
30 제1회 범죄기업 척결 월드컵 - 중국전 (4) 24.03.22 58 2 15쪽
29 기습! 라이진구미 24.03.21 55 2 14쪽
28 제1회 범죄기업 척결 월드컵 - 중국전 (3) +2 24.03.20 62 3 12쪽
27 제1회 범죄기업 척결 월드컵 - 중국전 (2) 24.03.19 66 2 13쪽
26 제1회 범죄기업 척결 월드컵 - 중국전 24.03.18 61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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