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사냥. 적자생존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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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 밑에 교묘히 엎드려있던 저격수의 목덜미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뒤에서 검은 그림자가 서서히 접근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스으으..
적에게 뒤를 내준 이상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었다. 앗차하는 순간 머리에 구멍이 뚫려버릴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기지를 발휘했다.
다가오는 그림자를 못 본척하며 자연스럽게 권총에 손을 가져갔다. 목숨을 내건 행동이었지만 권총을 집어 드는 데 성공했다.
반격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파앗!
그는 잽싸게 몸을 굴리며 그림자를 향해 권총을 조준했다.
탕!! 타앙!!
거의 본능에 가까운 속사 실력이었다.
하지만 그림자는 저격수의 움직임을 예측이라도 했는지 한 템포 더 빠르게 나무 뒤편으로 숨어들었다.
파악! 팍!!
총탄이 빗나가며 나무 기둥을 때렸다. 권총의 조준선을 노려보던 저격수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림자가 사라진 나무 기둥 틈으로 산탄총의 총구가 불쑥 튀어나왔다.
콰앙!!
귀청이 찢어질 것 같은 엄청난 굉음과 함께 그가 엄폐해 있던 바위 한 부분이 가루로 변해 버렸다.
콰르르르르...
깨져나간 돌조각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저격수의 시야를 방해했다. 단 한발의 사격이었지만 대전차 로켓을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산탄총에서 어떻게 저런 화력이...’
재빠르게 SVD를 집어 든 저격수는 나무 뒤편을 조준했다.
‘어디 들어와 봐! 개자식이...’
스코프의 십자망선을 노려보는 저격수의 입술이 크게 뒤틀렸다. 상대방이 다시 총구를 내미는 찰나 노출된 팔을 노려볼 심산이었다.
‘잠깐! 그게 아니야!’
파캉!!
그의 머릿속에 어떤 불안감이 스쳐 지나가던 찰나 아이다의 M110A1 소총에서 발사된 아음속탄이 그의 오른 어깨를 스치며 지나갔다.
피잇!!
저격수의 어깨에서 검붉은 피가 팍 치솟았다.
총탄이 날아들어 온 곳으로 황급히 고개를 돌리던 그는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조금 전 산탄 공격이 엄폐물인 바위를 깔끔하게 날려버렸고, 어느새 계곡 아래 대기하던 상대 저격수에게 시야가 완전히 노출되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나를 노린 게 아니었나?!’
서로 말 한마디 없이 이렇게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일 수 있다니. 그는 지금 상황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게다가 방금 어깨를 스치고 지나간 저격총탄은 자신을 일부러 빗맞힌 경고 사격임이 분명했다.
그 와중에 놈들은 자신을 산채로 생포하려는 여유까지 보이고 있었다.
“....이런, 사냥은 오히려 내가 당하고 있었군.”
철컥!!
씁쓸한 미소를 떠올리던 저격수의 코앞에 유진의 서늘한 총구가 나타났다.
“이봐. 그만 포기하는 게 좋을 거야.”
유진의 목소리는 짧지만, 위협적이었다. 의외로 저격수는 두 손을 치켜들며 순순히 항복 의사를 표시했다.
“인정하지. 내 실력으론 도저히 상대할 수준이 아니군.”
저격수가 치켜들었던 손을 유진에게 펴 보이자 묵직한 금속성의 물체가 땅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대인 공격용 세열 수류탄이었다.
“이런 망할 자식!!”
유진은 수류탄을 피해 급하게 바닥을 나뒹굴었고, 그 사이 저격수는 반대편 비탈길을 향해 몸을 내던졌다. 그곳은 거의 수직에 가까운 바위 절벽이었다.
쿠콰앙!!
수류탄이 폭발하며 흙먼지가 튀어 올랐다. 저격수는 허리와 등으로 나뭇가지를 부러뜨리며 엉망으로 추락해 내리기 시작했다.
끼릭...
아이다의 총구가 굴러떨어지는 저격수를 조준하고 있었다. 먼 거리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타깃을 맞추려면 거의 곡예에 가까운 예측 사격이 필요했다.
“흐읍. 하아아...”
가볍게 호흡을 가다듬던 그녀의 총구가 떨림을 완전히 멈췄다.
파캉!!
소음기가 장착된 총구에서 미약한 불꽃이 터져 나왔고, 총탄은 공기를 찢는 듯한 소리와 함께 저격수의 몸을 정확히 꿰뚫어 버렸다.
퍼어억!!
.
.
.
우거진 수풀이 흔들리며 유진의 모습이 나타났다. 눈앞에는 검은 천옷 차림의 저격수가 쓰러져 있었고, 옆에는 M110 소총을 둘러멘 아이다가 말없이 서 있었다.
“이봐. 그냥 사살해버리면 어떡해?”
아이다는 무덤덤한 얼굴로 어깨를 한 번 으쓱거렸다.
“알잖아요? 이런 놈들은 끝까지 저항한다고요.”
유진은 무릎을 굽히며 쓰러진 저격수의 상태를 확인했다. 왼쪽 가슴 위 관통상 단 한발의 총탄이 그의 심장을 꿰뚫어 버렸다. 그녀의 섬뜩한 사격 실력에 유진은 입술만 달싹일 뿐 말을 더 붙이지 않았다.
“어떻게 됐어? 전부 다 처리된 거야?”
뒤쪽에서 부산스러운 소리와 함께 테즈의 모습도 불쑥 튀어나왔다.
“으윽! 이 시커먼 새끼가 날 죽이려 했단 말이지?!”
테즈는 차가운 시체로 변해버린 저격수를 쳐다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유진은 말없이 그의 몸을 수색했다.
찰랑..
게릴라의 목에 걸려있던 목걸이가 가슴팍 부위로 툭 떨어져 내렸다. 검은 가죽끈에 은빛 인식표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테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야? 이건? 우리 메델린 병사들의 인식표잖아?”
유진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일종의 전리품이야. 이런 놈들은 보통 독자적으로 움직이면서 재미로 사람들을 죽이고 다니지.”
"그렇게 잔혹한 일이..."
유진은 저격수의 목에 걸린 인식표 꾸러미를 끊어 자신의 안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아이다가 싸늘하게 말했다.
“다 자업자득이죠. 목에 걸린 인식표가 빛에 반사되지 않았다면 지금쯤 우리 현장 요원 아저씨 머리가 날아갔을 테니까."
테즈는 마른침을 꿀꺽 집어삼켰다.
누군가에게 목숨을 노려지는 일은 누구나 쉽게 경험할 수 있는 게 절대 아니었다. 이제 수풀 으슥한 곳만 쳐다봐도 온몸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테즈는 아무렇지 않게 저격수의 시체를 확인하는 유진과 아이다의 모습을 무척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덜그덕...
저격수의 주머니에서 손바닥만 한 전자기기가 툭 떨어져 내렸다. 한눈에 그 물건의 정체를 알아보던 아이다의 눈빛이 번뜩였다.
“오호라. 이거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리겠는데?”
그녀는 떨어진 물건을 집어 들었다. 마치 구형 핸드폰처럼 생긴 물건의 정체는 민수용 GPS 수신기였다.
GPS는 위성에서 보내는 신호를 수신해 현재 위치를 알려주는 위성항법 시스템이다. 사실, 드넓은 볼파스 정글을 홀로 헤매고 다닐 때는 이런 항법장치는 필수이기도 했다.
그녀는 배낭에서 위성통신 컴퓨터를 꺼내 GPS와 연결했다.
삐빅...삑..
아이다는 컴퓨터를 무릎 위에 올려놓은채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GPS 정보를 컴퓨터에 옮겨 담는 중이었다.
“저기.. 우리 슬슬 이동해야 하지 않을까? 한 곳에 너무 오래 머무른 것 같지 않아?"
테즈는 불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아이다는 목소리를 낮춰 유진에게만 들리도록 말했다.
“뭐예요? 저 인간. 또 무슨 태세변환이죠?”
“글쎄. 이제 볼파스 정글이 슬슬 실감 나는 모양인데.”
그녀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삐빅!!
아이다는 손가락을 탁 튕기며 고개를 들었다.
“잭팟이에요. 반복적으로 GPS 위치가 찍힌 곳이 딱 한 군데 나오는군요.”
“거기가 놈들의 은신처일 가능성이 높겠군.”
“당연한 말씀."
유진은 수풀 사이로 드러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미 주변은 어둑어둑했고, 싸라기별이 무수히 빛나고 있었다.
“날이 어두워졌으니 이 근처에서 야영을 하고 새벽에 다시 움직이자고.”
“네. 좋은 생각이에요.”
.
.
.
일행이 야영지로 선택한 장소는 물길이 휩쓸고 지나가 자연스럽게 생겨난 메마른 수로였다. 움푹 팬 구덩이가 군데군데 있어 몇 사람이 들어가 하룻밤을 때우기엔 적합한 장소였다.
지이익..
아이다는 밀봉한 방수팩에 챙겨놓은 군용 전투식량인 MRE(Meal, Ready-to-Eat)를 배낭에서 꺼내 들었다.
야전에서는 함부로 불을 피울 수 없기 때문에 MRE에 동봉된 히터를 사용해 주식을 데운다. 마그네슘이 들어간 비닐 팩에 물을 부으면 발열 작용이 일어나는데 이 사이에 밀봉된 주식을 끼워서 데워먹는 형식이었다.
".............."
그녀의 전투식량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테즈의 뱃속에서는 꼬르륵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하아... 정글 한복판에서 자기 배낭을 잃어버리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 유치원생인가?”
첫 매복지에서 자신의 배낭을 두고 온 테즈는 물이며, 식량이며, 챙겨온 물자를 모두 잃어버린 상태였다.
“아이다 양? 우린 이제 생사를 함께 한 전우 아닌가? 그럴수록 서로를 채워주고... ”
질척거리는 듯한 테즈의 말투에 아이다는 얼굴을 확 찡그렸다.
‘이 인간. 밤새도록 배고프다고 칭얼대겠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아이다는 주식이 담긴 발열팩을 선뜻 건네주었다. 기다렸다는 듯 테즈는 넉살 좋게 전투식량을 받아들였다.
“이거 번번이 미안한데? 음? 망할 사료라고 무시하고 있었는데 이거 생각보다 괜찮은데?”
그는 끊임없이 쩝쩝거리며 MRE를 입안으로 마구 밀어 넣고 있었다. 그런 테즈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아이다는 담요를 하나 챙겨 들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응? 어디 가? 쩝! 쩝쩝!! 쩝!”
“산책이요!!”
그녀는 꽥 소리를 지르며 구덩이 밖으로 훌쩍 나가 버렸다. 테즈는 자연스럽게 유진의 전투식량에 손을 대며 혀를 찼다.
“하! 거참! 성질머리하고는..”
야영 지역에서 몇 미터 떨어진 곳에 매복 진지를 구축한 유진은 홀로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휴게 지역에서의 진지 구축은 방호력보다 은밀성이 더 우선시 된다. 적에게 관측되지 않게 얼기설기 만든 진지는 바닥이 낮아 납작 엎드린 상태로 경계를 서야 했다.
사그락....
진지의 수풀이 흔들리며 아이다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잠시 긴장을 했던 유진이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뭐야? 아직 교대 시간 아니잖아? 좀 더 쉬라고.”
“아~ 그런 걱정은 하지 마세요. 분부대로 할 테니까.”
그녀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담요를 바닥에 깔고 유진 가까이에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자, 잠깐! 이게 무슨 짓이야!”
유진이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지만, 그녀는 여유로운 포즈로 바닥에 머리를 기댔다.
“저 얼간이 옆에서 휴식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게다가 선배랑 있는 편이 훨씬 더 안전해.”
유진은 피식 웃음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코나 골지 말라고.”
“별말씀을..”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말없이 유진의 얼굴을 지켜보던 아이다가 대뜸 입을 열었다.
“...라덱에 대한 복수가 끝나면 그 후엔 어쩔 생각이죠?”
라덱의 이름이 언급되자 유진의 안색이 살짝 굳어졌다. 그는 잠시 생각을 하는 듯하다 씁쓸한 미소를 떠올렸다.
“다른 계획 같은 건 없어. 버려진 패잔병의 말로는 언제나 비참한 법이지.”
유진의 말에 아이다는 왈칵 열을 올렸다.
“또 시작이네! 온 세상 고독 다 씹어 삼킨 것처럼 네거티브하지 말라고요. 이 전쟁이 선배 때문인 것 같나요?”
그녀는 유진에게 자신의 팔을 불쑥 내밀었다. 손목 부위에 새겨진 검은 문신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마치 어떤 상품에 일련번호가 새겨진 바코드 같은 형상이었다.
“얼마 전만 해도 내가 제거해야 할 최우선 대상은 유진. 당신이었어."
"이, 이봐. 그..그건"
"결국 나도 선배랑 똑같은 처지라고요. 당신을 제 선배라 칭하는 이유를 다시 한번 잘 상기 해줬으면 좋.겠.군.요.”
그녀는 당혹스러워하는 유진의 얼굴을 차갑게 쏘아보다가 휙 돌아누워 버렸다.
“언제까지 과거의 잔향에만 끌려다닐 거냐고요. 적어도 난 안 그래."
혼잣말로 투덜거리는 아이다의 뒷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트려 버렸다.
“앞으로 계획이라... 그렇군. 그런 것도 있었지.”
깊은 한숨을 내쉬는 유진의 머리 위로 긴꼬리 혜성이 밤하늘을 가르며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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