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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가넷 님의 서재입니다.

검은 배의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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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가넷
그림/삽화
케빈가넷
작품등록일 :
2020.06.23 22:47
최근연재일 :
2021.06.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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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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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45화. 할카

DUMMY

1535년 가을. 알렉산드리아, 이집트.


바로스는 과감한 결단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배를 몰았다. 켈리에게 대부분의 전력을 맡기고 소수의 인원들만 데려온 덕분에 배는 날아갈 듯 가벼웠다. 쉬지 않고 해변을 따라 달린 팔리스 호는 불과 열흘만에 목적지인 알렉산드리아의 앞바다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과연.”

바로스는 항구가 지척에 보일 무렵부터 누군가 자신의 배를 미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정보를 사고 파는 조직이라더니 지중해 전부를 감시하는 건가?”

알렉산드리아 앞바다에서 그들과 해전을 벌일 수는 없었다. 바로스는 얌전히 속도를 줄이고 뒤따라오던 미행자들을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우선(아랍권의 선박) 두 척이 팔리스 호 양 옆으로 부딪칠 듯이 다가왔다. 평범한 이집트의 상선처럼 꾸몄지만 실제 배안에는 무장한 선원들이 가득 타고 있었다.

“너희들이 할카인가?”

목에 두른 검은 천으로 얼굴까지 감싼 선원들은 바로스의 질문에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잠시 후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가 앞으로 나오더니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는 곧바로 부하들에게 손짓하였다.

“엇!”

깜짝 놀란 바로스가 물러서기도 전에 배로 갈고리가 날아들었다. 순식간에 팔리스 호를 갈고리로 끌어당긴 그들은 난간 사이로 긴 널빤지를 갖다 댔다.

“두목만 데려오라는 하심 님의 지시가 있었다.”

우두머리 사내가 손가락 끝으로 바로스를 가리켰다. 바로스는 꺼림칙했지만 지금으로선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결국 혼자 할카의 다우선에 옮겨 탔다.

‘쓸데없이 까다롭군.’

팔리스 호와 떨어진 배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난간에 선 바로스는 최대한 여유 있는 모습으로 항구의 풍경을 살폈다. 아주 오래 전 고대 시대부터 번창해온 알렉산드리아 항구는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로 붐볐다. 아시아에서 건너온 상인들과 그들의 물건을 사기 위해 온 유럽의 상인들로 가득하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내항으로 들어오는 낡은 다우선을 신경 쓰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다우선은 항구에 정박된 수많은 배들을 지나 구석진 선착장까지 들어갔다. 그곳엔 이미 할카의 일원으로 보이는 사내가 마중나와 바로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대가 바로스인가?”

배에서 내린 바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의 거만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별 수 없었다. 그 순간 뒤에 서있던 그의 부하들이 바로스의 머리에 면천을 덮어씌웠다.

“무, 무슨 짓이야?”

“조용히 가자.”

순식간에 포박된 바로스는 곧장 마차에 태워졌다. 할카는 마치 그가 찾아올 것을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바로스도 이 상황을 예상 못한 건 아니었지만 눈이 완전히 가려진 탓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를 태운 마차는 넘어지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로 거침없이 달렸다. 마차가 멈춘 뒤에도 한참을 끌려간 그는 낡은 창고 바닥에 던져진 뒤에야 복면을 벗을 수 있었다.

“여기가 어디야?”

불안한 기분이 든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뭘 그리 두려워하나? 나도 자넬 만나러 혼자 갔었는데.”

갑작스레 하심이 부하들을 이끌고 등장했다. 단상 위에 놓인 아랍식 의자에 걸터앉은 그는 바로스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아, 오랜만입니다. 하심.”

바로스는 굴욕감을 참고 그 답지 않게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그러게. 아주 오랜만이네. 여기까지는 어쩐 일인가? 이제 와서 브로치나 그 소녀를 가져온 거 같지는 않고.”

할카의 본거지에서 만난 하심은 특히나 더 여유 있는 모습이었다.

“저번에는 내가 실수를 했소. 작은 이득에 눈이 멀어 잠시 제 정신이 아니었다고 할까요.”

“하하하, 천하의 바로스 경께서 그게 무슨 말인가?”

하심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바로스는 그의 비아냥이 괘씸해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불쌍한 날 놀려도 딱히 할말이 없소. 오늘 여기까지 온 것도 내게 기회를 한번만 더 줬으면 해서 찾아온 거니까.”

하심은 완전히 고분고분해진 바로스의 모습에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그가 어떤 마음으로 이 곳에 들어왔는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기회를 한번 더 달라······ 내가 왜 그래야 하지?”

하심은 팔짱을 낀 채 물었다. 바로스는 최대한 공손한 자세로 입을 열었다.

“당신들은 위험한 일이나 지저분한 일을 대신해줄 조력자를 필요로 하오. 돈만 받으면 무슨 짓도 해내는 용병 같은 거 말이오. 그 조건에 가장 부합하는 자가 바로 나요. 게다가 난 이미 당신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잘 알고 있소.”

그는 하심을 설득하기 위해 준비한 말들을 재빠르게 쏟아냈다. 하심은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아네. 그래서 내가 그 멀리 있는 튀니스까지 찾아갔었지. 그런데 이게 왠걸? 돈만 밝히는 사나운 해적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더군. 아주 날 가지고 놀려고 하지 않았나? 자네가 어디 한번 말해보게. 이래서야 내가 어떻게 그대를 신뢰할 수 있겠나?”

하심의 핀잔에도 바로스는 필사적이었다.

“그건 걱정 마시오. 난 튀니스의 함락으로 모든 것을 잃었소. 당장 조직을 배신한 대가로 거대한 상납금을 내야 할 처지요. 그러니 다른 생각은 하지 않겠소. 한번만 더 믿어준다면 할카의 충실한 개가 되겠소. 그래서 당신들이 원하는 물건을 찾는 데 온 힘을 다 할 것이오.”

바로스는 생각이상으로 처절했다. 하심은 실소를 금치 못하면서도 아지즈가 설계한 계획들이 착착 들어맞고 있음에 탄복하였다.

“저런, 심지어 자신의 두목에게도 배신을 했었나 보군. 자네는 가진 실력에 비해 야망이 너무 큰 게 문제야.”

하심은 급할 것이 하나도 없기에 짐짓 훈수까지 둬가며 그를 조롱했다.

“나도 내가 이 정도밖에 안된다는 것을 이제 깨달았소. 이러다간 부하들에게 맞아 죽게 생겼으니 마지막으로 한번만 기회를 주시오. 이렇게 간절히 부탁하겠소.”

바로스는 무릎까지 꿇고 그에게 매달렸다. 하심도 어차피 그를 좀 더 써먹을 생각이라 즐기는 것은 이쯤 하기로 했다.

“그대가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한번 더 믿어보지. 크게 기대는 안 하지만 그다지 돈 드는 일도 아니니까.”

“감사하오. 꼭 마음에 들도록 노력 하겠소.”

평소답지 않게 연신 굽신거린 바로스는 마침내 원하는 대답을 받아냈다. 얼마나 비굴하게 굴었는지 부하들이 곁에 없었던 게 다행이라 여길 정도였다.

“하나 조언한다면 앞으로는 함부로 움직이지 말게. 그대가 맡아줘야 할 일이 조만간 있을 테니 그때까지 세력을 키우는 데만 집중해야 돼. 우리 마음에 들게만 활약해준다면 필요한 돈이야 얼마든지 지원하도록 하지. 나소르, 거기 그거 좀 가져와봐.”

뒤에 기립해 있던 부하가 재빨리 헝겊으로 만든 작은 주머니를 가져왔다. 하심은 그것을 받자 마자 바로스에게 던졌다. 바로스가 열어본 주머니 안에는 베네치아에서 주조한 두카트 금화가 무려 열 개나 들어 있었다.

“이건 자네가 힘들다고 하니까 미리 주는 선금이네. 그리고 명심해.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거.”

하심은 엄숙한 목소리로 바로스에게 경고했다.

“하심, 고맙긴 한데 이 금화를 좀더 구할 수 있겠소? 주는 게 아니라 빌려줘도 좋소.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상납해야 될 금액이 워낙 커서······”

바로스는 간절하게 하심을 바라보았다. 상납금 규모에 비하면 주머니 속의 금화로는 턱도 없었다. 그 모습을 한심하게 여긴 하심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이, 바로스. 내가 자네에게 줄 수 있는 믿음은 거기 까지야. 자네도 내게 뭔가 보여줘야 되지 않겠나? 중요한 건 돈이 아니라 믿음이니까. 알아들었으면 그만 칭얼대고 이만 나가봐.”

말을 마친 하심은 손짓으로 바로스를 내보냈다. 더 이상 돈을 줄 것 같지 않자 바로스는 낙담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그는 받은 금화만 챙겨 얼른 할카의 안가를 빠져나갔다.

“거참······ 정말 믿음이 안가는 녀석이군.”

하심은 수염을 매만지며 바로스가 사라진 문을 바라보았다.


바로스는 갔던 길의 역순으로 항구를 거쳐 다시 자신의 배로 돌아왔다. 갑판 위에 올라선 그는 다짜고짜 발 아래 놓인 나무 궤짝을 걷어찼다.

“빌어먹을, 하심······ 이 수모는 언젠가 내가 수천 배로 갚아줄 것이다!”

그는 들고 있던 금화 주머니까지 내팽개치려다 소스라치게 놀라 동작을 멈췄다.

“쳇, 이 돈 때문에 그 고생을 했는데 귀하게 다뤄야지.”

마음을 가라앉힌 바로스는 주머니를 열어 금화들을 다시 세어 보았다. 그래도 금화를 열 개나 받았으니 여기까지 방문한 보람은 있었다. 어차피 받은 돈의 대가는 지금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때 뭔가 떠오른 그는 부하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이봐! 파올로는 선창에 있나? 누가 가서 잠깐 올라오라고 해.”

바로스가 직접 추린 승선 인원에는 파올로도 포함되어 있었다. 갑작스러운 부름을 받은 파올로는 요리하다 말고 갑판 위로 뛰어올라 왔다.

“대장, 무사히 돌아왔군요.”

바로스는 금화 하나를 손가락 끝에 끼운 채 파올로를 쳐다보았다.

“전에 이야기한 교역 말이야. 그게 정말 가능할까?”

파올로는 바로스의 얼굴에서 미묘한 심경변화를 읽었다.

“그럼요. 저 부둣가의 상인들을 보십시오. 잘만 하면 하루에 200 두카트 버는 건 일도 아닙니다.”

“이봐. 난 해적이야. 전형적인 베르베르 인이지. 누가 나에게 물건을 사고 팔겠나?”

바로스는 당연히 장사 같은 건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제가 이탈리아 인이지 않습니까? 저를 이용하면 얼마든지 장사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 알렉산드리아라면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모이는 곳이니 우리라고 못할 건 없죠.”

파올로는 어느정도 마음이 열린 바로스를 집요하게 설득하기 시작했다.

“사고 판다면 뭘 거래하지?”

“향신료 아니면 노예? 이 도시의 전통적인 거래 품목이라고 하죠.”

“미친 소리! 그런 귀한 물건들은 베네치아 상인들이 꽉 잡고 있다는 거 몰라? 게다가 내가 가진 돈을 다 합쳐봐도 교역을 할 만한 종자돈은 못돼.”

“······그럼 일단 목돈을 먼저 만들어야겠군요.”

“어떻게?”

“큰돈을 가진 사람들을 이용한다면 시간이 덜 걸리겠죠.”

바로스는 점점 파올로의 이야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한편 바로스를 내보낸 하심은 그대로 의자에 앉아 졸고 있었다.

“부단주님, 단주님께서 오셨습니다.”

그의 귓가에 마치 꿈결처럼 흐릿한 하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단주님이?”

이내 꿈이 아니라는 걸 알아챈 하심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호위 무사들을 이끌고 온 아지즈가 빠른 걸음으로 들어왔다. 그는 자연스럽게 하심이 앉아있던 의자를 뺏어 앉았다.

“여기 누가 왔었나?”

아지즈는 자리에 앉자 마자 미묘하게 달라진 공기 냄새를 느꼈다.

“예상대로 바로스가 왔었습니다. 다시 한번 기회를 달라 더군요.”

“생각보다 오래 걸렸군.”

하심이 보일 듯 말 듯 웃었다.

“그건 그렇고, 하심. 내가 오늘 대단한 발견을 했어.”

아지즈는 하심에게 가까이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그의 손엔 낯익은 포대기가 들려 있었다.

“이건······ 제가 가져온 양 가죽 포대기군요. 무슨 문제라도?”

하심은 아지즈가 왜 이 포대기를 들고 왔는지 의아했다. 그 포대기는 나탈리의 집에 있던 걸 하심이 뺏어 온 것이다. 카린이 어렸을 때 썼던 것 같아 가져오긴 했지만 별다른 단서는 찾지 못했었다.

“그게 말이야. 새로 들인 멍청한 하녀가 이 가죽 포대기를 물에 빨아 널어뒀더군.”

아지즈는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모습이었다.

“하······ 양 가죽을······ 그 하녀가 누구인지 말씀해주시면 제가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하심이 하인을 부르려고 하자 아지즈가 제지하였다.

“아니 그게 아니라, 이것 좀 보게.”

놀랍게도 아지즈가 가리킨 포대기의 끝부분에는 하얗게 쓰여진 알파벳 철자가 희미하게 나타나 있었다.

“이건······”

하심은 들어본 적 있는 지명이 눈에 들어오자 침을 꿀꺽 삼켰다.

“어디인지 알아보겠나?”

“몇 번 지나가본 적이 있긴 합니다만······”

“어서 이 곳으로 가봐야 해. 얼른 준비하게.”

아지즈는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결연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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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73화. 바로스의 귀환 21.05.28 20 0 18쪽
73 72화. 키프로스의 공작 부인 21.05.14 29 0 17쪽
72 71화. 해적 상인 21.05.07 26 0 17쪽
71 70화. 푸스카스의 정체 21.04.30 42 0 14쪽
70 69화. 란도 가문 21.04.23 59 0 16쪽
69 68화. 아이라의 고향 21.04.15 31 1 17쪽
68 67화. 흑해의 들개 3 21.04.09 61 0 14쪽
67 66화. 흑해의 들개 2 21.04.02 37 0 16쪽
66 65화. 흑해의 들개 1 21.03.26 55 0 14쪽
65 64화. 뜻밖의 해후 21.03.19 59 0 18쪽
64 63화. 사라진 상선대 2 21.03.12 54 0 15쪽
63 62화. 사라진 상선대 1 20.09.22 78 0 14쪽
62 61화. 바라쿠다 용병대 2 20.09.18 59 0 15쪽
61 60화. 바라쿠다 용병대 1 20.09.15 37 0 14쪽
60 59화. 어긋난 계획 2 20.09.12 33 0 14쪽
59 58화. 어긋난 계획 1 20.09.09 43 0 14쪽
58 57화. 대담한 인질 2 20.09.07 40 0 13쪽
57 56화. 대담한 인질 1 20.09.04 50 0 13쪽
56 55화. 잊혀진 동굴 2 20.09.03 43 0 13쪽
55 54화. 잊혀진 동굴 1 20.08.31 67 0 12쪽
54 53화. 각성 +2 20.08.29 148 1 16쪽
53 52화. 의문의 섬 20.08.26 55 0 16쪽
52 51화. 공생 관계 2 20.08.24 65 0 18쪽
51 50화. 공생 관계 1 20.08.21 60 0 15쪽
50 49화. 맘탈리 20.08.19 69 0 18쪽
49 48화. 사라진 타란티아 20.08.18 62 0 13쪽
48 47화. 베네치아의 공녀 2 20.08.17 59 0 13쪽
47 46화. 베네치아의 공녀 1 20.08.13 74 0 18쪽
» 45화. 할카 20.08.12 74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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