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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선생님 님의 서재입니다.

태양을 가린 도적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퓨전

바선생님
작품등록일 :
2020.09.17 00:09
최근연재일 :
2020.09.23 12:00
연재수 :
21 회
조회수 :
910
추천수 :
23
글자수 :
75,216

작성
20.09.2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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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오프리츠니나 여제(3)

DUMMY

“그 운명······피해갈 방법은 있습니까?”


백신현은 그때 자신의 대답을 들은 라파엘로의 표정을 잊을 수 없었다.

가여운, 안타까운, 그리고 씁쓸한 표정.

그런 표정으로 자신에게 말했다.


“방법은 있다. 그러나 운명이란 것은 그렇게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야.”

“뭐가 마음대로 안 되죠?”

“너에게서 빠져나갈 운명은 너의 모든 것이다. 가족과의 인연, 앞으로의 미래. 그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

“포기하면 가족들은 살 수 있나요?”

“······그래.”

“그럼 그렇게 해주세요.”

“······진정 그것이 네가 원하는 것이냐?”


백신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라파엘로는 백신현에게서 운명을 거두어갔다.

예언의 술이라는 주술이었다.

진언을 통해 두 사람의 운명을 묶어 한 명에게 몰아주는 신비한 주술.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자신과 비슷하거나 동급의 재량이 있는 자가 필요했다.

그때 백신현의 무재를 가져간 인물이 바로 오프리츠니나 여제의 떨이었다.

그녀는 백신현에게서 무재의 운명을 빼앗아갔고, 자신은 그 부작용으로 모든 것을 잃었다.

그러나 후회는 없었다.

잃었지만 잃은 것이 아니기에.

자신의 가족들은 살아남았으니까.

그는 그렇게 설산으로 들어갔다.

시히리카의 여제가 자신 대신 제국으로부터 왕국과 가족들을 지켜줄 것을 믿으며.

그런데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긴 오프리츠니나 여제가 제국에게 패해, 설산으로 도망을 왔다는 것이다.

설산을 오르는 그의 발이 전에 없을 정도로 무겁게 느껴졌다.

자신의 결정이 잘못되었던 것일까.

후회하지 않는다고 동생에게 말 한 직후였지만, 한 줄기 의심이 피어났다.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자신이 여제 대신 나섰어야 했을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리고 그 의심은 얼마안가 확신으로 바뀌었다.

설산위에 있는 자신의 집 앞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백신현은 얼굴을 보지 않아도 그녀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오프리츠니나 여제였다.

그녀가 설산에 홀로 초췌한 얼굴이 되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지켜주지 못해서.”


그러나 그녀는 이어서 말했다.


“하지만 라파엘로의 예언은 틀리지 않을 겁니다.”


결연한 각오가 담긴 얼굴이 그를 비추었다.


“나의 딸은 제국을 무너뜨리고 천하를 제패할 겁니다.”

“······.”

“그대가······.”


백신현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볼 뿐이었다.


“이제 그대가 나의 딸을 도와줄 수밖에 없게 되었으니까.”

“그게 무슨 소리지?”

“라파엘로의 예언의 술. 그건 당신에게서 운명을 거두어가는 술이 아니라는 의미에요.”

“······.”


백신현의 눈동자가 사시나무 떨리듯이 요동쳤다.

그리고 곧 그 눈에 깃드는 것은 분노.

붉게 달아오른 눈동자가 그녀에게로 향한다.


“날 속였다는 의미로군.”

“예. 그래요. 난 당신을 속였습니다. 우리 아이. 우리의 조국. 그걸 위해 당신의 힘이 필요했으니까.”


백신현은 그 순간 생각했다.

그렇다면 내게 건 주술은 도대체 뭐지?


“그렇다면 그때 도대체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우린 커다란 운명들을 모아 거대한 하나의 운명을 만들어야만 했습니다.”


운명을 모아?

그녀의 설명이 이어졌다.


“제국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라파엘로는 그만한 거대한 운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했습니다. 당신의 운명도, 나의 운명도, 우리 아이의 운명도. 그 모든 것을 엮어 천하를 제패할 운명을 설계하는 일이 라파엘로의 일이었죠.”

“하.”


백신현은 순간 허탈한 마음에 헛움음이 나왔다.

그 양반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라파엘로.

그 늙고 보잘 것 없는 노인.

그 노인의 손아귀에 놀아난 것이 그 뿐이 아니라는 소리에 백신현의 머릿속에 분노가 요동쳤다.


“그 자식은 대체 목적이 뭐지? 대체 뭘 위해서······. 천일교는 대체 뭘 원하는 거야! 설마··· 설마 라파엘로가 아직 살아있는 건가?”

“아뇨. 그는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운명의 소용돌이는 이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의 운명도. 이제 움직일 때가 왔다는 거죠.”

“내가 당신 딸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라도 할 거라는 건가?”


백신현은 참을 수 없는 분노에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스릉!


“헛소리!”


순식간에 칼집을 빠져나온 날카로운 칼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차가운 칼날을 바라보며 그녀가 웃음 지었다.


“그런다고 벗어 날 수 있는 운명이었다면. 내가 내 운명을 라파엘로에게 맡기지도 않았을 겁니다.”


백신현이 칼의 손잡이를 잡은 손이 떨려왔다.

이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가.

자신이 눈앞에 있는 오프리츠니나 여제를 죽임으로써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그는 그것이 두려웠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떨려오는 눈동자가 마음에 든다는 듯.

팔을 활짝 벌렸다.


“날 죽이세요. 그리고 당신의 가족들이 제국의 손아귀에 죽는 꼴을 보세요. 그 모든 운명이 가리키는 곳으로 가면 됩니다.”


그녀의 말에 신백현의 눈동자가 부릅 떠졌다.

가족들!


‘내 동생!’


동생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소리에 그는 눈앞에 있는 오프리츠니나를 지나쳐 달려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챙!


자신을 향해 휘둘러지는 검을 튕겨낸 신백현이 그녀에게 으르렁거렸다.


“비켜!”

“이미 죽었을 겁니다. 내가 거길 지나왔거든요. 제국 기사단이 이미 이 근처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죽이고 있을 거예요.”

“이, 이······ 대체 나한테 뭘 원하는 거야! 나한테······ 나한테 대체 뭘 하라고······!”


백신현이 그녀를 향해 울부짖었다.

원망스러운 그녀를 향해 칼을 휘둘렀지만.

막강한 그의 힘도.

흐려오는 시야 때문에 그녀의 목을 베지는 못 했다.

저 멀리서 다가오는 제국 기사단의 모습이 어렴풋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들의 칼에 묻힌 핏자국만이 선명하게 눈동자를 비췄다.


“으아아아!”


이성을 잃은 백신현은 그대로 오프리츠니나와 싸우고 있었다는 사실도 잊은 채 그들에게로 달려들었다.

그걸 지켜보던 오프리츠니나가 아무도 들리지 않는 설산을 바라보며 웃음 지었다.


“기다리거라. 내 딸. 너만은 내가 안전하게 지켜 줄 테니까.”


운명이라는 폭풍우의 한가운데.

그곳은 아주 고요한 폭풍의 눈.

그녀는 라파엘로의 힘을 통해 만들어낸 운명의 장막 속에 있을 자신의 딸을 떠올렸다.

모든 것이 안전한 곳에서 제국을 무너뜨릴 운명을 키워나갈 그녀가.

너무나도 기대가 되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




당신의 운명,

왕의 길로 대체되었다.



- 001화 -



북월국, 시히리카의 수도 오토벨.

이제는 멸망해버린 옛 왕성의 대궐 앞에 일파만파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 앞에 있는 것은 서슬 퍼런 단두대.

잠시 후, 사형 집행을 위해 병사들이 도열했다.

그걸 지켜보는 사람들.

단두대의 칼날에 반사된 정오의 햇살이 마치 이곳에 있는 모두의 모가지를 자를 것처럼 피부를 찔러댔다.

사람들은 햇빛을 피해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그들은 한 번 숙인 고개를 다시 들 수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 단두대에 오를 사형수는 자신들의 여왕이었으니까.

어찌 고개를 들 수 있을까.

한때나마 자신들을 다스렸고, 제국을 지배했던 역습의 여제, 오프리츠니나 샤리아.

그녀가 지금 단두대 위에 무릎을 꿇었다.

코트의 후드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쩐지 땡볕 아래 그녀의 주변만이 차분히 가라앉은 듯 보였다.

삭막한 그림자가 단두대 위에 앉은 그녀의 주위의 공간을 짓누르는 것 같은 침묵이 흐르고, 사형집행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코트를 벗겨라.”


사형집행인의 짧은 명령.

병사들이 다가와 그녀의 코트를 벗기자, 후드에 가려져 있던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드러난 얼굴을 본 사람들의 입에서 참담함이 삐져나왔다.


“아아······.”

“어찌하여 이런 일이······.”

“오프리츠니나 여왕 폐하······!”


여왕을 향한 시히리카 사람들의 표정에는 절망감이 가득하였지만, 여왕은 웃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좌중을 훑었다.

누군가를 찾듯이.

그 눈빛과 마주한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고, 누군가는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때,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백신현이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백신현은 이후 그 설산에서 뛰어내려와 사방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그가 볼 수 있었던 것은 피로 가득한 집들과 사람들의 시체일 뿐.

살아있는 사람 없는 마을을 그는 한동안 정처없이 돌아다녔다.


‘나에게 원하는 게 대체 뭐요.’


그리고 산을 완전히 내려왔을 때.

그는 오프리츠니나가 제국 기사단에게 붙잡혀 사형대에 오른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자신에게 이런 시련을 가져다준 그녀가 죽는다는 얘기에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어쩐지 이곳으로 발길이 이끌어졌다.

백신현은 자신의 입술을 잘게 씹으며 그녀가 사형대로 오르는 것을 지켜봤다.

그녀의 눈동자가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듯이 투명하게 빛났다.


‘나보고 어쩌라는 거요!’


이윽고 그녀의 입술이 달각달각 열리며 대답이 돌아왔다.

목소리 하나 없는 대답.


‘사실은 다 알고 있지 않소?’


다음 순간, 사형집행인의 선고가 끝났다.


“······다음과 같은 죄목을 들어, 옛 시히리카의 여왕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그가 손을 들었다.


“죄인을 사형대로.”


그녀는 더 이상 사람들을 보고 있지 않았다.


- 스릉!


바람 한 점 없는 겨울의 햇빛이 단두대를 비췄다.

그리고 순식간에 내리꽂힌 거대한 칼날이 그녀의 목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팍!


둔탁한 쇳소리가 들리고.

양분되었어야 할 그녀의 머리.

그러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키이이이이이잉·········


어느새 다가온 칼 한 자루가 거대한 단두대를 가로막고 버티고 있었다.

백신현의 칼이었다.


“난 운명을 믿지 않소.”

“그럼 왜 날 구하나?”

“그걸······ 나도 모르겠어.”


갑작스럽게 사형대 위에 나타난 침입자의 좌중의 눈이 쏠리고.

이어서 소란이 일어났다.


“누구냐! 녀석을 죽여라!”


사태를 파악한 제국 기사단이 침입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보통의 사람이었다면.

이러한 때에 자신의 안위를 걱정해야 했겠지만.

백신현은 그렇지 않았다.


쉬익!

쾅!


“커헉!”

“이, 이게 대체!?”


단 한 번 칼이 휘둘러지고.

주변에서 달려들던 제국 기사단 수십 명이 일시에 사방으로 나뒹굴었다.

백신현은 이어서 오프리츠니나를 구속한 구속구를 양단했다.


“기억하시오. 이 빚은 반드시 돌려받고 말겠어.”


그녀가 태연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모든 것은 운명이 가리키는 대로 될 것입니다. 백신현, 나의 충성스러운 신하여.”

“난 당신의 신하가 아니야.”


그녀의 말에 백신현이 으르렁거렸다.

이윽고 좌중의 경악스러운 반응을 뒤로하고.

백신현과 오프리츠니나는 순식간에 사형대에서 모습을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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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오프리츠니나 여제(2) 20.09.23 33 1 7쪽
19 오프리츠니나 여제(1) 20.09.23 15 1 7쪽
18 동전에는 뒷면이 있다 20.09.22 17 1 9쪽
17 축배를 들어...라? 20.09.22 20 1 8쪽
16 면담 (6) - 역설득 20.09.22 24 1 7쪽
15 면담 (5) - 설득 20.09.21 13 1 7쪽
14 면담(4) - 천일교 20.09.21 14 1 7쪽
13 면담(3) - 세인트 호샤나 20.09.21 23 1 9쪽
12 면담(2) - 예상대로의 남자 20.09.20 19 1 8쪽
11 면담(1) - 준비 완료 20.09.20 26 1 8쪽
10 망명은 기세다 (3) 20.09.20 23 1 10쪽
9 망명은 기세다 (2) 20.09.19 31 1 7쪽
8 망명은 기세다 (1) 20.09.19 37 1 7쪽
7 이것이 나의 도주 경로다! (4) 20.09.19 31 1 9쪽
6 이것이 나의 도주 경로다! (3) 20.09.18 36 1 7쪽
5 이것이 나의 도주 경로다! (2) 20.09.18 44 1 8쪽
4 이것이 나의 도주 경로다! (1) 20.09.18 61 1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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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좀도둑(1) 20.09.17 189 2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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