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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가 케익 먹는 햄버거가 되는 그 날까지~!

삼극무제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백수77
작품등록일 :
2012.09.11 08:39
최근연재일 :
2013.09.28 13:18
연재수 :
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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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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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9.28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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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0쪽

기연은 고통을 타고 1

DUMMY

1. 기연은 고통을 타고




“이놈아!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러는 것 이느냐?”

이제 이립(而立:30대)에 들어선 사내가 밧줄로 의자에 꽁꽁 묶인 채 어두운 밀실 속에서 고래고래 소리쳤다.

“내 이름은 이만석이니라. 내 사촌 누님은 북맹(北盟) 삼대세가인 파주(坡州)금(金)가의 가주이신 금지천 님의 이종 십육 촌 동생인 엄진천의 안사람이니라. 네놈들이 나를 이렇게 대하고도 살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당장 나를 풀어주고 무릎 꿇고 백배사죄하거라. 그러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이에 사내를 납치해온 노인네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금지천이 직접 나타나도 나를 어쩌지 못하는데, 네놈 따위의 협박에 내가 겁낼 거라 생각하느냐?”

“네놈의 이름이 무엇 이느냐?”

“크하하하. 어린 놈이 감히 내 이름을 묻다니. 뭐…… 곧 죽을 놈 소원인데 들어줘야지. 난 화교(火敎)의 원로원주인 황보대청이니라.”

“헉! 광검(狂劍) 황보대청!”

이만석의 얼굴은 저승사자를 만나기라도 한 듯,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좀 전에 북맹을 이끄는 삼대세력 중 하나인 파주(坡州)금가를 팔아먹었지만, 이만석의 직업은 한 작은 식당의 숙수(熟手:요리사)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와 같은 평범한 사람에게 있어 서(西)대륙을 지배하고 있는 화교의 고수는 두려운 존재이다.

그런데 지금 그를 납치한 노인은 그런 차원을 넘어서는 존재였다. 우선, 황보대청이란 노인에겐 별호가 있다. 수많은 강자가 존재하는 강호무림에서 별호를 얻는다는 것은 엄청 힘든 일이다. 그리고 별호를 얻었다는 것은 그와 견줄만한 실력자가 손에 꼽을 만큼 적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었다. 황보대청이란 인물은 화교의 최고고수이자, 전대화교교주였으며 지금의 화교교주의 사부이다. 즉, 화교의 최고실세란 뜻이었다.

“나…… 나를 어쩌려는 것입니까?”

“단지 이 진법을 실험하려는 것이니 걱정 말거라. 운이 좋으면 네놈이 살 수도 있을 테니.”

이만석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밀실 바닥에 그려진 이상한 상형문자들을 살폈다.

“이건…… 무엇 입니까?”

“이백 년 전, 우리와 함께 서 대륙을 양분하던 일월교(日月敎)를 무너트리며 얻은 진법이니라. 아수라멸진이란 것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것이 설령 신선이라 할지라도 소멸시킬 수 있다는 진법이라 하더군.”

“헉! 이런 진법이 화교에 있었다니.”

“크크크. 걱정 말거라. 아직 이 진법의 존재는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이 실험이 성공한다면 나는 화교를 이끌고 동(東)대륙 정벌에 나설 것이다. 크하하하.”

한참을 미친 듯이 웃던 황보대청은 순식간에 얼굴을 굳히더니 근엄한 목소리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이만석은 지금 정신이 없었다. 저 미친 늙은이가 이 빌어먹을 진법을 완성시킨다면, 그것은 동 대륙의 멸망을 뜻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동 대륙의 안전 따위는 큰 관심이 없었다. 다만, 아직 장가도 가지 못했는데 이대로 죽는다는 것이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뿐이었다. 해서 그는 이 진법을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는 영웅호걸 따위는 아니다. 그저 운이 좋아, 사촌누님 덕분에 파주(坡州)금가로부터 삼재선공(三才善功)이라는 심법 하나 얻어 배운 것이 전부였다. 때문에 그 흔한 권각술조차 모르는 그가 강호무림의 안전과 평화를 지켜야 한다니 하는 사명감 따위는 처음부터 갖고 있지도 않았다.

다만, 지금처럼 백이면 백 죽을 상황에 처하자 혼자 죽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자기 같은 숙수보다 믿음직한 무사와 결혼하겠다며 자신을 차버린 여자들에게 복수도 하지도 못했는데, 이대로 가버리자니 죽어도 눈을 감을 수가 없을 듯 했다.

하지만 밧줄에 묶여있고 삼재선공을 겨우 이(二)년 연마한 그가 황보대청을 방해할 방법이란 전무했다.

그때, 바닥에 그려진 문양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저것이야. 저것들의 그림을 지운다면…… 잘하면 진법이 실패할 것이고, 그것도 아니면 황보대청마저 함께 끌고 갈 수 있지 않을까?’

진법을 이루고 있는 상형문자는 황보대청이 지력으로 돌로 된 바닥에 직접 그려 넣은 것으로 지우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어차피 죽을 것 시도라도 해보잔 생각에, 이만석은 있지도 않은 내력을 모두 짜내어 바닥을 발로 차기 시작했다.

쾅. 쾅. 쾅.

발에선 살이 찢어져 피가 나는지 금세 축축해졌다. 그리고 뼈도 어긋났는지 관절을 움직일 때마다 고통이 밀려왔다.

또 다시 화가 치밀었다.

‘씨방…… 내공만 좀 있었으면……’

솔직히 파주금가에서 얻은 삼재선공이란 심법은 돈만 주면 얻을 수 있을 만큼 온 중원에 널리 알려진 것이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거들떠도 보지 않는 이유는 정심한 내공을 쌓게 도와주지만 그 속도가 극악적으로 느리기 때문이다. 해서 지금에 와서는 단순히 돈 좀 있는 노인들이 건강기공으로 배우는 것이 전부였다. 그뿐만 아니라, 요즘 무림은 조화사상이라 불리는 삼재(三才)는 배척하고 음양사상만을 떠받들고 있다. 그러니 이만석의 내공이 어디 내공이라 할 수라도 있겠는가?

‘젠장. 이럴 줄 알았다면 아버지 말씀을 들을걸.’

이만석은 왜 아버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무술을 배우지 않겠다고 했는지 후회됐다. 몸이 너무 고달프고 재능이 없어 남들보다 뒤쳐지는 것이 창피하더라도, 그때 열심히 배웠다면 어쩌면 지금과 같은 상황에 처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괴롭히는 것이었다. 해서 그는 자신의 잘못된 선택을 원망하며 화풀이를 하듯이 계속해서 발길질을 멈추지 않았다.

쿵. 쿵. 쿵.

‘제발! 조금이라도 깨져라.’

쿵. 쿵. 쿵.

‘제발……!’

톡.

‘응? 응!’

모든 화를 발길질에 집중해서인지 마침내 약간의 성과를 얻었다. 황보대청의 주문이 끝나는 순간, 손톱보다 작지만 분명 바닥의 돌이 조금 떨어져 나간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진(陣)을 형성하는 문양 중 하나의 모습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쿠오오오.

갑자기 밀실 안의 기류는 엄청난 압력을 일으키며 역류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황보대청으로서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기에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가늠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기류의 압력이 점점 거세지자, 그는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밀실에서 빠져나가려 시도했다. 하지만 순식간에 밀실을 장악해버린 기류는 천하의 광검 황보대청을 놓아주지 않았다.

이만석이 밀실을 빠져나가려고 아등바등 하는 황보대청을 보며 광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 네놈도 나와 함께 죽자꾸나. 이 염병할 놈아!”

“이! 죽일 놈!”

황보대청이 노화를 터트렸다. 하지만 그것이 그가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밀실을 장악해버린 엄청난 기류는 진의 외각에 있던 광검의 신체를 순식간에 흔적도 남기지 않고 갈기갈기 찢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만석도 마냥 좋아할 수 없었다. 황보대청을 찢어버린 기류는 밀실이 벽들로 인해 더 이상 밖으로 퍼져나갈 수 없자, 갑자기 안으로 조여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기류가 조여올수록 엄청난 압력은 중앙에 묶여있는 이만석을 서서히 짓이기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이만석은 엄청난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이제 자신 또한 황보대청의 뒤를 잇겠구나 하고 모든 것을 체념하는 순간, 엄청난 섬광이 터지더니 그를 삼켜버렸다.


* * *


쾅!

마지막 천족이자 최고의 무장인 엘라임(Elaime)의 눈은 크게 떠졌다. 마신의 힘을 얻어 천계를 침범한 마족의 왕 아르마님(Amanime)이 자신에게 마지막 일 검을 꽂으려는 순간, 갑자기 생겨난 엄청난 압력에 의하여 소멸됐기 때문이다.

엘라임은 점점 꺼져가는 마지막 생명의 불씨를 붙잡으며 연기 사이로 드러난 사내를 응시했다. 마족과 비슷하게 흑안에 흑발을 가진 사내. 하지만 인세에서 찾아보기 힘든, 낮은 콧대와 각진 턱이 인상적인 사내였다.

자신을 무심한 눈길로 바라보는 사내는 인간임이 분명했다.

“대…… 단하군. 마왕 아르마님을 단 한 순간에 죽이다니. 훗…… 하긴 인간이 천계에 왔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것이지만……”

하지만 사내는 엘라임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와 마찬가지로 무심히 바라볼 뿐이었다.

“눈빛이…… 깊군. 인간으로선 오를 수 없는 절대의 경지에 올랐기 때문인가?”

“……”

“과묵하군. 아니면 내가 곧 소멸될 것을 알기에 말을 아끼는 것인가? 나에게 시간을 더 주기 위해?”

“……”

“자네가 보는 것과 같이, 난 곧 소멸되네. 마왕 아르마님의 마검 마브로스(Mavros)에 당했으니 당연한 것일지도……”

“……”

“내가 자네에게 줄 것이 있네.”

엘라임은 두 눈을 지긋이 감더니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그의 몸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곧 하얀 구체가 그의 입을 통해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에 사내는 무언가 맘에 들지 않는지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엘라임은 그 모습을 보고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말게. 자네같이 대단한 능력을 가진 자에게 나의 힘을 주고 생색낼 생각은 없네. 그리고 나의 힘을 준다 하여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자네의 몸에서 빠져 나와 자연으로 돌아갈 것이니 쓸모 없는 것이겠지.”

그러며 힘들게 손을 들어 하얀 구체를 보여줬다.

“이것이 무엇인 줄 아는가? 바로 천족의 힘이자 생명력이라네. 그리고 우리의 힘의 원천이지.”

엘라임은 숨쉬기가 힘든지, 잠시 말을 끊고는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그리고 통증이 가라앉자 그의 설명이 이어졌다.

“내가 주려는 것이 바로 이것일세. 물론 이것으로 인해 자네가 천족이 되는 것은 아니며 우리의 힘까지 얻는 것도 아니네.”

“……”

“그럼에도 내가 이것을 자네에게 주려는 것은 천족의 향이 자네의 몸에 묻어나게 하려는 것일세. 아까도 말했듯이 이 구슬에 담긴 힘을 결국 사라져버릴 것이라네. 하지만 그 구슬에 담긴 향기는 자네의 몸에 각인될 것이고 그럼 자넨 더 이상 마법진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언제든지 이곳을 마음대로 오갈 수 있다네.”

“……”

“내가 부탁하고자 하는 것은 단 한가지…… 가끔 이 천계로 올라와, 이곳이 마족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지켜달라는 것일세. 만약 마족이 천계를 손에 넣는다면, 그들은 천계를 구성하는 마몬(Ma-Mon)을 흡수하여 거대한 힘을 얻을 것이네. 그럼 인계는 크나큰 혼란에 빠지겠지.”

엘라임은 힘겹게 웃었다.

“그리고 이곳은 모든 시간이 멈춘 곳. 이곳에서 시간을 자주 보낸다면 자네는 영생에 가까운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네. 인간이라 할지라도……”

하지만 사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큰 거부도 없었다. 엘라임은 그것이 수긍의 뜻이라 여기고 구체를 날려보냈다. 그러자 하얀 구체는 아직도 무심한 눈빛만을 보내는 사내의 입 속으로 쏙 들어가더니, 작은 섬광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그와 동시에 엘라임의 모습 또한 새벽이슬마냥 자취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마왕 아르마님을 소멸시킨 사내에 대한 진실을 알지 못한 채……


* * *


이만석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조금 전만해도 화교(火敎)의 미친 영감탱이에게 붙잡혀 이상한 진법 중앙에 묶여 있었는데, 갑작스런 섬광과 엄청난 기류에 휩쓸려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보니 사방이 온통 하얀 장소로 이동된 것이었다.

그는 겨우 눈알을 굴려 주변을 살폈다. 저 멀리에는 하얀 성이 우뚝 솟아있고 주변엔 아름다운 과실나무들이 자라나있는 것이 무릉도원을 보는 듯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 신기한 경험과 신비스러운 장소를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아까 진법에서 발생한 엄청난 압력 때문인지 온 몸의 뼈마디가 부러지고 살갗은 찢어지는 듯 아팠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죽을 것처럼 아픈데, 다른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어디 있겠는가?

‘씨방…… 정신을 놓으면 안돼……’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살수 있다고 했다. 때문에 이만석은 고통으로 인해 점점 어둠 속으로 멀어져 가려는 정신을 안간힘을 다하여 붙잡으려 노력을 했다. 이대로 정신을 잃었다가는 진짜로 두 번 다시 눈을 못 뜰 것만 같은 불안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때, 우연처럼 한 젊은 백금발의 청년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저 놈은 뭐야? 서 대륙인 중에 머리 색이 노란 놈들이 있던데……? 하지만 저렇게 잘생긴 놈도 존재하나?’

그때, 인세에선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운 미남의 손에 쥐어진 백검 한 자루와 흉부에 꽂혀있는 묵검 한 자루가 눈에 들어왔다. 이에 이만석은 숙수와 혼인하기 싫다며 매정하게 자신을 차버리고 떠난 꽃순이, 연분이, 향란이, 옥분이 등등이 떠올랐다. 기억하기 싫은 너무나도 슬픈 악몽이 떠오르자, 이만석은 마음속으로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저런 놈들은 이 땅에서 사라져 버려야 해. 남의 사랑이나 훔쳐가는 말미자 도둑놈의 새끼들…… 대체 뭘 처먹고 저따위로 생긴 거야? 완전 기생오라비같이 생겨가지고. 아무튼 진짜 잘 뒤졌다. 아, 그런데 저 새끼는 대체 바닥에 누워서 자꾸 뭐라고 계속 중얼거리는 거야. 기분 더럽게. 죽으려면 빨리 죽어버리든가 하지. 내가 움직일 수만 있으면 당장 가서 패주는 건데.’

너무 극심한 고통 때문에 지금의 상황이 꿈인지 현실인지조차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는 이만석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욕을 해댔다. 그리고 그렇게 한참 동안 욕을 하다 어느 정도 화가 가라앉자, 또 다시 통증이 밀려오며 정신이 더욱 혼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도 모자라, 마치 아이를 재우기 위해 불러주는 자장가 같은 백금발 미남의 나른한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그는 진짜로 눈이 감기기 일보직전이었다.

하지만 지금 눈을 감으면 영영 뜨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에 이만석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별별 상상을 다 하기 시작했다. 마음씨가 비단결 같은 미녀와 결혼해 토끼 같은 자식들 낳고 오순도순 사는 것부터 시작해 색기가 넘치는 요녀 같은 미녀와 결혼해 뜨거운 밤을 활활 태우는 상상까지 해봤다.

하지만 고통과 수마는 그런 상상조차 할 수 없게 계속해서 방해했고, 나중에는 너무나도 나약한 자신의 정신력에 짜증이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에는 이 모든 일의 원흉인 화교의 광검 황보대청을 향한 욕설만이 머리에서 맴돌 뿐이었다.

‘으윽.’

황보대청이 갈기갈기 찢겨져 죽던 장면을 회상하니 기분이 조금 좋아져 웃으려던 이만석은 옆구리가 결려 인상을 찌푸렸다. 잠시나마 화교제일고수인 광검을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었는데 통증이라는 놈이 그를 다시 현실세계로 인도한 것이다. 그리고 잠시나마 잊고 있던 백금발의 미남의 존재감을 다시 인식하게 되었다.

‘저놈은 아직도 중얼거리네? 지겹지도 않나? 아, 그런데 왜 내 몸은 움직여지지 않는 거야? 역시 나는 꿈꾸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이것은 가위눌림이고?’

솔직히, 이곳이 저승이건 꿈이건 현실이건 상관없었다. 다만, 이놈의 통증과 저 백금발의 짜증나는 목소리만 듣지 않았으면 하고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지겹도록 중얼거리던 백금발의 사내가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뭔가를 토해냈다. 그것은 신비스러운 광채를 품고 있는 구슬이었다. 물론, 목구멍을 통해 토해냈다는 사실은 매우 역겨운 것이지만, 구슬이 가지고 있는 빛깔은 그러한 역겨움을 잊어버리게 할 정도로 매혹적인 거였다.

하지만 신기한 것도 잠시.

사내가 또 다시 짜증나게 중얼거리자 이만석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안 그래도 몸도 아프고 정신도 없는데, 자장가보다 더 따분한 목소리로 중얼중얼거리니 미칠 것만 같았다. 해서 이만석은 이번엔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기 위하여, 온 힘을 짜내어 얼굴을 찡그렸다.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제발 입 좀 다물어줬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상대의 반응은 그가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사내는 그러한 이만석을 보고는 오히려 미소를 짓는 것이 아닌가. 이만석은 백금발의 사내가 모든 평범한 남자들이 가장 경멸하고 저주하는 살인미소를 날리는 것을 보고는 강력한 살인욕구를 느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놈이 남자를 좋아하는 변태가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생겼다.

하지만 그가 무슨 생각을 하건 상관없이, 백금발의 미남은 계속 뭐라 하더니 방금 토해낸 구슬을 날렸다. 이를 본 이만석은 깜짝 놀라 피하려 했다. 여자도 아니고 사내놈의 목구멍에서 나온 것이 자신의 입으로 다가오는 느낌은 정말 끔찍하면서도 역겨웠다.

‘이건 악몽이야. 이건 최악의 악몽이야!’

이만석은 어떻게 해서든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망할 놈의 몸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하얀 구슬은 기어코 입술을 비집고 들어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더니 뱃속으로 들어가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백금발의 사내는 신기루마냥 흐릿하게 사라져버렸다.

‘씨발…… 아직 장가도 안간 몸인데……’

그러나 이만석이 받은 정신적 피해는 뒤에 따라온 문제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다. 왜냐하면 좀 전에 목구멍을 통해 들어온 구슬이 몸 속에서 녹는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뜨거운 열기가 몸에서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마치 ‘나’란 공간 안에서 거대한 두 가지 기운이 미친 듯이 싸우는 느낌이었다.

‘크으윽. 뭐…… 뭐야?’

뭐가 뭔지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이만석은 고통으로 몸부림을 치다 삼재선공을 운기 하기 시작했다. 지금 겪고 있는 것이 무슨 조화인지 모르지만 이것이 그 유명한 주화입마가 아닐까 하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것이 진짜로 주화입마에 빠졌다면 그 원인은 분명 사내자식의 입에서 나온 구슬을 삼킨 정신적 충격이리라.

다행히도 그의 예상은 그리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물론 이만석이 가진 내력이나 깨달음의 수준으로 봐서는 절대 주화입마에 빠질 우려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그에게 그와 비슷한 상황이 닥친 이유는 바로 그의 몸 안에 들어온 천족의 기운과 마족의 기운 때문이다.

사실 이만석은 마왕 아르마님이 있던 같은 공간으로 이동되면서 함께 소멸했어야 할 운명에 처해있었다. 하지만 천계로 이동되기 전에 아수라멸진에서 만들어진 기류의 압력에 의해 받았던 극심한 고통이 그의 정신을 소멸 당해야 할 상황에서도 깨어있을 수 있게 준비를 해주었다. 게다가 차원이 다른 곳에서 온 덕분에 그의 정신과 영혼은 곧바로 소멸되지 않을 수 있었고, 덕분에 그의 육신은 마왕의 기운은 흡수하여 잠시 죽음을 늦출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말 그대로 죽음을 임시로 미룬 것뿐이지, 죽음을 피한 것이 아니다. 그 때문에 그는 몸을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일 수 없었으며 온 몸은 서서히 붕괴되어감으로 인해 그토록 고통스러웠던 것이었다.

그런데 천운이 일어났다. 마왕의 기운으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이루며 실낱 같은 목숨을 유지하던 이만석의 신체에 천족의 기운이 녹아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기운은 처음에는 서로 반발하여 크게 싸움으로써 더욱 큰 고통을 주었다. 이에 이만석은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심재선공을 운기했고, 천만다행으로 이것이 두 기운을 이만석의 육신과 잘 융합시켜주면서 몸을 깔끔하게 치유해준 것이었다.

재수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을 뒤집어보면 재수 좋은 놈은 앞으로 넘어져도 금을 발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만석은 금이 아니라 새로운 목숨을 얻은 것이었다.

물론 이만석 본인은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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