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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6굴림실패 님의 서재입니다.

치킨 없는 판타지에 구원은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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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D6굴림실패
작품등록일 :
2019.10.28 19:34
최근연재일 :
2021.03.04 14:24
연재수 :
28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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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6,358
추천수 :
28,912
글자수 :
2,157,900

작성
19.11.03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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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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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
글자
21쪽

망치와 용 #4

DUMMY

겨울은 잔혹한 계절이다.

모든 것이 얼어붙고 동물들은 잠에 빠지고, 식물들마저 땅 밑으로 숨어든다.

겨울은 부동을 부르는 계절이나 자기자신만큼은 언제나 바쁘게 움직인다.

잠들지 않고 움직이는 이들을 채찍질하기 바쁜 겨울은 잔인한 심성을 지닌 채 눈보라라는 이름으로 땅을 떠돌아다닌다.


엘프 다섯, 인간 일곱, 드워프 다섯으로 구성된 원정대는 차갑게 얼어붙은 땅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마을에서 떠나온지 벌써 7일째가 되었다.

마을 북쪽의 인간 부족 마을에 들러 교역을 해서 물자를 보충한 게 3일 전이었고 칼가둔하람의 말에 의하면 앞으로 2일은 더 가야 마추픽이 나온다 하였다.

도보로 총 9일 정도가 걸리는 거리를 걷는 동안 그 사이에 인간 부족 하나를 제외하고 그 어떠한 지성체도 없다는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하였다.


우리를 반겨준 것은 손가락만한 모기와, 피를 빨아먹으려는 파리들과 원정 4일째에 나타난 정체 모를 육식동물 무리였다.

해충들은 마법으로 전기를 흩뿌려 구워버리고, 육식동물들은 그동안 헤카와 함께 실험하던 화염 마법을 난사해서 구워버렸고 놈들이 도망친 뒤 불에 탄 동물 중 하나를 한입 먹어봤지만 4일 굶은 냄새나는 수컷 스밀로돈보다도 맛이 없었다.



"근처에 야생마들을 본 적이 없습니까?"


"말을 말하는 겁니까? 마구잡이로 초원을 달리는 그 생물들을?"


"예, 그 말입니다."


"정확한 위치는 모르겠지만 지나다니다 가끔 본 적이 있습니다. 초원에서 풀을 뜯어먹다가 근처에 누군가 오면 바로 도망치는 놈들이죠. 최근에도 봤습니다."



아직까지 무언가에 탑승해 싸운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시기이지만 분명 세상 어딘가에서는 기병에 대한 생각을 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이 시대의 지성체들은 생각해내지를 못할 뿐이지 머리가 나쁜 건 아니었다.



'등자를 먼저 만들고 길들여야 하나?'



어쩌면 나는 늑대나 멧돼지보다 말을 먼저 길들였어야 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동안은 늘 마을 근처만 돌아다니니 달리는 것보다 빠른 이동수단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지만 앞으로 이번 원정 같은 일이 없을 거라 생각할 수는 없기에 나는 함께 온 엘프 사냥꾼들 중 나이가 가장 많은 아테리온에게 말했다.



"말들을 발견하게 되면 그 위치를 잘 기억해놔라 아테리온. 나중에 길들인다."


"주술사가 길들인 늑대처럼?"


"지금은 2마리만 길들인다. 그 이상은 우리가 관리를 못할 테니까."



아테리온은 내말에 수긍하였다.

하지만 그날은 길을 걸어가는 동안 말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전생에도 말들은 늘 인간과 함께 있는 것만 봤지 야생마들이 겨울에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본 기억이 없었다.

말들이 겨울잠을 잔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으니 아마 겨울에도 먹이를 구하기 위해 활동을 하는 게 분명했다.

혹시 철새처럼 따뜻한 남쪽으로 먹이를 구하러 이동하는 걸까?

하지만 칼가둔하람은 최근에 야생마 무리를 봤다고 했다.


말들은 대체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걸까?

초원에 그냥 누워서 자는 걸까?

아니면 숲이나 동굴을 찾아서 그나마 따뜻한 곳을 집으로 삼는 것일까?


여러 생각을 하면서 걷는 동안 하늘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주술을 사용해서 얼어있는 땅을 녹이고 파내려가서 만든 야영지에 가죽들을 이어붙여 만든 텐트는 좁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불침번 근무 순서를 정한 뒤 잠자리에 들었다고 생각한 순간 순식간에 이전 근무자가 나를 깨우러왔다.

나는 아침해가 떠오르는 걸 봐야하는 마지막 근무자였다.



"잠을 잔 것 같지가 않아."


"눕자마자 잠들었는데 피곤하다? 떠도는 어두움?"



나와 함께 근무를 서는 건 다름 아닌 내 오랜 친구인 멀리보는 수염이었다.

불꽃 부족은 엘프 마을 엘븐델과 마찬가지로 원정대를 강제로 뽑는 게 아니라 지원자만 받았고 멀리보는 수염은 내가 원정대 책임자라는 말을 듣고 지원했다고 하였다.

신들이 내게 폰티펙스 포이부스 막시무스-줄여서 포이부스-라는 칭호를 준 뒤에도 나를 떠도는 어두움이라 불러주는 단 2명 밖에 없는 사람 중 하나인 멀리보는 수염은 늘 믿음직한 친구였다.



"많이 먹는 자도 있었으면 좋았을 거다."


"그래, 그렇다. 많이 먹는 자 보고 싶어진다."



우리는 6년 전 오크와의 전쟁으로 희생된 또 다른 친구를 떠올리며 대화를 나눴다.

물론 주변을 경계하면서 동시에 피곤에 절어서 잠든 원정대원들을 깨우지 않도록 목소리를 낮춘 상태였다.



"애들은 어떤가? 멀리보는 수염."


"늘 똑같다. 말 안 듣는다."


"우리 카론은 말 잘 듣는다 똑똑하다."


"그 말 벌써 5년동안 들었다. 다른 이야기 좀 해봐라 떠도는 어두움."



내가 아들 자랑을 하려고 하는데 이 정없는 친구놈은 벌써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안다는 얼굴로 말을 잘라버렸다.

아들 자랑이 뭐 어때서!



"할 말 없나? 그럼 마추픽에 가면 뭐한다? 떠도는 어두움?"


"드워프 도와준다. 시체 가지고 온다. 우리 살아돌아간다. 아내랑 애들 마을에서 나 기다린다. 너도 안 한다 멀리보는 수염."


"그래, 우린 가족에게 돌아간다."



나도, 멀리보는 수염도 집에 가족이 있었다.

제 아무리 신들이 명했다고 하더라도 드워프들의 대표인 칼가둔하람이 원한 것은 용의 퇴치가 아니라 유해의 수습이었다.

불의 신은 찬스가 있으면 용을 죽이고 그 심장을 먹어치우라고 했지만 그런 찬스가 올 거라고는 애초에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우리는 적당히 드워프들을 도와주기만 하고 돌아갈 것이다.



"응?"


"왜 그러나 멀리보는 수염?"


"뭐가 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멀리보는 수염이 눈살을 찌푸리며 어둠으로 가득한 낮은 언덕 너머를 바라보았다.

멀리보는 수염은 이름처럼 시력이 굉장히 좋은 친구였기에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의 무언가를 발견한 것 같았다.

바짝 긴장하며 멀리보는 수염과 함께 낮은 언덕 너머의 지평선을 바라보기를 10분 정도 유지했을까

우리는 새벽녘을 물리치는 여명의 햇살이 서서히 세상을 물들이는 걸 보았다.

그리고 그 여명의 빛을 피해 지평선을 달리고 있는 것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



그건 틀림없는 야생마 무리였다.

하지만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그 야생마 무리의 선두를 지키면서 지난 며칠동안 쌓인 눈을 발로 흩뿌리며 돌진하는 존재였다.

그것은 여명의 빛을 받아 눈부신 백금색으로 빛나는 털을 지니고 있었다.



"히이이이잉!!"



아할-테케.

통칭 한혈마라고 불리는 품종이었을 것이다.

승마에 대해 잘 모르는 나조차도 알고 있는 전설적인 존재였다.

그 녀석은 자기보다 조금씩 작은 야생마 무리를 이끌고 높은 체온으로 만들어낸 김을 눈보라처럼 뿜으면서 지평선을 달리고 있었다.

놈들이 일렬로 달리며 김을 내뿜고, 바닥에 쌓인 눈을 차서 흩뿌리는 모습은 마치 눈이 쌓인 철로를 달리는 열차처럼 보였다.

내가 알고 있는 보통 말들보다 훨씬 거대한 원시적인 말들이 원시적인 매력을 뿜어내며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저게 뭐냐?"


"멀리보는 수염, 저게 바로 말이다."


"저게 말이다?"


"말이다."



멀리보는 수염은 처음보는 말의 모습에 멍하니 놈들을 바라보았다.

녀석들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서 다시금 세상이 조용해진 뒤에도 한참이나 놈들이 사라진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았다.



"저거 길들인다? 떠도는 어두움?"


"길들일 거다."


"길들여서 뭐한다?"


"타고 다닌다. 말 빠르다. 잘 안 지친다. 힘도 세다. 길들이면 등에 타고 다닐 수 있다. 달리는 거 보다 빠르다."



녀석들을 타고 다닌다는 말에 멀리보는 수염은 말에 탄 자신을 상상하는 것인지 한참을 야생마들이 사라진 지평선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태양이 마침내 지평선이라는 이름의 이불에서 완전히 머리를 내밀었을 때 멀리보는 수염은 몸을 돌려 내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도와주겠다. 나도 저거 타보고 싶다."



멀리보는 수염의 얼굴에는 어른이 된 뒤에는 잘 보이지 않았던 동경과 모험심과 흥미진진한 감정들이 뒤섞여서 나타나 있었다.

가족이 생기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잃어가던 동심이 돌아온 친구를 보며 나는 녀석의 가슴을 툭 치며 말했다.



"누가 말 빨리 잡나 해본다?"


"하하하! 내가 더 빠를 거다 떠도는 어두움."



멀리보는 수염은 그말에 너털 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고 이제 우리는 꿈의 신의 포로가 되어 있는 원정대를 깨우기 위해 야영지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마침내 9일째가 되었을 때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드워프들의 산 마추픽은 넓은 벌판 한 가운데에 있는 뒤틀린 지각 아래에 우뚝 솟아서 웅장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옛 시대에 있던 지각변동과 화산활동으로 마추픽의 주변 땅만 지각 밑으로 파고들어 마추픽은 개미지옥 한가운데에 꽂힌 돌처럼 보였다.


아마 카르스트 지형의 탑 카르스트였나?

침식과 용식 작용으로 단단한 부분만 남겨져서 높은 바위나 산이 이루어지는 현상이었을 것이다.

지금 눈앞에 있는 마추픽은 평범한 카르스트 지형이 아니라 우연히 화산활동과 카르스트 지형 형성 요인이 일어나 거대한 산 하나가 지대 밑에 남겨진 걸로 보였다.

산의 표면 대부분이 화산암이지만 산 근처의 침하된 지반은 석회암과 심성암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긴 어떻게 내려가는 겁니까?"



마추픽으로 가는 길은 없었다.

우리가 지금 서 있는 곳은 마추픽이 내려다보이는 깎아지른 절벽이었고 그 반대편도 딱히 내려갈 길이 없는 것 같았다.

마법과 주술을 쓸 수 있는 나는 몰라도 다른 사람들은 그대로 떨어졌다가는 무사하지 못할 그런 높이였다.



"마추픽은 예로부터 밖과 차단된 장소였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겉으로 보이지 않는 좁은 길을 만들고 이 자리에 물건을 보관할 장소를 만들었죠. 용이 날뛰기 전에는 이 자리에 집적소가 있었습니다."



칼가둔하람은 우리들의 반응이 당연하다는 듯이 한쪽 무릎을 꿇고 흙먼지 속을 뒤지기 시작했고 그가 먼지 밑에서 꺼낸 건 부서진 나무판자였다.



"그럼 이건?"


"용은 하늘을 날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입에서 뭔가를 뱉어낼 수는 있더군요. 놈이 뱉어낸 무언가가 이곳에 있던 집적소를 완전히 날려버렸습니다."



칼가둔하람이 꺼낸 나무판자는 뭔가의 부품이었던 걸로 보였다.

그는 박살난 판자를 들고 근처를 둘러보면서 바닥을 쓸기 시작했고 그렇게 10분 정도가 흘렀을 때 그는 뭔가를 찾아냈다.

그는 박살난 판자를 잘 펴서 그 무언가에 끼워넣더니 낑낑대며 돌리기 시작했고 잠시 후 땅이 울리더니 우리 17명의 원정대의 앞에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사람 하나가 간신히 들어갈 수 있을 너무나도 좁은 지하 통로로 가는 돌로 된 문이었다.

돌로 된 문은 스스로 열리며 솟아났고 칼가둔하람은 자랑스럽지만 비통한 눈으로 통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용은 덩치가 너무 커서 이 통로로는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통로의 존재는 알고 있습니다. 마추픽의 일곱 공동 중 이 통로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단 하나의 공동만이 우리의 정착지로서 멀쩡하게 작동하는 지금, 이 너머로 가면 우리는 동포들보다 놈을 먼저 만날 수도 있습니다."



칼가둔하람의 말에 인간과 엘프들은 바짝 긴장하였고 드워프들은 큰 결심을 한 얼굴로 돌 도끼를 들어올렸다.



"아쉬나, 판테라 같은 바람, 날카로운 혀. 너희들은 여기 남아서 입구를 지켜라. 셋이서 함께 다니면서 이곳에 쓸만한 물건이 없나 살펴라. 우리는 별다른 일이 없다면 해님 달님이 일곱 번 달린 뒤, 일주일 뒤에 다시 오겠다."


"예! 주술사!"



나는 입구에 엘프 하나, 인간 둘을 남기고 칼가둔하람에게 가자는 신호를 보냈고 14명으로 줄어든 원정대는 드워프들의 지하 도시로 진입하기 시작하였다.

통로는 드워프들에게는 쾌적했으나 인간과 엘프는 허리를 숙여야 하는 구간이 너무 많았고, 폭도 간신히 2명이 지나갈 수 있는 정도였다.

칼가둔하람은 바짝 긴장하며 내려가는 길을 안내하였고 어두운 통로를 몇 분이나 내려가고서야 우리는 좀 넓은 천연동굴로 들어올 수 있었다.



"조심하십시오. 여기서부터 마추픽의 4번째 공동으로 이어지는 통로입니다. 놈이 어디에 숨어서 우릴 지켜보고 있을지 모릅니다."


"아주 약하게 빛을 띄우겠다. 너무 밝은 빛은 용의 주의를 끌 수도 있으니까."



칼가둔하람은 우리에게 주의를 주었고 인간과 엘프들은 서로 말없이 수신호를 주고 받았다.

결혼 동맹으로 묶인 두 부족은 지난 6년동안 여러가지 방면에서 협력해왔고 이 수신호 체계 역시 그 협력의 산물 중 하나였다.

나를 제외한 4명의 인간과 4명의 엘프들은 각자, 후방에 3명, 양측 좌우에 각각 2명, 중앙에서 사방에 신호를 전달해주는 한명이 주변을 경계하는 진형을 만들었고 나는 선두에서 드워프들과 함께 있었다.

드워프들은 우리가 측면과 후방을 경계하는 진형을 짜자 앞쪽만 바라보기 시작했고 나는 인간의 선두, 드워프들의 후방의 자리에 위치한 채 주변을 살폈다.


나는 그들이 진형을 만드는 동안 지난 6년 동안 헤카와 함께 수련한 성과인 마법을 자랑하듯 드러냈다.

내가 띄운 작은 구체는 아주 희미한 빛을 내고 있었다.

우리 반대편의 어둠 속에서 보면 광물에 반사된 빛이 아닌가 착각할 정도지만 우리 쪽에서는 반대편 어둠이 조금 보이는 특별한 빛의 구체였다.


천연동굴 곳곳에 삽과 곡괭이로 파내려간 흔적이 있었다.

아마 드워프들이 귀한 암석과 광물을 찾느라 만든 흔적일 것이다.

하지만 곳곳에 횃불을 지져서 뭔가를 녹이려던 흔적도 있었고 끔찍하지만 시체가 부패하면서 녹아내리고 남은 뼈들이 보였다.



"크르르! 그그극!"



그때 갑자기 앞쪽에서 뭔가가 가래 끓는 것 같은 울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내가 정지 수신호를 내는 것과 동시에 진형 가운데에 있던 자가 다른 인원들에게 정지 신호를 전달했고 인간과 엘프들은 다 같이 멈췄다.



"뭐지?"


"아아, 별거 아닙니다. 그냥 지하에 살고 있는 짐승이죠. 지상의 하이에나와 조금 닮았습니다. 크기는 훨씬 작습니다."



다만 드워프들은 그 울음소리를 듣고 별거 아니라는 듯이 오히려 안도하고 있었다.

칼가둔하람의 말에 조금 집중해서 어둠속을 바라보니 그곳에는 어둠 속에 둥둥 떠 있는 한쌍의 불빛 같은 게 있었고 그게 내가 마법으로 띄운 빛에 짐승의 눈이 불빛을 반사하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는 녀석이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용은 굉장히 거대하지만 소리를 잘 내지 않습니다. 놈이 조용히 걸어다닐 때는 조용히 나뭇잎 밟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립니다. 다만, 놈이 진심으로 뛰기 시작하면 지하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울립니다."



우리가 다시 전진하는 동안 칼가둔하람은 내게 용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리고는 길을 안내하기 위해 방향을 지시할 때를 제외하고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 어둠 속에서 용이 어디서 덮쳐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느껴졌다.

내가 비추는 빛은 전방으로 향하고 있었기에 나에게서 등을 보이고 있는 칼가둔하람의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았음에도 공기와 공간을 타고 칼가둔하람의 두려움이 내게 전해져왔다.


지금까지 이곳에 오는 9일 동안 들은 묘사를 생각한다면 용은 거대한 도마뱀 형태인 게 분명했다.

비록 아가리가 늑대처럼 벌어졌고, 흉측한 이빨들이 입천장까지 잔뜩 박혀있는데다 얼굴이 반쯤 녹아내린 상태에 등에 갈기 같은 게 달렸다는 믿을 수 없는 묘사였다.


나는 곳곳에서 용이라 생각되는 것의 흔적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놈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고 그렇게 몇 시간을 떠돌아다녔을까, 어느 순간 통로가 점점 밝아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을 때 저 멀리서 내가 띄운 것이 아닌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 더 걸어가자 천장에 박힌 투명한 석영들이 그 빛을 반사시키고, 굴절시키면서 통로를 조금 밝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고 마침내 내가 띄운 불빛이 없어도 동굴 벽에 있는 긁힌 자국이 몇 개인지 셀 수 있을 정도로 밝아졌을 때 우리가 본 것은 거대하고, 거대한 커다란 공터였다.



"여기가 마추픽의 네 번째 공동입니다."



동굴을 빠져나오자 우리가 본 것은 천장에 박혀서 빛을 내고 있는 거대한 보석이었다.

그것은 방사능과는 관련이 없는 순수한 주황빛 마력의 불빛을 은은하게 내뿜고 있었고 그 아래에는 철저하게 파괴된 폐허가 있었다.

자세히보니 우리가 동굴에서 빠져나온 지점에 있던 건 돌로 된 계단이 아니라 바위로 된 문의 파편이 널부러져 있는 것이었다.



"이곳은 마추픽에서도 가장 외곽 지역에 있어서 외부와의 무역으로 크게 번창했던 공동입니다. 지금은 폐허와 죽은 자들의 메아리만 남겨졌지요."


"각 공동은 다 저런 빛을 내는 보석이 있는 지점에 만들어졌습니까?"


"예, 대장장이의 여신께서 점지해주신 지점들을 파내려가서 각 공동을 만들었습니다. 저 순수한 땅의 결정체는 우리를 비추는 불빛이고, 태양입니다."



칼가둔하람과 드워프들은 저 빛을 내는 보석을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저 멀리 불빛 아래의 폐허에 뼈들이 뒹굴고 있던 것이다.

어떤 뼈는 죄다 부러져 있었고, 어떤 뼈는 폐허가 된 건물 벽에 처박혀 있었다.

어떤 뼈는 살아생전 입고 있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고 어떤 뼈는 팔다리의 순서가 뒤바뀐 채 거리에 엎어져 있었다.



"시신들을 수습하는 동안 통로들을 지켜봐주시기 바랍니다."



그것들은 이미 시신이라기보다는 유골이라고 해야 하는 상태였지만 우리는 칼가둔하람의 슬픔에 찬 목소리에 2인 1조로 흩어져 3개의 통로와 폐허가 된 거리를 경계했다.


그동안 나는 홀로 폐허를 바라보며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파악하려고 했다.

드워프들의 건축물이 대부분 돌과 암석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건 명확했다.

그들은 지하에서 구하기 힘든 목재 대신 여러 암석과 일부 녹는 점이 낮은 광물을 사용하였다.

내 발밑에 뒹구는 돌을 깎아만든 숟가락과 포크는 이들이 얼마나 정교한 암석 가공기술을 가지고 있는지 알려주고 있었다.


다만 목재를 아예 안 쓰는 건 아니었는지 대장간으로 추정되는 폐허에는 나무를 태운 목탄이 뒹굴고 있었다.

아직 석탄을 사용하는 건 아닌 것 같았고 창고로 보이는 곳에는 말린 식용 버섯들이 박살난 석재창고 건물 파편에 뭉개진채로 포자를 퍼트렸는지 새로운 버섯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용은 최소한 두께 5cm가 넘는 돌을 깎아 만든 벽을 일격에 박살낼 수 있는 수준의 덩치와 힘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우리가 지나온 높이 평균 4~5m, 가장 낮은 곳은 3m 정도되는 천연동굴을 통과할 수 있는 높이일 것이고 그렇다면 놈은 내가 흔히 알고있는 용보다는 드워프들이 묘사한 것처럼 납작 엎드린 도마뱀에 가까운 형태를 지니고 있는 게 분명했다.


놈에게 날개가 없다는 건 놈이 사방이 막힌 절벽으로 둘러싸인 마추픽에서 탈출하지 못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고, 통로가 이러한 걸 보면 아마 뒷발로 서서 불을 내뿜는 서양 용보다는 도마뱀이나 길쭉한 동양 용에 가까운 모습일 것이다.

다리 2개에 날개가 팔 대신 달린 와이번 형이나 다리 4개와 날개가 달린 드레이크 형이 아닌 원시적인 도마뱀 형태의 공룡인 것이다.



"칼가둔하람? 놈, 용은 주로 어떤 공격을 해왔습니까?"



대충 용이 남긴 흔적들을 둘러보고 뼈를 한군데에 모으고 있는 칼가둔하람에게 묻자 그는 악몽에서 깨어나려는 사람처럼 살짝 몸부림을 치다가 가까스로 자신을 진정시키고 내게 말해줬다.



"날카로운 이빨로 물어뜯을 때도 있고, 앞발 중 하나를 휘두를 때도 있었습니다. 몸을 돌려 긴 꼬리를 휘두를 때도 있었죠. 하지만 역시나 가장 위력적인 공격은 놈이 입에서 내뱉는 무언가입니다."


"무언가?"


"그건 처음에는 불꽃인 줄 알았습니다. 놈이 그걸 내뱉을 때마다 어둠 속이 물러가고 환하게 사방이 비춰졌으니까요. 하지만 놈이 밖에 나와 외부 집적소를 날려버릴 때 알았죠. 그건 불이 아니라 뭔가 파란색 연기 덩어리 같은 걸 뭉쳐서 내뱉는다는 걸 말입니다."



아무래도 놈이 내뱉는 건 전설로나 듣던 불로 된 드래곤 브레스는 아닌 모양이다.

어쩌면 내가 모르는 신종 독일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는 체렌코프 현상을 일으킬 정도로 농축된 방사능 증기나 플라즈마일 수도 있었다.

내가 생각에 빠지자 칼가둔하람은 다시 뼈를 모으러 저 멀리 건물로 들어갔고 나는 박살난 거리의 바위에 앉아 생각했다.



"놈이 쓰는 브레스는 온도를 극도로 높은 증기인가? 아니면 방사능? 플라즈마? 그것도 아니면 마력인가?"



그러나 이곳 제4공동에 남겨진 흔적만으로는 놈이 정확하게 무엇인가 판별할 수 없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나 드워프들이 제4공동에 남겨진 뼈들을 한 곳에 모았을 때, 갑자기 마추픽 중심부로 들어가는 통로 방향에서 우리가 지금껏 들은 적이 없는 끔찍한 포효가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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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신들과 부족들 #10 +18 19.11.01 6,014 230 19쪽
10 신들과 부족들 #9 +8 19.11.01 6,028 204 22쪽
9 신들과 부족들 #8 +11 19.11.01 6,127 201 18쪽
8 신들과 부족들 #7 +8 19.11.01 6,302 199 17쪽
7 신들과 부족들 #6 +14 19.10.31 6,911 206 26쪽
6 신들과 부족들 #5 +20 19.10.31 7,588 217 29쪽
5 신들과 부족들 #4 +18 19.10.30 7,959 235 26쪽
4 신들과 부족들 #3 +20 19.10.30 8,507 268 27쪽
3 신들과 부족들 #2 +15 19.10.29 9,731 274 22쪽
2 신들과 부족들 #1 +28 19.10.29 12,574 323 22쪽
1 프롤로그 +66 19.10.28 24,266 415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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