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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카레 님의 서재입니다.

노을의 맹세

웹소설 > 자유연재 > 현대판타지, 무협

인도카레
작품등록일 :
2023.05.10 23:10
최근연재일 :
2023.06.16 17:10
연재수 :
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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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277

작성
23.06.16 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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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프롤로그(8)

DUMMY

끔찍한 상상을 하는 게 내 일상이었다.


하지만 그런 비현실적인 일은 현실 세계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굳게 믿어 왔다. 나는 언제까지고 예측 가능한 인생을 살 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있는 장소는 현실이다. 캔버스 위에나, 영화 필름 안에나, 소설이나 나 같은 환자의 망상 속에만 존재해야 할 지옥의 풍경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넘어졌던 아이는 여자의 어깨 너머로 그 광경을 봤다. 어느새 여자의 손에는 권총이 쥐여져 있다. 아이의 머리에 차가운 강철이 닿았다.


여자의 뒤에 보이는 흉측한 문어는 천이 넘는 촉수를 부르르 떨며 춤추고 있었다.


"어.......?"


아이는 괴물의 품에서 벗어나고자 팔다리를 흔들었다. 문어의 촉수는 꿈쩍도 않고 아이를 단단히 붙잡았다. 여자는 아이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리고 잠시 후에 아이를 놓아주었다.


괴물의 품에서 벗어난 아이는 주위를 둘러본다. 빠른 템포로 흐르는 캐릭터송, 롤로코스터가 움직일 때마다 울려 퍼지던 즐거운 비명, 인형옷 옆에 서서 사진을 찍던 사람들. 그 모든 것들이 붉은색과 침묵으로 덧칠되었다.


붉은 물결이 아이의 허벅지를 적셨다. 핏물은 내가 있는 곳까지 흘러왔다.


아이는 엄마를 찾으려는 듯이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다. 찰박거리며 엄마가 있던 방향을 향해 걸어간다. 엄마를 찾기 위해 땅을 보고 걸어간다. 부릅뜬 눈과 인간의 단면을 보며 나아가던 아이는 그만 붉은 바다에서 목놓아 울었다.


여자는 하늘을 향해 갖고 있던 총을 쐈다. 큰 소리에 놀란 아이는 뒤를 돌아보며 넘어졌다. 아이의 오른쪽 반신이 붉어졌다. 검붉은 괴물이 웃으면서 아이를 향해 다가간다. 아이는 찰박찰박 소리를 내며 필사적으로 괴물의 반대 방향으로 도망쳤다.


여자는 장전된 총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렸다. 도망치는 아이의 뒷모습을 느긋하게 지켜보다가 갑자기 나와 눈을 마주쳤다.


놈과의 거리는 고작 20m. 겨우 손톱만 한 구멍으로 바깥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마술사의 눈이라면. 저 괴물의 눈이라면 숨어 있는 사냥감의 모습을 놓칠 리가 없다.


여자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고개를 돌렸다.


......못 봤나? 산 건가? 찢어질 것처럼 뛰는 심장이 멈추지 않았다. 괴물이 금방이라도 이쪽을 볼 것 같다. 모습을 숨기고 싶은데도 핀에 찔린 벌레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이를 향해 걸어가는 여자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여자의 앞에 흰 고깔모자를 쓴 마술사 세 명이 착지했다. 마술연합의 구조대가 여자를 쓰러뜨릴지도 모른다는 환상을 품었다. 하지만 그들은 신하처럼 여자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어 앉았다.


쉬지 않고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를 뚫고, 여자의 목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이게 다 얼마야? 한 5분의 1쯤 죽였나?"


살인에 대한 거부감이라고는 하나도 느낄 수 없었다. 얼마 전에 다빈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바스커빌. 다빈이 그 어떤 신비종보다도 두려웠다고 표현한 쾌락살인마들이 저들이리라고 확신했다.


"네."


"우리 귀염둥이들이 고생이 많아. 키스해 줄까?"


여자가 가운데 있는 복면의 목을 팔로 휘감아 끌어당겼다. 이마와 이마를 맞대고 말했다.


"셋 센다. 잡아와. 마술은 쓰지 말고. 제일 빠른 분한테 사랑을 담은 키스를 드리겠습니다."


나를 이야기하는 건가? 여자가 하늘을 향해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나를 바라본다.

고깔모자를 쓴 마술사의 고개가 동시에 여자를 따라 움직였다. 숨이 멎었다.


가슴에서 드럼을 연타하는 소리가 들린다. 팔다리와 이빨이 헐벗고 눈보라에 던져진 것처럼 덜덜 떨렸다.


여자가 손을 내렸다.

손끝은 도망치는 아이를 향하고 있었다.


마술사들이 희고 붉은 옷자락을 휘날리며 아이를 향해 달렸다. 질척거리는 피바다를 헤치며 아이를 쫓는 모습은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제법 우스꽝스러웠겠지. 그래서 더 기괴했다.


여자는 들고 있던 권총을 장전했다. 권총을 쥔 팔을 일직선으로 쭉 뻗는다. 총구가 불을 뿜었다.


선두에 서 있던 마술사의 가슴에서 피가 튀었다. 복면을 쓴 마술사 둘이 총성이 울린 방향을 본다. 다음 총알이 두 번째로 앞에서 달리던 사람의 머리를 꿰뚫었다.


복면이 주춤거리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여자는 권총 끝에 입을 맞췄다.


"뭐 해? 안 쫓아가? 키스 싫어?"

"왜 저희를......?"


마지막으로 남은 복면인이 쓰러진 동료들을 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나도 비슷한 기분이었다. 왜 동료를 쏴죽인 거지?


넘어진 복면은 일어날 생각도 못 하고 팔다리를 저으며 뒤로 움직였다. 여자는 성큼성큼 부하였던, 겁에 질린 희생자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오늘 살인의 테마는 담백함이야. 좆 됐다고 생각하지도 못하고 죽는 거. 받아들이기도 전에 갑자기 찾아오는 거.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잖아? 여기 있는 사람들, 자기가 죽는 것도 모르고 죽었을 거야. 좋은 살인이었어.

그런데. 와이어를 쓴 게 실수였어. 손맛은 깔끔한데 뒤가 지저분하거든. 잘게 쪼개진 단면이나 안에서 나오는 물컹거리는 것들. 이거 봐, 신발 다 더러워졌잖아. 담백한 죽음이라는 테마랑은 안 어울려. 어정쩡한 작업물을 만들어 놓고 일을 끝낼 수는 없지. 안 그래?"


철컥. 장전된 권총을 미간에 댄다.


"못 들었어? 담백한 죽음이라니까. 너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거야. 자. 포커페이스."

"사, 살려 주십시오. 살려만 주시면 뭐든."


여자가 부하의 입에 권총을 집어넣고, 총구로 입꼬리를 내렸다.


"포커페이스라니까."


단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어린아이를 죽이러 살기등등하게 뛰어가던 마술사는, 총구가 물려진 입으로나마 살기 위해 발악하고 있었다.


"에, 에가 아이으 아바 오겠습니다. 아바 올게요. 하 후 이허........"

세 번째 총성이 울렸다.

철퍽.


피바다에 새로운 시신이 또 한 구 떨어졌다. 여자는 부하였던 것의 두개골을 자근자근 짓밟으며 중얼거렸다.


“맘에 안 드네 진짜.”


저건 인간이 아니다. 같은 팔다리와 눈코입을 달고 있음에도 저것은 인간이라고 불러서는 안 됐다. 여자의 어깨 너머로 반투명한 환영이 보였다. 천 개가 넘는 다리를 늘어뜨린 문어가 보였다.


인간의 몸에 미처 담기지 못하고 흘러넘친 것의 흔적. 저 환영이 여자의 본질이었다.

지옥의 바다에 사는 문어가 손으로 눈썹 위를 가리며 어딘가를 본다. 아이가 도망친 방향이었다.


"멀리도 갔네."


괴물이 권총을 들었다. 달리는 아이를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왜인지 총을 내렸다.


“굳세게 살아라.”


웃기지도 않는 인사를 건네고, 괴물이 걸음을 옮겼다.

손톱만 한 구멍으로 바깥을 보고 있는 나를 향해.


테러리스트의 등 뒤에 부유하던 문어가 다리 하나를 들어올렸다. 마천루가 수직으로 떠 있는 것 같았다.


“후.”


테러리스가 입술을 내밀어 김을 불었다. 그녀의 머리맡에 신기루처럼 떠 있던 환영이 한순간 실체로 변했다. 반투명한 문어의 상 뒤로 보이던 놀이공원의 풍경이 가려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문어의 다리가 내 머리 위를 지나갔다. 몸을 짓누르고 있던 돌무더기들은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나는 비틀비틀 제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원래 여기에는 덩치 큰 놀이기구들이 있었다. 그 너머에는 높이 솟은 산봉우리들이 있었다.


핵미사일을 떨어뜨려도 작은 구멍이나 움푹 파이고 말 거대한 자연물이 소리도 없이, 증기처럼, 지우개로 문질러 버린 스케치처럼 사라져 버렸다.


지형을 바꿔 버린 괴물이, 나를 향해 히죽 웃으며 말했다.


“탁 트이니까 좋네. 그렇지?”


미친 듯이 뛰는 심장 박동을 무시하려 애쓰며 내가 무엇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뛰어서 도망칠까.


될 리가 없다. 산봉우리를 날려 버린 것으로 미루어보건대 저 문어의 사정거리는 수십 km에 달한다.


그러면 싸울까?

입김으로 산을 지워 버린 괴물과 싸움을 성립시킬 수는 있나?


도망칠 수도, 싸울 수도, 숨을 수도 없다. 이 순간 살아남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테러리스트는 권총을 던져 버리고는 주머니에서 나이프를 꺼냈다.

손잡이 끝에 달린 고리에 검지를 끼우고, 칼날을 빙글빙글 돌리며 코앞까지 다가왔다. 역수로 쥔 나이프를 목에 들이대는데도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살려 줄까?”


목이 밀려나지 않도록 왼손으로 머리를 고정한다. 살갗에 나이프를 지그시 대자, 차가운 금속이 살갗을 파고들며 피가 한 방울 글렀다.


나이프는 아주 느리게, 일정한 속도로 내 몸을 침범하고 있었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던 죽음의 기척이 어느 지점에서 우뚝 멈췄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여기서 단 1mm라도 움직이면 끝이다.


“농담 아니야. 시키는 것만 잘 하면 살려 줄게. 우선.......”


테러리스트가 나이프를 뗐다. 등으로 흐르는 피는 굳이 지혈하지 않아도 금방 멎을 수준이었다. 놈의 변덕으로 내 수명이 조금이나마 늘어났다.


나는 테러리스트가 살려 보내 준 어린아이를 떠올렸다. 정말로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의 불씨가 지펴졌다.


“짖어 봐.”


살기 위해서는 못할 짓이 없었다. 진짜 개처럼 짖으려면 네 발로 기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무릎을 꿇으려 했다.


──그런데 문득.

몸이 확 뜨거워졌다.

용량을 넘긴 분노가 말이 되어 밖으로 튀어나왔다.


“......씨발.”


견딜 수 없는 수치심이 눈앞을 새하얗게 물들였다. 앞에 있는 테러리스트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사라져 버린 기억의 편린이 망각의 호수 위로 떠올랐다.


새하얗게 점멸하는 시야로 지옥의 풍경이 펼쳐졌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죽음이 끝없이 되풀이되는 곳.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잔인한 고문실.


그 안에서 무력하게 비명을 지르는 나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 지옥에서 결심하지 않았던가. 나는──


분노로 달아올랐던 몸이 차갑게 식었다.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과거의 내 모습을 잠깐이나마 떠올렸던 것 같다.

내가 본 것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짖으라고....... 못할 건 없지. 못할 건 없는데. 그 전에 하나만 물어보자.”


하지만 기억에 초점을 맞출 필요는 없다. 그 흐릿한 기억을 통해 내가 깨달은 것이 무엇인지만 똑똑히 기억하면 된다.


나는 내가 무엇이 되고 싶은지 모른다.

하지만 무엇이 되고 싶지 않은지는 확실하게 알았다.

나는 인간이고 싶다.


인간은 선택할 수 있는 존재다. 내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 것인지 고를 수 있는 의지야말로 인간의 자격이다.

내 운명이 타인의 의지에 의해 결정된다면. 그건 인간이 아니라 비명을 지를 줄 아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하겠지.


“덩치 큰 파란 머리 마술사랑 십자교 수녀. 아마 둘이 같이 다니고 있었을 텐데, 본 적 있냐?”


“있다고 하면?”

“죽였어?”

“기억이 안 나는데....... 살려 줬다고 하면? 어쩔 거야?”

“그럼 짖으려고.”


“호오. 죽였다고 하면 어쩔 건데?”

“복수해야지. 빌어먹을 반장이거든.”

“반장......?”


“학우가 살해당할 경우에 반드시 복수해 드리겠다는 공약을 걸었으니까.”


물론 그런 공약을 건 적은 없다.

인간으로 죽기 위해 짖지 않을 명분이 필요했던 것뿐이다.


“재밌는 공약을 다 거네. 복수라. 할 수는 있겠어?”


“알 바냐. 하기로 했으면 해. 할 수 있든 없든.”


“수녀랑 파란 머리라. 30분쯤 전에 만났지. 만나서...... 와이어로 토막을 냈는데. 다섯 덩이였나, 여섯 덩이였나.”


“그러냐.”


진짜일까? 아니면 거짓말?

가늠할 수가 없다.


하지만, 저 테러리스트라면 진실과는 무관하게 둘을 죽였다고 말해줄 것 같았다.


“그럼 너도 죽어.”


마술사의 강함은 곧 자신이 겪은 고통의 크기라고, 다빈에게 들었다.

그렇다면 그 빌어먹을 지옥을 겪었던 나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스스로도 의미를 알 수 없는 망상이 번갯불처럼 번뜩이다 사라진다.


머리를 새하얗게 비웠다.


내 목적은 살해당한 친구들의 복수다. 목숨은 목숨으로밖에 갚을 수 없으니 테러리스트를 죽여야 한다.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해야 한다. 가장 먼저 공포를 지웠다. 친구를 잃은 슬픔과 그들을 죽인 테러리스트를 향한 증오도 지웠다.


나는 꿈에서 개를 죽인 일을 떠올렸다.


그건 정말로 꿈에서 일어난 일이었을까.


마지막으로 사소한 의문 하나를 지우고


오직 죽여야 한다는 강박만을 남긴다.


그러자, 몸은 뇌에 남은 유일한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유례없이 빠르게 가속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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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1화 23.06.16 7 0 11쪽
» 프롤로그(8) 23.06.16 4 0 13쪽
7 프롤로그(7) 23.06.16 3 0 12쪽
6 프롤로그(6) 23.06.08 6 0 11쪽
5 프롤로그(5) 23.06.04 6 0 9쪽
4 프롤로그(4) 23.06.04 5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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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프롤로그(2) 23.05.10 10 0 12쪽
1 프롤로그(1) 23.05.10 38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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