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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카레 님의 서재입니다.

노을의 맹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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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카레
작품등록일 :
2023.05.10 23:10
최근연재일 :
2023.06.16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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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8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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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6)

DUMMY

2. 반신(神/身) - 2148년 12월 14일 월요일.



'그 꿈은 뭐였을까.'


나는 이틀 전에 꾼 꿈을 생각하면서 검지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아저씨가 남긴 이상한 메모를 본 다음에 개와 싸우는 꿈이라니.


엊그제 다빈이 아저씨가 내 유산을 독차지하기 위해 음모를 꾸몄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했었지. 그 말 때문에 괜히 밤잠을 설치고, 아직까지 그 꿈을 떠올리고 있었다.


'진짜 꿈이긴 했을까?'


악몽을 꾸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 내 팔은 멀쩡하게 붙어 있었다. 도베르만의 시체도 없었고, 자기 전에 켜 두었던 불도 그대로였다.


현실에서는 절대 일어날 리 없을 허무맹랑한 사건의 연속이었음에도 묘한 의심이 떠나지 않았다.


“대학 붙었다면서?”


바삭한 츄러스를 먹으면서 다빈이 말을 걸었다. 평소에 입고 다니던 갑갑한 수녀복 대신 사복을 입어서인지 놀이공원을 돌아다니는 내내 평소보다 텐션이 높았다.


“무슨 과야?”


돈까스를 먹고 있던 이하민이 대신 대답했다.


“아직 과는 안 정해졌대. 1년 동안 전공 없이 이것저것 다 해 보고 2학년부터 자기가 하고 싶은 전공을 고르는 식이래.”


“그런 대학도 있어? 신기하네. 그럼 따로 하고 싶은 일은 안 정한 건가?”


“뭐....... 아직은.”


수능 성적으로는 더 좋은 다른 대학에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학과에 갈 것인지를 고르지 못해서 대학을 정한 것이다.


돌이켜 보면 우습다. 나는 지난 1년을, 기억상실에 걸려서 막 깨어났던 내 체감으로는 평생이라고도 할 수 있는 시간을 공부에 바쳤다. 하지만 정작 높은 성적으로 어떤 대학에 가서 무슨 일을 할 것인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담임교사는 돈벌이가 될 만한 학과들을 소개해 줬지만 전부 거절했다.

두 부모와 형제는 교통사고로 같은 날 죽었고, 친척은 한 명도 없다. 주식투자로 큰돈을 굴리던 아버지의 재산은 내가 독차지하게 됐다.


미성년자 신분이라서 상속받을 수 없었던 유산은 며칠 전에 내 통장에 들어왔다. 서울 시내에 마당 딸린 저택에서 살 때부터 짐작하긴 했지만, 아버지의 유산은 지진이나 전쟁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죽을 때까지 먹고살 수 있을 정도였다.


인간은, 아니, 지구상의 무수히 많은 생물들은 대부분이 살기 위해 산다. 서식지를 만들거나 지키고, 먹이를 구하기 위해 하루의 대부분을 소모하는 것이다.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은 이 행성의 역사를 통틀어서도 극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이었으리라.

그런 행운을 타고났기에, 나에게는 이 축복을 온전히 활용할 의무가 있다.


오직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이루고 싶은 꿈을 목표로 살아가는 것이 올바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정작 내가 무엇이 되고 싶은지를 모른다.


“살다 보면 뭐든 할 마음이 들겠지. 넌? 수녀 일 계속할 거야?”


“대한민국에서 돈 제일 못 버는 직업 2위가 수녀거든. 좀 옛날 자료긴 한데, 못 버는 직업인 건 안 변했어.”


나는 푸념하는 다빈에게 말했다.


“돈 보고 하는 직업은 아니지 않나?”

“신앙심도 별로 없으니까 하는 말이지.”

“근데 넌 돈 잘 벌잖아.”


마술사 출신인 하민이가 지적했다. 일반적인 수녀는 재물과 그다지 인연이 없는 직업이지만, 신비종과 싸우는 아리우스 교파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제 성인이잖아. 수습사제 타이틀 떼고 지구6에 몇 달만 출장 다녀오면 집 한 채 값은 나오고. 돈 못 번다고 때려치운다면 앞뒤가 안 맞지.”


“지구 6? 목숨 내놓고 그런 데 가기 싫거든? 싸우다 죽으면 남은 돈은 뭐, 누가 노잣돈으로 챙겨 준대?”


전선에 투입된 마술사가 죽을 확률은 1%미만이다. 후열에서 아군을 지원하는 마술사일 경우에는 죽을 확률이 더 줄어든다.


하지만 아무리 낮은 확률일지라도 없는 것은 아니다. 목숨이 걸린 일이기에 무시해도 된다는 말을 함부로 할 수는 없었다.


“마술사도 결국 명예직인데....... 난 됐어. 따로 하고 싶은 일도 있고.”

“하고 싶은 일?”


“그건 비밀. 하민이 너는 졸업하면 뭐 할 거야?”


다빈은 내 질문을 흘리고 하민이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금지 처분 곧 끝나지 않아?”


하민이는 민간인을 때려서 3년간 마술 사용을 금지당하는 처벌을 받았다. 중학교 졸업 직전에 받은 처분이었기에 슬슬 풀릴 때가 됐다.


“난 그냥 마술사 하려고. 싸우는 게 재밌기도 하고.”


나는 하민의 말에 수긍했다. 녀석은 책상 앞에 앉아서 하는 일과는 영 인연이 없었다. 기어이 교칙을 어기고 머리를 새파랗게 물들인 것만 봐도 어지간한 반골이다. 이런 놈은 사무실에 처박아 놓고 기력을 썩힐 바에 전선에 던져 놓는 게 공익을 위한 일이었다.


“3년이나 쉬었잖아. 스케일은 유지돼? 다른 지망생들이랑 격차도 꽤 나지 않았어?”

“구르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뭐.”

“대학은?”


“글렀지 뭐. 3년 꿇은 것 때문에 내신은 하나도 없고, 중학생 때보다 못한 실력으로 실기 쳐 봤자 똥통에나 굴러갈 게 뻔해. 그럴 바에 고졸로 구르려고.”


“굴러? 전선에서?”

“어. 연줄로 파티 하나만 구해줄 수 없냐?”


“괜히 추천해줬다가 네가 못하면 내 평판만 깎이는 건데? ......하긴. 그만두기로 했으니까 상관없으려나. 잠깐만 기다려 봐.”


마술사 두 명에서 자기들끼리만 아는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조금 소외당하는 기분이 들긴 하지만, 장래에 관한 진지한 대화였다. 억지로 화제를 바꾸는 건 하민이에게 민폐다. 나는 식탁에 놓인 고깃덩이를 잘라 입에 넣었다.


그나저나 마술이라. 새삼스럽지만 아직도 잘 믿어지지 않는다.

2018년 12월 25일. 인류 역사에 처음으로 ‘신비종’이 나타난 날이다.


신비종이란 생김새는 일반적인 동식물과 비슷하지만 총기에 맞아도 끄떡없을 정도의 방어력과 초월적인 신체 능력, 그리고 인간을 향한 무조건적인 적의를 지닌 생명체다.

당시 인류의 군대는 신비종과의 전쟁에서 단 일주일 만에 거의 무력화되었다. 초강대국이라 불리던 몇몇 국가들은 좀 더 오래 버티긴 했지만 큰 의미 없는 발악이었다.


신비종 출현 이후 한 달 만에 돌덩어리를 모아 하늘에 별을 쏘아올린 위대한 문명은 잿더미가 되었다.


그 암울한 역사의 반환점이 마술사. 즉 맨몸으로 신비종을 격퇴할 수 있는 초인들의 등장이었다.


일단 역사 교과서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평범한 인간보다 강한 마술사가 존재한다는 것은 상식이 되었다. 하지만 왠지 나는 마술사의 존재를 믿을 수가 없었다.


tv프로그램 등에서 마술의 시연 장면을 본 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것쯤은 적절한 와이어 액션과 cg로도 만들 수 있었다.


당장 내 눈앞에 마술사 두 명이 있어도 마술 시연을 볼 수는 없다. 민간인 거주 구역에서 마술을 쓰는 건 범죄이므로.


시내에서 권총을 꺼내면 체포당하는 것과 같은 논리다. 지구 반대편에 아메리카 대륙이 있다는 사실은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아도 믿을 수 있는데, 이상하게도 마술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서는 완전히 믿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세계 전체가 나를 둘러싸고 거대한 사기를 치고 있는 듯한 의심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다.


조금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나 자신이 세상 전체가 속이려 들 만큼 대단한 존재라고 여기는 자의식 과잉이지만. 뭐, 언제나 하던 망상의 연장선이다. 길 가다 습격당하거나 습격하는 것보다는 건전하잖아.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식당 스피커에서 나오던 가요가 갑자기 끊겼다.


“또 시작이네. 또.”


하민이는 말을 하다 말고 접시에 남아 있던 음식들을 마구 입에 욱여넣었다. 녀석이 음식을 채 삼키기도 전에 사이렌이 울렸다. 식당 손님들의 스마트폰에서도 일제히 날카로운 경보가 울렸다. 나는 붉은색 화면이 보이지 않도록 테이블에 놓아 둔 스마트폰을 거꾸로 뒤집었다.


“에이씨. 무음 모드잖아. 무음이라고 무음. 소리가 없음. 못 알아 처먹냐?”


살집 두껍고 인상 나빠 보이는 중년 남성이 옆 자리에서 괜히 짜증을 냈다. 긴급경보가 울릴 때는 휴대폰을 끄지도 못하게 되어 있어서 무슨 욕을 해도 무의미했다. 다빈이 그런 남자의 모습을 보고 하민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야. 저거 네가 맨날 하던 말이지?”


“나도 안 멈추는 거 알거든. 개그잖아 개그. 근데 저 아저씨는 찐텐으로 빡친 것 같다.”


서울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신비종 출현을 대비한 훈련을 하는데, 훈련 날짜와 시간을 예고하지 않는다.


지난번에는 학교에서 중간고사를 보던 중에 훈련이 시작돼서 시험 하나를 다시 치르는 참사가 일어난 적도 있었다. 학생들의 불만은 하늘을 찔렀지만, 신비종 출현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중간고사가 아니라 수능 도중에 훈련이 시작되더라도 군말 없이 대피해야 한다는 여론이 더 강했다.


교통사고를 겪고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사회의 기본적인 상식조차 잊어버린 상태였다. 그때는 신경을 자극하는 소음과 대피 행렬에 적잖이 놀랐지만, 열두 번째인 지금은 경고문을 읊으면서도 묘하게 여유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친근하게 들릴 지경이었다.


위잉. 위잉. 위잉.


긴 소리가 세 번 연속 울렸다. 이제 여자의 목소리가 나올 차례였다.

그런데 오늘 방송은 평소와 달랐다.


[알립니다. 현재 놀이공원에 무차별 살인을 벌이는 마술사가 나타났습니다.]


남자의 목소리였다. 경보 방송 내용도 평소와 달랐다.


“살인을 벌이는 마술사? 이번엔 테러리스트 시나리오인가?”


하민이가 태평하게 중얼거렸다. 식당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방송도 평소의 훈련과 다를 것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맨 처음 경보를 들었을 때와 같은 불길함을 느꼈다.


녹음된 파일이 새 것으로 교체되었을 뿐이라고 치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저 목소리는 프로의 것이 아니다. 발성이 흔들리는 데다 방송 중간중간에 치직거리는 잡음이 섞였다. 대본도 조잡하다.


이것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통찰의 영역에서 이해했다.

거짓말이지.


섬광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질문에 쐬기를 박듯이. 스피커 너머의 목소리가 말했다.


[소장님! 매뉴얼 1번! 실제 상황!]

[......실제 상황입니다. 반복해서 알립니다. 실제 상........ 컥!]


안내 음성이 부자연스럽게 끊겼다. 하지만 스피커에서는 계속 소리가 나오고 있다.

의자가 넘어지는 소리.


푹. 둔중한 타격음 사이에 섞인 섬뜩한 소리.


폐에 피가 들어가서 나오는 가래 끓는 듯한 소리.


“이거 뭐야?”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은 가게에서 누군가가 그렇게 중얼거린다. 공포와 웅성거리는 소리가 전염병처럼 퍼졌다.


극도의 긴장 상태에서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는 세상에서 주위의 소리가 평소보다 선명하게 들렸다.


내 심장 박동 소리.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

아직도 꺼지지 않은 스피커 너머에서 누군가의 발소리.


[터트려.]

그리고, 장마철 검은 먹구름이 샛노랗게 빛나는 소리.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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