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풀잎열매 님의 서재입니다.

스틸 드래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풀잎열매
작품등록일 :
2011.02.28 00:50
최근연재일 :
2021.08.08 23:44
연재수 :
49 회
조회수 :
452,679
추천수 :
2,038
글자수 :
459,195

작성
10.04.24 23:56
조회
9,680
추천
30
글자
22쪽

스틸 드래곤 (20)

DUMMY

베스퍼는 자다 지쳐 깨어났다.

엄밀히 말하면 잠을 자서 지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하지만 최소한 그에게는 그런 느낌이었다. 실은 그건 불면증의 일종이었다. 심적으로 이래저래 부담이 커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그대로 깨어버린 것이다.

“공주님?”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루우가 있을 리가 없다.

‘잠들었던 건가. 추적자는······. 아니, 별로 상관없겠군.’

추적은 미적미적했다. 의욕이 있는지도 의심스러운 추적자는 며칠도 되지 않아 오감의 어떤 부분에서도 그 존재를 느낄 수 없었다. 그렇게 추적이 너무 없다는 것이 오히려 불안감을 줄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사소한 불안감은 불면증의 원인은 될 수 없었다. 그가 불면증에 시달린 건 다른 이유였다.

걱정 때문이다.

‘공주님께서는 어디 계실까. 무사히 계실는지.’

며칠째 정신을 차리고 나면, 아니 정신을 못 차리는 와중에도 그녀를 걱정하고 있었으니 이미 중증이다. 냉혹하게, 객관적으로 판단했을 때 아직도 루우가 살아있을 리가 없다. 그도 그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예 그런 생각 자체를 거부했다. 딸의 죽음을 확인하지 않았지만 냉혹하게 인정한 노 마법사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 마법사와 달리 베스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건 증거는 없지만 믿는다, 따위의 것도 아니었다.

그저 어린아이 같은 고집이었다.

마음속 어딘가에서는 사실에 가까운 가설이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의식의 표면으로 그것을 올려보내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거의 정신병이라 해도 문제없을 수준이었다.

아니, 정신병이었다.

그러나 그렇기에 그 마음은 순수했다. 삐뚤어지도록 순수했다.

베스퍼는 몸을 일으켰다. 담요 삼아 덮고 있던 여행용 망토에서 이슬 몇 방울이 굴러떨어졌다. 똑, 토도독. 소리는 들렸지만 보이는 것은 없었다. 너무 어두웠다. 모닥불조차 피우지 않았던 탓이다. 여름의 끝자락이 가지고 있는 마지막 온기가 있다고 해도 입이 돌아가도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초인적인 소드마스터의 신체 능력 덕분에 모닥불도 없이 차가운 대지 위에 누워 밤을 보냈어도 베스퍼의 몸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며칠 전의 무지막지한 짓거리와 며칠간의 강행군으로 누적된 피로가 사라진 것은 아니기에 온몸이 욱신거렸다. 피곤했다. 자다 지쳤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정신없이 잠에 빠져 있다가 깨어난 상태인 것이다. 애초에 모닥불을 피우지 않고 잠든 것도 추적자를 두려워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며칠 동안 정신없이 달린 끝에 정신을 잃어버린 탓이었다.

소드마스터면서 그게 뭐냐고 하는 것은 모욕적인 언사다. 비록 실전용하고는 다소 거리가 있는 마상시합용 창이지만 엄청난 세월이 담긴 무기를 폭파해 수도의 문을 뚫는다는, 개인이 할 수 있는지 의심스러운 위업을 달성하고 그 후로도 며칠 동안 몸을 혹사하며 먹지도, 자지도 않고 도주했다. 그 끝이 이 정도로 끝난 것은 오히려 대단한 것이다.

아니, 단기필마로 수도 성문을 부순 것만 가지고도 전설로 남을 것이다. 앞으로 누군가 그런 위업을 또 달성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업적이니 말이다.

하지만 자랑스러운 건 없었다.

베스퍼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가장 희미한 별이 반짝이는 것까지 볼 수 있었다. 두 달 모두 하늘에서 보이지 않았다. 꺼질 듯 말 듯 반짝이는 별을 멍하니 바라보며 그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조금씩 머리가 맑아진다. 베스퍼는 그제야 그가 타고 온 말에 대해서 생각이 미쳤다.

‘분명, 쓰러지기 전까지 타고 있었을 텐데.’

알펜은 지도와 며칠 분의 식량, 그 외에 생존에 필요한 몇 가지 물건뿐만 아니라, 말도 준비해줬다. 뭔 수로 구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준비해 준 말은 최상급의 군마였다. 엄청난 폭발을 일으키며 성문을 돌파해야 하니 전투마법 소음적응 훈련이 끝난 군마가 아니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단 수도를 벗어나고 나서는 군마라는 점이 역으로 문제가 됐다. 원래 군마라는 것은 <오래 달리는>데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다. 1톤이 넘는 어마어마한 몸무게에 마갑과 완전 무장한 기사까지 태운 군마는 애초에 강력한 힘과 무게를 단숨에 발휘하도록 훈련을 받는다. 그러고도 한 번 전투에 나가면 며칠은 쉬도록 해야 한다. 그 정도로 한 번에 모든 것을 쏟아내게 한다. 즉, 군마는 <짧고 빠르게> 달리도록 만들어진 말이라는 이야기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 몇 번이고 재돌격을 하기도 하지만 그것도 성직자의 보조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베스퍼는 그런 보조도 없이 군마를 타고 멈추지 않고 달리는 강행군을 벌였다. 비록 마갑도 없었고 베스퍼도 갑옷을 입고 있지 않았지만, 여행을 위한 짐 정도는 싣고 있었다. 그러니 말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기척이 없는데.’

도망간 걸까. 하지만 그것도 별로 타당하지 않았다. 애초에 군마는 도망가지 않도록 훈련받는다. 게다가 사람도 별로 안 가린다. 란데로스는 기사 중심이라 군마도 대체로 한 기사만을 위해 육성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군마는 사람에게 익숙하다. 오죽하면 너무 인간에 익숙해 적에게 잡혀도 얌전히 잡히고, 나중에 자신의 등에 타던 사람을 향해 망설임 없이 돌격할 정도다. 그러니 이야기에 나오는 야생마 출신의 군마가 아닌 이상, 베스퍼가 살아있는데도 도망갔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하아.”

어쨌든 곤란했다. 필요한 짐의 대부분은 말이 가지고 있었다.

‘어차피 이 주변에 사람은 없을 테니까. 일단 기다리지.’

그냥 드러누워 버린다. 눈을 감는다. 보이지는 않아도 모든 것이 느껴진다. 얇은 가죽으로 된 여행자용 옷으로 땅의 냉기가 슬금슬금 올라온다. 펼쳐진 채 땅에 놓인 손바닥으로 촉촉하면서 까끌까끌한 흙의 감촉이 느껴진다. 들이쉬는 숨을 따라 탁한 먼지 냄새가 코를 자극하고, 곧이어 멀리 있는 숲에서 전해지는 향기가 희미하게 그 위를 덮는다.

욱신거리는 근육의 사이에 놓인 핏줄을 따라 생명이 달린다. 뛰는 심장의 고동이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손에 쥐어진 검의 손잡이가 달라붙는 것 같다. 뛰어오르다 가라앉는 감각. 조금씩 몸은 사라지고 태어난다. 조금씩 천천히. 하지만 끊임없이. 분열하고 자라나고 죽어가고 잡아먹히고 다시 분열한다.

그 모든 생명은 한 송이 해바라기를 위한 것.

지금의 휴식도 온전히 그녀에게 바치라. 주어진 이름은 그녀의 영광을 위해. 죽음을 믿지 않는다. 내 심장이 뛰고 있으니까. 죽었어도 달려간다. 그 죽음조차 바치기 위해. 어리석은 순수. 미쳐버린 갈망. 하지만 깨끗하다. 몸으로 전해지는 온기.

자, 다시 일어날 시간이다.

깊은 밤이 끝나가고, 새벽이 다가온다. 밤의 끝자락이 흐릿해지며 없어지며 선명한 어둠의 윤곽은 무너진다. 너무나 멀어 닿지 않는 별빛이 그 흐릿함 속으로 숨어버리고, 아직 차가운 대지를 감싸 안아줄 열기가 그 흐릿함 사이로 빛과 함께 다가온다.

감겨있는 두 눈꺼풀 위로 그 빛과 온기가 닿는다. 베스퍼는 눈을 떴다. 군청빛 하늘이 보인다. 말로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종류의 색상들이 줄을 서서 하늘을 물들이고 있다. 노란빛이 퍼진다. 아직 작다. 가늘다. 하지만 밝다.

해가 떠오른다.

아름답다.

색색으로 물든 하늘이 어둠에 익숙해진 눈을 희롱한다.

그 혼란 속에서 지평선의 끝을 뚫고 솟아오르는 태양이 이제 새로운 날이 시작함을 선언한다.

“하지만 지상은 멈춰 있군.”

몸을 일으켜 앉으며 베스퍼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이미 죽어버린 군마와 그 아래에 깔린 짐. 그리고 언덕 아래로 보이는 어느 마을의 시체였다. 베스퍼는 한숨을 쉬었다. 베스퍼는 알 것 같았다. 한계를 넘어서 달리던 마음이 이 폐허에서 고향의 일면을 보고 긴장을 늦춘 것이다. 그 마을에 새로운 이주민이 들어왔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다. 그러니 그의 고향도 지금 찾아가면 분명 이것과 비슷한 모습일 것이다.

이렇게 비참한 광경인데도, 닮았다는 그 이유 하나가 이리도 마음을 두드린 걸까. 모르겠다. 고향은 이제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무엇이 미련을 만들고 있는 걸까? 그런 것까지 따져보기에 베스퍼는 지식이 모자랐고, 지혜로서 따져보기에는 아직 어렸다.

사람의 발길도 끊어진 채 서서히 무너지고 있는 회색빛 마을은 아름다운 하늘과 너무나 대비됐다. 애써 담담하게 말했지만 실은 그 마음은 엉망진창으로 우그러지고 있었다.

“제기랄.”

욕지거리가 절로 나오는 모습이었다.


“이런 개 같은!”

그리고 그녀는 정말로 옆에 있던 개를 차 버렸다. 깨갱! 평소에는 어지간한 평민보다 호사스러운 삶을 살며 <개 팔자가 상팔자>라는 말을 몸소 증명하던 그 사냥개는 애처로운 비명을 내지르며 비틀비틀 물러났다. 그녀가 보다 집어 던진 책이 발에 걸려 다시 한번 비틀거린다.

끝이 뾰족한 신발 덕에 상당한 고통을 겪었지만 개는 결코 반항심을 보이지 않았다. 명색이 왕족을 위한 개였다. 철저한 훈련은 타고난 타당한 본성마저 억누르고 있었다. 다른 이가 그 개를 대신해 공주의 잘못을 지적했다.

“좋은 행동이 아닙니다. 일공주 마마.”

세가르 스팃트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란데로스의 일공주이자 자신의 호위 대상인 란데로스 비토리니 로제에게 말했다. 그러면서 슬쩍 발을 움직여 비틀거리는 개의 옆구리에 가볍게 댔다. 발을 덮은 금속제 사바톤으로 있는 듯 없는 듯한 감각이 전해졌다. 비록 소드마스터는 아니지만 그도 평생을 수련한 기사로서 보통 사람을 능가하는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내장은 멀쩡한 것 같군.’

스팃트는 그대로 부드럽게 개를 밀었다. 개는 낑낑대면서 방구석에 조용히 주저앉았다.

그러는 동시에 스팃트는 다른 것도 깨달았다.

‘엿듣는 자는 없군.’

어지간히 훈련받은 자라도 이런 상황에서 쥐 죽은 듯 있기는 힘들다. 그 정도로 조금 전에 개가 내지른 비명은 자극적이었다. 귀머거리가 아닌 이상 작게 움찔거리기라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척은 없었고, 하인들의 기척도 없었다. 변기담당관도 물러가게 했고, 부르기 전까지 아무도 접근치 못하게 하라는 명령이 확실하게 지켜지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스팃트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로제는 그 끄덕임을 못 본 척하며 화를 냈다.

“어차피 당신 외에는 보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없으니 상관없어요. 그리고 나를 공주라 부르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죠?”

스팃트는 매력적이나 앙칼진 그 목소리에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몇 번이나 들은 말이었지만 언제나 그는 대답을 회피했다. 물론 그에게는 그 말에 대한 나름의 대답은 이미 있었다. 하지만 스팃트는 자신의 대답이 그녀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도 알 수 없었기에 대답하지 않았다. 이번도 마찬가지였고, 그래서 이전에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거북한 침묵이 흘렀다. 로제의 사나운 시선이 끈질기게 스팃트를 재촉했지만 그는 묵묵무답이었다. 결국 대답을 듣길 포기하고, 그녀는 코웃음을 쳤다.

“흥, 관둬요.”

저것도 스팃트가 몇 번이나 들었던 말이었다. 그녀는 진절머리를 내며 창가로 갔다. 란데로스의 왕궁에 있는 대부분의 건물이 그러하듯, 그녀가 거하는 로세툼 궁도 워낙 오래된 석조 건물이라 그 창틀은 목재 덧창을 달게 되어 있던 옛날 방식이었다. 지금은 유리창으로 바뀌었지만, 그 때문에 비교적 최근의 양식으로 된 유리창과 옛 양식으로 된 창틀 구조는 뭔가 모르게 어색하고 어울리지 않았다.

“언제 봐도 마음에 들지 않아요. 이 어색함이라니. 언젠가 새 양식으로 새로 지었으면 좋겠는데.”

“오래된 것은 그만큼 힘을 가지는 법입니다.”

“흥, 기사인 당신보다 마법을 조금이나 배운 내가 그런 것은 더 잘 안다는 건 알고 있으면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건가요?”

스팃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말했다.

“공주님께서야 말로, 알고 계시면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잖습니까?”

로제는 가늘게 미소를 지었다. 평소와도 같은, 요사스러운 매력이 있는 웃음이었다. 그녀는 가느다란 손가락을 들어 창을 밀었다. 어딘가 모르게 어색한 모습이지만 그래도 최대한 고급스러운 재료를 쓰고 란데로스 최고의 장인들이 지은 건물이다. 창은 소리 없이 부드럽게 열렸다. 그와 동시에 작은 소리가 났다. 창에 걸려있던 방음 마법이 해제되는 동시에 외부의 공격에 대비한 방어 마법이 작동하는 소리였다.

그 작은 울림과 함께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끝부분이 꺾여있는 독특한 모양의 머리카락이 바람의 손을 맞잡고 춤을 췄다. 다른 귀족들이 가발을 쓰는 것과 달리 진짜 자신의 모발을 마법으로 손본 덕일까, 유난히 생동감이 넘쳤다. 로제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살짝 매만졌다.

“그런가요?”

로제는 살포시 웃으며 창턱에 걸터앉았다. 누군가 본다면 기겁을 했겠지만, 창틀에 걸린 마법은 단순히 방어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 해도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지만 스팃트는 굳이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로제는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궁에 초대받은 음유시인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름다운 로세툼 궁의 장미정원에서 산책과 밀회를 즐기던 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 그 노래를 듣고 있었다. 맑고 풍부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로제의 귀에도 들어왔다.


고결한 사랑.

비록 그 대상이 죄악을 저질렀어도 용서하는 바다 같은 사랑.

기사는 은백색 갑옷을 벗어 던지고 그의 공주에게 향한다.

그를 향한 무한한 영광마저 뿌리치고 달려나간다.

그를 향한 무한한 부귀마저 뿌리치고 뛰쳐나간다.

그가 향한 것은 그저 놀라운 사랑.

철옹성의 문마저 뚫고 나가는 그 위업.

그것이 사랑이어라.

한 떨기 꽃 같은 아름다움이 검게 물들어도 그의 고결함은 순백이라.

황금빛으로 빛나는 그 영혼은 마지막 사랑을 향한다.

순백의 동토로, 모든 죄악을 씻어내기 위해.

모든 것이 정화되고,

검은 꽃이 사라지고,

그 사랑은 빛나리라.

그리하여 영광된 기사는 돌아오리라.

최후의 최후에서 붉은 영광으로 돌아오리라.


“하.”

로제는 자신이 만들어 퍼뜨린 그 노래를 비웃었다. 유치하고, 조잡하고, 엉터리인 노래. 하지만 바보 같은 귀족들과 구제 불능인 평민들은 그 노래에 흠뻑 젖어 있었다. 진실은 명백한데도, 그 강렬한 충격은 수십 명의 입을 권위로 짓누르는 것과 달콤한 거짓만으로도 사라졌다. 다들 낭만이라는 이름표가 붙은 술독에 자신을 빠뜨리고, 그 조잡한 향에 취해 있었다.

심지어 진실을 눈앞에서 본 이들 중에도 그 거짓에 자발적으로 빠져든 이마저 있었다. 로제는 그것들은 비웃을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아버지가 그중 한 명이었는데도 말이다.

“생각보다도 더 어이없게 일이 잘되고 있더군요. 쓰레기 같은 것들. 그래도 덕분에 이 일은 잘 풀릴 것 같지만요.”

“그렇습니까?”

“솔직히 애초에 일이 비틀어진 시점에서 제대로 풀린 게 없지만.”

로제는 팔짱을 끼며 스팃트를 쏘아봤다.

“베스퍼는 나에게 필요한 사람이에요. 절대로 포기할 순 없지요. 답답하기 짝이 없지만, 짜증 나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죽게> 놔둘 수는 없어요.”

“베스퍼에 대한 공식적인 추적은 끝냈고, 비공식적인 추적도 이쪽 선에도 정리해뒀습니다. 게다가 그의 능력을 생각하면 죽을 리는 없습니다.”

“멍청이. 이래서 헛똑똑하기만 한 기사는 안 돼.”

그녀는 집어 던졌던 책을 다시 들었다. 스팃트는 그것이 무엇인지 한눈에 알아봤다. 기사들의 기본 교양을 위한 서적이었다.

쓸모없는 책이었다.

형식적으로 남은 기사도 같은 것은 무시당하고 있었고, 기본적으로 머리보다 몸이 앞서는 기사들에게 책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검술서를 가지고 있으면 대단한 애서가로 취급받을 정도며 세가르처럼 좀 더 학구적인 인물이면 거기에 병법서가 추가되는 정도다. 그러니 꽤 오래전에 나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깨끗했다. 골동품적 가치도 없는 그런 책이 깨끗하다는 것의 의미는 분명하다. 그래서 스팃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전투용과 다른 일상 호위용의 약식 갑옷인 터라 얼굴을 가리는 면갑은 없었고, 덕분에 로제는 스팃트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코웃음을 쳤다.

“당신도 이 책이 별 볼 일 없는 거로 생각하는군요.”

“그렇습니다. 기사에게는 검술서와 병법서 같은 것이야말로 책입니다. 그건, 사치품에 불과합니다.”

잠시 말을 멈췄다가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기사에게, 무의미한 것이지요.”

로제는 고개를 저었다.

“이러니 아무도 그를 이해하지 못했지. 아니, 나부터가 이런 걸 놓치다니. 멍청한 년.”

“무슨 말씀이신지?”

딱! 로제가 손을 튀겼다. 방 안에 걸린 마법과 그녀의 마력 덕분에 양피지로 된 코덱스가 둥둥 떠서는 기사의 눈앞으로 다가갔다. 양피지에 희미하게 배인 향기가 스팃트에게 훅 끼쳐왔다. 스팃트는 살짝 움찔거렸다. 그 스스로가 병법서를 보는 등 기사치고는 애서가인 편이지만 책에서 이런 향이 나는 건 처음이었다. 그런 기사를 무시하고 공주는 입을 열었다.

“3번째 장식 글자부터.”

문단의 첫 부분을 장식하는 커다란 장식 글자 중 세 번째. ‘레이디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경우’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로제의 입에서 나온 구절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검과 내 생명만은 기사도를 버리고 란데로스를 배신했다는 증표로서 가져가겠습니다. 이 검이 앞으로 마실 피가 바다를 넘치게 할 수 있게 된다 하더라도 그대가 버린 해바라기에게 내 목숨을 바치기 전까지 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국왕 디란의 목에 검을 겨눈 채 베스퍼가 했던 말이었다. 단 한번들은 그 말을 다 기억하고 있는 그녀의 기억력도 놀랄만한 것이었지만, 그보다는 그녀가 말한 것과 그 책의 내용이 합쳐졌을 때 드러나는 의미는 더 놀랄만한 것이었다.

“<그대가 버린 해바라기에게 내 목숨을 바치기 전까지 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로제가 다시 한 마디를 반복했다. 스팃트는 그 구절을 들으면서 처음의 놀라움이 거의 확신으로 변하는 것을 느꼈다. 화려한 공주가 그를 보고 코웃음을 쳤다.

“흥, 그 얼굴을 보니 이제 알긴 안 모양이네요. 역시 당신은 그래도 낫군요.”

“확실합니까?”

“이상한 말이네요. 물론 모르죠. 하지만 베스퍼가 평민 출신이고,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건 기사가 된 이후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꽤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할 수 있겠죠.”

로제의 눈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렇게 둘 수 없어요. 별 쓸모도 없는 그 꼬맹이 때문에 귀중한 소드마스터를 잃을 수는 없어요. 만에 하나라도 베스퍼가 그녀의 시신을 찾아낸다면, 그는 고지식하게 기사의 맹세에 따라 그 목숨을 그녀를 위한 제물로 바치겠지요.”

로제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그녀는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내뱉었다.

“절.대.안.됩.니.다.”

그녀는 스팃트롤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죽은 소드마스터는 아무런 쓸모가 없으니까요. 설령 그가 나를 따르지 않더라도, 그는 살아있어야만 해요.”

스팃트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제 이쪽에서 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로제가 혀를 찼다.

“도무지 칭찬을 못 하겠군요. 가장 최근의 마법 통신에 따르면 그들은 아직 국경은 넘지 않았다고 알고 있는데요.”

로제가 말한 것은 폐위 공주, 루우를 귀향지로 <호위>하고 그녀 주변을 <청소>한 부대였다. 그 부대는 모종의 정치적인 이유로 스팃트에게도 지휘권이 있어 그 부대에 관해 보고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스팃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처리> 후 눈폭풍 때문에 일정이 많이 지체되었습니다. 북방에서는 흔한 일입니다만.”

<처리>라는 단어에서 숨길 수 없는 불쾌감이 묻어 나왔지만 로제는 그것을 굳이 지적하는 대신 더 건설적인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그러니까 최소한 베스퍼보다는 그곳에 가깝다는 이야기죠. 베스퍼는 진실을 알아서는 안 됩니다. 그 꼬맹이의 시체 위치 따위가 아니라, 루우가 귀향지에 도착하자마자 죽었다는 것 자체도 알아서는 안 돼요. 절대로 알아서는 안 됩니다. 죽음에 대한 증거도, 반대로 망상을 부풀릴 만한 사소한 희망 따위도 남겨서는 안 돼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완벽한 무. 그것만 남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언젠가 그가 다시 란데로스의 품, 아니, 내 품으로 돌아오게 되니까요.”

“하지만-”

스팃트의 말이 나오기도 전에 로제가 선수를 쳤다. 스팃트는 입술 위로 올라온 손가락에 마비되는듯한 기분을 맛봤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로제는 그윽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상관없어요. 외교 문제 따위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곰 같은 멍청이는 내가 구워삶을 테니까요. 작은 마을 하나 정도는 없어져도 상관없게 <될 거에요>. 아무 문제 없으니까, 어서 실행하세요. 스팃트. 명령입니다. 그들에게 그 마을을 이 지상에서 지워버리라고 해요. 베스퍼가 영원히 진실의 끝자락에도 다가갈 수 없도록, 모든 흔적을 지워버리세요.”

로제는 여전히 둥실둥실 떠 있는 책을 덮고, 스팃트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당장.”

스팃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작가의말

20210701 내용수정


----


1. 오랜만입니다...만, 저 아직 시험 안 끝났습니다. (그런데 지금 뭘 올린거지, 자네?)

2. 그런 연유로 저번 것의 답글은 포기입니다. 죄, 죄송합니다-

3. 그런 연유로 글 퀼리티는 계속해서 엉망...ㅠㅠ

4. 코덱스는 양피지를 제본해서 만든 책입니다. 아무래도 가죽이다 보니 내구력은 좋지만, 무게와 크기에 비해 많은 정보를 담을 수 없고, 무엇보다 필사로 생산되기에 대량생산이 거의 불가능하며 무지 비쌉니다. 인쇄술이 발달하기 전에 주로 사용된 것으로서 현대적인 책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덧붙여서 현존하는 코덱스는 데부분 성서입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33

  • 작성자
    Lv.14 풀잎열매
    작성일
    10.04.28 23:10
    No. 31

    데르미크 님// 오랜만이지요^^;;
    EvilDragon 님// 감사합니다 :>
    머니매니아 님//
    느린 것을 알면서도 못 고치고 있습니다. 이게 실력 부족이라는 것이겠지요...OTL; 어떻게 해야할지 여러모로 고민을 해보고는 있습니다.

    연타신공 님// 시험 잘 치셨는지요^^
    Ignis 님// 윽... 저에겐 너무 어렵습니다;
    Lunien 님// 만약 그래도 빈다면 지적해주세요 ;)
    에스카론 님// 뭐, 그것도 '사랑'이라면 사랑일 수는 있겠습니다만...
    쿠레타노 님// 감사합니다 :-)
    마리오네트 님// 이런 스타일은 아무래도 인기가 없지요. 그러니 별로 없는 거겠지요.

    데일라잇 님// 노래는 딱히 스토리 암시를 담지는 않았습니다^^ 그 노래에 담긴 건 일공주가 바라는 스토리지요.

    에일 님// 끝내주는 스릴러에 비하면 유치한 수준이지만요^^;;
    삶의 정석 님// 감사합니다, 열심히 쓰겠습니다.
    레이젠 님// 아, 베스퍼가 있는 마을은 그 마을이 아닙니다. 베스퍼는 아직 그 장소에 비하면 남쪽에 있습니다.

    칼라모기 님// 괜찮았나요^^;
    설렁탕 님// 즐겁게 보셨다니 다행입니다^_^
    경태풍 님// 죄송합니다. 이번엔 출현이 없었지요...아하핫;;
    꺼벙이님 님// 헛, 님님이 되는군요;; 어...그런데... 전 비축분이 없습니다;;(도주)

    아크리드 님// 잘 치셨나요 ㅠㅠ
    정문학 님// 어지간해선 힘들겠지요^^;
    푸르비 님// 감사합니다 :)
    바람피리 님// 현재 경주마로 활약하는 말 중에서 무거운 녀석들이 500kg이상입니다. 일반적으로는 그것보단 가볍지요. (3~400정도) 현재는 1톤급의 말은 거의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에 전마로 길러졌던 품종에는 1톤급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마나가 자연계에 영향을 미치는 세상이라 이곳의 전마들은 대체로 800kg이상은 나간다고 생각하시면 될 듯 합니다.

    창월 님// 시험은 끝났으니 다음 시험기간(...)까지는 최소 주1회는 유지하려 하고 있습니다 :)

    kjdcjswo 님// 감사합니다^^
    쿠데타 님// 허업...(스으윽)
    darklight 님// 베스퍼입니다 ㅠ_ㅠ
    더블티 님// 감사합니다 :-)
    Nirvana_ 님// 헉;;; 그것은 지금은 답변드릴 수...(퍽)
    돌개차기 님// 아, 그건 코덱스의 대부분이 성서라는 것이지, 성서가 대부분 코덱스라는 의미는 아니지요^^;; 뭐, 애초에 근대 이전의 서양서적의 많은 양은 성서가 차지하고 있긴 합니다만...

    窮狀 님//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전 그런 고어를 고려한 것은 아닙니다. ...어, 그러니까, 그저 오타입니다! 으헝헝 ㅠㅠ 죄송합니다;;;

    닐니 님// 뭐, 그쪽 입장에서야 당연히 죽었겠거니...하는 거지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3 아힌Ahin
    작성일
    10.07.14 23:40
    No. 32

    잘 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1 xig
    작성일
    10.07.22 00:46
    No. 33

    시체를 보여주는 게 오히려 더 희망을 싹 없애는 거 아닌지...

    스토리를 그쪽으로 끌어가시려고 무리하시는 게 아닌가 싶네요.;;

    북쪽으로 더 악착같이 달려갈 것 같은데...

    찬성: 0 | 반대: 1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스틸 드래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49 스틸 드래곤 (49) +3 21.08.08 339 17 17쪽
48 스틸 드래곤 (48) +1 21.08.04 238 16 12쪽
47 스틸 드래곤 (47) +4 21.07.25 295 18 17쪽
46 스틸 드래곤 (46) +1 21.07.25 251 14 13쪽
45 스틸 드래곤 (45) +3 21.07.18 368 19 15쪽
44 스틸 드래곤 (44) +4 21.07.11 421 23 15쪽
43 스틸 드래곤 (43) 21.07.11 365 20 17쪽
42 스틸 드래곤 (42) +4 21.07.06 551 28 12쪽
41 스틸 드래곤 (41) +9 21.07.03 501 28 13쪽
40 스틸 드래곤 (40) +16 21.07.01 622 32 13쪽
39 스틸 드래곤 (39) +35 21.07.01 975 32 18쪽
38 스틸 드래곤 (38) +140 11.02.28 5,896 54 12쪽
37 스틸 드래곤 (37) +27 11.02.14 3,546 35 27쪽
36 스틸 드래곤 (36) +35 11.01.24 4,049 43 26쪽
35 스틸 드래곤 (35) +27 11.01.16 4,267 40 21쪽
34 스틸 드래곤 (34) +49 11.01.06 4,493 46 22쪽
33 스틸 드래곤 (33) +88 10.08.16 7,969 92 23쪽
32 스틸 드래곤 (32) +56 10.08.09 6,294 64 22쪽
31 스틸 드래곤 (31) +80 10.08.02 6,459 65 23쪽
30 스틸 드래곤 (30) +59 10.07.25 7,454 44 25쪽
29 스틸 드래곤 (29) +77 10.07.15 7,077 35 30쪽
28 스틸 드래곤 (28) +37 10.07.09 6,778 34 24쪽
27 스틸 드래곤 (27) +33 10.07.08 6,743 34 15쪽
26 스틸 드래곤 (26) +38 10.07.03 7,537 32 28쪽
25 스틸 드래곤 (25) +32 10.06.26 7,361 29 26쪽
24 스틸 드래곤 (24) +43 10.05.30 8,204 31 20쪽
23 스틸 드래곤 (23) +29 10.05.23 8,310 34 27쪽
22 스틸 드래곤 (22) +53 10.05.16 8,434 33 22쪽
21 스틸 드래곤 (21) +40 10.04.29 9,177 37 23쪽
» 스틸 드래곤 (20) +33 10.04.24 9,681 30 2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