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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힘법사의 서재입니다

빌어먹을 세상의 구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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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올힘법사
작품등록일 :
2021.02.02 18:25
최근연재일 :
2021.07.01 18:30
연재수 :
15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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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79
추천수 :
249
글자수 :
937,572

작성
21.02.02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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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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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3쪽

02. 존재의 증명

DUMMY

[2198년, 더 월드 - 타운 D 지역 - 암시장]



스스슥 —


[못 믿겠다고?]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난데없이 공책이 말을 걸지 않나, 채널이니 뭐니 하면서 이상한 소리를 늘어 놓지를 않나.

공책을 찢어버리지 않은 것 만으로도 나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은데.


스스슥 -


[증명을 해라 이거지?]

[그래]

[그럼 지금부터 너를 베타 계급이 있는 곳으로 보내 주겠어]


베타 계급?


[나를 타운 B로 보내겠다는 말이야?]

[맞아]

[난 거기 못 가. 델타는 갈 수 없어, 가본 적도 없고]

[내가 말했잖아, 증명해 보이겠다고]


알파와 베타, 그리고 델타 계급이 사는 곳을 설명하라고 한다면 나는 언제나 달팽이 껍질을 떠올린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가장 작고 밖으로 나올수록 가장 넓은.


델타 계급이 사는 곳은 나라의 외곽에 있는 죄다 똑같은 아파트들이 모여있는 곳.

베타 계급이 사는 곳은 나라의 중간에 있는 나름 개성 있는 집들이 모여있는 곳.

알파 계급이 사는 곳은 나라의 중심에 있는 화려한 집들이 모여있는 곳.


각자 계급은 자신들이 사는 곳 외의 지역에 갈 수 없다. 가고 싶어도 특별한 상황이 아닌 이상 가기 어렵다.

그래서 서로가 어떻게 사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만약 정말로 내가 타운 B로 가게 된다면 델타 중에서는 내가 최초로 그곳에 발자국을 남기게 되겠군.



스스슥 -


[대부분의 채널에는 채널의 전원을 끌 수 있는 스위치가 있어.]

[스위치? 모든 채널에 있는 거야?]

[모든 채널은 아냐, 대부분이니까. 어쨌든 스위치는 채널에 사는 가상 인물들의 생명줄이나 다름없지.]

[네가 만든 거야?]

[아니, 당에서 만들어낸 거야]

[당에서?]

[당에서 채널의 존재를 발견한 후, 대다수의 채널들을 더 월드화 했지. 그리고 진짜 인물과 가상 인물을 섞어서 스위치를 만들어냈어]


스위치가 가상 인물일 수도, 진짜 인물 일수도 있다는 소리군.


스스슥 -


[너는 믿지 않지만, 지금 네가 있는 이곳은 채널 S-1이라고 해]

[채널 S-1의 스위치가 베타 계급이구나?]

[맞아, 눈치가 빠르네]

[그래서 나를 타운 B로 보내겠다는 것이고?]

[그렇지]


이 공책 좀 보게?

내가 믿든 안 믿든 어차피 보낼 생각이었군.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믿고 믿지 않고를 떠나서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다. 못 믿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사상 경찰이 내 눈앞에서 그대로 굳어버린 것을 똑똑히 봤는데 못 믿을 리가.


지금의 내 기분을 묘사하면 약간 이런 기분이다.

예전에 암시장에서 성경 만화책이라는 걸 본 적이 있다.

종교 관련 서적은 금지 품목이기는 한데, 뭐 어떤가? 암시장에서 파는 것을.

만화책에 있던 내용에 따르면 마리아라는 여자에게 어느 날 천사가 나타났다.

천사는 여자에게 나타나 신의 아들을 잉태할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여자가 아니기에 예상치도 못하게 임신했을 때의 심정 따위는 모른다.

다만 한 가지, 전혀 내 인생과는 상관없던 생뚱맞은 제3자가 나타나 내게 하는 뜬금없는 소리를 들었을 때의 그 기분 만큼은 이해가 간다.

내가 선택 받았다니, 웃기는 소리를.


하지만 이미 채널 속에 들어온 건 확실하다.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이 정신 나간 흐름에 몸을 맡겨 보는 수밖에.


[이봐, 그럼 타운 B로 어떻게 가지? 난 갈 수 없잖아?]


스스슥 —


[암시장으로 베타 계급이 가끔 오는 거 알아?]


자주는 아니고 간혹 가다 몇 명씩 보기는 했다.

베타들은 절대 떼 지어 오지 않는다. 무조건 혼자 온다.

그것도 어설픈 델타 분장을 하고서.


자기들은 베타가 아닌 것처럼 꾸며내지만 델타인 나는 알 수 있다.

조금이라도 살림살이가 나은 놈들과 아닌 놈의 차이는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가 없으니까.

하지만 자기들끼리는 정말 델타 같다면서 감탄을 하겠지.


[알고는 있지, 그런데 그게 뭐?]

[베타놈들이 어디로 오겠냐?]

[뒷문이 있구나]

[그래. 지금부터 널 그곳으로 보내 줄게]

[뒷문에서 베타를 마주치면 어떡하려고?]

[델타로 분장한 베타 놈들도 긴장되기는 마찬가지야. 널 보고 의심하지 않을걸]

[믿어도 되는 거냐?]


스스슥 —


[당연하지]

[뒷문을 통과하면, 그 뒤는 어떻게 해? 델타인 게 바로 들통이 날텐데?]

[그건 걱정하지 말고 일단 가기나 하라고. 뒷문은 저기 노인이 운영하는 노점상 뒤편에 있어]

[알겠어. 그동안 내 주머니에 들어가 있어]


스스슥 -


[아! 지금부터는 연필로 굳이 안 적어도 돼. 네가 생각을 하면 네 생각이 내게 전달이 될 테니까. 어차피 우린 하나잖아?]


우린 하나라고? 낯간지러운 소리를 참 잘도 하는군.


"그나저나 저 노점상 뒤 쪽으로 가라고 했지?"


대체로 이모가 파는 물건을 사서 이쪽으로는 와 본 적이 없는데.


“거기 동지! 어디를 그렇게 가나?”


암시장에서 하루 종일 죽치고 사는 할아범이다.

나이를 제법 많으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100살이 넘었다지?


100년 전, 그러니까 2098년보다도 전에 태어난 남자다.

일명 뒷골목의 남자. 보통은 다들 최씨 할아범 혹은 21세기 최후의 남자라고 부른다.

할아범이 채널 속에도 존재하는 줄은 몰랐는걸.


“어디를 그렇게 급하게 가시나?”

“아무 데도 아닙니다.”

“자네 표정이 평소랑 달라. 눈동자에 불안함이 비춰 보인다고.”


나이는 들었지만 할아범의 날카로운 눈빛은 여전히 살아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가끔씩 당에서 암시장에 스파이를 보낸다고 하던데.

혹시 모를 위험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 가장 불순한 자를 골라낸다고 한다.

혹시 최씨 할아범이 스파이는 아니겠지?


“뒷문으로 가는 게야?”

“예?”


어떻게 안 거지?


껄껄껄 —


“그 소문이 허풍은 아니었구만 그래 —”


소문?


“무슨 말씀이신지...”

“22세기가 시작될 때쯤에는 내가 10살도 채 안 되던 때였지. 그때는 당이 지배를 시작할 무렵이었어.”


내가 알기로 더 월드의 역사는 대략 100년 정도. 하지만 이 수치도 정확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최씨 할아범이 더 월드의 가장 초기 아니, 그 이전부터 살았던 자라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그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는 소문이 하나 돌고 있었다 네.”

“무슨 소문입니까?”

“한 남자가 자유로운 세상을 만들었다는 소문.”

“자유로운 세상이라뇨?”

“그 남자는 채널이라는 가상 세계를 만든 거야. 채널 속에 자유로운 세상을 만들어낸 거지. 물론 어느 정도 환상에 불과하기는 하다 만.”


공책의 말이 사실이긴 한 가 보군.


“그런데 당이 눈치채고 남자를 죽인 거야. 그리고 채널을 압수해갔지.”

“그렇군요.”

“당에서는 여전히 채널을 연구 중이라고 하더군. 아직도 알지 못한 채널이 존재해서 그렇다는데, 그들이 말하기를 채널 속은 마치 우주 공간 같다고 해. 어디까지가 끝인지, 어떤 존재가 사는지 모를 정도로 말일세.”


그 남자는 대체 누굴까.

채널이라는 이 기묘한 공간을 만든 사람이.


“동지, 그 소문의 주인공이 바로 자네라네.”

“죄송한 말씀이지만, 저는 채널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네.”

“그럼 뭐가 중요한 겁니까?”

“채널은 만든 그 남자가 죽기 전에 한 말이 있어.”

“그게 뭐죠?”

“나를 죽여도 채널은 죽지 않는다. 나 역시 죽지 않는다. 먼 훗날, 한 남자가 나타날 것인데 그 남자가 너희를 모두 죽이러 올 것이다.”


노망난 노인의 허풍이라고 하기엔 너무 진지하다.


“동지, 내가 동지 나이였을 때 당의 감언이설에 속아 이 채널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다네. 하지만 곧 이곳이 지옥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

“어떻게 들어오신 겁니까?”

“당에서 사람들을 선동한 거야. 새롭고 유토피아 같은 세상에서 살 자들을 구한다면서. 실상은 그저 마루타에 불과했지만.”


초창기 채널을 발견했을 때 순진한 사람들을 데리고 실험을 자행했구나.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곳에 인간들을 집어넣는 거대한 생체 실험을 말이지.


“자네가 믿든 안 믿든 그건 중요치 않다네. 나는 동지가 영웅이 될 거라고 믿으니까.”

“그러시지 않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을 겁니다.”

“이것을 받게.”

“이게 뭡니까?”

“베타 계급의 제복이라네. 그것도 사상 경찰의 제복이지.”


사상 경찰의 녹색 제복이다.

조금 낮은 계급이었던 놈이 입었던 건가.

줄이 딱 네 개밖에 없군.

기왕이면 별이라도 달았으면 했는데.


“어서 갈아입어 보게.”


제복은 딱 맞았다.

길이도 품도 마치 원래부터 내 옷이었던 것 마냥 적당했다.


“잘 어울리는구먼."

"딱 맞습니다."

"그게 있으니 타운 B로가기 좀 더 수월할 걸세, 이제 어서 가보게!"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인사는 됐고, 빨랑 가! 빨랑!”

“정말 감사드립니다!”

“내가 죽기 전에 꼭 자유로운 세상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 동지!”





(2198년, 더 월드 - 타운 B 지역)



뒷문을 빠져나와 타운 B로 갔을 때 나는 희한한 경험을 하나 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옛날의 풍습인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린 이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책에서 봤던 엄마와 아빠, 그리고 그들의 어린 자식들 말이다.


이상하다.

더 월드에서 결혼이라는 것을 금지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엄마! 오늘 학교에서 배운 것들이에요! 들어 보세요, 베타 계급의 의무 첫 번째는..."


엄마라니, 지금 저 아이가 엄마라고 한 건가?

암시장에서 파는 책에서나 보던 단어다.


예전에 델타 계급인 어떤 아이가 한 델타 계급의 여자에게 엄마라고 했다는 이유로 사상 경찰에게 끌려가 죽임을 당한 적이 있다.

더 월드에서는 엄마는 물론이고 그와 관련된 모든 단어가 금지 단어이다.

나는 당으로부터 그것들과 관련된 모든 것을 배척하고 혐오하도록 배웠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델타에게만 해당되는 규칙들이었던 건가.


웅웅웅 —


스스슥 —


[이민준, 감상에 젖어있을 때가 아니야. 네가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채널 S-1의 전원을 끄는 거야]

[지금까지 우리를 속인 거였어.]

[그래 맞아]

[우릴 인간 취급하고 있는 게 아냐]

[이민준, 일단 저 건물 안으로 들어가. 화는 나중에 내고]

[건물이라니?]

[저기 앞에, 눈앞에 있는 기다란 건물 보여?]

[붉은 빛 도는 저 건물?]

[그래, 그 건물은 스위치가 있는 곳이야. 사상 경찰의 본부지]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하고 차오른다.

이 기분은 대체 뭘까.


지금의 델타들은 모두 당에서 하라는 대로만 배우고 움직인다.

그러나 당은 절대로 우리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생각보다 당은 매우 친절한 자들이다.


하지만 그게 함정인 것을. 웃는 낯 뒤에는 어두운 이면이 존재한다는 걸 다른 델타들은 알고 있을까.

화가 나지만 일단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자.



웅웅웅 —

스스슥 —


[이민준, 잠깐 멈춰봐.]

[왜 갑자기?]

[저기 저 사상 경찰 보여?]

[어디?]

[네 왼쪽에 있는 남자. 지금 자기 아내를 때리고 있는 놈 말이야.]


나의 왼쪽에는 정말로 공책이 말한 남자가 있었다. 그들의 행색을 보아하니 사상 경찰인게 틀림없다.

그 남자가 있는 곳은 사각지대로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곳이었다.

그는 아내인지 뭔지는 모르겠으나 한 여자를 때리고 있었다.


퍽- 퍽- 퍽-


"델타 계급 주제에 불쌍해서 거둬 먹여 줬더니, 뭐? 집 밖으로 나가고 싶다고? 집에서 얌전히 있어야지 왜 밖으로 싸돌아다니려고 하는 거야?"

"사... 살려... 주..."

"잘난 얼굴 하나 덕분에 신분 상승한 것에 고마워해야지, 어디서 기어올라?"

"커헉...!"

"고마워해라, 얼굴은 안 때릴 테니까. 그럼 나한테도 손해거든."

"허억... 헉..."

"착각하지 마라, 코드 델타 F-23! 넌 인간이 아니니까! 넌 그냥 베타 계급의 장난감일 뿐이라고! 명심해!"


퍽 — 퍼억 —


"크흑...!"

"네가 아니어도 난 얼마든지 다른 델타를 데려올 수 있다고, 알겠냐?"


스스슥 -


[저 남자를 없애.]

[남자를 없애라고? 죽이라는 거야?]

[어차피 저 남자는 채널 속 가상 인물이야. 정 죽이고 싶지 않으면 빼앗기라도 해 봐]

[뭘 빼앗으라는 거지?]

[출입증 말이야. 옷은 그렇다 쳐도 출입증이 없잖아?]



하긴, 명색이 본부인데 출입증 정도는 있어야겠지.

그동안 사상 경찰한테 당한 걸 생각하면 저 남자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기는 하는데, 어떻게 할까?



살릴까, 아니면 죽일까?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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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8 07. 존재했던 것들 +1 21.02.06 140 4 13쪽
7 06. 호랑이 없는 곳에서는 여우가 왕 노릇을 한다 +1 21.02.05 169 4 13쪽
6 05. 노예 시장 +2 21.02.05 226 4 13쪽
5 04. 양심을 얻다가 팔아먹었길래 +1 21.02.04 255 5 13쪽
4 03. 개 만도 못한 +1 21.02.03 318 4 13쪽
» 02. 존재의 증명 +1 21.02.02 542 10 13쪽
2 01. 헬로, 스트레인저 +3 21.02.02 905 14 13쪽
1 Prologue. The one +4 21.02.02 1,801 22 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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