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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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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nbo
작품등록일 :
2019.08.20 21:54
최근연재일 :
2019.11.12 22:00
연재수 :
2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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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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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수 :
185,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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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12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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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5. 종달새 종달새 대문을 열어주오(6)

DUMMY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꿈에도 모른 채 당우와 석산은 이야기를 나누는 데 여념이 없었다. 석산은 그 며칠 새 눈에 띄게 야위어서 제 한 몸 가누는 것도 힘들어 보였다. 그럼에도 그녀의 아름다움은 더욱 무르익었으니 알 수 없는 일이다.


“며칠 전에는 공연히 걱정만 끼쳤구나. 많이 놀라진 않았니.”


“이제 몸은 괜찮은 거예요?”


“내 상태에 대해서는 문방 화백님에게 들어서 알고 있겠지.”


“네.”


“점점 더 안 좋아지고 있단다. 당장 오늘 숨을 거둔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야.”


“저랑 있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더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는 게 낫지 않을까요.”


“네가 어때서. 애당초 처음 피어날 때부터 몸이 좋지 않아 이번 생은 일찌감치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단다. 시도 노래도 마음껏 즐겼고 과분한 사랑을 받았으니 더 이상 미련은 없어.”


“아직 세진 형이 남았잖아요.”


당우는 고이 간직하고 있던 세진의 그림을 세진에게 건네주었다. 그림을 받아든 석산이 슬픈 미소를 지었다.


“참 미련한 사람이야. 단념하고 깨끗이 잊는 편이 서로에게 이로울 텐데.”


“거짓말하지 마요. 다 잊었다면서 왜 아직도 세진 형의 그림을 가지고 있는 건데요. 세진 형이 얼마나 더 힘들어하고 있는지 알아요? 누나가 쓰러졌을 때도 한달음에 달려와서 누나가 무사하기만을 간절히 기도했다고요.”


“우리가 함께 한다고 한들 행복해질 수 있을까. 그는 하루하루 내가 괴로워하며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할 거야. 그리고 나는 매순간 그와의 이별이 다가오는 것을 두려워하겠지. 비겁한 생각이란 걸 알아. 하지만 함께 있어도, 떨어져 있어도 가슴앓이를 해야 한다면 차라리 얼굴이라도 보지 않는 편이 덜 괴롭지 않겠니.”


“언젠가 분명 후회하게 될 거예요.”


“이미 그를 만난 날 이후로 매일을 후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단다.”


문득 방문 너머에서 요란한 발소리가 울리더니 복면을 쓴 한 무리의 괴한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재빨리 당우와 석산의 턱 밑에 단도를 갖다 댔다.


“한 마디라도 지껄였다간 혓바닥에 구멍을 내주겠다.”


문 틈새로 깡철이 복도에 대(大)자로 뻗어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코까지 골며 단잠을 자고 있었다. 사내들은 당우와 바리에게 재갈을 물리고 두 손을 뒤로 해서 묶었다.


“시간이 없어요. 다른 사람들이 오기 전에 얼른 움직이세요.”


깡철에게 술을 갖다 주었던 동기가 주변을 살피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에 석산은 큰 충격을 받은 눈으로 동기를 바라보았는데 소녀는 양심에 가책을 느낀 듯 시선을 회피했다.


“안으로 들여보내주었으니 약속을 지키셔야 해요.”


“그런 말은 금향님한테나 가서 해라.”


소녀는 인적이 드문 경로를 따라 그들을 안내했다. 쪽문을 나오니 수수하게 생긴 가마가 미리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당우와 석산을 가마에 던져 넣고 부리나케 발을 놀렸다.


사내들이 당우와 바리를 끌고 온 장소는 어느 집의 안마당이었다. 사내들이 그들을 마차 밖으로 내동댕이치자 기다리고 있던 명인과 금향이 다가왔다.


“이 계집은 왜 끌고 온 것이냐.”


“개인적인 용무가 있어서요. 절대 공자께 폐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뭐, 상관없겠지. 그보다 이 꼬맹이를 아버님께서 그토록 얻길 원하셨단 말이지.”


명인은 당우의 턱을 잡고 얼굴을 이모저모 뜯어보았다.


“어딜 봐도 평범한 꼬맹이에 불과한데. 이 녀석한테 일국의 정승을 없는 죄를 뒤집어씌우면서까지 처리할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


명인의 말에 당우가 얼굴을 비틀며 끙끙거리는 목소리를 냈다. 명인이 이마를 찌푸리며 재갈을 제거했다.


“없는 죄를 뒤집어씌우다니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몰랐느냐. 아버님께서 널 얻기 위해 네 가문에 누명을 씌웠다던데.”


“영의정씩이나 되는 인물이 뭐가 아쉬워서 저를 얻으려고 하는데요.”


“나도 들은 얘기라서 정확한 내막은 알지 못한다. 보아하니 정말 모르는 눈치로군. 본인도 모르는 이유라니. 갑자기 흥미가 생기는데.”


당우는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 했지만 차남은 다시 재갈을 물리고 금향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미 한 번 납치를 시도한 전적이 있으니 관아에서는 가장 먼저 나를 의심할 것이다. 이곳의 안전은 보장할 수 있는 거겠지.”


“물론입니다. 이 집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아무도 몰래 사놓은 안전가옥입니다. 내일 아침 일찍 균천으로 출발하는 세곡선을 수배해놨으니 누구도 우릴 찾을 순 없을 겁니다.”


“과연 그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되는구나. 저 둘은 광에 가두고 절대로 도망치지 못하게 감시해라.”


“알겠습니다.”


명인과 금향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그때까지 눈치만 살피고 있던 동기가 금향의 치맛자락에 매달리며 애걸복걸했다.


“이제 그만 약속을 지켜주셔요.”


“이건 또 뭐냐.”


“하찮은 빈대에 불과합니다. 공자는 신경 쓰지 말고 들어가시죠. 뭣들 하고 있어. 어서 이 계집을 밖으로 내치지 않고.”


“그동안 시키는 대로 밀정노릇도 하고 길도 안내해줬잖아요. 제발 저희 가족의 빚을 변제해주세요.”


그러나 금향은 매몰차게 소녀를 뿌리치고 냉소했다.


“생각해볼 터이니 그만 돌아가거라.”


“전에도 똑같은 말씀만 하셨잖아요. 이번에도 빚을 변제해주지 않으면,”


“변제해주지 않으면, 관아로 달려가 고자질이라도 할 생각이느냐. 그럼 네년은 혐의로부터 자유로울 것 같으냐. 우릴 도와준 시점부터 너도 저것들을 납치한 공범인 셈이다. 가족이 무사하길 바란다면 우리가 사라질 때까지 조용히 입 다물고 있는 편이 좋을 것이다.”


금향의 협박에 소녀는 하얗게 질려 아무 말도 못 하고 사내들에게 끌려 나갔다. 곧 당우와 석산 또한 집 깊숙한 곳에 위치한 광 속에 가둬졌다. 사내들이 재갈을 풀어주고 두 눈을 부라렸다.


“조금이라도 허튼 수작을 부렸다간 성한 꼴을 못 볼 것이니 눈치껏 얌전히 있어라.”


문 틈새로 들어오는 희미한 햇살이 겨우 주위를 분간할 수 있는 빛을 만들어주었다. 광은 오랫동안 방치됐는지 퀴퀴한 냄새가 진동했고 어디선가 쥐 같은 것이 돌아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텅 빈 공간에 당우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렸다.


“나 때문에 험한 꼴을 보게 해서 미안해요.”


“괜찮아. 그보다 아까 얘기한 내용으로 봐서는 널 균천으로 데려가려는 것 같은데 그 전에 이곳을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겠다.”


“걱정 마세요. 곧 제 일행들이 구해주러 올 거예요.”


“그렇구나.”


“정말이에요. 전에도 비슷한 일이 몇 번 있었거든요. 아둑서니한테 쫓기고 왈패들하고도 싸워봤는데 저런 허접한 사람들한테 잡혀가면 억울하지 않겠어요?”


당우는 짐짓 밝은 체하며 석산의 기분을 북돋아주려고 했다. 그러나 어쩐지 석산의 반응은 싱겁기 짝이 없었다. 자세히 보니 가만히 있는데도 숨소리가 거친 것이 심상치 않았다.


“또 몸이 안 좋아진 거예요?”


“아니야. 그냥 공기가 더러워서 그래.”


당우는 무릎으로 기어가 석산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갖다 댔다. 끓는 물을 부은 찻잔처럼 뜨거웠다. 화들짝 놀란 당우가 바깥에 도움을 청하려 했다.


“그만두렴. 도와줄 사람들이 아니란 걸 알고 있잖니. 갑자기 무리하는 바람에 몸이 잠시 놀란 것뿐이니 조금만 기다리면 다시 괜찮아질 거야.”


하지만 장담과 달리 석산의 상태는 조금씩 악화되어갔다. 그러던 차에 저녁이 되고 금향이 수하들을 이끌고 광을 찾아왔다. 석산을 만족한 눈으로 내려다보던 금향이 수하에게 눈짓을 보냈다. 곧 수하가 금향의 앞에다 들고 있던 그릇의 내용물을 쏟아 부었는데 악취와 함께 음식물쓰레기가 바닥을 적셨다.


“저녁식사야. 배고플 테니 마음껏 핥아먹으렴.”


금향의 조롱에도 석산은 아무 말이 없었다. 아마 몸이 좋지 않아 상대할 겨를이 없는 것이리라. 그러나 이를 일방적인 멸시라 해석한 금향이 석산의 머리채를 휘어잡으며 으르렁거렸다.


“이런 상황이 돼서도 여전히 콧대는 높아. 나 같이 천박한 년은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건가.”


“그런 게 아니에요.”


“넌 닥치고 있어.”


금향의 수하 한 명이 헝겊으로 당우의 입을 틀어막았다.


“지금 기분이 어때. 그토록 무시하던 내 손에 네 알량한 목숨이 달려있는 기분 말이야. 장담하는데 넌 결코 좋은 꼴로 죽지는 못할 거야. 그동안 내가 너로 인해 받았던 치욕을 열 배, 백 배로 갚아주겠어.”


금향의 엄포에도 석산은 그저 신음을 흘리며 그녀를 아무 말 없이 쳐다볼 뿐이었다. 화가 난 금향은 한 손으로 석산의 머리를 잡은 채 한 손으로는 석산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헝겊을 뱉은 당우가 외쳤다.


“그만둬요. 지금 석산 누나는 몸이 안 좋은 상태라고요!”


“몸이 안 좋다고?”


석산의 얼굴을 바짝 끌어당긴 금향이 이윽고 통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가 붙들고 있던 손을 놓자 석산은 그대로 음식물쓰레기 위로 엎어졌다. 금향은 만족한 표정이 되어서 수하들을 이끌고 광을 나갔다.


“보아하니 오늘 밤도 버티기 힘들 것 같구나. 이 얼마나 불쌍한 꼴인지. 천하의 석산이 아무도 봐주지 않는 차가운 광에서 외롭게 죽어가다니.”


금향이 돌아가고 석산은 토혈과 발작을 하기 시작했다. 부패한 음식물과 피의 냄새가 섞여 이루 말할 수 없는 매스꺼운 악취가 진동했다. 석산은 죽은 듯이 엎드려 이따금씩 어깨를 경련하며 겨우 숨만 붙어있는 상태였다. 당우는 목이 쉬어라 소리 지르며 도움을 요청했으나 굳게 닫힌 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석산의 숨결이 서서히 희미해져갔다.


“누나, 정신 차려요.”


당우가 몸을 흔들자 석산이 미동하며 웅얼거리는 소리를 냈다. 너무 작은 소리라 정확히 알아듣진 못했으나 누군가의 이름을 말하는 듯했다.


“울지 마시게. 마지막 가는 길 웃는 얼굴로 보내줘야 하지 않겠나.”


그녀는 이제는 가고 없는, 기억 속의 바라기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수많은 이름들이 스쳐가며 그녀는 그 짧은 시간에 수도 없는 죽음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눈물을 흘렸으며, 때로는 환한 미소를 짓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든 순간마다 표정도, 말하는 목소리도 전부 달라서 어디까지가 그녀이고 그녀가 아닌지 도저히 분간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이런 데서 죽으면 안 돼요. 세진 형을 만나야 하잖아요.”


당우의 울음 섞인 목소리에 석산의 어깨가 움찔하며 큰 반응을 보였다. 곧 석산의 미약한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당우야, 거기 있니.”


“정신이 들어요?”


“이제야말로 죽는 줄 알았는데 목숨이란 게 참 질기기도 하구나.”


“그런 말 말아요.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야 해요.”


석산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화사하던 머리카락에서 조금씩 붉은 기운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체념한 상태였다. 당우의 눈물에도 그녀의 얼굴은 담담하기만 했다. 그러다 문득, 석산이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 이젠 다 포기한 줄 알았는데 죽을 때가 다가오니 마지막으로 그 사람의 얼굴이 보고 싶어지는구나.”


“조금만 기다려요. 영실이 우릴 구해주러 올 거예요. 그러니까 조금만 더...”


“아니야. 이젠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단다. 아마 오늘밤을 견디지 못할 거야.”


새벽이 되자 강가엔 자욱한 물안개가 깔리고 어스름한 동녘에선 밝아오는 여명이 서슴서슴 희뿌연 빛을 뿌렸다. 하늘이 밝아질수록 석산의 생명은 반대로 미약해졌다. 토혈도, 발작도 멈췄지만 이는 호전의 징조가 아니라 폭풍전야의 고요함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녀에게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당우 또한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어느 순간부터인가 석산을 살리려는 노력을 멈추었다. 그는 다만 그녀의 마지막 순간을 기억하려는 듯 한순간도 석산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앞으로 한 시진도 안 돼 마침내 석산의 숨이 끊어지고 말리라. 당우는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석산 앞에 엎드렸다.


“습격이다!”


누군가의 외마디 비명이 새벽 공기를 갈랐다. 무언가 부서지며 수많은 함성이 집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곧 바깥은 치열한 싸움터로 변모했다.


“당우야! 어디 있냐!”


깡철이었다. 그는 보이는 족족 금향의 수하들을 때려눕히며 당우를 찾았다. 그 목소리를 들은 당우는 애타게 외치며 자신의 위치를 알렸다. 문을 박살내고 깡철이 광으로 들어왔다.


“둘 다 무사하냐.”


“석산 누나가 많이 위험해요.”


깡철의 뒤에는 영실과 문방, 그리고 세진이 있었다. 세진이 달려와 석산을 끌어안았다. 온기를 느낀 석산이 눈을 떴다.


“이리 환상이 보이는 것을 보니 확실히 죽을 때가 다 된 모양입니다.”


세진은 말없이 흐느끼며 석산의 손을 자신의 뺨을 끌어당겼다. 그녀의 몽롱한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윽고 그녀는 가물가물한 목소리로 시 한 편을 읊조렸다. 세진의 구애시에 대한 답가였다.


“하늘엔 따스한 봄볕이 완연하고


냇가엔 푸르른 수양버들 흐드러지니


종달새 우짖는 소리 기쁘기도 하구나


그리운 임이여 대문을 열어주오


흐르는 강물에 조각배 띄워놓고


천 년 만 년 정답게 살고 싶어라...”


그 말을 끝으로 석산은 정신을 잃었다. 다급해진 세진이 석산을 둘러업으며 바깥에 외쳤다.


“거기 누구 없소. 여기 위급한 환자가 있소. 빨리 의원에 데려가야 하오!”


세진의 부름에 육모방망이를 든 포졸 세 명이 달려와 석산을 옮기는 것을 도왔다. 광에서 나오니 안마당에서는 포졸들과 금향의 수하들이 뒤엉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숫자도 포졸들이 훨씬 많았거니와 거리에서 주먹질이나 하던 왈패들로서는 무장한 포졸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깡철이 선두에 서서 위협을 하니 금향의 부하들은 하나씩 쓰러져 포승줄에 사로잡혔다. 부하의 대부분을 잃은 명인과 금향은 어느새 마당 한구석으로 내몰렸다. 명인이 새빨개진 얼굴로 남은 부하들에게 활로를 뚫을 것을 독촉했지만 이미 상황은 암담하기만 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길길이 날뛰는 명인에게 포승줄을 든 포졸들이 다가왔다.


“목숨이 아까운 자들은 모두 비켜라!”


갑자기 대문 쪽에서 복면을 쓴 기수(騎手)들이 칼을 휘두르며 마당으로 난입했다. 말발굽에 치이지 않으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포졸들 때문에 마당은 삽시간에 난장판으로 변했다. 괴한의 숫자는 겨우 넷이었지만 칼을 다루는 솜씨가 범상치 않아 누구도 함부로 다가갈 엄두를 못 냈다. 주위에서 포졸들을 몰아낸 후 괴한 중 하나가 명인의 바로 앞에 말을 세웠다.


“어서 올라타십시오.”


명인은 버둥거리며 냉큼 등자를 밟고 올랐다. 금향이 그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저도 데려가주십시오!”


“저리 비키지 못하겠느냐.”


명인의 매몰찬 발길질을 맞고 금향은 볼썽사납게 넘어졌다. 기수들은 곧장 말머리를 돌려 탈출을 꾀했다.


“죄인을 놓쳐선 안 된다!”


몇몇 포졸들이 정신을 차리고 대문을 막아섰지만 기수들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맹렬한 기세로 박차를 가했다. 말이 거센 콧김을 내뿜으며 마당을 질주했다.


“너희야말로 죽기 싫으면 당장 멈춰라!”


깡철이 구석에 놓인 맷돌을 들고 괴한들을 향해 던지려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그보다 빨리 기수 중 하나가 안장에 달려있던 활과 화살을 빼들고 깡철을 겨누었다. 그는 지체 없이 시위를 놓았고 깡철은 화살을 피하기 위해 그 자리에서 고개를 숙여야 했다. 그 사이 기수들은 앞을 가로막고 있던 포졸들의 머리를 뛰어넘는 기예를 보이며 대문을 빠져나갔다. 마당에 남은 자들은 그들이 사라진 자리를 허탈하게 바라보았다.






고을 한가운데에서 향주 제일의 기생이 납치당한 이 사건은 나라에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다. 향주의 관아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기생들 간의 투기에서 비롯된 일이라는 입장을 발표했다. 여기에 영의정의 둘째 아들이 연루되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이는 곧 더 큰 목소리에 밀려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말았다. 바로 도를 넘은 기생들의 향락과 그 원흉이 된 양반들의 사치편력을 두고 젊은 선비들의 상소가 올라온 것이다. 이는 곧 삼정승을 비롯한 육조의 관리들까지 움직이게 만들었고 양반들의 사치를 제한하고 기방의 규모를 축소하는 법령이 온 나라에 반포되었다.


한편 석산은 기적적으로 사흘을 더 버티다 마침내 낙화했다. 마지막 사흘 동안 그녀의 곁에는 세진이 있었으며 숨을 거둘 때에도 그녀는 세진의 품에 안겼다. 마지막으로 두 연인이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다만 새로운 법령으로 인해 기방이 축소되고 많은 이들이 타지로 떠난 뒤에도 세진은 향주에 남아 그림을 그렸다. 그는 한평생 오직 달과 강, 그리고 갈대밭의 그림만을 그렸는데 먼 훗날 그의 그림들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으며 인기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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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3. 하늘을 오르는 바라기(2) 19.09.24 21 0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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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2. 깊은 그림자(3) 19.09.13 18 0 13쪽
7 2. 깊은 그림자(2) 19.09.10 24 1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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