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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비스1 님의 서재입니다.

SF 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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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비스1
작품등록일 :
2019.04.26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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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20 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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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03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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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쪽

우로보로스 (下)

DUMMY

두 사람의 시체가 바닥에 놓여 있을 것이라는 괴한의 기대와는 달리, 화장실에는 깨진 타일 조각만 가득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괴한은 눈을 들어 천장을 보았다. 천장에는 철제 사다리가 달려 있었고 그 사다리는 천장에 뻥 뚫린 공간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괴한은 귀에 장착된 무전기의 버튼을 누르면서 말했다.


"둘 다 도망쳤습니다, 스미르노프님."


앨리슨과 브라이언은 인적이 없는 어두운 골목으로 나왔다. 앨리슨이 골목 구석에 쓰레기로 범벅이 된 그라피티 투성이의 철제 화물 컨테이너로 다가가서 컨테이너 경첩 쪽에 손을 가져다 대자, 큰 금속성 소음과 함께 잠금장치가 해제되었다. 컨테이너 속에는 붉은색 2인승 스포츠카가 숨어 있었다. 브라이언이 비틀거리며 조수석에 오르자 앨리슨은 운전대를 잡고 시동을 걸었다. 300마력의 스포츠카는 골목에 야생동물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음을 내뿜자마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밤 10시 25분.


앨리슨은 도시를 벗어나 최대한 인적이 드문 국도를 통해 도시 남쪽에 위치한 황무지로 향하는 고속도로를 탔다. 한참을 달린 후 더 이상 차를 쫓아오는 듯한 낌새가 없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앨리슨은 브라이언에게 말을 걸었다.


"브라이언, 이건 나도 모르는 일이야. 어디서 정보가 새었는지 모르겠어. 일단 내 아지트로 가자."


앨리슨은 브라이언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조수석에 앉아 있는 브라이언은 묵묵부답이었다.


"브라이언?"


앨리슨은 그의 이름을 부르며 조수석으로 시선을 옮겼다. 고속도로 가로등의 뿌연 불빛에 희멀건 얼굴로 조수석에 축 늘어져있는 브라이언의 형체가 보였다. 브라이언이 입고 있는 양복 곳곳에 구멍이 나 있었고 그곳에서는 진득한 액체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앨리슨의 눈동자가 크게 좌우로 흔들렸고 그녀의 얼굴도 심한 부상을 입은 것처럼 파랗게 질렸다.


"브라이언! 정신 차려! 젠장... 이 계획에는 당신이 꼭 필요하단 말이야!"


앨리슨은 크게 외치며 오른쪽 발에 힘을 주었다. 보닛 안에서 터져나갈 듯한 엔진음이 들려왔고 두 사람을 태운 차는 한계까지 가속했다. 황무지로 접어든 스포츠카는 국도를 타고 아무런 불빛도 생명체도 없는 황량한 벌판으로 향했다. 헤드라이트는 검붉은 색의 마른 땅과 크고 작은 돌멩이로만 이루어진 쓸쓸한 풍경만을 비추다가 곧 판자로 만든 작은 집에 빛을 쏘아냈다.


앨리슨은 자동차를 판자 집 앞에 세우고 대시보드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자동차 주변 땅이 꿈틀 하는 것 같더니 사각형 모양으로 갈라지며 천천히 땅 속으로 꺼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을 태운 자동차는 황무지 땅 속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거칠고 마른 땅 속에는 강철로 이루어진 구조물이 있었다. 자동차를 떠받치고 있는 거대한 유압 파이프가 끝까지 수축해서 자동차를 지하 8층에 위치한 인피니티 코퍼레이션의 지하 비밀 연구소로 운반했다. 자동차가 끝까지 내려오자마자 흰 옷을 입은 의료진이 조수석으로 달려들어 브라이언을 들것에 옮겼다.



수트가 없었다면 브라이언은 벌집이 되어 진즉 사망했을 것이었다. 브라이언의 다기능 수트는 최대한 브라이언을 보호했지만 모든 총탄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들것에 실려가는 동안 브라이언의 흐릿한 시야에 자신을 바라보는 낯선 사람들과 앨리슨의 걱정 어린 얼굴이 가물거렸다. 정신을 잃은 브라이언이 다시 의식을 회복한 곳은 인피티니 코퍼레이션의 마크를 달고 있는 최첨단 의료장비들이 가득한 방 안이었다.


조용한 방 안에는 쉭쉭 하는 펌프 소리와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 듯한 짧은 전자음만 규칙적으로 흐를 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브라이언이 누워있는 침대 맞은편에는 커다란 유리창이 있었고, 유리창 너머에는 흰 옷을 입은 노인과 참담한 표정으로 그에게 설명을 듣고 있는 앨리슨의 모습이 보였다.


앨리슨의 모습을 보고서 브라이언은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사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목소리도 낼 수 없었고 고개를 움직이지도 못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눈동자를 움직여서 주변을 바라보거나 눈을 깜빡여 눈에 수분을 공급하는 것 밖에 없었다. 자신이 처한 상태를 깨닫자 브라이언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어떻게 된 일이지?'


브라이언이 최대한 상황을 파악해보려고 노력하고 있을 때, 창 밖에서 앨리슨은 몸을 돌려 브라이언을 바라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앨리슨?'


브라이언은 고함을 지르고 싶었지만 두 눈동자만 끔뻑거릴 뿐이었다. 하지만 앨리슨이 브라이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그녀는 유리창 밖에서 브라이언을 향해 말을 하기 시작했다. 마이크가 설치되어 있는 모양인 듯 그녀의 말은 브라이언이 있는 방 천장에서 울려 퍼졌다.



"브라이언, 여기는 인피니티 코퍼레이션의 연구소야. 여기가 널 돕고 보호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이리로 왔어."



차분한 앨리슨의 목소리에는 업무적인 아쉬움과 인간적인 미안함이 뒤섞여 있었다. 앨리슨은 브라이언이 눈을 깜빡이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서 말을 이었다.


"내가... 아니, 우리 회사가 당신에게 한 제안은 여전히 유효해. 우리 계획을 위해서는 당신이 필요해. 하지만 지금 당신 상태로는 우리 계획을 성사시킬 수 없어. 자세한 설명은 못하겠지만 네 몸은 점점 기능을 상실하고 있어. 시간이 지나면 뇌사 상태에 빠지겠지."



앨리슨의 말에 브라이언은 큰 충격을 받았다. 논리적이면서 직관이 뛰어난 브라이언이었지만 지금은 머릿속이 온갖 정보와 의문으로 뒤죽박죽이 되어 있었다. 그 괴한들은 누구인가? 앨리슨의 말을 믿어야 하는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로 이득을 받을 사람은 누구인가? 스미르노프? 앨리슨? 인피티니 코퍼레이션?


브라이언의 머릿속에 있던 계획과 논리는 조각조각나 흩어지고 검은 구름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목청을 높여 끓는 듯한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그 비명은 성대 근처에 가지도 못하고 브라이언의 뇌 속의 작은 전기 신호로만 발현되었다가 금세 사라져 버렸다. 방 안에서 규칙적으로 흐르고 있던 전자음의 간격이 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앨리슨은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희망이 있어. 우리 연구소에서는 뇌를 디지털화하고 육체의 클론에 이식하는 기술을 연구하고 있어. 곧 상용화 단계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네 뇌를 디지털화해서 컴퓨터로 옮겨놓은 후 더 강하고 튼튼한 육체로 옮겨줄게. 대신 깨어난 후에 우리 일을 도와줘야 하는 조건이야. 네가 좋다면 눈을 두 번 깜빡여 줘."


브라이언은 앨리슨을 노려보며 그녀에게 청각적으로 전달될 수 없는 욕지거리를 해대었다. 이건 죽어가는 육체와 정신을 담보로 하는 협박에 가까운 부탁이었다.


죽음이냐, 아니면 미지의 기술을 통해 새 삶을 얻고 또 다른 짐을 짊어지느냐.


마음을 가득 채운 의심과 분노의 폭풍이 점점 사그라들자 브라이언은 문득 자신의 목을 안고서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이던 앨리슨의 모습이 떠올랐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선택의 순간에 자신의 마음을 흔들리게 한 여인의 행동이 생각나자 브라이언은 스스로를 향해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의 심각성과 상관없이, 삶이란 그런 것이라는 엉뚱한 생각이 들자 브라이언은 앨리슨을 향해 두 눈을 깜빡여 보였다. 그러자 앨리슨 옆에 있던 노인이 유리창 아래에서 뭔가를 조작하는 거 같더니, 브라이언의 머리 위쪽을 감싸는 헬멧 같은 장치가 웅웅 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앨리슨은 울먹거리며 브라이언에게 말했다.


"고마워, 브라이언."


그러자 앨리슨 옆에 있던 노인이 브라이언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이제 바로 자네 뇌를 스캔해서 디지털화시킬 걸세. 자네 뇌의 모든 정보는... 아니, 자네는 클론이 준비될 때까지 연구소 컴퓨터에 보관될 거야. 디지털화 된 자네 의식이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컴퓨터는 네가 만들어내는 이미지대로 가상 환경을 구축할걸세. 그러면 자네가 경험하고 만났던 사람들이 비슷하지만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거야.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이 말이야.


하지만 자네가 반드시 해 줘야 할 일이 있어. 자네가 스스로 만들어 낸 가상 환경에 적응하는 것 이상으로 거기 매몰되면 자네 자아는 소멸하고 마네. 그럼 우리는 자네를 온전히 클론으로 옮겨 담을 수가 없다네. 그러니 항상 정신을 차리고 그곳이 실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어야 하네."


내가 만들어내는 이미지.


꿈같은 가상 환경.


정신 차리고 꿈속에 매몰되지 말 것.


브라이언은 주의사항을 다시 되뇌었다.



머리 위에서 나는 웅웅 거리는 소리가 더 커졌다. 수만 마리 벌이 귓가에서 비행하는 듯한 소음과 함께 눈부신 빛이 브라이언을 덮쳤다.


**


브라이언이 눈을 뜨자 천장에 달린 일자형 형광등이 보였다.


그는 푹신한 가죽 소파에 누워서 천장을 보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따스한 느낌의 나무 바닥. 별 특색 없는 벽과 벽에 가까이 놓인 라디에이터, 사무용 책상, 목재 책장. 그리고 그 옆에는 안경을 쓴 중년 남자가 가죽 커버에 끼운 리걸 패드와 펜을 들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 남자는 입과 턱 밑으로 단정하게 다듬은 수염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수염은 온화한 그 남자의 인상을 더욱 부드럽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남자는 아무 말 없이 브라이언을 관찰하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브라이언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불과 몇 초 전만 해도 뜻대로 움직이지 않던 사지가 다시 태어난 것처럼 가뿐하게 그의 뜻대로 움직였다. 브라이언은 소파에 걸터앉아서 중년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 남자는 리걸 패드에 무언가를 기록하고서 다시 말없이 브라이언을 바라보았다. 남자가 먼저 무언가를 말하길 기다렸지만 별다른 반응이 없자 브라이언이 그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디죠?"


브라이언의 목에서는 마른 소리가 났다. 남자는 리걸 패드를 보호하는 커버를 닫고서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친근한 말투로 천천히 브라이언의 질문에 답을 했다.


"아직 좀 얼떨떨하신가 보군요. 여기는 업라이트 정신의원입니다. 저는 지미 솜니엄 박사이구요. 기억나십니까?"


자신을 솜니엄 박사라고 소개한 중년 남자의 말을 듣자 브라이언의 의식 저 너머에서 뭉게구름이 피어오르는 것처럼 흐릿한 기억이 조금씩 형체를 이루는 것 같더니 금세 어떤 정보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브라이언은 헤프너 사에서 회계 업무를 담당하는 30대 회사원이었다. 그는 교외의 단독주택에서 피젯이라는 이름의 보스턴 테리어와 둘이서 살고 있었다. 최근 브라이언은 심각한 스트레스성 불면증을 앓기 시작했다. 별 일 아닐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깨어있을 때도 지독한 두통에 시달리자 그는 수면 전문의를 찾았다. 하지만 별다른 차도가 없자 그는 전화번호부를 뒤져 맨 처음 눈에 들어온 정신의원인 업라이트 정신의원을 찾아갔다.


브라이언이 눈을 뜨기 한 시간 전, 솜니엄 박사는 약을 처방하는 것 외에 최면치료를 권했고 브라이언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박사의 권고대로 최면치료를 받은 것이었다.


자신과 관련한 낯선 정보가 머리를 가득 채우자 브라이언은 얼굴을 찌푸렸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이런 게 꿈을 꾸는 것 같다는 뜻이었군...'


브라이언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머릿속을 채우는 자신에 대한 정보과 진짜 자신의 기억과 경험을 최대한 구분하고 분리시키기 위해 애를 썼다. 브라이언이 땀을 흘리며 낑낑거리고 있자 솜니엄 박사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에게 다시 물어보았다.


"자기 이름이랑 오늘 날짜 말할 수 있습니까?"


"브라이언 닐, 1985년 10월 17일."


브라이언의 대답에 박사는 안심하는 표정으로 몸을 뒤로 기댔다. 박사는 책상 위에 두었던 리걸 패드를 가져다 들고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다시 그것을 책상에 놓았다. 그리고 브라이언에게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브라이언 씨,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근본적으로는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줄여야 합니다. 일상적인 일에서 오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그 첫 번째 단계입니다. 예를 들자면... 해보지 않았던 운동이라던지 전혀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취미를 가져본다던지. 더 간단한 방법으로는 집에 가셔서 책장에 꽂혀 있는 있지만 한 번도 눈길을 준 적도 없는 책을 찾아서 읽어보는 겁니다.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요. 시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설명은 계속되었다. 박사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친근하고 부드러워서 브라이언은 박사가 집으로 찾아와서 이 목소리로 책을 읽어준다면 불면증 증세가 더 호전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브라이언은 재빨리 주의를 환기했다. 지금 주변 환경에 너무 익숙해지지 않도록. 설명이 끝나자 브라이언은 박사에게 물어보았다.


"박사님. 혹시 최면 중에 제가 뭐라고 그러던가요?"


"브라이언 씨의 정체가 이중 스파이라고 그러더군요. 이 도시를 장악하고 있는 초거대기업에 잠입한 이중 스파이. 주변에 계신 분들도 다양한 역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기업 회장, 또 다른 기업의 이중 스파이... 전 이게 브라이언 씨 무의식 속에 잠재한 불안감이라고 생각해요, 주변 사람들에 대한."


박사의 말에 브라이언의 머릿속에 물밀듯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앨리슨과 스미르노프는 헤프너 사에서 브라이언과 같이 근무하고 있는 회계팀 동료였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들과 동료관계를 유지해왔던 것 같은 익숙한 느낌이 들자 브라이언은 자기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브라이언은 박사의 나머지 설명은 듣는 둥 마는 둥 처방전을 받고서 의원을 나섰다.



밖으로 나오니 깜깜한 밤이었다. 밤하늘에는 페가수스자리가 나안으로도 선명하게 보였다. 스산한 가을바람이 인적 드문 거리에 낙엽과 비닐봉지를 굴리고 있었다. 브라이언은 다시 한번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신의 의식이 만들어낸 세계는 아무리 꿈이라고는 하지만 진짜라고 믿을 정도로 정교하고 실제 같았기 때문이었다. 브라이언은 주변을 둘러보고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앨리슨, 빨리 클론을 준비해 줘. 여기는 익숙해지기 딱 좋은 세계야.'


브라이언의 간절한 부탁은 희미한 입김과 함께 허공을 떠돌았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자 그는 짧게 한숨을 쉬고서 도로 연석에 걸쳐서 주차해 놓은 머스탱 컨버터블에 시동을 걸었다.


브라이언의 집은 도심에서 자동차로 40분가량 떨어진 교외의 주택단지에 있었다. 2층 단독주택 40여 채가 모여 있는 이 단지 옆으로는 아름다운 단풍나무와 침엽수가 어우러져 있는 작은 숲과 숲을 가로지르는 작은 시내가 있었다. 브라이언이 집 앞에 차를 대고 현관으로 들어가자 검은 무늬가 양쪽 눈을 가로지르는 작은 보스턴 테리어가 반가운 소리를 지르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브라이언은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고 조용하라고 했지만 입가에 걸린 웃음은 감출 수 없었다. 마치 몇 년을 같이 산 반려견을 대하는 것처럼 브라이언은 익숙하게 보스턴 테리어를 쓰다듬어 주었다.


자정이 넘어가자 보스턴 테리어는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브라이언의 허벅지에 몸을 붙이고선 한번 하품을 한 뒤 잠이 들어버렸다. 브라이언은 최근 24시간 사이에 벌어졌던 일을 최대한 자세하게 수첩에 적고 있었다. 임무에서 실패했을 때의 기억부터 인피니티 코퍼레이션 연구소에 갔을 때까지 기억나는 모든 것을 글로 옮겨 적었다. 그 후에 솜니엄 박사를 만나서 집으로 돌아온 부분까지 적고 나니 손목이 뻐근해졌다. 브라이언은 팔을 머리 위로 끝까지 뻗어 올리며 기지개를 켰다.


소파 맞은편에 놓인 TV에서는 아나운서가 쉬지 않고 떠들고 있었다. 화면 하단에는 유가가 정상화되었다는 소식, 지방세를 인상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린다는 소식, 어느 예술가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자막으로 흐르고 있었다. 평평한 스크린에 익숙해진 브라이언은 해상도가 낮은 브라운관 TV의 굴곡진 화면이 영 익숙하지 않았다. 그는 TV 가까이 다가가서 전원을 끄고 다시 소파에 몸을 묻었다. 다시 한번 솜니엄 박사가 그 친숙한 목소리로 옆에서 책을 읽어준다면 아주 편안한 기분으로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까 박사가 했던 말이 다시 생각났다.


- 전 이게 브라이언 씨 무의식 속에 잠재한 불안감이라고 생각해요, 주변 사람들에 대한.


또 연구소에서 앨리슨과 함께 있었던 노인이 했던 말도 떠올랐다.


- 항상 정신을 차리고 그곳이 실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어야 하네.



브라이언은 수첩과 펜을 소파 앞에 놓인 목재 테이블에 올려다 놓았다. 그리고 강아지를 안아서 바닥에 놓인 푹신한 러그에 올려놓았다. 브라이언은 다시 소파로 돌아와 거기 몸을 누이고 눈을 감았다. 이 세계에서 자신의 원래 기억을 흔들림 없이 붙들고 있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강아지가 몸을 뒤척이며 낑낑대는 소리를 들으며 브라이언은 슬며시 잠에 들었다.


**


렌터카 사업을 15년째 성공적으로 하고 있는 헤프너 사의 본사는 도시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다. 좋지 않은 도로 사정 때문에 직원들은 자전거로 출근하거나 도심 외곽에 있는 주차장에 차를 대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곤 했다. 브라이언도 외곽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서 바로 근처에 있는 역에서 트램으로 갈아탔다. 쌀쌀한 가을바람 때문에 옷깃을 잔뜩 세운 사람들이 트램 안으로 들어갔다가 도심 중앙에서 쏟아져 나왔다.


브라이언은 사무실로 들어와서 높은 파티션으로 나뉘어 있는 여러 자리 중 하나에 자신의 짐을 풀었다. 작은 책상에는 어제 다 처리 못한 서류뭉치와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는 커피잔, 그리고 거대한 CRT 모니터와 회색 데스크톱이 놓여 있었다.


"좋은 아침이야."


익숙한 목소리에 브라이언은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고 있는 앨리슨의 모습을 보자 브라이언은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여기가 가상의 세계라는 것을 까맣게 잊고서 브라이언은 그녀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에 어떻게 있는 거야?"


"무슨 소리야? 난 자전거 타고 왔지."


앨리슨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자 그제야 브라이언은 눈 앞에 있는 앨리슨이 자신의 의식과 컴퓨터가 만들어 낸 존재임을 상기했다. 브라이언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충 얼버무렸다.


"아니야, 어제 잠을 잘 못 자서..."


"아직 그래? 의사는 만나봤어?"


"만나봤지."


"뭐래?"


"스트레스 때문이라던데."


브라이언의 대답에 앨리슨은 그의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오, 스트레스. 만병의 근원이지. 이유를 모르면 다들 스트레스 때문이라더군."


앨리슨은 자신의 말이 재미나다는 듯 깔깔 웃고선 브라이언을 지나쳐서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환한 미소는 실제와 비슷했지만 성격은 가상 세계의 앨리슨이 더 밝고 유머스러운 것 같았다. 왜 저런 모습이 만들어졌을까 생각하며 짐을 풀고 있는 앨리슨을 바라보던 브라이언에게 누군가 다가와서 어깨를 두들겼다.


"이봐, 브라이언. 어젠 잘 잤어?"


브라이언의 눈 앞에는 녹안을 한 금발의 백인 남성이 커피잔을 들고 서 있었다. 이번에는 브라이언은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좋은 아침이야, 스미르노프."


스미르노프는 대답 대신 손에 들고 있던 커피잔을 입에 가져다 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멀리 있던 앨리슨이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었고, 스미르노프도 그녀를 향해 웃으며 커피잔을 위로 들어 보였다. 브라이언은 싱글거리며 웃고 있는 스미르노프를 위아래로 찬찬히 살폈다. 브라이언이 알고 있는 모습과 비슷했지만 뒤로 바짝 넘긴 머리가 아니라 짧게 다듬어서 훨씬 깔끔하고 활발해 보였고, 교활한 뱀 같기보다는 순박한 시골청년 같은 인상이었다.


"네 말대로 다음 달에 하기로 했어."


스미르노프는 여전히 커피잔을 든 채로 브라이언의 옆구리를 툭 치며 말했다.


"뭘 한다고?"


"네가 이젠 하는 게 좋겠다고 그랬잖아, 프러포즈."


"프러포즈? 누구한테?"


브라이언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스미르노프는 다시 브라이언의 옆구리를 꾹 찔렀다.


"조용히 해, 듣잖아!"


두 사람의 소리들 들었는지 멀리 떨어진 파티션 위로 앨리슨의 얼굴이 나왔다가 다시 사라졌다. 스미르노프는 브라이언의 어깨를 눌러서 의자에 앉히고 자신도 파티션 아래로 몸을 숙였다. 브라이언이 두 손을 벌리고 무슨 짓이냐는 듯 손짓으로 항의를 했지만 스미르노프는 신경도 쓰지 않고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늘어놓았다.


"당연히 앨리슨이지! 이 정도면 프러포즈해야 하지 않겠냐고 네가 그랬잖아. 나도 한참 고민했는데 저런 여자가 또 없지. 준비 좀 하고 다음 달에 프러포즈할 거야."


자기 할 말을 늘어놓은 다음 스미르노프는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 브라이언 코 앞에 엄지손가락을 쳐든 주먹을 자랑스럽게 내어 보였다. 그리고선 다시 커피를 홀짝이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는 브라이언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아무리 가상의 세계라고 하더라도 이런 관계라니. 게다가 자신이 저 둘을 위해서 연애 코치를 해 줬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브라이언은 관자놀이 부근을 엄지손가락으로 깊게 누르며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여기서 겪고 있는 이 경험이 바로 자신의 무의식에 잠재된 내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하니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


한동안 브라이언은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을 살았다. 트램을 타고 회사로 출근하면 동료들이 비슷한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이라던지 얼굴 좋아 보인다 던 지 하는. 회의를 하고 숫자와 표로 채워진 수십 장의 서류를 검토하거나 깜빡이는 초록색 컴퓨터 화면에 문자와 숫자를 입력하다 보면 하루가 훌쩍 지나갔다. 퇴근 후 가끔 동료들과 식사를 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브라이언은 집으로 가서 강아지와 시간을 보냈다.


자신이 만들어 낸 앨리슨과 스미르노프와 더 얽히고 싶지 않았다. 유쾌하고 활발한 그 둘과 어울리면 어울릴수록 왠지 자신의 처지가 비참하다고 느끼기도 했고, 그 둘이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있기가 괴롭기 때문이었다.


브라이언은 매일 밤 수첩에 일기를 적었다. 이 가상 세계에서 있었던 일이 아니라 자신이 과거 기간투스 코퍼레이션에서 겪었던 일을 생각나는 대로 최대한 자세하게 적었다.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이 가상 세계에 익숙해지고 매몰되지 않으려는 발버둥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기간투스 코페레이션의 해결사였던 브라이언의 기억은 조금씩 희미해져 갔고, 그가 써 내려가는 글의 양도 조금씩 줄어들었다. 컴퓨터 속에서 인간으로서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 만든 세계 그 자체가 오히려 자신을 좀먹는 가장 강력한 적이 된 셈이었다.


날은 더 쌀쌀해졌고 거리에 뒹구는 낙엽도 자취를 감췄다. 무언가 불길한 것을 쏟아낼 듯 꿈틀거리는 희끄레한 하늘과 거리 곳곳에서 가지만 드러내어놓은 채 서있는 앙상한 나무는 겨울이 다가왔음을 알리고 있었다. 5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지만 동쪽 하늘은 타는 붉은색으로 물들고 있었고 서쪽 하늘에서부터는 밤의 장막이 드리우고 있었다.


일을 마치고 회사 건물을 나선 브라이언은 정류장에서 트램을 기다리다가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고양이가 우는 듯한 소리에 이끌려 브라이언은 정류장 근처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소리는 카페 옆에 있는 작은 골목에서 나고 있었다. 골목 안쪽을 살핀 브라이언은 트렌치코트를 입은 앨리슨이 벽에 기대서 눈물을 훔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브라이언은 재빨리 앨리슨에게 다가가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보았다. 하지만 아무런 대답 없이 앨리슨은 커다란 눈에서 눈물만 하염없이 떨구고 있을 뿐이었다. 브라이언이 앨리슨을 카페로 데리고 들어갔고, 커피가 식었을 때 즈음에야 앨리슨은 진정하고서 브라이언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무슨 일이야? 회사에서는 괜찮아 보이더니."


브라이언의 말에 앨리슨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금방이라도 다시 눈물을 흘릴 것 같았지만 앨리슨은 코만 움찔하고서는 크게 심호흡했다. 그녀는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브라이언. 난 네가 스미르노프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얘기해 줬을 때 사실 나도 스스로를 안목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네가 얘기해 준 그 사람 장점을 나도 보고 있었거든."


연애 상담이라는 생각이 들자 브라이언은 아차 싶었다. 이런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면 머리만 더 복잡해질 뿐이었다. 남녀 문제라는 것이 그런 것 아닌가 - 잘 되면 당사자끼리 좋아 죽어 못 살고, 잘못되면 당사자뿐 아니라 주변 인물까지 고생하게 된다. 브라이언은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내고 있는 허구의 이야기에 에너지를 쏟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허상에 불과하더라도 눈물을 글썽이는 앨리슨의 모습에 브라이언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 스미르노프가 청혼할 거라는 거 나도 알아. 기대하고 있어. 그런데 기뻐야 하는데 겁이나. 이건 내가 바라던 모습이 아닌 것 같아. 불안하고 막막해. 난..."


앨리슨은 다시 눈물을 훔쳤다. 브라이언은 속으로 별일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앨리슨은 갑자기 자신의 삶에 다가온 사랑 때문에 감정이 복잡해진 것뿐이고 누군가가 자신의 결정을 지지해주길 바라고 있는 상태라고 판단했다. 동시에 브라이언은 자신의 가슴에 뭔가 따뜻한 것이 섞여 들어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문득 자신을 끌어안으며 달콤한 말을 속삭이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브라이언은 빨리 마무리하고 이 자리를 떠야겠다고 생각하고선 앨리슨에게 차분하게 조언했다.


"네 상황이라면 누구나 그럴 거야. 너도 안목이 있다고 했으니 자신의 결정을 좀 더 믿어봐. 오늘은 푹 쉬고 내일 다시 생각해보는 게 어때? 감정적일 때는 별로 좋은 결정을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브라이언의 말에 앨리슨은 다시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상이라지만 그녀의 웃는 모습은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브라이언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따라 웃음을 짓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페 앞에서 헤어지기 전에 앨리슨은 브라이언에게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고마워. 넌 참 좋은 친구야."


앨리슨은 발을 들어 브라이언의 뺨에 살짝 키스하고서 몸을 돌려 거리 저편으로 사라졌다. 뺨에 닿은 부드러운 입술이 평온하던 브라이언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드레스를 입고서 함께 식사를 하고 나서 자신을 껴안던 앨리슨의 모습이 머릿속을 채웠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는 괴로운 마음으로 집으로 향했고, 그날 밤 브라이언의 수첩 한 페이지는 앨리슨에 대한 내용으로 가득 찼다.


다음 날, 일찍 출근한 브라이언은 회사 팬트리에서 웃으며 서로를 껴안는 앨리슨과 스미르노프의 모습을 보았다. 브라이언은 그 둘이 자신을 볼까 봐 재빨리 파티션 아래로 몸을 숨겼다. 그는 머리를 싸매고 마음속으로 간절히 외쳤다.


빨리 클론을 완성해서 자신을 이 세계에서 끄집어 내 달라고.


평범함으로 점철된 이 세상에서 이방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일은 너무나도 힘들다고.


자신의 삶이 일상에 젖어드는 이 느낌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노라고.


브라이언은 컴퓨터가 도와서 자신이 만든 이 세계 너머에 있는 앨리슨과 인피니티 코퍼레이션의 연구원들에게 기도하는 심정으로 부르짖었다. 하지만 그에게 아무런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제나 오늘이 비슷한 나날은 계속 이어졌고 앨리슨과 스미르노프가 열애하는 모습만이 진부한 일상의 풍경에 엑센트를 줄 뿐이었다. 브라이언은 조금씩 지쳐갔다. 그의 눈은 생기를 잃었고 몸에서는 활력이 빠져나간 것 같았다. 브라이언은 수첩에 무언가를 적기를 그만뒀다. 아무리 떠올리려고 노력해도 예전 기억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브라이언은 그렇게 무너져가고 있었다.


**


희끄무레한 하늘에서 좁쌀만 한 눈이 내리던 어느 날, 퇴근 후 바로 집으로 돌아간 브라이언은 강아지가 뭔가를 물고 있는 것을 보았다. 오래되어서 가장자리가 누렇게 변색된 수첩이었다. 장난을 치는 줄 알고 으르렁대며 수첩을 놓지 않으려는 강아지의 입을 브라이언은 억지로 벌려서 그것을 꺼내었다.


수첩에 적힌 글씨가 자신의 필체라는 것을 안 브라이언은 소파에 앉아서 첫 페이지부터 읽기 시작했다. 처음은 기간투스 코퍼레이션에 잠입했을 때 심정이 어땠는지가 적혀 있었다. 브라이언은 고개를 돌려 목재 테이블 위를 보았다. 거기에는 최근에 적다 만 수첩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오래된 수첩에 이렇게나 많은 내용을 적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가 이걸 언제 적은 거지...?'


브라이언은 곰곰이 예전 기억을 떠올리며 오래된 수첩의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다음은 첫 임무에 대한 개괄이었고, 그다음은 본사 건물의 스케치, 그다음은 기간투스 코퍼레이션의 간부와 주변 인물의 관계도, 그다음은 두 번째 임무에 대한 요약...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브라이언의 미간은 점점 좁아졌다.


기간투스 코퍼레이션과 관련된 내용은 뒤로 가면 갈수록 점점 짧아졌고, 그 대신 앨리슨과 스미르노프에 대한 글, 회사 업무에 관한 글, 그리고 답답함과 스트레스 때문에 잠이 오지 않는다는 글 따위가 적혀 있었다. 브라이언이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자 거기에는 어떤 주소가 급하게 휘갈겨 쓰여 있었다.


- 타임 스트리트 1955번가


브라이언은 그 주소를 보자 뭔가에 홀린 듯이 외투를 걸쳐 입고 밖으로 나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 눈은 함박눈이 되어 도로에 쏟아지고 있었지만 브라이언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헤드라이트 불빛 말고는 아무런 불빛도 없는 컴컴한 밤거리를 달려 시내로 향했다. 제설차도 다니지 않는 듯, 시내는 무릎까지 오는 눈으로 가득 차 있었다. 눈 때문에 더 이상 차를 전진시킬 수 없게 되자 브라이언은 길가에 차를 버려두고서 인적 없는 거리에 쌓인 눈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오래된 수첩에 적힌 주소에 도착한 브라이언 앞에는 낮은 건물이 있었다. 거리를 채운 건물 중에서 불이 켜져 있는 유일한 건물이었다. 브라이언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온기가 흘러나오고 있는 지미 솜니엄 박사의 명패가 걸린 문을 열었다. 나무 마룻바닥에는 책상과 책장, 그리고 기다란 면담용 가죽소파가 있었다. 그 옆에는 스토브에서 몸을 녹이고 있는 솜니엄 박사가 의자에 앉아서 문 앞에 서 있는 브라이언을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지난번에 여기 오기 전에도 온 적이 있습니까?"


브라이언은 박사에게 오래된 수첩을 던지며 말했다. 박사는 서투른 자세로 수첩을 받고서는 그것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손짓으로 브라이언에게 소파에 앉을 것을 권했다.


"지금 물어보잖습니까!"


브라이언이 문에 꼼짝 않고 서서 으르렁대자 박사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브라이언 씨가 생각하는 대로입니다. 그 전에도 수첩을 제게 던지셨죠. 그런데 문을 열어놓고 있으니 찬 바람이 들어오는군요. 문을 닫아 주시겠습니까? 브라이언 씨도 거기보다는 여기 스토브 옆이 더 좋을 것 같은데요."


브라이언은 박사를 한참 노려보다가 문을 닫고 들어왔다. 그는 소파에 앉아서 말없이 박사를 쳐다보았다. 어디서부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브라이언은 자신과 박사가 사는 세상이 컴퓨터 속에서 자신이 만들어낸 세상이라고 운을 뗀다면 박사는 뭐라고 반응할지가 궁금해졌다. 평온한 표정으로 브라이언과 시선을 맞추던 박사는 브라이언이 우물거리며 말을 꺼내지 못하자 먼저 입을 열었다.


"뭐가 현실인지 판단하기 어렵다는 표정이군요."


"그걸 어떻게..."


"브라이언 씨, 전 브라이언 씨 상태가 호전되길 바랍니다. 그래야 이렇게 밤늦은 시간에 절 찾아오는 일도 없고 저도 편안한 마음으로 집에서 쉴 수 있죠. 브라이언 씨와 제가 이런 대화를 처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제가 잘 알겠습니까?"


박사의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브라이언의 미간이 좁혀지며 깊은 주름을 만들어냈다. 갑자기 찾아온 두통에 브라이언은 몸을 숙이며 두 손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박사는 그런 브라이언을 보며 친근하게 말을 건넸다.


"몸이 좋지 않으면 누워도 됩니다. 그렇지, 그렇게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해 보세요. 그럼 몸과 마음이 편해질 겁니다."


브라이언은 박사의 말 대로 긴 소파에 누워서 눈을 감았다. 그러자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혼란스럽고 복잡한 상념이 조금씩 가시는 것 같았다. 그렇게 수 분을 가만히 누워서 심호흡을 하자 잡생각이 없어졌다. 스토브의 열 때문인지 온 몸의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박사는 다시 브라이언에게 말했다.


"이제 제가 이름을 부르면 더 깊은 세계로 들어갑니다. 깊이... 깊이 들어간 다음 거기서 보게 되는 걸 제게 말하게 됩니다. 브라이언 씨."


박사가 자신의 이름을 부른 순간, 브라이언은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한다는 충고가 생각났지만 그는 저항하기보다는 점점 밑이 없는 구덩이로 빠져드는 느낌에 온 몸을 맡겼다. 자신의 몸이 편안하다 못해 녹아내려 없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브라이언은 눈을 떴다.


화려한 색상으로 빛나는 어스름한 천장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기억이 흐릿하고 혼란스럽기만 하다.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었던 걸까?'



바닥에 누워있던 브라이언은 몸을 일으켰다. 움직일 때마다 사지가 쑤실 듯이 아팠다. 꽉 다문 그의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브라이언의 고급 검은색 양복은 군데군데 찢어져 있었고 먼지투성이가 되어 있어서 철거 직후의 건물 벽처럼 보였다. 브라이언은 옷을 툭툭 털고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머리가 맑아지면서 흐릿했던 기억이 다시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브라이언은 어떤 고층빌딩 최고층에 위치한 방 한가운데 서 있었다. 깨진 창 밖에서는 밤바람이 들이닥쳐 방 안을 서늘하게 식혀주고 있었고, 깜빡이는 네온사인의 빛이 방바닥에 쓰러져 있는 두 사람과 널브러진 서류가방을 주황색과 푸른색으로 번갈아가며 물들이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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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어느 화물선에서 생긴 일 +2 20.03.20 39 2 33쪽
» 우로보로스 (下) 19.05.03 38 0 35쪽
3 우로보로스 (上) 19.05.03 49 1 30쪽
2 황금 왕좌 19.04.28 61 2 45쪽
1 사막 횡단 고속도로 19.04.26 138 1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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