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휘이이잉-
뼈가 시릴 정도의 한풍이 몰아치는 어느 설산,
일련의 무리가 마차를 끌고 그곳을 오르고 있었다.
덜컹!
거지꼴을 한 사람들과 함께 손발이 포박된 채 마차에 구금되어 있던 나는 조심스레 눈을 뜨며 생각했다.
‘이게 무슨 X랄 맞은 상황일까?’
정신을 차린 지 어느덧 1시간째,
아직도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기분 좋게 퇴근하고 맥주 한 잔 마시며 게임을 하던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갑자기 시야가 암전되었고 눈을 뜨니 이 모양이다.
특전사에서 워낙 파란만장한 일들을 겪어온 탓에 전역한 지 5년이 넘었음에도 어지간한 일에는 놀라지 않는 나였지만, 지금만큼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X발, 대체 뭔데?’
마차와 그 주변을 지키고 있는 사내들,
아마도 병사로 추정되는데 왜인진 몰라도 그들은 중세시대의 의복을 입고 있었다.
그뿐인가?
슬쩍 손을 바라봤다.
낯설기 그지없는 손등.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이건 내 손이 아니라는 걸.
그렇다.
나는 지금 모르는 누군가의 몸에 빙의한 상태였다.
‘후우, 일단 진정하고 상황을 정리해보자.’
내가 어쩌다 이런 꼴이 됐는지,
또 여기가 어딘지,
이놈들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다만, 확실한 건 나는 지금 어딘가로 끌려가는 중이고,
꼬라지를 봐선 죄수 취급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탈출할 수 있나?’
손발의 포박을 푸는 건 어렵지 않다.
문제는 주변을 지키는 놈들이다.
병사들의 숫자를 확인하며 계산기를 두들겨 봤다.
‘당장 마차 주변에 4명, 후미에도 5명 정도 있고, 선두에 몇 명이 있는진 파악되지 않는다라···’
만약 이놈들이 총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가정하면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속으로 각오를 다지고 탈출할 각을 봐야겠다고 생각하던 그 순간,
쿵!
마차가 멈춰 섰다.
“도착했다!”
“징벌병들을 꺼내라.”
“예!!”
분명 낯선 언어임에도 병사들의 말이 한국어처럼 또렷하게 들려온다.
‘징벌병이라고?’
징벌병은 보통 죄수 출신 병사들을 지칭하는 말일 텐데?
눈살을 찌푸리며 실시간으로 상황을 업데이트하고 있던 와중, 병사들이 마차 안에 있던 나를 반강제로 끄집어냈다.
“빨리빨리 나와!!”
굴비처럼 밧줄에 묶여 줄줄이 마차 밖으로 끌려 나오자,
웅장한 성채가 나를 반긴다.
“모두 주목해라 버러지들아!”
선두에 서 있던 흉흉한 인상을 가진 사내가 좌중을 훑어보며 소리친다.
“네놈들은 모두 죽어 마땅한 죄인이나, 운이 좋게도 제국에 헌신하여 그 죄를 씻어낼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다. 이제 너희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
“하나는 형량에 따라 부여된 복무기간을 모두 채우고 전역하는 것, 다른 하나는 죽어서 시체로 나가는 것이다. 그 전까지 너희는···”
뜸을 들이던 사내가 이윽고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곳 엘네스 산맥에 위치한 제국의 북부 전선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거룩하신 스카디님의 이름으로 천명하마.”
엘네스 산맥,
제국 북부 전선,
그리고 방금 전 놈이 언급한 스카디라는 신의 이름.
이 세 가지 단서를 조합하자 익숙한 이름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제국의 노래]
황제와 간신배들로 인해 개판이 된 제국을 통일하는 일종의 군주제 전략게임.
성인이 되기 전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즐겨 했으며 플레이 타임은 정확히 확인하진 않지만, 마지막으로 봤을 때 5000시간 정도 되었으니 아마 1만 시간 가까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고였다면 고였고,
썩었다면 썩었다고 할 수 있는 수준,
어쨌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제국의 노래]는 코X이에서 만든 삼국지와 비슷한 스타일의 게임이다.
농민들의 반란,
야만족들의 침공,
영주들의 군웅할거 등등,
나라가 개판이 된 상황 속에서 영지를 키우고 인재를 모아 전쟁을 통해 세력을 일궈, 끝내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게 [제국의 노래]의 궁극적인 목표고,
나는 그런 게임을 수천 번 넘게 클리어한 고인물인 만큼 지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X발, 북부 전선이라고?’
아무래도 나는 게임 속에 빙의한 거로도 모자라, 유저들 사이에서 차가운 무덤, 뉴비 분쇄기라 불리는 북부 전선에 끌려온 것이다.
그것도 징벌병 신분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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