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발라더 님의 서재입니다.

슬기로운 한풀이 생활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드라마

발라더
작품등록일 :
2024.01.13 22:11
최근연재일 :
2024.02.01 23:53
연재수 :
25 회
조회수 :
700
추천수 :
5
글자수 :
166,022

작성
24.01.14 22:50
조회
32
추천
0
글자
21쪽

4화

DUMMY

한복장인 침선장 김옥순.

명실상부 한국 최고의 한복 명문가 영선채 수장인 그녀가 불어오는 바람에 잠시 손을 멈췄다.

널따란 마룻바닥 위에 앉아 바느질을 하는 건 그녀에게 있어 크나큰 즐거움 중 하나였다.

올해 64살에 무형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된 한복의 장인이 김옥순이기도 하다.


전대 수장들 역시 전부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것만 봐도 영선채에서 전해지는 기법이 결코 그 명성에 비해 모자라지 않다는 것은 알 수 있는 사실.


마당 빨랫줄에 걸어놓은 옷감들이 나부끼는 소리가 유독 귀를 즐겁게 하니 시선은 자연스레 옮겨진다.

염색한 옷감들이 햇빛을 머금은 채 살랑살랑 흔들리는 모습에 시선을 빼앗겼다.

오늘따라 아름답게 다가오는 풍경의 조화에 보다 보니 미소는 지어졌다.

형형색색의 색감을 뽐내는 모든 것이 풍요롭게 세상을 꾸며 눈을 즐겁게 했다.


"항상 오늘만 같으면 좋으련만."


그러다 문득 방송국 관계자가 오늘 온다는 게 떠올라 우측 벽에 걸린 시계에 눈길은 갔다.


뭐라고 했더라.

한복 자수가 팀원의 실수로 풀려, 그걸 수선했다고 했다던가.


실수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는 것이다. 하니 그 부분보다는 수선을 했다는 부분에 관심은 갔다.

그것도 전문가가 아닌 드라마에 출현하는 배우가 했다는 말에서 호기심은 생겼다.

허락도 받지 않고 수선을 해서 죄송하다며 거듭 말을 전하던 팀장의 말은 아직도 또렷이 기억났다.


일단 약속대로라면 이제 곧 들릴 터이니 다시 남은 시간 바느질을 하기 위해 자세를 가다듬고 옷감을 고쳐잡았다.


그렇게 막 다시 시작하려던 그때 한 사람은 대문을 열고 들어왔다.


"여사 님. 오신다던 방송국 사람이 왔습니다."

"들어오시라고 하시지요."


영선채 직원이 남기고 간 말에 널브러진 작업도구를 주섬주섬 챙겨서는 한곳에 모았다.


찾아 온다는 의상팀 팀장은 일전에도 몇 번이나 본 적이 있는 관계자다.


이번 드라마 말고도 다른 드라마를 할 때 여러 번 직접 한복을 들고 방문한 적이 있다.


팀장이라는 위치는 실력이 없다면 오를 수 없는 자리다.


담당하는 분야에서만큼은 실력과 안목이 없었다면 오를 수 없었기에 들고 들어오는 표정은 오묘했다.

약간의 기대감도 섞인 묘한 표정이 김옥순의 호기심을 자아냈다.

이내 앞에 이르러서 짧은 인사와 함께 먼저 한복을 냉큼 내밀었다.


영선채에서 태어나 가문의 대를 이어온 게 다름 아닌 김옥순.


수선했다는 자수를 보는 두 눈은 금세 퉁방울만 하게 떠진다.

그녀 정도 되면 유심히 살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걸 그 젊은 청년 배우분이 수선했단 말인가요?"


똑같은 색상의 실과 똑같은 기법으로 감쪽같이 이었다는 걸 단번에 알아보았다

결코 눈썰미가 좋다고 해서 따라 할 수 있는 수준의 자수가 아니었다.

명백히 바느질을 배운 사람이다.

그것도 최소 수년, 아니 수십 년은 배운 게 확실해 보인다.

거듭 생각을 잇다 보니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26살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럼 언제부터 바느질을 배운 것일까?

이 정도 수준의 바느질을 손쉽게 해냈다?


쉽게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직접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동해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흥분해 보고자 결정한 순간이었다.


*


"하- 씨발. 이 새끼가 결정적일 때 날 물 멕일라 그러네."


이영우가 담배를 피우며 하는 말에 옆에 있던 친구가 재밌다는 듯이 낄낄 웃었다.


"키흐흐흡 병신. 그러니까 내가 제대로 손봐줘야 그런 애들은 안 기어오른다고 전에 몇 번이나 말했잖아? 네가 겁나 몸을 사리니까 통수나 당하는 거 아니야."


빛바랜 가로 등불이 애를 쓰며 어둠을 밀어내는 골목길 한편.


"땅에서 설설 기면서 알겠다고 말한 놈이 그렇게 쌩갈 줄 알았나 뭐."

"근데 오늘 손봐줬다가 내일 꼰지르면 너 좆되는 거 아니야?"

"겁만 줄 거야 겁만."

"그럴 시간에 내일 대국 준비나 하는 게 낫지 않나?"

"고작 몇 시간 더 준비하는 것보다 차라리 컨디션 조절에 신경 쓰는 게 나아. 그 새끼한테 한소리 안 하면 내일 대국 집중 못 할 거 같다고 난. 아- 씁 생각할수록 열받네."


지금 있는 곳은 서울 성동구로, 근처에는 한국기원이 자리하고 있다.

서울 출신인 이영우는 유년시절부터 바둑을 둬 기원 연구생으로도 지내본 적이 있는 아이다.

기원 연구생의 벽을 느끼고 15살에 지역 연구생 생활을 시작한 지는 어느덧 2년이 되었다.


부모는 둘 다 서울에서 유명한 법조계인에, 공무원 정년퇴직을 한 조부모는 둘 다 부산에서 지내 어렵지 않게 부산 지역 바둑 연구생이 될 수 있었던 이영우였다.


부산에서 2년 동안 조부모와 살며 지선우를 수없이 괴롭혀 온 게 이영우이기도 하다.


하마터면 오늘 본선 16강에서 떨어질 뻔해 생각할수록 화는 났다.


분명 지라고 말했는데 자신을 이겨?


내일 8강 조에서 붙는 아이들의 기력은 알아 실수만 안 하면 4강은 무조건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방심만 하지 않으면 확실히 이길 자신은 있었다.

그렇다면 이후에 만나는 상대를 대비해 준비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해 이 같은 일을 계획했다.


조금 전 전화를 해 나오라고 했으니 지선우는 부른 장소로 나올 것이다.

부르면 늦더라도 꼭 나왔다.

고작 겁 좀 주는 것으로 경쟁자 한 명을 떨어트릴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이득인 일이 있을까.


"근데 걔가 기력이 좋긴 좋나 보다? 예선전 전 전승에 16강도 2승 찍은 걸 보면?"


기력이 더 앞서는 지선우가 부산 연구생 시드를 차지하지 못한 건 모두 이영우 때문.


"쌔. 쌔지 그 새끼. 근데 뭘 잘못 처먹었는지 오늘은 재 실력 이상을 발휘해서 날 가지고 놀더라고 그 찐따가 말이야."


붙을 때마다 평정심을 잃기 일쑤이던 지선우가 오늘, 하필 중요한 대회에서 극복했다는 것에 기분은 더 나빴다.

기다리다 보니 일전에 사범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린 것도 떠올라 이를 빠드득 갈았다.

그때 얼마나 부모님에게 욕을 먹었던지.

물론 부모님 덕분에 잘 넘기기는 했지만 그런 사건이 있었다는 점에서 행동은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 요즘 내가 너무 띄엄띄엄 놀아주기는 했지 그 거지새끼랑."


지선우의 집안 가정형편이 좋지 않다는 건 부산 연구생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근데 나오라고 한지가 언젠데 아직도 안오는건데."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하나 더 꺼내 물때 골목길로 그림자 하나는 들어섰다.


이영우가 그림자가 걸어오는 방향으로 머리를 쭉 빼고는 눈매를 좁혔다.

많이 봐 온 지선우의 실루엣인게 확인되자마자 입꼬리는 말려 올라갔다.


"누가 거지새끼 아니랄까 봐 제 말 하니까 쳐 오네."


담배를 집어넣고는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어 검지를 까딱거렸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회백색의 어둠과 어울려 한층 위압감을 더했다.


"야! 빨리 안 튀어오냐 이 씨발새끼야?"


약간 주춤거리며 거리를 좁혀오던 그림자가 어느 순간부터는 올곧은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두 아이는 그저 저희들끼리 시시덕거리며 오길 기다렸다.


가로등불이 비추는 범위 내에 이윽고 지선우가 들어서서는 멈춰 섰다.


"네가 뒤지고 싶어 아주 환장했지? 내가 분명 지라고 했는데 이겨? 요즘 안 맞으니까 몸이 근질근질한가 봐? 그럼 내가 다시 기억나게 해줘야겠네?"


바둑 실력을 질투해온 이영우가 사납게 말을 이으면서 기세를 끌어올렸다.


"이기니까 좋아? 좋냐고 이 씹새끼야!?"


부라린 두 눈에는 그 나이대의 아이가 품기 힘든 악기가 피어올랐다.

그 기세 그대로 다가가 손닿는 거리에 이르러 오른손으로 왼쪽 어깨를 밀었다.


정확히는 밀려고 했다가 살짝 트는 바람에 손은 허공을 가르고 만다.


"야이- 어잌 씹!"


천귀 성대훈.


택견 태권도 합기도 등등.

생전에 더해 환생을 기다리는 30년 동안 무술을 연마해온 성대훈이 지선우의 몸에 빙의해 슬쩍 몸을 틀었다.

덤으로 정말 적은 힘으로 밀어 이영우를 꼴사납게 넘어트렸다.


"너는 네가 추하다 생각하지 않는가 보구나."


넘어진 것도 쪽팔린 상황에 들리는 말이 진득하게 싹튼 악을 건드렸다.

말에 호응하듯 벌떡 일어나서는 재차 달려들었다.

행동이 어찌나 빠른지 전광석화나 다름없다.


하지만 상대가 나빠도 너무 나빴다.

아무리 본인의 몸이 아니라 해도 수십 년간 무예를 단련해온 무예인 천귀 성대훈이었다.


보기에는 뻗어오는 손짓 발짓이 너무 한심한 수준이라 차마 맞아주기도 힘들다.


"보아하니 너 자신이 우월하다는 걸 알았을 때 매번 희열을 느껴왔겠지."


처음 듣는 말투나 행동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약자를 괴롭히며 그 위에 서 봤자 결국에 돌아오는 건 비난과 허무뿐인데도 말이야."


이영우는 그저 드는 굴욕감과 수치심을 어떻게든 풀고자 노력하기 바빴다.

한껏 달아오르는 얼굴로 씩씩거리며 계속해서 손과 발을 놀렸다.


"넌 그것이 참으로 치졸한 악독함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걸 알아야 할 텐데 말이지."


아무리 성질껏 휘둘러 봐도 잘해야 옷자락과 머리카락에 스치는 정도가 다였다.

욕지거리와 허공을 가르는 바람 소리가 골목 안에 요란히 울려 퍼졌다.


"스스로 구긴 네 인생은 다시 편다고 해도 자국이 남을 것이다. 볼품없게 만든 건 자초한 일이며. 그로 인해 훗날 후회하고 또 후회하며 죗값을 치를 날이 올 거라는 걸 잊지 말고 명심해라."


비꼬는 것으로밖에 안 들리는 말들에 이성은 점점 사려져 간다.

그렇다고 해서 없던 실력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으니 애꿎은 허공만 가르는 건 여전하다.


"권성훈 뭐해 씨발! 와서 이 새끼 좀 잡아봐!"


싸움꽤나 해서 부른 친구는 불러도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다.


친구인 권성훈은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고 있었기에 잘 보였다.

처음에 돕고자 했던 마음은 물밀 듯이 밀려오는 의아함에 밀려난 지 오래였다.


간단하게 피하는 게 우연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듯 표정은 여유로웠다.

전체적으로 어색한 부분을 찾아볼 수 없는 동작에서도 마찬가지로 여유로움이 묻어났다.


"찐, 찐따라며. 저게 무슨 찐따야! 몸 좀 놀려본 놈이 분명해 보이는데?!"


결코 처음 몸쓰는 게 아니라는 것을 모를 수가 없는 수준이었다.

서울에 살 때 알던 친구인 권성훈은 지선우를 본 적이 없어 지금 이 순간이 심히 당황스러웠다.


보던 와중에 놀라 몸을 흠칫 떨기도 했다.


어찌할지 갈피를 못 잡는 사이 결국 사고는 일어나고 만다.


"악- ! 씨발! 내- 발!"


마구 허공을 휘졌던 손과 발 중 발이 전봇대를 차기에 이르렀다.


이제 손발로도 이 감정을 풀 수 없는 처지가 되니 멀쩡한 입에 힘을 모아 쏟아내는 이영우다.

스스로가 만들어낸 감정에 지배되어 흡사 짐승 같은 악을 쏟아냈다.


"야이 개새끼야 돌았냐? 돌았냐고 이 씨벌개 거지 같은 새끼야-!"


참으로 하찮은 악에 지선우의 입에서 실소는 흘렀다.


발을 붙잡고 엎어져 있는 이영우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것도 잠시.


"발등 골절이니 병원에 가보는 게 좋을 거다."


이 말을 남기고는 등을 돌렸다.


"야! 야! 거기서, 거기서라고! 개쳐맞기 싫으면 서라고오!"


엉거주춤 일어나 다시 통증에 넘어지는 이영우를 뒤로 하고 갈 길을 걸었다.

지선우를 항상 밀고 때리기만 했던 손으로 잡으려 뻗어봐야 이제는 닿지 않을 먼 곳에 있어 닿지 못했다.


나아가던 걸음은 골목길 끝에 이르러 무수히 많은 빛이 밝히는 곳에 들어가서야 잠시 멎었다.


뒤돌아 웃는 모습은 조금 전 무심했던 얼굴과는 차이가 컸다.


본래의 주인은 천귀 성대훈과는 달랐다.


좀전과는 다르게 서글픈 미소를 띤 얼굴이 자신이 결코 이루지 못한 결과를 보았다.


이렇게 하잘 것 없이 넘길 수도 있는 일에 죽음을 택한 것이 못내 아쉬워 돌아가는 걸음은 무거웠다.


죽고 나서도 소리 없는 눈물이 나온다는 것이 더욱 지선우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


끝없이 펼쳐진 파란 하늘 아래 수없이 자리한 건물 밭 한편.


이태원 고급 주택가에는 너른 마당이 있는 2층 주택이 하나 있었으니.


[지선우 군은 이번에는 본 실력으로 이겼고요. 결승전은 일단 고민 중이라고 하네요. 근데 알다시피 이영우 앞에서는 공포와 두려움 때문에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니 아마 어제처럼 부분 빙의라도 해달라 부탁하지 않을까 싶네요.]


무선 이어폰에서 들리는 전화 음성에 2층 그림 작업실에 들린 천여휘가 말했다.


"내일 결승전은 내가 가도록 할게."


인귀는 한풀이 자를 돕고 천귀와 빙의할 때는 혹 생길지 모를 사고를 우려해 감시하는 역할도 겸하게 되어 있다.


작업실 내에서 가져오지 않은 카본 연필을 챙겨서는 가볍게 발을 굴렀다.


큰걸음.


집안의 풍경이 발구름 한 번에 순간 역변한다.


[집이세요?]

"아니."


도착한 곳은 독일 뤼데스하임 강변가.


강변가에 나타나 바로 옆에 있는 간이의자에 앉아 거치대에 놓인 판화지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독일."

[작업하러 가신 거군요.]

"그렇지."


길을 지나는 한 여성이 분명 없던 공간에 나타난 천여휘를 보며 의문을 느꼈던 것도 잠시에 지나지 않았다.

그저 착각한 것이라 여기며 자기 갈 길을 가기 바빴다.

대개의 사람들은 그랬다.


이제는 익숙해진 현대인의 삶이다.


[아트 뉴스에서 또 연락 와서 인터뷰 한 번만 따달라고 사정사정하던데. 역시 안 하실 거죠?]


아트 뉴스는 미국 유명 미술전문매체.

6년 전부터 이번 해까지 세계 영향력 100위 안에 이름을 올린 '마루'의 인터뷰를 하기 위해 한 달에 1~2번은 꼭 전화해 물어오고는 한다.


"안 한다고 전해."

[얼굴은 안 밝히더라도 인터뷰 한 번쯤은 해줘도 되지 않을까요?]


"해서 뭐할까. 귀찮기만 하지."

[아시다시피요. 사실 작업하는 아티스트는 여러 명인데 한 명으로 포장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은 계속 나오고 있잖아요.]


임파그토, 그라타주, 스그라피토, 스텐실링, 드로잉, 하이퍼리얼리즘 등등.


한 사람이 배웠다고 보기 힘든 수준의 기법을 한 작품에 담기도 하고 그 안에 사회풍자적 메시지를 담은 경우도 워낙 많아 논란과 이슈를 몰기도 하는 화가가 천여휘다.


"제작 영상 찍어서 공개했는데도 그러면 뭐 어쩔 수 있나."


각각 다른 기법을 활용한 3개의 작품을 공개했는데도 믿지 못하는 미술가는 꽤 많았다.

제작 과정 내내 뒷모습만 찍혀 있으니 체형만 비슷하게 꾸며 찍은 것이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는 실정이었다.


[제작 영상 하나 찍으면서 인터뷰랑 손 정도만 자세히 나와도 논란은 없어질 거 같은데. . .]


너무 알려진 게 없다는 점이 흥미와 관심, 화제성을 불러와 마케팅이 되기도 했다면 그런 점에서 증명은 어려워 항상 논란은 일어났다.


"목소리. 손. 결국은 얼굴과 신상을 다 밝히지 않는 한은 논쟁이 끊이지 않을 테지. 그렇다면 일일이 대응할 필요가 있나. 뭐라 가타부타 떠들어대든 간에 내가 그린 것들인 건 변함이 없으니 말이야. 지금은 색동에 소속된 예술가가 나 하나만 있던 시절도 아니고, 내 그림 값어치나 평판이 떨어져도 운영되는데 큰 지장은 없지 않나?"

[그야 그것도 그렇긴하지만서도. . . .]


색동은 국내 유일의 예술가 매니지먼트사.


천여휘는 그림을 평가받고자, 돈을 벌고자 그리는 것이 아니었다.

하여 세간의 평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다른 용건은 더 없고?"

[네. 뭐.]

"그럼 작업하게 이만 끊지."

[그럼 내일 연락드릴게요.]


전화를 끊고 좋아하는 클래식 노래를 틀었다.

취미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는 어느덧 500년 하고도 2년이 더 되었다.


그 동안 수많은 신분을 거치며 쟁쟁한 화가로 여럿 이름을 남겨온 게 천여휘.


그림을 그리는 건 고단한 과정이다.

그렇다 보니 수십 수백 년을 살아야 하는 인귀에게는 꽤나 하기 좋은 취미였다.

불로장생을 꿈꾸는 이들은 실제로 불로장생의 삶을 살아보지 못했기에 그런 로망을 가지는 것이지.

실제로 살아보면 아주 따분하고 지루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한풀이 자는 줄어들어 최근 1년 동안 맡은 숫자라고 해봐야 고작 3명에 불과하다.

150년 전까지만 해도, 아니 70년 전까지만 해도 수십 명은 되었던 걸 고려해보면 참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만큼이나 사람 역시도 변하고 있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이 아닌가.

또 하나 한국의 인귀가 전보다 확연히 줄어 5명이라는 점에서 그 차이는 더 크게 느껴진다.

점점 순수하고 선한 사람이 사라진다는 얘기나 다름없는 이야기에 문득 풍경을 보다 보면 씁쓸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바로 오늘처럼 말이다.


세계의 변화에 따라 빠르게 변하는 특유의 심성과 기질이 썩 볼만한 감상거리는 아니었다.


전화온 색동의 대표 고군석 역시 인귀로 내려온지는 100년도 되지 않는 신입 인귀였다.


들었던 씁쓸함을 직접 내려온 커피 한 모금으로 희석시키고는 작업을 이어갔다.

유려히 움직이는 손이 판화지 안에 세상 일부의 풍경을 그려넣었다.

그러는 중에도 길을 지나는 많은 사람이 빨리 감기 된 세상의 일원처럼 스쳐 지나가고는 했다. 몇몇은 관심을 보이며 구경하다가 감탄도 하며 지나가기도 했다.


그리고 집중해서 그리다 보면 시간은 빠르게 흘러 또 하루의 끝이 임박해가고 있다는 사실을 변화로 알려주기도 했다.

이는 오늘이라 해서 다를 것은 없었다.


어느 시점에 이르니 사람은 점점 늘어나고 해로 달구어진 세상이 서서히 식어간다.

그럴수록 기울어가는 해 뒤로 색의 변화는 더디게나마 찾아와 시간을 짐작케 해준다.


"벌써 밤이 찾아오는구나."


빛이 빗겨나는 자리를 채우는 어둠이 주변의 경관을 서서히 변화시켰다.

연필을 내리고는 인간이 만들어낼 수 없는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을 잠시간 내다보았다.

붉은 석양이 시야 한가득 뒤덮어서는 낮에는 볼 수 없는 매력을 자아냈다.


풍경을 감상하는 것 또한 시간을 죽이는 데는 최적의 취미 중 하나라 눈에 담아 음미했다.


감상을 방해한 건 익숙한 한 사람의 목소리였다.

정확히는.


"세상은 참으로 자비롭지 않은가. 말썽만 피우는 인간들을 이리도 포근하고 아름답게 안아주니 말일세."


보통 사람이 아니라 차사 이안의 목소리다.


인간의 행동으로 인해 세상은 많은 것이 바뀌었다.

화려함 속에 가려져 있을 뿐 점점 나빠지는 자연환경으로 인해 생태계는 급속도로 혼란스러워지고 있었다.


"언제나 그래 왔듯이 나아가며 방법을 찾아내겠지."


이 말은 천여휘가 시선은 여전히 풍경에 둔 채 한 말이었다.

그게 나쁜 쪽인지 좋은 쪽인지는 500년을 인세에서 산 그도 몰랐다. 하지만 역사를 돌이켜보면 조금 엇나갈지언정 항상 그 끝은 인류에게 좋은 쪽으로 이어졌다.

이번 역시도 그렇게 잘 넘기지 않을까 천여휘는 예상하고 있었다.


이안이 무겁게 다시 입을 열었다.


"실혼인이 생기했다네. 누구의 소행인지는 아직 모르나 보통 악귀가 아닌 것은 분명해."


실혼인은 악귀에게 영혼을 빼앗겨 죽은 피해자를 칭하는 말.


악귀는 영혼의 흡수해 힘을 키우고 영생을 사는 존재다.

순리대로 살아가는 인간이 명부도 모르게 명을 달리한다는 것은 영의 존재에 속하는 누군가가 개입했을 때뿐이었다.


"그 정도 존재감이라면 자네 동생일 수도 있겠더군."


별반응이 없던 천여휘가 그제야 시선을 옮겨 이안을 보았다.


"그런가. 그 녀석이 어렸을 때부터 숨는 거 하나만큼은 잘했지. 사념을 굳이 없애지 않고 남겨두고 갔다면 내게 남긴 메시지일 수도 있겠네."


강력한 힘을 갖춘 악귀라면 흔적도 남기지 않는 게 보통이었기에 해볼 수 있는 추측.


가훈아.

가슴에 차오르는 동생의 이름을 삼켰다. 동시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여성은 눈을 지그시 감는 것으로 눌러 감췄다.

한데 애써 밀어 넣은 여성의 이름을 이안이 끄집어내 눈은 뜨였다.


"양선화. 그 여인이 환생을 한 것인지도 모르겠군 그래."


신체는 영혼을 품은 육신이다.

저승에 있던 영혼이 환생하게 되면 이승에 적응하는 시간은 필요하다.

완전히 적응하기 전까지는 영감靈感ㅣ이 특출나게 뛰어나지 한 그 영혼의 전생을 알 수는 없었다.

각각 적응하는 시간은 달라도 20살 전에는 완전해져 전생을 알아보는 게 가능한 존재들이 사후 세계의 일원들.


이와 비슷한 일은 전에도 있었고 그때는 환생한 양선화의 아버지가 목적이었다.


".........."


지키지 못했다.


아니.


"녀석은 환생 여부를 우리보다 먼저 알 수 있을 터이니 그럴지도."


지키지 못한 게 아니라 지키기 싫어서 모른 척했는지도 모른다.

동생인 천가훈의 삐뚤어진 염은 환생 여부를 알아내는데 특화되어 있다.


정말.

양선화는 환생을 한 것일까.


속으로 묻는 말은 천여휘의 머릿속에서만 맴돌다 사라졌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슬기로운 한풀이 생활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5 25화 24.02.01 11 0 14쪽
24 24화 24.01.30 9 0 18쪽
23 23화 24.01.28 8 0 18쪽
22 22화 24.01.28 10 0 12쪽
21 21화 24.01.26 8 0 14쪽
20 20화 24.01.26 12 0 16쪽
19 19화 24.01.25 16 0 15쪽
18 18화 24.01.23 10 0 12쪽
17 17화 24.01.22 13 0 15쪽
16 16화 24.01.21 10 0 20쪽
15 15화 24.01.21 13 0 14쪽
14 14화 24.01.20 14 0 15쪽
13 13화 24.01.20 11 0 11쪽
12 12화 24.01.19 8 0 13쪽
11 11화 24.01.18 13 0 14쪽
10 10화 24.01.17 17 0 13쪽
9 9화 24.01.17 15 0 12쪽
8 8화 24.01.16 18 0 14쪽
7 7화 24.01.16 21 0 12쪽
6 6화 24.01.15 25 0 15쪽
5 5화 24.01.15 23 0 14쪽
» 4화 24.01.14 33 0 21쪽
3 3화 24.01.14 47 0 16쪽
2 2화 24.01.13 116 1 20쪽
1 1화 +1 24.01.13 220 4 9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