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빈대, 들러붙다.
그는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옆에 있던 여자는, 소녀는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뭔가 안타깝다, 그렇게 생각했지? 지금?”
깨어난 첫마디가 그거라니, 참 사람마음을 이상하게도 읽는 취미가 아닐까. 흑발의 소녀는 대답하려다 입술을 깨물고, 그리고 두려움에 찬 눈으로 남자를 보았다.
“난 황제다.”
그게 무슨 상관일까.
“황제 할아버지가 와도 우리집에서 못 재우니까 당장 나가, 당장.”
“하루만 재워달라. 난 갈 곳이 없다는 걸 너도 잘 알지 않느냐?”
“알지. 그게 자업자득이라는 것도 잘 알고.”
옥구슬같은 눈동자는 한 치의 흔들림없이 정박되어 있었다, 황제에게. 그는 더 이상 황제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상투적이고 표면적인 이유가 아니었다.
“그럼 넌 그거 알지? 난 니가 싫다는거.”
황제의 대답은 심드렁했다.
“아니.”
그는 팔베개를 한 채로, 벌써 자려는 자세였다. 그러나 딱딱하다 느껴질 정도의 척추뼈를 자극하는 좋은 쿠션을 만끽하기도 전에, 커다란 솜베개는 사라졌다. 그녀는 팔뚝에 베개를 필사적으로 끼고 있었다.
“당장 나가라고!”
“어허, 성질머리하고는.”
“난 당신 보모가 아니야!”
“그럼. 난 보모라고 한 적 없다. 내 스승이 아니더냐?”
“스승 앞에서 밥이나 축내는 식충이가 왜 이렇게 뻔뻔해?”
그 말에 황제는 피식 웃었다. 은은한 강물에 흘러가는 나뭇잎처럼, 더없이 한가로운 태도였다. 말투도 그렇게 흐르는 말투였다.
“밥 먹고 일을 머슴처럼 해줬어봐라. 식충이란 소리가 붙겠느냐. 일이라도 잘한다 했겠지.”
“당신은 일 안할 거 아니까. 빨리 꺼져! 근위대 부른다?”
그 말에 황제는 멈칫했다. 그리곤 손을 눈가에 붙이고...울먹거리는 표정을 짓고...
“아함.”
...하품을 했다. 그리고 눈곱을 떼어냈다. 그 지저분한 것을 침대에 슥슥 문지르는 걸 본 그녀는, 식충이가 문제가 아니란 걸 직감했다.
“...죽여...죽여버릴거야.”
“어허, 좋다. 내가 제안하마.”
여자는 팔짱을 꼈다. 그리곤 황제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대꾸해버렸다.
“싫은데? 또 이상한 짓꺼리를 하려고 하는군. 그럴 줄 알고 대답을 많이도 준비했어. 근데 대답이 다 똑같네. ‘싫어, 싫어, 싫어’라고.”
“그럼 강제로 뺏는 것도 고려해봐야겠는데.”
“어딜?”
“여기.”
한 손으로 머릴 받치고 왼쪽 다릴 꼬고 누워버린 황제는, 영락없는 황제의 기품이 흘렀다. 그게 침대라는 게 문제였다. 게다가 침대는 ‘다른 집’ 여자의 침대였다.
“침대에서 빨리 내려오지 못해! 깨진 바가지는 어느 짝에도 쓸모가 없다더니!”
“잠 좀 자자. 짐은 이 나라의 황제가 아니더냐.”
“흥, 지금의 네가 황제?...황제도 아닌 것이...날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감히...그러고 보니 흑마법사를 우습게 보는 데에도 정도가 있지...빨리 안 나가면 부른다?”
“뭘 말이냐?”
“흑마법사가 할만한 게 달리 뭐가 있겠냐? 악마를 불러서...네 간이라도 빼먹으라고 해주지.”
그러나 황제는, 손질도 안되어 다 헝클어진 짧막한 흑발을 매만졌다. 그리곤 무심하게 대답했다.
“맘대로 하려무나. 여튼 난 잔다. 깨울 시 그 악마의 간이 없어진다는 것만 기억하도록.”
그는 그렇게 말하더니 방어막을 쳐버렸다. 그것도 속이 안 보일만한 불투명한, 회적색 빛이 감도는 특이한 질감이다 싶을 방어벽이었다. 그러나 여자도 만만하지 않았다. 질감이고 나발이고, 방어벽을 냅다 걷어차 버린 여자가 바닥에 침을 내뱉었다.
“이런, 천하의 쌍것 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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