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sk****** 님의 서재입니다.

큰소리 쳐 보자

웹소설 > 일반연재 > 일반소설, 중·단편

완결

skyhighd
작품등록일 :
2022.09.01 09:29
최근연재일 :
2022.09.01 09:31
연재수 :
1 회
조회수 :
30
추천수 :
0
글자수 :
14,740

작성
22.09.01 09:31
조회
30
추천
0
글자
32쪽

..

DUMMY

차창 밖으로 흘러가던 네모반듯한 건물들의 모습이 하나둘 사라지고 이젠 제법 봄기운이 느껴지는 농촌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논두렁에는 파릇파릇한 풀들이 돋아나오고 있었고 들녘의 논들은 이제 겨우내 얼어붙어 있던 바닥을 갈아엎고 물을 가득 담아 놓아 이제 모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김형숙은 고개를 돌렸다. 뒤돌아보니 아이들이 불편하게도 안전벨트에 끼어 널브러진 채 곯아떨어져 있다. 서민철 쪽을 바라다 보니 눈에 초점이 없다. 눈을 깜빡거리는 것이 잠의 여신이 눈두덩에 쇳덩이를 달아놓은 듯했다.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어 힘없이 핸들을 잡은 서민철의 팔을 후려쳤다. 순간 서민철이 흠칫 놀라더니 몸을 바로잡으며 심드렁하게 대꾸한다.

‘왜 그래?’

‘못 봐주겠네. 졸리면 여기 졸음 쉼터에 들러서 나랑 교대하지?’

서민철이 뻗댄다.

‘조는 게 아니야. 옛날 생각하는 거야.’

‘옛날 무슨 생각? 옛날 애인 생각? 아니면 회사 앞 청사초롱 바의 조 마담 생각?’

‘조 마담? 잘도 만들어 내네. 조 마담은 어떻게 알아? 소설을 쓰시는구먼. 홍 마담 아니었어?’

‘맞아. 홍 마담. 보니까. 당신 카톡에 자주 뜨던데. 서 사장님 왜 그렇게 뜸하세요. 이번 불금에 한 번 들르세요. 물 좋은 어장에 한 번 들르세요.’

콧소리까지 섞어가며 연기를 한다.

‘놀고 있네. 내 핸드폰 깔까? 그 대신 당신 핸드폰도 까는 거야.’

목소리가 너무 높았는지 널브러져 있던 규준이가 눈을 부스스 뜨더니 주위를 둘레둘레 쳐다보며 입을 연다.

‘엄마. 여기 어디야.’

‘응. 여기 차 안이야. 바닷가 아직 멀었으니까 더 자.’

‘나 오줌 마려워.’

서민철이 핸들을 탕 친다.

‘결국 졸음 쉼터에서 쉬어가야겠군.’

속력을 늦추어 졸음 쉼터로 들어갔다. 주말이라 그런가 빈자리를 찾기가 어렵다. 가까스로 빈자리를 찾아 주차하고 아이들 오줌을 뉘고 나오니 푸드트럭이 기름 냄새를 풍기고 있다. 아이들 성화에 소떡과 음료수를 사서 차로 돌아오니 이미 아내가 운전석을 차지하고 있다.

‘나와. 운전은 내가 해야지.’

‘못 믿어. 다음 휴게소까지만 내가 운전할게. 당신은 그다음에 책임져.’

‘아니 초보 운전 딱지도 못 뗀 사람이 이 네 사람의 운명을 떠맡으려는 거야.’

김형숙이 목소리를 높인다.

‘왜 그래. 졸리면 잠깐 쉬어. 세상은 한 바퀴로 굴러가지 못한다잖아. 두 바퀴로 굴러가야지. 그게 세상의 이치거늘. 잔말 말고 조수석에 앉거라.’

‘조수석에 앉거라.’

입 주위에 고추장을 잔뜩 묻히고 소떡을 먹던 아연이가 엄마의 말투를 흉내내며 서민철의 바짓가랑이를 조수석으로 잡아끈다.

‘어어. 고추장. 고추장.’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바짓가랑이에 벌건 고추장 자국이 나 있다. 하릴없이 조수석 문을 열고 앉았다.

‘영. 못 미더워.’

‘뭐가 못 미더워. 친구들이 다 인정한 운전 솜씨인데. 당신만 끌탕을 해요. 끌탕을.’

옥신각신하다 휴게소를 나서 고속도로로 들어섰는데 위험천만하게 SUV 한 대가 바람을 일으키며 쏜살같이 추월해 지나간다.

‘어어. 위험해. 내가 마음이 안정이 안 돼.’

‘아유. 조용히 잠이나 주무세요. 내가 안전하게 모셔다드릴 테니.’

한참 참견해대던 남편이 어느 틈엔가 조용해졌다. 슬쩍 돌아보니 고개를 떨어뜨리고 곯아떨어졌다. 이제 어느덧 차창 밖으로는 바다가 보이기 시작한다. 새파랗다고나 해야 할까? 창문을 여니 따뜻한 봄바람과 함께 바닷냄새가 밀려 들어온다. 내비 상으로 볼 때는 예약해 놓은 펜션이 멀지 않다. 라디오 볼륨을 조금 높였다.

‘아 깜빡 잤네. 다 와 가지?’

라디오 소리 때문인지 서민철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다.

‘네, 다 와 갑니다. 저기죠?’

복다리 펜션이라는 간판이 허름한 단층 슬래브 지붕 위에 위태로이 걸려 있다.

‘아. 좋다. 역시 내 선견지명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내가 그랬잖아. 이름만 봐도 벌써 포근한 느낌을 주는 아늑한 집일 거라고. 이름은 못 속인다니까.’

‘그 선견지명이 있어서 이탈리아에 가서 그 난리를 쳤어요?’

스멀스멀 서민철의 기억 속으로 이탈리아에 갔을 때의 악몽 같은 일들이 기어 올라온다.

국경을 넘을 때까지는 모든 것이 좋기만 했다. 2차선 도로이기는 하지만 하얀 암반이 그대로 드러난 울창한 숲 사이로 지렁이 기어가듯 늘어져 있는 도로를 따라 차를 몰고 갈 때는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일정을 짜는 문제 때문에 조금 언쟁이 있긴 했지만, 파란 하늘, 언뜻언뜻 보이는 파도 거품이 이는 검푸른 지중해, 흩날리며 차창에 부딪는 꽃잎, 모든 것이 너무나 평온하고 한가로워 신경이 곤두서있던 김형숙도 마음이 풀린 것 같았다. 가사도 모르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있는데 갑자기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자신들을 목표로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그때는 깨닫지 못했다. 사이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편도 1차선 도로인 그 위태로운 좁은 길에서 추월할 듯이 나란히 달리면서 경찰들이 창문을 열더니 뭐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영어에는 자신이 있어서 영어로 대꾸를 했는데 전혀 알아듣지를 못하는 거였다. 그래서 일단 차를 길가 쪽에 세웠다. 선글라스를 쓴 순경이 창문을 내리게 하더니 창틀에 팔꿈치까지 걸치고는 열에 받쳐 떠들어 댔다.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자 경찰은 둘을 차에서 끌어 내리더니 경찰차에 태우고는 어디론가 출발하는 거였다.

‘어디로 가는 거야. 내가 도대체 뭘 잘못한 거야. 왜 무턱대고 끌고 가는 거야. 나도 권리가 있는 사람이야. 변호사 불러.’

아무리 뻗대 보았자 거긴 이탈리아였고 자신들을 변호할 사람을 아무리 목청껏 불러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목소리가 높아지자 저항하는 것으로 보였는지 수갑까지 꺼내서 한쪽 고리는 손에 채우고 또 한쪽은 좌석에 채워 놓는다. 그러자 김형숙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보다 못해 서민철이 입을 열었다.

‘자기. 진정해. 이 사람들 그래 봐야 말이 통하지 않으니 입만 아파. 조금만 참자고. 이제 말이 통하는 곳에 가겠지. 그때까지 조금만 참아.’

김형숙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얼마 안 걸려 한국으로 치면 파출소 정도 되는 곳에 도착했다. 거긴 그래도 말이 통한다. 말을 들어보니 속도위반. 내리막길이라 사고가 자주 나는 곳이고 그래서 속도를 엄격히 제한하고 단속을 심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경찰들이 속도위반을 인지하고 추격을 하는데 속도를 늦추지 않고 계속 속력을 내는 것을 단속에 불응하는 것으로 보았고 더구나 소리를 지르며 저항까지 했으니 어땠겠는가? 김형숙은 진정이 안 되는지 여전히 훌쩍거리고 있었다. 단속 불응에 저항까지 한 것이라면 완전히 구속감이라는 거다.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고 거금의 속도위반 벌금까지 물고 경찰서를 나섰다. 렌터카가 있는 곳까지 가야 하는데 그게 어딘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얼굴이 죽을상이 된 김형숙은 다리에 힘이 빠지는지 아무 데나 퍼질러 앉아 다 때려치우고 집에 돌아가자고 징징대고 있었다. 그렇다고 렌트한 차를 버려놓고 갈 수도 없고 그 끔찍한 경찰서에 들어가 렌터카 있는 곳까지만 데려다 달라고 하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할 수 없이 영어를 잘하는 택시 운전기사를 골라 자초지종을 얘기했더니 알겠다며 데려다주겠다는데 요금을 엄청나게 부른다. 할 수 없이 그 운전사가 부르는 대로 요금을 지불하고 렌터카 있는 곳까지 갔는데 그다음부터가 문제였다. 김형숙은 혼이 나갔는지 계속 징징대며 그냥 돌아가자고 한다. 여기서 돌아가다니.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은 돈대로 들이고 구경은 그 이탈리아의 허름한 파출소를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신혼여행을 변변치 않은 곳으로 갔다 왔다는 이유로 기회 있을 때마다 끌탕을 하는데 이 기회에 그걸 만회해 보려고 큰 소릴 땅땅 치고 떠난 것인데 결과가 이렇게 되고 말다니. 렌터카에 오르면서 설득 모드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돌아갈 수는 없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하고 머리를 쓰고 일정을 짜고 했냐? 이제 아이라도 생기면 이런 모험은 꿈도 꿀 수 없다. 나만 믿어라. 이제부터는 꽃길이다. 그래도 경찰에 시달리며 얼마나 학을 뗐는지 말도 못 하고 김형숙은 고개만 절레절레 흔든다. 그래서 서민철은 강수를 두기 시작했다. 그냥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여기 이탈리아에 왔다면 원형경기장도 보고 카피톨리노 언덕에 가서 사진도 찍고 왜 그 있잖아 오드리 헵번의 그 진실의 입에 손도 넣어보고, 당신이 거짓말을 하는지 안 하는지 알아보려고 했는데 그걸 포기할 거냐. 오드리 헵번 소리에 잠깐 눈빛이 반짝였는데 그 이후로는 반응이 없다. 서민철은 열받아서 그럼 차 몰고 당신이나 가 나는 여기 이탈리아에 뼈를 묻겠어 하면서 문을 쾅 닫고 내렸다. 물론 그 당시 김형숙은 운전을 할 줄 몰랐을 뿐만 아니라 운전면허도 없었다. 시간이 지나니 진정이 되어가는 것 같아 어거지를 부려서 로마 시내로 들어섰다. 어쨌든 허름한 숙소에 짐을 풀고 쉬고 싶다는 김형숙을 설득 반, 협박 반으로 데리고 나와 유명한 관광지 몇 곳을 돌았다. 유명한 관광지라야 뻔했다. 성당 몇 군데, 로마 시대의 조각상, 동상. 가는 곳마다 몰려다니는 관광객들에게 치여 돌아다니는 것이 몇 배 더 힘들었다. 노천 카페에 앉아 다리쉼을 하면서 앉아 있다 보니 한국 사람들이 많이도 지나간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한국 사람들의 말소리. 그 친숙한 말소리에 마음의 안정을 찾았는지도 모른다. 무한정 앉아 있을 수도 없어서 점점 쪼그라들어가는 김형숙을 부축해서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대로변을 걷고 있는데 뒤에서 오토바이의 굉음이 들려오는 거였다. 그래서 피하려고 돌아보는 순간 오토바이를 몰던 검은 선글라스가 손을 뻗어 김형숙의 핸드백을 날렵하게 채가는 거다. 아야 소리를 지를 틈도 없었다. 김형숙은 그 자리에 쓰러졌다.

‘괜찮아. 다친 데는 없어.’

‘응. 괜찮아. 그런데 내 핸드백 어떻게 해.’

‘그까짓 핸드백이 중요해. 사람 안 다친 게 어딘데.’

‘그렇긴 하지만. 어떻게 해. 신고해야지.’

‘신고한다고 잡히겠어. 그냥 잊어버리자.’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복기해보니 그 핸드백 속에는 여행하는데 생명과 같은 여권이 들어있었다. 서민철의 여권도 같이. 여권이 없으면 여기 로마에서 발이 묶이는 거다. 다리에 힘이 풀려 잘 걷지도 못하는 김형숙을 반쯤 업다시피 해서 숙소로 돌아왔다. 다행히 서민철의 지갑과 휴대폰이 서민철의 주머니에 들어있던지라 그래도 다행이었다. 대사관에 전화를 하니 조심하셔야지 어찌 여권을 잃어버리냐며 핀잔을 준다. 오늘은 어쨌든 늦었으니 내일 나오시라고 한다. 금방 발급이 되냐고 했더니 사나흘은 족히 걸린단다. 그다음 며칠간은 악몽이었다. 나가서 바람이라도 쐬고 오자고 해도 김형숙은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움직일 줄을 모른다. 하릴없이 그 좁아터진 숙소에 웅크리고 앉아 아는 사람이 없나 이 궁리 저 궁리하며 사돈의 팔촌까지 다 떠 올리며 전화를 돌렸는데 성과가 무성과라. 여권을 다시 발급받는 데 꼬박 사흘이 걸렸다. 대사관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는데 그 사람들은 바쁜 거 없다는 태도였다. 똥줄이 타는 자신이다 보니 괜히 목청을 높여볼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자신이 을의 처지니 간절한 표정으로 부탁만 하고는 돌아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보아서 그런가 사흘 동안 먹을 걸 제대로 못 먹어서 그런가 아니면 마음고생을 해서 그런가 김형숙의 볼살이 쪽 빠진 것 같아 사흘을 바늘 방석에 앉은 기분으로 눈치만 보았다. 인천 공항에 내리는 순간에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쉴 수가 있었다.

복다리 펜션 앞에 주차를 하고 문을 열고 들어서니 늙수그레한 양반 하나가 어서 오라고 반긴다. 건물의 겉모습만큼이나 내부장식도 허름했다. 문제는 화장실도 주방도 모두 공용이라는 거였다. 주인 아줌마가 안내하는 방으로 들어서니 침대가 좁은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 침대도 좁아서 네 식구가 꼭 껴안고 자야만 넉넉할 공간이었다. 한숨이 나오려고 하는데 김형숙이 바가지를 긁는다.

‘이거 놀러 와서 스트레스만 쌓여서 돌아가겠어. 우리 그러지 말고 취소하고 다른데 알아보자. 여기서 불편해서 어떻게 해.’

‘아니 하룬데 뭘 그래. 이것도 가까스로 구한 거야. 지금 어디로 옮겨. 그렇다고 돌아갈 수도 없잖아. 애들이 갯벌 체험한다고 잔뜩 기대하고 왔는데. ’

‘집에서 뒹구는 게 백번 나을 뻔했어.’

김형숙이 입술이 잔뜩 부르터 있다.

‘걱정 마.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당신은 씻고 푹 쉬고 있어. 집에서 다리 쭉 펴고 쉬는 것처럼. 다 나한테 맡겨. 아마 내일이면 아 오길 잘했다 할 거야.’

‘제발 그러기를 바래. 그럼 나는 씻고 다리 쭉 뻗고 누워 있으면 되지?’

안심을 시키고 나오니 다른 가족들이 들이닥쳤다. 고만고만 애들에 부부가 나이 지긋한 노인까지 대동하고 나타난 것이다. 그다음부터는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아이들은 금방 친해진다고 규준이와 아연이가 그쪽 집 애들과 어울려 천방지축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까르륵거리고 정신없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평소 낯을 지독히 가리는 김형숙은 씻겠다고 방을 나섰다가는 러닝셔츠만 입고 앉아 있는 노인네를 보고는 질겁을 하고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간다. 서민철이 뒤쫓아 들어가 왜 안 닦고 들어가느냐 씻고 들어가 침대에 누워 있으면 저녁 대령할 테니까 빨리 씻어라 했더니 울상을 지으며 이렇게 대꾸를 한다.

‘아니 저 할아버지가 저렇게 버티고 앉아 계신데 어떻게 수건 떡 걸치고 나돌아다닐 수가 있어.’

이렇게 넋두리를 한다. 혹시 들리지나 않았을까 걱정이 되어 밖으로 나와보니 그 노인과 주인 양반이 죽이 맞아서 하하하 껄껄껄거리며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고 그 아들 내외는 삼겹살을 구우려는지 하나밖에 없는 주방을 차지하고는 잔뜩 벌여놓고 있어서 주방 근처에도 갈 수 없었다. 주방 근처에서 눈치를 보며 서성거리다가 상대 남자와 인사를 하게 되었다. 성격이 호탕한 게 그냥 지나가지 않는 성격인 듯했다. 인연을 더듬어 가다 보니 회사 정 팀장과 아는 사이란다.

‘보통 인연이 아니네요. 이거 반갑습니다. 우리 그러지 말고 합석하시지요. 이거 부엌도 그렇고 화장실도 공유하는 상황이라 은근히 걱정했는데.’

방으로 들어가 양말도 안 벗고 침대에 엎어져 있는 김형숙에게 다가갔다.

‘저기 말이야. 저 집 남자가 우리 정 팀장하고 절친이라네. 당신도 알지. 그 저번에 외식나갔다가 만났던 그 키 크고 풍채 좋은 친구 있잖아.’

‘그래서, 어쩌자는 거야.’

‘아이들도 벌써 낯을 익혀서 신나게 뛰어 돌아다니고 있고. 이렇게 된 거 안면 트고 같이 합석하는 거 어떨까? 벌써 저 사람들이 주방을 차지해서 뭘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네. 어차피 오늘 밤을 그 사람들과 어울려야 할 텐데 마침 저 집 남자가 합석을 하자고 하는데. 당신도 나가서 인사하고 같이 행동하자고. 손해 볼 것 없잖아. 전혀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김형숙이 도끼눈을 뜬다.

‘으이그. 내 이럴 줄 알았어. 큰소리칠 때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자기한테 맡겨 놓으면 편안하게 공주님 모시듯 모시겠다고 하더니. 저 집에 어르신도 계신 데 어째. 내가 다 덤터기 쓰게 생겼네. 어떻게 당신한테 일을 맡겨. 아이들만 아니었으면 안 따라오는 건데. 모임에 나가 친구들 만나서 수다 떨고 편안하게 남이 해 주는 음식 얻어먹으려고 했는데. 결국 이 사달이 나네. 아니 어떻게 계약했길래 이런 집으로 계약을 했어. 하기를.’

‘잘 됐지 뭐야. 우리 식구들끼리 둘러앉아 삼겹살 구워 먹느라고 궁상을 떠는 것보다 얼마나 좋아? 술도 한잔할 수 있고. 애들도 친구가 생겨서 좋고.’

김형숙이 등짝을 후려때린다.

‘결국은 그거였구먼. 술. 에이 웬수야. 그놈의 술. 혹시 두 사람이 서로 짠 거 아니야. 서로 처음부터 아는 사이 아니야?’

‘오해야. 그건. 어느 학자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인간관계가 7단계만 거치면 세계 60억 인구가 다 연결이 된다잖아. 그래서 나온 게 SNS고. 당신도 한 번 나가서 안면을 터 봐. 누군가 하고 연결이 될 거야.’

‘으이구. 내가 못 살아. 이 화창한 날씨에 꽁꽁 싸매고 다녀야겠네. 노인네 때문에 편하게 들락날락하지도 못하겠어.’

‘자 이리 나오라고.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이 기회에 사람도 사귀고 하자고.’

서민철이 머뭇거리는 김형숙을 끌고 나와 인사를 시킨다.

‘우리 집사람입니다.’

두 내외가 싱크대 앞에서 상추, 오이 등 야채를 씻고 있다가 공손히 응대한다.

‘아이고 이거 우리가 하나밖에 없는 주방을 차지해서 번거롭게 해드렸습니다. 그래서 실례인 걸 알지만 주인 양반에게 합석하자고 했습니다. 와서 보니 이런 상황이네요.’

김형숙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응대를 한다.

‘그러세요. 저희도 먹을거리 준비를 해왔는데 그럼 지금 내와야겠네요. 여보 뭐해요. 빨리 삼겹살하고 야채, 밑반찬 챙겨서 내 오세요.’

‘네이.’

상대편 여자도 김형숙과 거의 같은 또래라서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갔다. 그때 아이들이 숨바꼭질이라도 하는지 방바닥이 뚫어지라 쿵쿵거리며 뛰어다닌다.

‘야 너희들 멀리 나가지 말아라. 바닷가로 멀리 나갔다가 큰일 난다. 이 근처에서 놀아라.’

아이들은 대꾸도 하지 않고 시시덕거리며 땀을 뻘뻘 흘리며 신이 났다.

‘아이고 이렇게 나오니 좋기는 좋네요. 아이들이 저렇게 신이 났으니. 집에서 아래 윗집 눈치 보느라 마음대로 뛰어놀 수나 있어요. 오길 잘한 것 같네요. 그렇죠.’

상대편 여자가 야채를 씻어 정리하다가 허리를 펴며 동의를 구한다.

‘그럼요. 그런 맛에 이런 델 오는 거지요. 아이들이 어떻게 되나요. 우리 아이들하고 비슷한 또래인 것 같은데.’

‘우리 큰아이는 초등학교 6학년이고 둘째는 3학년이에요. 큰아이는 벌써 사춘기인 거 같아요. 뭐라고 하면 불퉁대고 방문을 걸어 잠그고는 얘기도 하지 않으려고 하고. 저렇게 뛰어놀 때는 천상 어린애인데 말예요.’

이미 남자들은 싱크대에서 밀려났다. 탁자에 앉아 있던 상대편 남자가 입을 연다.

‘별소리를 다 하는구먼. 남부끄럽게. 그만둬.’

여자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간다.

‘아 글쎄 며칠 전에는 핸드폰을 온종일 들여다보고 있길래 한마디 했더니 그 한마디 했다고 입이 댓 발은 나와가지고 밥도 안 먹고 자기 방에 틀어박혀 말도 안 하려는 거예요. 이젠 쟤 눈치 보게 생겼다니까요.’

대화의 주인공이 다른 아이들에게 쫓겨 방 안으로 들어오자 대화가 끊긴다.

‘얘들아. 그만들 뛰어다니고 이젠 손 씻고 밥 먹을 준비해라.’

대꾸도 안 하고 밖으로 뛰어나간다.

‘저렇다니까요. 이젠 아예 엄마 말을 무시해요.’

‘어디 그 집만 그런가요. 마찬가지지요.’

식탁이 너무 작아서 거실에 신문지를 깔아놓고 저녁 먹을 준비를 한다. 한가운데 휴대용 가스레인지를 놓고 그 주변에 상추, 김치, 밑반찬을 벌려 놓는다. 남자 둘이 가스레인지에 불을 붙이고 삼겹살을 불판 위에 올려놓자 불판이 가열되면서 기름이 튀기 시작한다. 땀을 뻘뻘 흘리며 뛰어다니던 아이들도 주위에 둘러앉는다. 노인도 다가들고 여자들도 끼어들자 거실이 빽빽하다. 벌써 기름 냄새와 연기가 거실을 가득 채우고 있다. 술이 몇 순배 돌자 얼굴이 벌게진 상대편 남자가 입을 연다.

‘낚싯대를 가져왔어야 하는 건데. 그 생각을 못 했어.’

‘낚시를 즐기시나 보죠?’

‘즐긴다기보다는 우리 아버지 따라서 많이 다녀보았지요. 민물낚시. 바다낚시. 민물낚시는 시간을 낚는 거라 좀 그렇고 손맛을 자주 보려면 바다낚시가 최고지요. 특히 배 타고 먼바다에 나가서 낚시하는 거 끝내 줘요. 목만 잘 잡으면.’

노인네가 낚시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뜨이는지 슬그머니 끼어든다.

‘그래 배 타고 나가서 낚시하는 게 최고지. 그런데 요즘 낚싯배 삯이 워낙 비싸야지. 이것도 비싼 취미예요. 사람들을 묶어서나 한번 가볼까? 혼자서 그 비용을 다 대가면서 즐기기에는 너무 비싼 취미예요. 그래도 그게 손맛은 최고지. 어디 낚시 같이 한번 안 나가보려오?’

그러자 남자가 여자들 눈치를 본다.

‘아버지 오늘은 갯벌 체험 온 거라서 그렇네요. 나중에 시간 내서 한번 가보도록 하죠. 그나저나 갯벌에는 잡을 것들이 많이 있으려나. 뭐 인터넷으로 보니까 무슨 게, 무슨 조개, 무슨 지렁이 하면서 잔뜩 선전해 놓았던데 그게 나 잡아 잡쇼 하고 기다리고 있으려나 모르겠네.’

그러자 쌈에 삼겹살, 밥, 고추장을 먹음직스럽게 싸 올리던 규준이가 때는 이때라는 듯이 신이 나서 떠벌린다.

‘엄마. 엄마. 게가. 게가 물지 않을까? 어젯밤에 꿈을 꿨는데 게를 잡았더니 그게 내 손가락을 물고는 놓지를 않는 거야. 그래서 너무너무 아파서 길길이 날뛰다가 깼어. 어떻게 하지? 게가 물면.’

‘그러면서 뭘 갯벌 체험 가자고 그렇게 졸랐어. 나도 꿈을 꿨는데 게가 규준이 고추를 물고 늘어지던데.’

한바탕 웃음이 터진다.

‘엄마는. 고추를 어떻게 물어. 옷을 입고 있는데. 그런데 말야. 성수가 갯벌 체험 갔다 왔다고 자랑하는데 너무 갯벌에 오고 싶었어. 걔가 그러는데 갯벌이 너무 질어서 발이 무릎까지 빠지더라는 거야. 빨려 들어갈 뻔했는데 아빠 도움을 받아서 가까스로 탈출했다는데. 갯벌에 빨려 들어가면 어떡하지. 빨리 내일이 왔으면 좋겠다.’

‘얘가 글쎄 어느 날엔가 와서 갯벌에 가자고 조르는 거예요. 자기 반 아이가 갯벌에 다녀와서 그렇게 자랑을 한 모양이에요. 그래서 미루고 미루다 그렇게 소원하는데 안 들어줄 수도 없겠다 싶어서 이렇게 나왔네요.’

이제는 화젯거리가 낚시에서 갯벌 체험으로 바뀌었다.

노인이 끼어든다.

‘어릴 때는 당연하지. 궁금한 것도 많고, 물어볼 것도 많고, 가보고 싶은 곳도 많고, 먹고 싶은 것도 많고. 내 어릴 때 동네 친구 하나가 서울 구경 갔다 와서는 어찌나 그 자랑질을 해대는지. 전차 탄 얘기, 창경원에 가서 호랑이, 코끼리, 기린 본 얘기. 어린 나이에 얼마나 부럽던지. 그래서 집에 돌아와 우리도 서울 구경 가자고 아버지한테 졸랐더니 씨알도 안 먹히는 거야. 그때 살림살이가 워낙 쪼들렸지. 어린 나이에서야 그런 거 알겠어. 그래서 내가 결심을 했지. 나는 우리 애들만은 그렇게 키우지 않겠다. 그래서 얘들 키울 때는 어지간히도 데리고 돌아다녔어.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우리도 복 받은 세대라는 생각이 들었어. 우리 부모님들이야 그렇게 하려고 해도 그렇게 할 수 없었잖아.’

이야기가 길어지고 밤이 깊어가자 어른들 이야기를 고개를 쳐들고 듣고 있던 아이들도 하나둘 잠이 들고 가끔 파도 소리가 밤의 어둠을 뚫을 때쯤 어른들도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펜션에 같이 들었던 사람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짐을 싸고 있다.

‘아니 왜 벌써 떠나시려고요? 오늘 갯벌 체험하신다더니.’

뒤 트렁크를 열고 짐을 싣고 있던 남자가 한숨을 쉬며 대꾸한다.

‘큰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군요. 애들을 오늘 하루만이라도 그렇게 원하던 갯벌체험을 시키려고 했는데 아버지가 그래서는 예의가 아니라며 지청구를 주셔서 짐을 쌉니다. 애들 데리고 잘 쉬다 오십시오.’

그 사람들이 못내 아쉬워하는 아이들을 데리고 떠나니 북적거리던 펜션이 조용해졌다. 하릴없이 아침 준비를 하기로 했다. 김형숙은 아직도 잠자리에서 뒹굴고 있는 듯했다. 참 아침잠은 많은 사람이다. 주인의 얘기를 들어보니 물때가 점심때는 되어야 갯벌 체험을 하기 좋으니 아침 자시고 푹 쉬고 계시면 알려주겠다고 한다. 아침부터 삼겹살을 구워 먹을 수는 없고 감자와 호박을 넣어 고추장찌개를 끓이기로 했다. 밑반찬을 준비해 왔으니 찌개만 있으면 아침은 거뜬히 때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감자와 호박을 깨끗이 씻어 놓고 물을 가득 넣은 냄비에 고추장을 풀고 가스레인지에 올려놓고 가스에 불을 붙였다. 잠깐 한눈을 팔고 있는 사이에 호기심 많은 규준이가 감자를 썰어보겠다고 부엌칼을 들고 설치다가 검지를 살짝 베고 말았다. 크게 벤 것은 아니지만 피를 보니까 어린 마음에 걱정이 되는지 울음보를 터뜨린다. 그 북새통에 김형숙이 졸린 눈을 비비며 나온다.

‘내 그럴 줄 알았어. 믿은 내가 바보지. 그렇게 큰소리치며 놀러 가면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하겠다고 하더니 어제저녁 내내 그 여자 수다 받아 가며 싱크대 신세 졌지. 오늘 아침도 이 모양이지. 저리 비켜요. 내가 할 테니. 그리고 아이가 저렇게 피를 봤으니 아무래도 불안해요. 갯벌 체험이고 나발이고 오늘 아침 지어 먹고 그냥 돌아가자고.’

그 말을 듣자 규준이 울음소리가 더 커진다.

‘엄마. 오늘 갯벌 체험한 거 글짓기 써가야 한단 말이야. 실컷 자랑해 놓았는데. 내 게는 어떡해.’

아연이가 그거 고소하다는 듯이 말참견을 한다.

‘그러니까 항상 조심해야지. 얘가 항상 이렇단 말이야. 너 때문에 갯벌 체험은 끝이다.’

아연이가 혀를 날름거린다. 그러자 규준이가 아연이의 등짝을 세차게 때린다. 아연이 등짝에서 나무 기둥 떨어지는 것 같은 둔탁한 소리가 들린다. 아연이가 등짝을 어루만지며 울 듯이 쭈뼛거린다.

‘알았다. 그러면 아침 빨리 먹고 간단하게 갯벌 체험하고 일찌감치 돌아가자. 오늘 도로가 엄청나게 막힐 거야.’

잔뜩 심통이 나서 펜션에 있겠다는 김형숙을 뒤로 하고 주인이 챙겨준 체험 도구를 들고 바닷가로 나섰다. 바로 펜션 앞까지 찰랑거리던 바닷물은 저만치 물러가 있고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체험객들이 저 멀리 점으로 보일 정도로 멀어져 있다.

‘아 빨리 가야지. 누나 빨리 가자. 누가 빨리 가나 시합하자.’

규준이가 찰박거리며 달려가자 아연이도 뒤를 따라 뛰기 시작한다. 벌써 등에는 개흙이 튀어 아침에 갈아입힌 옷이 점점이 물들어간다.

‘이거 또 잔소리 한 자락 듣겠구먼.’

예상외로 개흙은 그리 질척대지 않고 모래와 개흙이 적당한 정도로 섞여 있어서 걷기 어려운 정도는 아니다.

‘얘들아, 너무 멀리 가지 말아라. 맛만 보고서 빨리 돌아가자.’

서민철의 말이 들리는지 마는지 아이들은 이미 저 멀리 체험하느라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 쪽으로 달려간다. 발을 디딜 때마다 갯벌을 돌아다니던 게들이 구멍 속으로 숨어 들어가고 골을 타고 흘러가는 바닷물을 따라 이름 모를 해물들이 꿈틀거리며 기어 다닌다. 햇볕이 따갑다.

가까스로 아이들이 있는 곳을 따라잡았다. 아이들은 갈퀴와 호미로 갯벌을 헤집고 있다. 여러번 갯벌을 뒤집는데 별무소득이다.

‘야. 아무 데나 뒤집으면 뭐가 나오겠니? 여기 이 구멍이 있잖아. 아까 게가 이 구멍으로 들어갔잖아. 여기를 뒤집어야지.’

방금 게가 들어간 구멍을 갈퀴로 푹 파헤치니 개흙과 함께 드러난 게가 뒤집힌 채 버둥거리다가 잽싸게 달아난다. 아이들이 달아나는 게를 뒤쫓는다. 규준이가 신나게 뒤쫓다가 움푹 패인 고랑에 발을 헛디뎌 그대로 나동그라진다. 온몸이 개흙으로 범벅이 된다. 시커먼 손을 들고는 울음을 터뜨린다. 그 모습을 보고는 아연이가 웃음을 터뜨리며 놀려댄다.

‘울보쟁이. 울보쟁이. 규준이는 울보쟁이래요. 규준이는 울보쟁이래요.’

그러자 규준이가 개흙이 잔뜩 묻은 손을 들어 아연이의 얼굴을 쓱 훑는다. 새하얀 얼굴이 개흙 범벅이 되어 눈만 껌뻑거린다. 아연이도 커다란 눈을 껌뻑거리다 눈물을 뚝 뚝 떨어뜨린다.

‘야들아. 뭐하는 짓들이야. 그만 가서 씻고 올라가야겠다. 엄마가 질겁하겠다.’

‘아냐 아빠 잘못했어. 더 놀다가. 누나 저기 사람들 많이 모여 있는 데 가보자.’

규준이가 갈퀴와 채집통을 들고 날쌔게 달아난다. 아연이도 그 뒤를 쫓아가고 어쩔 수 없이 서민철도 그 뒤를 따른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은 갯벌이 질척질척해서 발이 깊이 빠진다.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는 것으로 가보니 어떤 남자가 신이 나서 조개를 잡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구멍을 잘 분간하면 낙지도 잡을 수 있다고 한다.

햇볕은 사정없이 내리쬐고 챙이 넓은 모자를 썼는데도 코끝이 빨개질 정도로 햇빛이 따갑다.

‘아빠. 여기 낙지야. 낙지.’

규준이가 호들갑을 떨기에 달려갔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우르르 달려간다. 막상 가보니 규준이가 파놓은 구멍으로 물이 달려들어 구멍을 메웠고 규준이가 들고 있는 것은 갯지렁이다.

‘갯지렁이잖아. 넌 낙지도 모르냐?’

규준이보다 조금 커 보이는 아이가 실망했다는 듯이 핀잔을 준다. 규준이 채집통을 들여다보니 빈약하기는 하지만 조개 몇 마리와 여리여리한 게 몇 마리가 들어있다.

‘아빠. 이거 내일 학교 가져가서 아이들에게 자랑할 거야. 내가 잡은 거라고. 내가 좋아하는 애들을 줘야 하는데 조금 더 잡아야 해.’

규준이를 따라 갈퀴로 갯벌을 뒤집다 보니 발목까지 물이 차오르고 있다. 아마 물때가 바뀐 듯하다. 주위를 돌아보니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아빠, 다른 사람들 다 나갔어. 우리도 나가야겠어.’

아연이가 울상이 되어 다그친다. 펜션이 있는 마을 쪽에서 바람결을 타고 방송이 들려온다. 바람 탓인지 중간중간 끊기는 방송 내용은 대충 밀물 시간이 되었으니 서둘러 돌아오라는 내용인 듯했다.

‘어느새 다들 빠져나갔지?’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빨리들 챙겨라. 빨리 가야겠다.’

아이들이 들고 있던 갈퀴와 채집통을 빼앗듯이 낚아채 들고 아이들을 재촉했다. 다급해지니 자꾸 발을 헛디딘다. 아이들도 자꾸 미끄러진다. 아까는 분명 갯벌 바닥이 단단했는데 어쩐 일인지 함정에 빠진 것인지 발목까지 갯벌에 박힌다. 바닷물이 종아리까지 올라왔다. 아이들을 내려다보니 규준이는 허벅다리까지 물이 올라왔다. 안 되겠다 싶어 규준이를 목말을 태웠다. 아연이는 그래도 나이가 들었다고 키가 훤칠해서 규준이보다는 나아 보여 빨리 걸으라고 재촉을 하고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더럭 겁이 난다.

‘아연아. 안 되겠다. 소리를 질러라. 도와주세요 라고.’

그러자 아연이가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도와주세요. 목말을 타고 있던 규준이는 살려주세요라고 소리를 지른다. 목소리가 어느새 울음소리와 섞여 무슨 소리인지 분간하기도 어렵다. 이제 물이 넓적다리까지 올라온다. 고랑에 빠졌는지 갑자기 허리께까지 물에 잠긴다. 아연이를 내려다보니 가슴까지 물이 차올랐다. 아연이 손을 잡고 가까스로 고랑에서 탈출해서 나오는데 군데군데 돌들이 솟아 있고 더구나 그 돌에 굴 조각들이 붙어있는지 발을 안정적으로 딛기가 어려웠다. 내려다보니 아연이 가슴께까지 물에 잠겨있다.

‘야. 안 되겠다. 아연이 네가 아빠한테 업혀라.’

규준이를 무동 태운 채 아연이를 등에 업으니 앞으로 나아가기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다. 집게와 채집통은 언제 사라졌는지 모르게 사라졌다. 눈앞이 점점 희미해져 온다. 마을 쪽을 바라보니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이 보이고 조그만 배 한 척이 느릿하게나마 서민철 부자쪽을 향해 움직이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아. 됐구나. 아연아. 소리 질러. 규준아. 소리 질러.’

규준이의 무게를 온몸으로 느끼면서 아연이를 받쳐 잡은 손에 힘을 주어 추어올린다. (끝)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큰소리 쳐 보자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 .. 22.09.01 31 0 3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