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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증영대근

늑대의겨울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정증영대근
작품등록일 :
2024.02.29 08:48
최근연재일 :
2024.04.02 23:48
연재수 :
9 회
조회수 :
84
추천수 :
0
글자수 :
37,977

작성
24.03.16 11:47
조회
6
추천
0
글자
10쪽

회색악마

DUMMY

누구든 어린 시절에는 자도 자도 졸리게 마련이다. 다 꾸지도 못하고 깨어버린 꿈이 못내 아쉬워진다.


무슨 꿈이었지? 기억해보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아웅... 왜 그래 갑자기? 더 자고 싶은데...”


사람 말을 알아들을 리 없는 개에게 무심결에 말을 건다. 개가 영특해서 자는 사람을 조용히 사람을 깨우는 법을 아는 모양인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다. 개는 겁에 질려 있다.


목동은 당황한다. 따지고 보면 동굴의 평온이 사랑스러웠을 뿐, 그 세계 자체가 아름다웠던 건 아니니까.


툭! 손에서 빠져나간 마음이 굴러가기 시작한다. 멈춰 세울 수 없는 주사위처럼.


설마. 발각된 건가?


한 순간에 마음이 모조리 먹빛으로 물든다. 다시 생각하니 기가 막힌 일이다. 뒤따라오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도 확인하지 않은 채 소중한 장소에 숨어들어와 버렸던 거다. 게다가 깊이 잠들어 버리기까지.


긴장한 소년은 동굴바닥에 귀를 바짝 붙이고 소리를 듣는다.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소년의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져나갈 것처럼 뛰고 있을 뿐.


그럼에도 소년의 가슴은, 동굴보다 깊고 어둠보다 검은 공포에 절여지기 시작한다. 소년은 꼼짝도 하지 못하고 쩔쩔맨다. 동굴 속에는 무기로 삼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미 꼬랑지를 내리고 끙끙대는 개 한 마리가 있을 뿐이다.


새까만 시간이 흐른다. 숨이 막힌다.


뭐냐고. 이러고 있다간 매질은 피한다 해도 불안에 떨다가 쇼크사할 거야. 나가봐야겠어!


호기심은 공포보다 강하다. 결국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서기로 마음을 먹는다.


누가 와 있든지! 상관없다고! 이렇게는 못 살아. 나는 나갈 거야. 어떤 놈이 왔는지 보자고!


앞선 폭력에는 전혀 저항하지 못했었던 목동이, 이번에는 맨주먹을 꽉 쥔다. 바지자락을 물고 늘어지며 소년을 말리는 개를 질질 끌고, 굴에 들어올 때와 반대로 움직인다. 무기는 없지만 겁도 없다.


굴 바깥으로 나와 꼿꼿이 선다. 아무도 없다. 아무리 주변을 살펴봐도 똑같은 결과.


공기는 맑지만 날씨는 차다. 바람이, 들과 숲에 자라난 모든 잎들을 한 호흡으로 핥듯이 쓸고 뒤흔든다.


풀 냄새. 향긋하다. 전날 무자비하게 폭행당한 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몸이 가볍고 정신이 맑다.


혹시 동굴에서 먹었던 말린 버섯 중에 약효가 있는 게 있었던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려보지만, 다시 동굴로 돌아간다고 해도 답은 낼 수 없을 터다.


대체 얼마동안이나 잔 거지? 하루 동안이 아니라 이틀이나 사흘 동안 잠들었던 거 아닌가?


동굴에서 나와 마을 쪽을 보고 걷는다. 시야를 가리고 있던 나무들이 걷히자 뜻밖의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마을이 불타고 있다.


새벽이다. 낮이었다면 잘 보이지 않았을 시뻘건 불길과, 밤이었다면 어둠이 숨겨주었을 검은 연기가 모조리 선명하다. 새벽은 잔인하게 두 가지 색을 모두 머금고 회색악마처럼 웃고 있다.


멀다. 공격을 한 대상이 무엇인지조차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냄새도 비명도 아직은 와 닿지 않고 있다. 그래서 목동에게 그 광경은 먼 세상의 일인 것처럼 느껴진다.


무엇인가에게 공격을 받은 것은 분명한 것 같지만, 그 와중에 어린 소년이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었을 리 없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목동은 이제 모든 것을 갖게 된다.


아직 목숨이 붙어 있다. 등 바로 뒤에는 몸을 숨길 은신처와 이틀 정도 버틸 수 있는 식량도 있다. 한 번 모른 척 등지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하늘이 벌을 내린 걸까.”


개는 대답하지 않는다.


일말의 안타까운 마음조차 들지 않는다. 도망쳐온 곳이 불타는 광경을 본 소년은 오히려 안도를 느끼고 있다. 배가 가라앉기 직전에 난파선에서 뛰어내린 마지막 생존자가 느낄 법한 소회다.


이제 양을 찾아내지 못한다고 해도 두들겨 맞지는 않겠지. 동굴에 숨어서 한숨 더 잔다고 한들 세상 어떤 것도 나를 벌주지 못할 거야.


그런데 다시 동굴로 돌아들어가려는 순간, 소녀의 얼굴이 불현듯 떠오른다. 소년으로서는 흉내조차 낼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복잡한 매듭으로 묶어 올리고 있던 머릿결의 윤기. 매끄러운 살결, 크고 아름다운 눈. 나들이옷.


나들이옷. 나들이옷.

나들이옷?


뭐야? 그렇다면 성 밖에 있었을 거 아니야?


싸한 절망감이 아래쪽 창자에 고이며 소년의 뱃속을 싸늘하게 뒤흔든다.


애써 고개를 흔들어본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잖아.


그러나 아무리 생각하지 않으려 애를 써도 소용이 없다. 소녀의 미모 때문이 아니다. 딱딱한 빵 한 덩이의 식감 때문이다.


파삭, 부스러지면서 입 안에 고여있던 피를 빨아들이던 빵조각의 감각이 문득 선연해진다. 그것이 어쩐지 따뜻했던 것만 같아 목동은 우뚝 멈춰 선다.


*


소년은 간밤에 공포와 절망으로 걸었던 길을 되짚어 성을 향해 걷는다. 따지고 보면 같은 거리일 텐데 밤의 길보다는 아침 길이 더 짧고 쉽다.


성은 건재하다. 한눈에 들어온다. 사람 눈에는 높은 곳이 먼저 들어오는 법이니까.


불에 그슬린 성벽과 목책에 박힌 화살이 관찰된다. 그래도 성이 함락되지는 않은 듯하다. 그러나 마을은 엉망이 돼 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참상은 자세해지고 절절해진다.


겨우 하룻밤 만에 거의 모든 지붕이 다 불타 사라지고 없다. 아직 눈에 익지도 않은 풍경의 상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모르는 목동이 사방팔방으로 눈을 돌리며 두리번거린다.


사람의 살이 타는 냄새가 아직 가시지 않은 마을에서, 파리와 까마귀들이 잔치를 벌이고 있다. 윙윙거리고 까악 깍! 울어댄다. 그 어떤 부끄러움도 없이.


그 까마귀들을 흉내내기라도 하려는 듯, 개는 죽어 넘어진 사람들의 살과 뼈에 흥미를 보인다. 억지로 잡아서 떼어놓는다.


아 이 개새끼가 진짜. 아무거나 다 쳐 먹으려고 하네?


징그럽고 역하다. 허리에 매고 있던 끈을 풀어 개의 목줄에 매고 잡아끈다.


피를 빨아들인 흙이 이곳저곳에서 무너져 사람의 길은 다 뭉개져버렸다. 혈액으로 개어놓은 흙길에 찍힌 무수한 말발굽 모양이 꼭 지옥으로 가는 이정표 같다. 소년은 그 말발굽을 따라 걷는다.


사람의 마을을 이렇듯 도륙해놓은 병력은 어느 정도였을까. 목동으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다.


다들 도망치다가 죽었다. 등에 꽂힌 화살이 묘비가 되어 하늘을 가리키고 서 있다. 불어오는 바람에 꼬리깃을 부르르 떤다.


화살이 아닌 칼에 목숨을 잃은 이들도 많다. 마을 입구를 지키고 있었거나 순찰을 하고 있던 병사들 같다. 아마도 도망치는 사람들의 뒤를 막고 시간을 끌었을 것이다.


저항을 선택했던 대가는 잔혹했다. 사지가 잘린 채 사방에 내던져져 있다. 그러나 죽었다는 사실만큼은 도망친 이들과 다를 것이 없다.


갑옷은 벗겨져 없어졌고 칼과 칼집은 보이지 않는다. 부러진 창 한 자루가 떨어져 있을 뿐이다. 가져가봤자 쓸 곳이 없었던 듯하다.


계급까지 알 길은 없으나 실로 영웅적인 죽음이었다. 사체를 모아 수습하고 수통을 열어 사자들의 입에 물을 흘려 넣는다. 죽은 이들의 얼굴을 손으로 문질러 닦아낸다.


소년은 부러진 창을 집어 든다. 단순한 모양의 보병용 창이다. 쓸모가 없어 적들조차 버리고 간 물건이지만, 소년의 키에는 걸맞다.


마을에서 도망친 사람들은 닫힌 성문 앞에서 죽었다. 용사들이 목숨을 걸고 분전한 보람도 없이.


성은 건재하다. 오직 성만이 살아남았다.


이미 죽어 넘어진 몸들이 다시 말발굽에 밟혀 으깨어져 있다. 성에서 날아온 아군의 화살에 죽은 자의 시신도 간혹 있다. 남들보다 앞서있다고 안도했을 사람들은 뒤쳐졌던 이들에게 떠밀려 해자에 빠졌다. 해자에 빠진 뒤에도 성벽을 향해 헤엄쳤던 모양이다. 해자의 중간쯤에 장애물로 세워둔 목책과 창에 찔리고 걸려 죽었다.


살기 위해서였다.


성문은 참담히 닫혀 있다. 아무도 수습하지 않는 시체들이 그대로 썩을 준비를 하고 있다. 죽지 않기 위해 도망쳐온 이들을, 죽지 않기 위해 저버린 거다.


살기 위해서였다.


소년은 혼란에 빠진다.


이 참상의 진정한 가해자는 누구인가. 모두 사람이었을 것인데.


닫힌 문 위의 성벽에 사람의 얼굴이 나타난다. 매처럼 날카롭게 생긴, 그러나 확실히 지쳐 있는 노인이다. 소년을 내려다본다.


“누구냐.”


고함을 지르지 않았는데도 목소리가 또렷이 들리는 것으로 보아 군인이거나 군인출신 같다.


갑옷을 갖춰 입었으되 투구는 쓰지 않은 것으로 보아 위험은 지나간 듯하다. 소년을 적의 첩자쯤으로 여기고 있는 모양이다. 합당한 의심이다.


“...목동이오.”


존댓말이 나오질 않는다.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죽어간 사람들을 본 뒤여서다.


물론 예법에 맞지 않는 대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지체가 높을 노인의 눈썹은 한 번 꿈틀하기만 하고 곧 누그러진다. 마지막 남은 양심 때문이 아닐까. 그래도 문은 열리지 않는다. 대신 질문이 던져진다.


“묻겠다. 어째서 너 혼자 살아 있느냐.”

“...”


생판 초면에 살아가는 이유를 묻다니. 꿈속에서든 현실에서든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대답이 없자 한 번 더 묻는다.


“어째서 너 혼자 살아있는 것이냐 물었다...”


스스로에게 묻는 듯한, 그래서 애초에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던 듯도 한 질문이다. 말꼬리를 흐린 노인이 풍선처럼 쪼그라든다. 오만하게 쳐들려져있던 그의 고개도 숙여진다. 마치 소년이 누리고 있는 삶과 젊음에 경배라도 하려는 것처럼.


붕괴되기 직전의 사람이다. 혹시 소중한 사람을 잃은 것은 아닐까. 지위로 보아 성 밖에 거주하고 있지는 않았을 터인데.


그러고 보니 사람들의 퇴로를 지키고자 싸우다가 사지가 잘린 젊은이와 이목구비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순간 노인이 안쓰러워진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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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미녀와 물개 24.04.02 2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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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색악마 24.03.16 7 0 10쪽
6 은신처 24.03.14 8 0 10쪽
5 학대 받는 저녁 24.03.13 8 0 10쪽
4 늑대들의 왕 24.03.12 8 0 10쪽
3 전생의 마지막 24.03.11 9 0 10쪽
2 불운한 새벽 24.03.07 13 0 10쪽
1 영웅전 24.03.07 25 0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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