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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증영대근

재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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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증영대근
작품등록일 :
2023.09.22 09:48
최근연재일 :
2023.09.23 11:35
연재수 :
4 회
조회수 :
62
추천수 :
0
글자수 :
19,859

작성
23.09.22 16:31
조회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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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글자
11쪽

피가 멈췄다

DUMMY

애가 울고 있소. 아마 아직도 그치지 않았을 거요.


애새끼가 쳐 울고 있을 때는, 여자가 우는 꼴을 볼 때랑은 좀 다르지. 심장을 할퀴고 헤집어놓는 맛이 있거든. 지금 내 기분이 안 좋아 보인다면 아마 그 때문일 거요.


아니. 그렇지만 그런 사소한 일로 여기까지 온 건 아니오. 그건 문제가 안 되지. 진짜 문제는 울음이 아니라 피가 멈추지 않고 있다는 거니까.


어제 그놈은 난생 처음으로 칼에 베였소. 나한테 뭘 만들어 먹이겠다고 꼴값을 떨다가 식칼을 놓쳤지. 얼굴에 벌레가 날아와 붙는 바람에 칼 든 손으로 벌레를 쫓다가 그렇게 된 거요. 식칼이 빙글 돌면서, 애 옷깃을 그으며 아래로 떨어지는 광경이 이상하리만치 천천히, 그리고 똑똑히 눈에 들어오더군. 칼날이 쇄골 아래부터 가슴팍까지를 핥듯이 긋고 지나갔소.


그게 어제 저녁 일이었소. 그러니까 그 전까지는 그런 상처가 생겼던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거요. 나도 어지간히 조심해가면서 그놈을 키웠던 모양이지. 그런데 그게 운이 좋았던 건지 나빴던 건지 모르겠소.


약초를 으깨 붙이고 붕대로 싸매놨었소.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생각했지. 그렇데 그렇지가 않았소.


이놈의 피가 멈추질 않았던 거요! 나는 그것도 모르고 평소하고 똑같이 잠이 들었고.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쳐 자던 사이에, 이 엄마 없이 자란 애는 밤새 피를 흘리고 있었던 거지. 한심한 일이오.


나는 새벽녘이 돼서야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았지. 애가 저 죽을 걸 알고 우는 소리에 잠에서 깼소. 붕대를 적시고 흘러나온 피가 이불까지 적시고 있었지. 새빨갛게 말이오. 애가 얼굴이 창백하더군. 조금만 더 늦게 깨어났더라면 영영 애를 잃을 뻔했소.


처음엔 내가 엉뚱한 약초를 붙였던 모양이라고 생각했소. 너무 오랜만에 약초를 쓰다가 착각을 했나 보다, 그랬던 거지. 그런데 별 짓을 다 해봐도 이놈의 상처가 아물지를 않는 거요. 이해가 가지 않더군. 상처가 깊었던 것도 아니고, 피도 많이 나던 게 아니었으니까. 상처가 났을 때 피는 고작 방울방울 흐르는 수준이었단 말이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소. 그런데 아침 일을 나가던 동네노인네가 말하길, 피가 멈추지 않는 병이 있다고 하더군. 만 명에 한 명 정도만 걸리는 병이라고 했소. 아니 왜 그런 병이 있었다는 걸 여태까지 몰랐던 건지...


몰랐지. 어디 긁히지도 않게 꼭꼭 싸매가며 키우느라 그랬던 거겠지. 애가 여덟 살이 되도록 말이오.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소. 미쳐 버릴 것 같았지. 아니 어쩌면 나는 이미 조금쯤 미쳐버렸는지도 모르오. 온몸의 피가 다 멈춰버리는 듯한 느낌이었으니까.


...내가 어떻게 했는지 아시오? 인두를 달궈서 상처를 지지고 오는 길이라오. 그렇게라도 안 하면 죽을 것 같아서. 이상도 하지. 나는 그놈의 인두가 내 집에 있었는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갑자기 손에 잡히는 곳에 떡하니 나타났으니 말이오.


피는 멎었소. 그런데 이놈 새끼가 내 손목을 물어뜯고 도망가 버렸지. 흐하하.


보이시오? 이 잇자국. 제법 아프게 물더군. 많이 컸지. 입이 너무 작아서, 겨우 손가락 하나가 들어갈까 말까싶은 갓난애였는데 말이야. 나는 이제까지 사냥을 해 먹고살아온 동안 한 번도 물려본 적이 없었는데, 자식새끼에게는 물리게 되더군. 지랄 맞게.


아니. 그건 문제될 일이 아니오. 그놈이 뛰쳐나가봤자 갈 곳이 없으니까. 제 고모 집에나 가 있겠지. 분명히 누나가 돌봐주고 있을 거요. 뭐, 나랑 같이 있는 것보단 나을 지도 모르오.


누나는... 숲의 사람이오. 숲속으로 도망쳐 들어가 숨어 사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오. 요즘 말로는 화전민이라고도 하지. 화전을 일구고 약초를 캐서 파는 것 같소. 그게 돈이 될 일이 아닌데 꽤 잘 사는 것 같아서, 요즘 몰래 밀수라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기는 하지.


나이 차도록 시집을 못 가다가, 괜찮은 사람 만나서 그럭저럭 지내게는 됐소. 그렇지만 뭐하나 변한 게 없지. 예전 그대로야. 아주 지긋지긋하지.


아니. 아무리 약초를 잘 안다고 해봐야 방법이 없었을 거요. 누나가 쓸 줄 아는 약초는, 나도 진작부터 다 알고 있는 것들이니까.


잘 알지 그럼? 우리 집은 내가 어릴 때부터 계속 약초를 캐서 팔아왔소. 나는 그놈의 약초 일이 너무 지긋지긋해서 지금은 사냥을 해 먹고 살게 된 거고. 그 시절보다 신세가 나아진 건지 더 더러워진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애는 아직도 울고 있을 거요. 나를 원망하고 있겠지.


이쯤 됐으면 내 인생도 볼장 다 본 거겠지? 사냥이라는 게 원래 유목민들 생활방식 아니오? 위험하고 남는 것도 없고 고달프기만 하지. 생각해 보시오. 아무리 소금을 뿌려도 고기는 오래 보관하기가 어려우니까, 늘 손해를 보면서 팔수밖에 없지 않겠소?


나는 나를 아는 모든 놈들한테 눈탱이를 맞으면서 살아왔소. 다 쓰레기 같은 놈들이었지. 그놈 하나 의지해서 살아온 거요. 달랑 그놈 하나를.


그런데 이놈이 날 때부터 병에 걸려있어서 작은 상처 하나만 생겨도 인두로 살을 지져서 막아야 한다는 걸 알게 된 거지. 오늘에야 말이오.


불에 데는 아픔이 얼마나 끔찍한지 아시오? 나는 알고 있소. 오늘 그놈 상처를 틀어막았던 바로 그 인두에, 오래 전에는 내가 지져진 적이 있었거든. 아주 어릴 때 일이오. 누나가 실수를 하는 바람에 그렇게 됐지.


그건 정말이지... 상상을 뛰어넘는 고통이오. 고작 말 몇 마디 가지고는 설명할 길이 없는...


피 한 방울을 흘릴 때마다 불로 살을 지져서 틀어막아야 하는 것을 사람의 삶이라 할 수 있겠소?


그런 건 삶이 아니오. 나는 그래서 여기 와 있는 거요, 마법사님.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시오. 피가 멈추지 않는 병. 불치병이라더군. 옆집 노인네 말로는, 이 병에 걸린 놈을 마지막으로 본 건 이십 년 전이라고 했소. 이 병 때문에 얼마 자라지도 못하고 죽었다더군.


아니, 아니. 그럴 리가 있나.


아니야! 마법으로는 고칠 방법이 있을 거요. 분명히. 있을 거요.


아 그러시겠지. 그렇게 말할 줄 알았소. 마법사가 아니라고.


하하. 그렇지만 이런 데 숨어서 조심히 살고 있는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게 아니오?


거짓말을 해봤자 소용없소. 나는 다 알고 있으니까.


무슨 소리냐니? 재작년 일이 기억나지 않는 거요? 내가 고기를 배달하러 왔다가 엉뚱한 델 잘못 들어갔던 적이 있었잖소. 거기가 식량창고인 줄 알고.


그렇지 우연히. 보게 됐소. 하지만 일부러 훔쳐봤던 건 아니오. 맹세할 수 있소.


...당신은 좋은 고객이었소. 다른 농투성이 놈들처럼 터무니없이 가격을 후려친 적도 없었고, 나를 멸시했던 적도 없었지. 그날도, 방에 잘못 들어가 비밀을 알게 된 나를 나무라지도 않던 게 기억나는군. 고마운 일이었소.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물론 이제껏 나는 그날 거기서 본 것들을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소.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나도 어쩔 수가 없지 않겠소?


그래도 계속 발뺌을 하려는 거요?


아무 것도 아니었다고? 하! 기가 막히는군. 알아보지도 못할 글자들만 잔뜩 적혀 있는 책, 해괴하게 생겨먹은 지팡이, 스스로 빛나는 문자와 문양, 뭔지 알 수도 없는 가루와 액체들... 그게 아무 것도 아니었다? 평생 처음 보는 물건들이었는데?


거짓말해봐야 소용없다니까? 아니 왜 사람들은 사냥해서 먹고 사는 놈들이 다 까막눈인 줄 아는 거지? 그건 분명히 이 나라에서 쓰는 문자가 아니었소.


그냥 기도문이었다고? 아니. 그건 사제들이 쓰는 문자가 아니었소. 바드, 오바테, 드루이드들이 쓰는 문자도 아니었지. 게다가...


지금 손과 눈동자가 떨리고 있잖소. 참 심약하신 마법사님이군.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여기 들어온다고 해도 지금 당신 말을 믿지는 않을 거요.


혹시 지금 마법으로 몰래 나를 죽일 궁리를 하고 있나? 사람을 그렇게 쉽게 죽일 수 있소? 이름도 모르는 자에게도 저주를 걸어 죽여 없앨 수 있는가? 마법은 악마에게서 나온 힘이라 들었는데.


뭐, 아무래도 상관없지. 나는 칼을 잘 쓰는 편이니까.


이 칼. 이렇게 생겨먹기는 했어도 날은 빠지지 않았소. 아마 마법사님이 주문을 외우는 것보다 빠를 거요.


조심하시오. 허튼 짓을 했다간 바로 목을 날려버릴 테니까.


아니, 아니. 미안하오. 그렇다고 울 것까지는 없지 않소? 이보시오. 나는 해칠 생각을 가지고 온 게 아니오. 나쁜 짓을 할 마음도 없소. 그만 진정하시오.


아아 당신은 정말 어린애 같이 우는군. 나는 내 아들 때문에 온 거요. 믿지 못하겠소?


말했잖소? 나는 사냥꾼이오. 짐승을 잡아서 숨통을 끊고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잘라 파는 게 내 직업이라니까? 그 짓거리를 하다 보면, 자연히 알게 되오. 아무리 아름다운 여자라 해도, 고작 얇은 가죽 한 꺼풀을 벗겨내면 짐승이나 별다를 게 없다는 걸. 살덩이와 기름과 핏줄이 있을 뿐이오. 이제 나도 그 정도는 알만치 나이를 먹었소.


음욕이라는 건 정말 터무니없는 거요. 어마어마하게 큰 대가를 받아가거든. 사제들 말이 맞았던 거지. 내가 이렇게 비참하게 살아가게 될 줄 누가 알았겠소?


실수라는 게 원래 두고두고 영혼을 좀먹는 일 아니오? 나는 더 이상 실수를 할 마음이 없소이다. 지금 당신이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요. 그러니 제발 나를 도와주시오.


나에게는 그놈 하나뿐이오. 철없던 시절 불장난을 하다가 정말 장난같이 생겨난 놈이지만, 나에게는 그놈뿐이오.


내.

아들을.

살려주시오.


만일 병을 고쳐주지 않는다면, 나는 정말 끔찍한 짓을 해버릴 거요.


...이단심판관을 만나본 적이 있소? 마녀사냥이라는 걸 당해본 적이 있냐는 말이오. 마녀재판이 뭔지 알고 있겠지? 혹시 구경이라도 해본 적 없소?


운이 좋으시군 그래, 마법사님. 이렇게 대놓고 수상쩍은 짓을 하고 계셨는데 말이오. 아니 이제 와서 생각하니, 운이 좋았던 건지 나빴던 건지는 잘 모르겠군.


나는 겪어본 적이 있소. 마녀사냥이라는 걸.


누나 때문에 생긴 일이었지. 그게 쓸데없이 예쁘게 태어나는 바람에... 자기 인생을 완전히 말아먹어버렸던 거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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