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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증영대근

세상 살아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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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증영대근
작품등록일 :
2023.09.16 21:32
최근연재일 :
2023.09.25 12:32
연재수 :
6 회
조회수 :
107
추천수 :
3
글자수 :
31,291

작성
23.09.16 23:30
조회
18
추천
1
글자
12쪽

남자의 직감

DUMMY

그런데 생각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이게 나와 눈이 마주치니까 스르르 눈을 깔더니 고양이 앞의 쥐처럼 다소곳하게 걸어 지나가는 거였다.


거기서 나는 딱히 그놈을 두들겨 팰 생각을 하면서 공격성을 드러내고 있던 것도 아니었고, 눈에 힘을 주고 노려본 것도 아니었으며, 긴장을 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학창시절에는 상상도 못했을 사슴 같은 눈망울을 하고 지나가는 모습을 보니 그게 정말 내가 알던 그놈이 맞나 싶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놈은 졸업 이후로도 똑같이 개차반으로 살았다는 것 같았다. 길바닥에서 싸움질을 했는데 멍청한 경찰 때문에 기사회생했다는 일화를 들은 적이 있었다.


나는 놈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저 무심히 바라보기만 했던 거다. 어렸을 때는 눈 마주칠까 봐 겁이 났던 놈이었는데 그때는 그렇지가 않았고, 그냥 돌멩이 하나가 굴러가는 모양을 보는 듯 하찮고 대수롭지가 않았다. 사실은 그 때문에 나도 조금 놀랐다.


나만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투기종목을 하게 되면 눈치가 빨라진다. 시합을 잘하려면 시합 중에 상대 얼굴에서 지친 기색 겁먹은 표정 괴로움의 표시 같은 조짐들을 빨리 찾아내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것들을 바탕으로 상대의 상태 정보를 파악해야만 상대가 가장 힘들어하고 아파할 때 주먹을 꽂아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봐도 그날 그놈은 그냥 쫄아서 꼬랑지 내리고 지나간 게 맞는 것 같다. 처음에 눈 한 번 마주친 뒤에 바로 눈을 피한 뒤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지나가버렸으니까. 아주 조신한 표정이었다.


별 것도 아닌 일이었지만 나는 꽤 기뻤다. 죽을힘을 다해 운동을 하던 동안 돈을 번 것도 아니었고 부상만 얻었었지만, 그래도 양아치 한 명쯤은 눈빛으로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이 됐구나 싶었던 거다. 약간 우쭐했었던 게 사실이다.


어린 시절 겪었던 더러운 일들의 트라우마도 얼마간 옅어지는 것 같았다. 물론 마음 같아서는 그대로 뒤따라가서 중학교 시절 있었던 일의 대가를 치르게 해주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곳은 집과 너무 가까운 곳이었다.


내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한다고 해도 역시 위험했다. 아무리 잘 패놓고 도망을 친다 해도 경찰을 백 퍼센트 따돌릴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던 거다.


정말로 긴 한숨이 터졌다. 꼭 90년대 유행가 같은 순간이었다. 슬픈 이별 노래를 만들기 위해 연인들 중 누구 하나를 죽이고 시작하던 K-발라드처럼, 나도 꽤 슬프고 아련해(?)졌었다. 1분 안에 얼굴을 걸레짝으로 만들어놓을 수 있는데도 보내줄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되고 보니 상사병 걸린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


나를 정말 사랑하기 때문에 너를 보내주는 거야.


그런 놈 하나를 죽여 놓자고 범법자가 될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냥


오늘 평생 운 다 쓴 줄 알아라 병신새끼야,


라고 뇌까린 뒤 가던 길을 가기로 했다.


거기서 고개를 돌렸다. 정말 몇 발짝 걷지도 않고 고개만 돌렸었던 건데, 거기서 또 다른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방금 눈 깔고 지나간 놈과는 다른 길에서 검은 트레이닝복 차림의 남자가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검은 트레이닝복 차림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사실 정확하게는 기억이 안 난다. 아마 당황해서 그랬을 것이다.


체형만 봐서는 모델 느낌? 이었다. 키만 빼쪽하게 크고 호리호리해서, 만약에 학창시절 내가 그런 체형이었다면 멸치라고 놀림을 받지 않았을까 싶은 몸이었다. 기운을 쓰게 생긴 것도 아니었고 다부진 느낌도 전혀 없었다.


방금 전 내가 보낸 놈처럼 자연스럽게 눈이 마주친 게 아니었다. 그쪽이 고개를 조금 내밀면서까지 내 얼굴을 뚫으려는 듯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던 거다.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어어? 이거 뭐냐?


눈이 잠깐 마주치긴 했었는데, 어쩐지 그 눈을 계속 마주보기가 어려웠다. 갑자기 내 시선에 무게가 생겨서 아래로 내리꽂히기라도 한 것처럼 시야가 계속 떨어져 내렸다. 눈을 치켜뜨려고 애를 쓰는데도 자꾸 눈이 자동으로 깔렸던 거다. 요즘 말로 하자면 에임이 안 됐던 거라고 하면 될까.


나는 당황했다. 오래 전도 아니고 바로 방금 전에 승리를 거둔 참이었다. 눈빛으로만 중학교 시절 일진이었던 양아치 한 놈을 제압한 다음 순간, 난데없이 나타난 이상한 놈 때문에 삽시간에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이 되었으니 그도 그럴 법한 일이었다.


그 길지도 않았던 순간, 나는 내가 그놈이랑 붙으면 족 된다는 사실을 직감으로 알아차렸던 거다. 결국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승리자였던 나는 비굴하게 그 눈을 피했다. 그리고 방금 전 지나간 일진 놈이 그랬던 것처럼 신속히 그 자리를 모면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놈이 나에게 다가와 갈 길을 막은 것이었다. 그러더니 꾸벅 인사를 했다.


“형 안녕하셨어요?”


운동부 선배들한테 하듯이 아예 깍듯하게 한 인사는 아니었고, 아는 사람을 만난 것이 반가운 듯 웃으며 친밀하게 건넨 인사였다.


나는 깜짝 놀랐지만 놀란 얼굴을 감추려 무던히도 애를 썼다. 솔직히 그때 뭐라고 대답을 했었는지도 기억 안 난다.


이놈이 웃으며 자기 이름을 말할 때까지 나는 그게 누군지도 몰랐는데, 알고 보니 예전 운동을 하던 시절 귀여워했던 중등부 선수단 애였다.


몇 년이 지난 뒤였는데도 내가 누구인지 알아보고 먼저 와서 인사를 했던 걸 봐서는 나에게 나쁜 기억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던 듯싶었다.


혼이 빠져 있었던 나는 어버버 하다가


“여기는 웬일이야?”


라고 물어봤어야 되는 걸


“네가 여기 왜 있어?” 라고 말실수를 해버렸다. 몇 살이라도 나이를 먹었으면 좀 침착했어야 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부끄럽기만 하다.


우린 잠시 멈춰 서서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 녀석은 그때 ㅇㅇ시청 소속 현역 실업팀 선수로 활동 중이었다.


아이들은 정말 빨리 자란다. 불과 몇 년 얼굴을 못 본 사이에, 아마도 지옥 같았을 고등부 시절을 거쳐 나 같은 놈은 도저히 비벼볼 방법이 없는 수준까지 올라가 있었던 거다. 후생가외라는 말은 그럴 때를 두고 만들어진 말이었을 거다.


아무튼 고작 양아치 한 마리를 쫄게 만들었다고 우쭐해져 있던 나는, 사실 나도 알고 보니 그냥 쪼다 피라미에 지나지 않았다는 냉혹한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아마 얼굴이 벌개져 있지 않았을까 싶다.


우리 머리 위에는 반드시 우리보다 나은 누군가가 있다. 서운하게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그 동생 입장에서도 그렇다. 열과 성을 다해 훈련을 했겠지만 세계선수권이나 올림픽에서 입상해 텔레비전에 나오지는 못했으니 그 머리 위에도 더 잘하는 놈들이 있을 터였다.


사람은 겸손해야 한다는 걸 그때 배웠다.


이게 꾸며낸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백퍼센트 실화다. 정말 다음 블록까지 간 것도 아니고 그 일진이었던 놈 지나보내고 난 직후 몇 걸음 걷지도 않은 곳에서 그 녀석과 마주쳤었다.


몇 년 동안이나 얼굴을 못 본 사람이, 그것도 둘씩이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하필 그 순간 거기를 지나갔다는 게 나도 잘 믿기지 않을 때가 있다. 인연 혹은 운명이라는 말로만 설명할 수 있는, 신비한 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여자에게 육감이 있듯이, 남자에게도 직감이 있다.


물론 격투와 싸움이라는 것은 워낙 변수가 많은 활동이다 보니 누구든 상대와 실제로 붙어보기 전까지는 결과를 장담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그런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상대가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사람이거나, 한 번 비벼볼 수도 없을 수준의 전력 차가 나는 괴물일 경우에는 이 직감이 신호를 보내준다.


그러면 도저히 상대와 눈 마주친 채로 눈을 쳐들고 있을 수가 없게 되는 거다. 그때 그 직감을 거스르면 크게 다치거나 심하면 죽을지도 모르니 항상 조심해야 한다. 남자가 그런 직감을 무시하고 싸워야 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자기 여자나 아이를 건드렸을 때 외엔 없을 것 같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옛말은 정말이다.


평생 한 번도 주먹질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이 직감을 못 느끼는 경우가 있었다. 학창시절에 길바닥에서 개싸움을 좀 하고 돌아다녔거나, 아예 투기종목을 혹독하게 배운 사람들은 대체로 이런 쪽으로 직감이 트여 있는 편이다. 본능으로 알게 되는 거다.


싸움을 하거나 투기 종목 훈련을 할 때 사람은 누구나 다치게 되지만, 이 직감이 형성되게 되면 그 과정에서 다쳤던 것만큼은 나중에 덜 다치게 되는 것 같다.


*


후일담이다.


전교에서 가장 작았던 나를 위해 악랄한 놀이를 고안해냈던 그놈은 고등학교까지 나랑 같은 델 다녔다. 거기서도 공부를 잘해 치대에 들어갔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연락을 해본 적도 연락이 닿았던 적도 없지만 아마 잘 살고 있을 거다. 많은 돈을 벌었을 거고 결혼을 잘 했을 거고 환자들에게 선생님 소리를 듣고 있겠지.


행복에 겨워 있을 거다. 하지만 그놈은 언젠가 또 자기보다 키 작은 사람들을 재미로 줄 세우고 모욕할 것 같다. 네가 반에서 가장 작다고 놀리며 웃고 떠들지 모른다.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존엄을 지키기 위해 정당방위를 했던 사람을 반역자로 만들고 다른 놈들까지 선동해 윽박을 지를 것이다.


공부를 잘하는 놈들일수록 반성을 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선생들이 웬만한 일로는 혼을 내지 않고 그냥 덮어주기 때문에 잘못이 뭔지 모르는 경우가 많아서인 것 같다.


그래서인지 사회지도층이라는 말은 내게 참 우습게 들린다. 어쩌면 언젠가 그놈은 정치인이나 권력자가 될지도 모른다. 아마 잘 적응할 거다. 어린 시절부터 내로남불에 아주 익숙해져 있던 놈이니까.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말을 해주고 싶지만, 실패한 예술가인 내게는 그놈이 내 말을 듣게 할 힘이 없다. 하지만 언젠가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게 되면, 정말 목에 밧줄이 걸릴 지도 모르니 앞으로는 자중하며 살길 바란다.


*


시청소속 선수였던 그 녀석을 그 뒤로는 다시 만나보지 못했다. 그렇지만 언젠가 다른 일로 SNS를 뒤지다가 우연히 계정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바빴지만 거기 올라와 있는 사진과 글들을 다 보고 떠났었는데, 좋은 사람 만나 결혼을 하고 잘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자랑 삼아 웃통을 깐 사진이 많이 올라와 있었는데, 호리호리해 보였던 몸은 벗겨놓고 보니 완전 인간병기였다. 내 직감이 맞았어.


고등부에서 활동한 투기종목선수들은, 졸업을 하고 나면 대체로 체육대학 특기생으로 가서 대학부 선수로 뛰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얘는 좀 약았던 경우여서 대학엘 안 가고 바로 실업팀에 들어가 연봉을 받으며 선수생활을 했었다.


대학부 선수들은 등록금을 면제해주고 졸업장을 받는 대신 그 시간에 돈을 못 번다. 하지만 이 녀석은 대학에서 시간낭비 안 하고 실업팀에서 돈을 잘 모아서 체육관을 차렸는데, 그게 잘 되고 있는 것 같았다.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지난 코로나 3년은 아주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때 나랑 같이 운동하던 중등부 애들 중에 대학부 선수로 뛰고 인생이 잘 풀린 애는 하나도 없는 것 같다. 오히려 대학부 선수단에서 도망 나갔던 애가 더 잘 된 경우를 하나 알고 있다.


비인기 종목의 애환이다. 돈이 없고 불우해서 운동부에 들어갔는데, 이후의 삶은 더 보잘 것 없어지는 거다.


나쁜 물이 든 인간쓰레기 하나 때문에 그쪽 지인들 전부를 다 손절한 채 살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정말 안 좋은 쪽으로 흘러간 애들은 없어서 그나마 다행스럽다.


다 흘러간 옛일이 되었다. 지긋지긋하지도 설레지도 않는, 푸석푸석하고 건조한 과거.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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