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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증영대근

세상 살아가는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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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증영대근
작품등록일 :
2023.09.16 16:47
최근연재일 :
2023.09.19 19:41
연재수 :
4 회
조회수 :
49
추천수 :
0
글자수 :
21,074

작성
23.09.16 17:46
조회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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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글자
12쪽

남자의 직감

DUMMY

지난 번 나는 소설에 이런 문장을 적어 넣은 바 있다.


‘여자에게 육감이 있는 것처럼 수컷들에게도 본능으로 위험을 감지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는 한편 부연설명을 겸해 재미있는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해볼까 한다. 이 일화는 100퍼센트 실화이기는 하지만, 작가 본인의 이야기는 절대 아니라는 점을 여기에 미리 밝혀둔다.


독자의 이해가 쉽도록 1인칭 시점을 사용해 가공하였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을 이해해하기 위해서는 주인공이 어떤 사람인지를 먼저 알아야 하므로, 이 사람이 살아온 과정을 비교적 상세히 다루어보았다.


*


학창시절 나는 전교에서 가장 작았다.


초등학교 때 내 별명은 ‘땅콩’이었다. 매번 싫다고 말했지만 그런다고 순순히 이름을 불러주는 놈들은 한 놈도 없었다.


바로 옆까지 몰래 다가와서 손날로 내 머리끝을 세게 치면서 키를 잰 뒤, 내가 얼마나 작은지를 확인하고 확인시키는 게 동기들한테는 재미있는 놀이였다.


키만 작았던 게 아니라 마르고 힘도 없었다. 게다가 성격까지 물러 터져서 그렇게 놀림을 당하면서도 의자나 연필 같은 걸 써서 남을 다치게 할 생각 같은 것도 못하는 아이였다.


와서 괴롭힐 때는 웃으며 장난이라고 하지만, 내가 반격을 하면 바로 정색을 하며 주먹질을 하고 싸움을 거는 게 놈들의 패턴이었다.


베이비붐 시대의 학교는 한 반 학생들이 50명이 넘을 정도로 많아서 누가 통제를 할 수도 없었고, 나처럼 약한 애를 보호할 수도 없었다. 아마 국민학교 시절 전교에서 코피가 제일 많이 터졌던 애가 나였을 거다. 나는 아무 때나 때려도 쉽게 이겨먹을 수 있는 놈이 돼 있었다.


언젠가는 반에서 공부를 제일 잘하던 놈이 반에서 누가 제일 작은지를 재는 새로운 놀이를 발명했다. 가만히 있던 나를 끌어내 고만고만한 놈과 붙여가며 키를 쟀던 거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 법이라는데, 다들 몰려와서 나를 둘러싸고 작다고 놀리는 게 너무 싫었다. 그래서 나와 키를 재고 난 뒤 나보다 겨우 1센티가 더 크다고 쪼개고 있던 놈의 목을 졸랐다.


바닥에 쓰러뜨려놓고 올라타서 양손으로 목을 졸라 질식시켰던 게 아니었다. 그런 노하우가 있었더라면 진작 써먹었을 거다. 둘 다 서 있는 상태에서, 운동장 개미들을 꼬여낼 때 쓰던 명주실 같은 걸 그놈 목에 감고 조른 거였다.


실 끝을 손에 둘러 감고 있던 것도 아니었으니 힘이 들어갔을 리 없었고, 명주실 한 가닥으로 숨통을 조를 수도 없었는데 이게 울어버리는 바람에 나는 가해자가 되고 말았다.


순식간에 나는 대역죄인이 되었다. 자기들이 나를 놀리고 괴롭힐 때는 늘 웃던 놈들이, 그때는 또 내가 죽을죄 지은 놈인 양 여럿이서 몰아세우고 면전에 대고 고함을 질러댔다.


그놈들은 내가 울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굴욕적이었지만 울면서 사과를 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들이 하면 재미있는 장난이었지만, 내가 하면 불경한 반역이었다.


그놈들 덕분에 나는 ‘내가 하면 로맨스고 네가 하면 불륜’이라는 정치인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일찌감치 학습할 수 있었다. 이 나라의 권력이 유난하고 이상한 것이 아니다. 원래 권력자들은 다 그러는 법이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권력자이고 폭군이었다. 현명하고 잘나서 얻은 권력이 아니라 나보다 고작 몇 센티가 크고 몇 킬로그램이 무거워서 생겨난 권력이었지만, 뒤집을 힘이 없었다.


권력의 속성은 달라지지 않았고, 국민학교 때 겪었던 일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반복되었다. 그런 교실에서 12년을 보냈다.


땅콩이라는 별명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결국 내 키가 모두를 놀라게 할 만큼 커져서 그 오명을 벗게 되...


었더라면 정말 좋았겠지만, 그건 내가 안경을 쓰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안경을 쓰게 된 뒤로는 별명이 ‘안경잡이’로 바뀌었기 때문에 땅콩이라고 불리는 일이 줄어든 것이었다.


그 시절에는 내가 쓰고 있던 안경을 홱 낚아채 멀리 도망친 다음, 내가 안경을 되찾으려 쫓아가면 자기들끼리 던지고 주고받으면서 나를 따돌리는 놀이가 유행했다. 안경 낚아채던 손톱에 얼굴이 할퀸 것도 모르다가 집에 가서야 알게 되어 떠듬떠듬 변명을 하던 날도 있었다.


패스! 패스! 하면서 쳐 웃던 놈들의 면상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그건 내 시력이 나빠진 뒤였기 때문인 것 같다. 내 안경은 늘 그놈들의 지문자국으로 얼룩이 져 있었다. 처음에는 닦았지만, 나중에는 포기했다.


그 당시는 요즘처럼 대기오염이 심하지 않아서 시력이 나쁜 애가 별로 없었다. 국민학교 저학년이었을 때는 안경 쓴 애가 전교에 나 하나였던 시절도 있었다.


우리 집은 2차선 도로 바로 옆이었다. 창을 열면 자동차 배기가스가 그대로 다 들어오는 집이었다. 일 년 내내 바닥을 쓸고 닦아도 바닥은 늘 어석어석했다.


그 당시에 그렇게 심하게 오염된 공기에 노출되었던 건 나와 내 동생뿐이었던 것 같다. 텔레비전에서 혹은 스마트폰 액정에서 나오는 전자파 때문에 아이들 눈이 나빠진 거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내 경험으로 보면 그게 아닌 듯하다.


그때도 텔레비전은 집집마다 다 있었고, VTR로 비디오테이프를 빌려다 보는 애들도 많았다. 게임보이가 있는 애들도 한 학년에 몇 명씩은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렇다면 종일 비디오를 보고 게임을 하던 애들 눈은 나보다 나빴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나처럼 안경을 쓴 애들이 많아졌던 건 몇 년 뒤 내가 국민학교 고학년이 되었을 때쯤이었는데, 텔레비전, VTR, 게임기 오락실 등이 보급되던 시기와는 별로 일치하지 않는다.


안경을 쓰는 놈들이 늘어나면서 비로소 안경잡이라는 별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내 안경을 빼앗아 던지고 노는 놀이도 시들해진 모양이었다. 자기들도 희생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룰을 바꿨던 거다. 자기들이 당할 것 같으면 규제를 만들어내는 것은 권력의 본성이다.


나는 중학생이 되었다. 90년대의 남자 중고등학교는, 요즘 같으면 학폭위원회가 매일 열렸을 정글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겪었던 더러운 일들은 알고 보면 그냥 몸풀기에 지나지 않았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내심 친구로 생각하고 있던 놈들도 뭔가 욕심이 생기면 서슴지 않고 내 것을 빼앗았다. 잘못을 하지 않아도 때리고 욕하고 이용하고 배신했다.


매일이 지옥이었다. 지금도 학교가 싫다. 지금도 평상시에 ‘친구’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게 된 건 그 시절 때문일 거다.


그렇지만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고 고등학교 2학년 때 갑자기 키가 크기 시작했다. 어깨와 쇄골 언저리에 살 튼 자국이 생길 만큼 급속도로 성장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애초에 내가 워낙 작았던 탓에 큰 키까지 자라지는 못했다.


단 1센티미터도 보태지 않은 평균 키까지만 클 수 있었지만, 나는 거기까지 커준 것만도 진심으로 감사하며 살았다.


이후에도 나는 안경을 써야 했고 몸이 약했지만, 이것저것 무술 배우는 척을 해가며 위기를 넘기곤 했다. 그때 도움이 되었던 친구들이 있는데, 이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할 기회가 있을 것 같다.


많이 큰 것도 아니고 그냥 제일 작은 걸 면했을 뿐이었는데 동기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는 꽤 달라졌다. 하지만 나는 내가 약자일 때 그놈들이 나를 어떻게 대했는지 잘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친구로 여겼던 적은 없었다.


무사히 졸업을 하기는 했지만, 진로계획이 어그러지는 바람에 지방대에 들어가게 됐다. 들어가 놓고 보니 아비의 교수직이 아들에게 세습되는 똥통이었다. 학생들이 중정원에 천막을 치고 단식을 해도 바뀌지 않았다.


공부에 흥미를 잃었다. 취직에 필요한 스펙이나 학점을 따는 일은 뒤로 하고 운동을 시작했다. 위험해서 다른 사람들은 꺼리는 투기종목을 골랐는데, 큰 위험을 감수해야만 나중에 돌아오는 보상도 커질 것 같아서였다. 나는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은 후회를 하게 됐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위험만 크고 효율은 높지 않은 기술체계였고, 겉으로 보기에는 멋있을지 모르지만 실제 써먹을 길이 마땅치 않았다. 게다가 나한테 운동을 가르쳤던 인간 중에는 폭력배들과 어울리던 놈까지 있었다. 거기서 알게 된 모든 사람을 다 손절 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그 시절 나는 진심이었다. 숨이 차서 몸이 움직이지 않을 때까지 달렸고 미친 사람처럼 허공에 주먹질을 했고 스파링에서는 상대를 죽일 듯 달려들었다.


돈도 안 주는 시합엘 굳이 돈 들여 나갔고, 누군지 밝힐 수는 없지만 국가대표급 선수와도 시합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모든 것은 한계가 온 뒤에도 움직이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지만 내 시작은 너무 늦었다. 진짜 선수가 될 수는 없었다.


재능은 있는 편이었지만, 중등부 고등부 6년을 다 거쳐서 이미 괴물이 된 상대들을 이길 방도가 없었다. 그저 고만고만한 상대와의 시합을 이겨먹을 수 있었을 뿐이었다. 중학생 시절이 아니라 고등학교 시절에만 운동을 시작했어도 국가대표급이 됐을 거라는 말도 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승률은 좋지 않았지만 강자와의 시합을 회피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물론 약자를 괴롭힌 적도 없었다.


그 짓을 해서 얻은 건 아무것도 없었고, 인상이 사납게 변했다. 처음에는 얼굴을 많이 맞게 되어 얼굴형이 변한 건 줄 알았는데, 나중에 생각하니 사람을 때려서 주저앉힐 흉악한 생각만 종일 해대는 통에 그리 되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인상이란 그 사람이 가진 생각을 따라서 나는 이정표 같은 것이다. 인상에서 오는 느낌은 절대 무시할 게 아니다.


무리를 하는 동안 여러 가지 부상을 얻었다. 코뼈가 꺾여서 수술도 했었고, 눈과 어깨 인대에도 문제가 생겼다.


예전보다 더 고통스러워져 있었지만, 그건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을 이겨먹으려고 하는 고생이어서 훨씬 나았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예전에 나를 괴롭혔던 놈들에게 보복을 할 수는 없었다.


내가 약해서 괴롭힘을 당할 때는 아무런 보호장치가 없었지만, 정작 내가 앙갚음을 할 수 있을 만큼 강해지고 나니 놈들은 법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이기면 기쁘기는 했지만 그건 결국 애먼 사람이었다. 그놈들이 아니었다. 별 재미가 없어졌다. 결국 운동에도 흥미를 잃었다.


그런 덧없고 남는 것 없던 질풍노도의 세월을 보내고 나서 몇 년이 더 흐른 뒤였다. 마트에 다녀오는 길에 더러운 놈과 마주쳤다.


아스팔트가 깔리기는 했어도 2차선 너비도 되지 않아서 차 한 대가 지나가려면 한 대가 어디로 숨어야 하는, 조그마한 일방통행 시골 삼거리에서였다.


그놈은 예전 말로 하자면 서클이었고 요즘 말로 하면 일진이었는데, 생애 딱 한 번 말을 섞어본 놈이었지만 그것만 가지고도 내게 살인충동을 불러 일으켰던 놈이었다.


중학교 시절 나한테 잊을 수 없는 치욕을 안긴 적이 있었다. 그 시절과 거의 같은 모양새였다. 나아진 게 없었다.


측면을 걷고 있던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내 외양이 많이 변해서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한 것 같았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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