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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증영대근

아더의 안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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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증영대근
작품등록일 :
2023.07.25 15:31
최근연재일 :
2023.07.29 18:34
연재수 :
15 회
조회수 :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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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71,129

작성
23.07.26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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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만남

DUMMY

어쩌면 추격자들은 아르달하를 쫓던 도중 사슴의 흔적이 없다는 사실을 이미 깨달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르달하는 사슴을 죽여서 그 사체를 끌고 도망치던 게 아니었으니까.


아르달하가 진흙위에 엉망으로 남겨놓았던 발자국들 역시 좋은 쪽으로 작용했을 것 같았다. 귀찮은 철야근무를 하고 있던 추격자들로 하여금 추격을 중단할 마음을 품게 하기에 충분했을 터였다. 그것들은 사냥을 성공시키고 목표물을 획득한 사냥꾼이 남긴 과시용 흔적이 아니라, 병든 아들을 둔 한 아버지에게서 떨어져나온 기진한 상처들일 따름이었으니까.


다리가 풀려버린 아르달하는 그 임시 호수의 물 위에


첨벙!


네 발로 엎드리듯 쓰러졌다. 그리고 그대로 벌컥벌컥 짐승처럼 물을 마셨다. 죽을힘을 다해 도망치느라 목이 마르다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물론 격류에 휩쓸렸을 때 어지간히 물을 먹었었기 때문에 갈증을 느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쩐지 몸이 다 퍼져버릴 때까지 잔뜩 물을 들이켜고 싶었다. 물은 탈주와 안온의 증거물이었다. 비로소 안전해졌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구름이 잔뜩 끼어있던 밤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개어 있었다. 마치 꿈속의 새가 정말 하늘의 구름을 모두 말려 없애기라도 했던 것처럼.


보름은 아니었지만 초승달이라도 충분히 의지할 만했다.


아르달하는 크게 숨을 돌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제야 그곳에 다른 누군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겨우 네다섯 걸음쯤 떨어진 물 위에 선 형체가 있었다.


에엑? 이렇게 가까이?


마치 마술보자기를 홱 걷어치우고 난 직후 바로 나타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르달하는 깜짝 놀라 움찔했지만, 일단 자신을 공격하려는 듯한 징후는 없는 것 같아 다소 마음을 놓았다. 만약 그럴 의도가 있었다면 정신 못 차리고 있을 때 진작 칼을 꽂았을 터였다.


처음에 호수의 형체는, 달빛을 받은 사슴으로 보였다. 아르달하는, 암만 세상이 미쳐 돌아가도 그렇지 망할 사슴새끼가 뿔 찾자고 여기까지 쫓아올 리가 있나 싶어 눈을 비볐다.


요즘 내가 시력이 많이 나빠져서 몰랐던 건가, 아니면 너무 방심해서 넋을 놨던 건가?


역시, 다시 보니 사슴이 아니었다.


유선형의 형체는 사슴이 아니라 여인이었다. 하반신을 물 속에 다 담근 채 우두커니 선, 전라의 미인.


전혀 개연성이 없는 맥락이었다.


요즘 눈이 침침해지더니 이제 아예 눈이 멀려고 이러나...?


그러나 눈앞의 여자는 눈을 문질러도 사라지지 않았다. 분명히 헛것이 아니었다. 헛것이 아니어서 아르달하는 다시 어이가 없어졌다.


뭐지? 뭐냐고 이거.


어둠과 당혹 속에서도, 여자의 마법적인 아름다움은 광휘를 내뿜고 있었다. 현실이었지만 마치 이데아 같은 모습이었다.


여자는 사슴뿔을 가져오라던 마법사보다는 나이가 많은 것 같았지만, 아르달하의 누나보다는 젊어보였다.


여자 역시도 아르달하만큼은 경악했으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이었으나, 여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겁먹어서 그러는 건가? 하긴 내가 좀... 무섭게는 생겼지.


아니었다. 여자는 그저 빤히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그 아름다운 눈을 크게 뜬 채로, 방금 전 호수 물에 뛰어들어 개처럼 철벅거리던 침입자를.


정말이지 어색하고 난처한 상황이었다. 역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아르달하가 돌연 오만상을 찡그렸다.


“우읍...!”


아무리 봐도 혼자 몰래 나와 호수에서 멱을 감고 있던 듯한 광경.


그럼 저게 몸 씻은 물을 내가 마신 걸 거 아니야?


가까스로 안전지대에 도달해 물을 들이켤 때는 세상 가장 맑은 물 같았지만, 상황을 파악하고 나니 역시 기분이 나빠졌다. 여자가 미인이건 아니건 간에 그런 건 취향에 안 맞았으니까.


아르달하가 대놓고 질색하는 기색을 내보이자, 미녀도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지만 주위를 잘 둘러보니 물이 한참 불어나 있었기 때문에, 여자가 몸 씻은 물을 아르달하가 그대로 들이마셨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혹시 몸을 씻던 여자가 몰래 물속에 소변이라도 보지 않았던 이상 그렇게까지 더럽게 생각할 일도 아니었다.


일이 잘 마무리된 것 같아 시원하고 상쾌했다. 추격도 멈췄겠다 그냥 집으로 돌아가면 그뿐이었다.


사실은 마음이 홀가분해 여자에게 손이라도 흔들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호수에서 나가려고 보니 여자 바로 옆을 지나는 것이 최단거리였다.


그냥 멀리 돌아가 버리면 될 일이었지만, 다리가 후들거려서 그마저도 어려웠다.


아르달하는 여자를 어떻게 해버리겠다는 나쁜 마음을 품지 않은 채였고, 여자 역시 겁을 먹거나 당황하는 기색이 별로 없었다. 놀라서 몸을 가리거나 쇳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그저 말없이, 뭔가 재미있는 광경이라도 보는 것처럼 아르달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뭐 반응이 이래? 말 못하는 장애라도 있나?


너무 놀라지를 않으니까 도리어 아르달하가 당황스러워졌다.


철퍽! 철퍽!


아르달하는 걷기 시작했다. 그냥 최단거리로 여자 옆을 지나 호수를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그래도 헐벗고 서 있는 여자가 남우세스럽기는 해서 여자 옆을 지나갈 때는 쭈뼛거리며 어깨 하나만큼을 피해 지나갔다.


그렇게 허우적거리며 걸어 나가던 중 어째 기분이 좀 싸해졌다.


지나가는 아르달하와, 서 있는 여자의 눈이 달빛 아래에서 마주쳤다. 둘은 서로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아르달하 입장에서는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지만, 남자의 눈길은 마치 그물에 걸린 고기처럼 여자의 눈과 얼굴과 몸에 빨려 들어갔다. 정말이지 눈을 떼기 어려운 미모였다.


그런데 왜 저러고 나를 보는 거지?


아르달하는 그제야 사냥 시작 전 자신의 얼굴에 바른 진흙이 다 지워졌으리라는 생각을 해냈다. 여자는 그날 밤 자신의 얼굴을 본 유일한 목격자였다.


아뿔싸. 죽여서 입을 막아야 하나?


아르달하는 본능적으로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그러나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어졌다. 여자가 너무나 젊고 싱그럽고 아름다워서였다. 뭔가 가지고 있던 것을 내주거나 호의를 베풀고 싶지, 해를 가하고 싶지는 않았다.


기가 막히는군. 미모만 가지고도 살의를 꺾을 수 있다는 건가.


욕을 해서 살벌하게 겁을 주거나 위협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만일 아르달하가 뭔가 말을 해서 여자의 입을 막으려 든다면, 얼굴 뿐만 아니라 목소리까지 알려주는 셈이었다.


혹 떼려다 혹 붙이는 격. 나중에 일이 혹시 더럽게 풀리기라도 했다간 빼도 박도 못하게 될 터였다.


에이, 그냥 놔두자. 지금도 말이 없는데 나중에도 아무 말 않겠지.


사실 그때 아르달하는 너무 굶주리고 힘들고 지쳐있었기 때문에 거기서 여자랑 일대일로 맞장 까서 간단히 제압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아르달하는 그냥 집에 가기로 했다. 사슴뿔을 얻었으니 어서 아들의 약을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등을 돌리기 전에 검지를 입에 갖다 대고 입조심을 하라는 신호를 보내는 걸 잊지는 않았다. 이어 손날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팍 인상을 써보였다.


여자는 놀란 듯 잠깐 눈을 치켜뜨기는 했으나, 꼴같잖다는 듯 푸후흐흡, 하고 웃었다. 훤히 드러나 있는 가슴과 허리를 가리지도 않은 채였다.


아니 이 년이?


아르달하는 적잖이 불쾌해졌다. 낮이었다면 화나고 무안해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것이 보였을 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거기서 칼을 뽑아서 겁을 주는 건 너무 유치하고 저속한 짓인 것 같았다.


결국 아르달하는 긴 한숨을 내쉬고 호숫가로 휘적휘적 걸어 나갔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말괄량이가 놀러 나온 모양이지. 원래 하룻강아지들이 사자 무서운 줄 모르는 법이니까. 이쯤하면 알아들었을 거야.


아르달하는 호숫가 땅을 밟고 올라섰다. 바지 안에 들어차있던 물이 흘러 빠져나가면서 몸도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그냥 제 갈 길 가면 되는 상황이었지만, 왠지 등 뒤에 두고 온 여자가 자꾸 신경이 쓰였다.


희귀병에 걸린 아들을 키워야 하는, 극한의 육아스트레스에 시달린 끝에 결국 성욕까지 메말라버린 그였다. 그런데 어쩐지 더 이상은 그 미인(과 알몸)을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아쉽다는 생각은 들었다.


덜떨어지고 찌질한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르달하는 살며시 고개를 돌리고 여자 쪽을 흘끔거렸다.


이번에는 뒤태를 구경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여자는 의외로 호숫가 쪽을 향해 돌아서 있었다.


빤히. 처음처럼 아르달하 쪽을 보고 있었다. 찌질한 인간 아르달하는 찔끔했다.


으익! 깜짝이야. 왜 저래? 혹시 나한테 관심 있나?


여자는 움츠리거나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사실 아예 몸을 내밀고 있는 거나 별 다름없는 태도였다. 아르달하는 어쩐지 조금 주눅이 들었다.


내가 지금 제정신이 아닌가봐. 빨리 집에 가야겠다. 얼른 약 만들어달라고 해야지.


아르달하는 다시 돌아서서 걸었다. 그때 문득 여자가 사실은 말을 못하는 게 아니라, 아르달하가 그랬던 것처럼 뭔가 켕기는 게 있어서 일부러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뭐, 내 알 바 아니지. 무슨 사정이 있든.


아르달하는 정말로 집으로 가는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아들을 생각하니 잠시 지체했던 순간마저 미안해졌다.


덕분에 눈요기 잘했지 뭐. 고맙다요.


그런데 그때


부스럭!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르달하는 본능적으로 우뚝 멈춰 섰다. 호숫가로 나와 서 있던 아르달하에게서 예닐곱 걸음 정도 떨어진 수풀 너머였다. 수풀로 시야가 차단되어 있어 그게 사람인지 짐승인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여자에게 등을 돌리고 돌아선 이상 무슨 일이 벌어지건 간에 남의 소관이었다. 그냥 집에 가면 되는 일이었지만, 이번에도 아르달하는 머뭇거렸다.


혹시 이 멍청한 하룻강아지 말괄량이 계집애에게 해를 끼칠 만한 것이 풀숲 속에 숨어있을까봐 걱정이 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여자는 알몸이었고, 완전히 무방비였다.


뭐가 있는지만 봐 주고 갈까. 혹시 맹수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르니까...


아르달하는 호수의 여자를 한 번 더 돌아보고 난 뒤, 소리가 난 곳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다소 긴장해서는 손을 내밀어 수풀을 헤쳐 보았다. 풀을 헤칠 때 쓰는 밀림도가 있기는 했지만, 그걸 뽑아들지도 않은 채였다. 방심해서가 아니었다. 칼 뽑을 힘도 없어서였다.


호숫가 수풀 속에는, 신이 난 듯한 얼굴로 옷을 벗어던지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아르달하가 호수까지 떠내려 왔던 때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숨이 거칠었다. 마치 거기까지 한달음에 뛰어오기라도 한 것처럼.


젊고 잘생긴 놈이었다. 놈은 아르달하가 지켜보는 줄도 모르고 옷을 훌렁훌렁 벗어던졌다.


끄악!


아르달하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오만상을 찌푸렸다.


놈은 완전한 알몸이 되었다. 당연히 가랑이 사이에서 덜렁거리는 살덩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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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살인마 23.07.26 8 0 10쪽
9 베테랑 23.07.26 7 0 11쪽
8 내 눈 23.07.26 7 0 11쪽
» 만남 23.07.26 11 0 11쪽
6 추격자 23.07.25 9 0 10쪽
5 날개 23.07.25 8 0 11쪽
4 호기심이 사냥꾼을 23.07.25 8 0 11쪽
3 뿔과 흙의 시간 23.07.25 8 0 12쪽
2 하늘의 별을 따오라 그래 23.07.25 10 0 11쪽
1 피가 멈춰 23.07.25 32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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