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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증영대근

늑대와 밤의 사분면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정증영대근
작품등록일 :
2023.02.27 11:38
최근연재일 :
2023.03.11 16:57
연재수 :
11 회
조회수 :
185
추천수 :
0
글자수 :
46,466

작성
23.03.05 22:57
조회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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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글자
10쪽

은신처

DUMMY

목동에게서 시선을 거두어들인 소녀는 몸을 돌려 뒤에 선 시녀를 바라본다. 다 자라지도 않은, 나뭇잎처럼 얇은 잔등이 돌아선 것뿐인데 온 세상이 목동을 등진 것만 같다.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다. 한데 둥글게 묶어 틀어 올린 머리카락매듭에서 삐져나와 몇 가닥 뒷목에 드리워진 잔머리.


소녀의 볼이 약간 달아오른 듯 보이는 건 착각일까. 밥을 먹던 노인의 말이 불쑥 떠오른다. 축제라고 했었지? 축제에 가는 길인 모양이지. 혹시 축제의 설렘 때문에?


하지만 소녀는 그대로 멈춰 서서 손짓으로 목동을 가리키며 동동 발을 구른다. 시녀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여자에게 뭐라고 속닥거린다.


목동에게는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 시녀는 몸을 조금 기울여가면서까지 귀를 기울인다.


속삭임이 끝나자 시녀는 소녀를 대신해 앞으로 나서더니 뱉듯이 말한다.


“저녁은 먹게 해요.”


바닥에 엎질러진 죽그릇을 본 것일까.


금방 큼지막한 빵 한 덩이가 소년 앞에 던져진다. 빵을 받아드는 찰나 소녀의 얼굴은 사라져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고작 빵 한 덩이에 정신이 팔려 그 아름다움을 저버린 소년은 자신의 과오를 깊이 뉘우친다. 잠시 외면하게 된 것만으로도 그렇게 자책하고 싶어질 정도의 미모다.


이미 여러 걸음을 걸어 멀리 간 소녀가 등을 돌려 흘긋 소년 쪽을 살핀다. 그리고 다시 우아하게 걸어 나간다. 성 밖의 석양이 드리운 따스한 빛이, 얇은 옷에 숨겨진 자그마한, 그러나 보석 같은 몸의 실루엣을 땅에 길게 그려낸다.


조금만 더 천천히 걸어줬으면 좋겠는데. 뒷모습, 아니 그림자만이라도 오래 바라보고 싶어.


*


소년은 양을 찾으러 간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숲으로 돌아가려면 성문을 통과해야 한다. 딱딱한 빵 한 덩이를 씹으며 걷는다. 곰팡이가 핀 부분을 떼어 땅에 던지니 검은 개가 낼름 받아먹는다.


야이 개새끼야. 행복하냐? 주인은 쳐 맞고 있는데 거기 엎어진 죽이나 핥아먹고 앉아있어? 아오 내가 이 개새끼를 진짜...!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단 한 번도 개고기를 먹어본 적은 없지만, 확 된장을 발라버리고 싶은 어두운 충동이 목동의 뱃속 그늘에서 춤을 춘다.


성문은 활짝 열려 있다. 잘 차려입은 청춘남녀들이 걸어서 성 밖으로 나가는 중이다. 축제라더니 실로 그러한 모양이다.


어질어질하다. 코를 풀어 피를 짜내고 고개를 흔들어 봐도 걸음은 자꾸 비틀거린다. 지나가던 사람과 어깨가 부딪힌다. 어른이다.


“아 이 더러운 꼽추 새끼가! 똑바로 안 걸어? 눈깔을 확...”


아르르르르 월월월!!!


개가 사납게 짖는다. 놈은 모욕당한 주인을 대신해 으르렁대는 개를 보고는 하려던 말을 맺지도 못하고 도망치듯 자리를 뜬다.


그런데 이 개새끼 좀 봐? 아까 나 두들겨 맞을 때는 가만히 있더니만? 사람 차림새를 살펴서 신분을 파악한 다음에 짖거나 대드는 건가? 얍삽해서 얄밉기는 하지만... 영리한 똥개로군.


손에 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제야 장대를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머리를 너무 많이 맞아서일 거다. 몸을 보호할 최소한의 장비를 가지고 나와야 한다는 것조차 생각 못했다. 그저 구타가 멈춘 것이 고맙고 기꺼워서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다 보니 이렇게 돼 있다.


축제에 들떠 있는 사람들이 만든 물결에 떠밀려난 자갈이 터덜터덜 걸어서 성문을 지난다. 성문 밖의 풍광은 어두워지고 검어진다. 성문을 나오기는 했지만 대책이 있을 리 없다.


양을 찾아낼 계획 같은 건 생각도 못한 채로 그저 개의 뒤를 따라 허위허위 걷는다. 아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개가 이끄는 곳으로 가는 것이 차라리 낫겠지.


문득 뒤를 돌아본다. 성과 그 인근에 켜진 불빛들이 휘황하다. 그렇게 커다란 성에 내 한 몸 뉘일 곳이 없다는 사실이 잘 믿기지 않는다.


목동에게도 부모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그만둔다. 부모가 있었다면 이런 일을 당했을 리 없다. 스스로의 얼굴이 궁금하지만 거울이 없다. 막막하고 슬프다. 어지럽다.


추수가 끝난 경작지를 지난 뒤부터는 성과 숲과 들이 어느 쪽이었는지조차 기억할 수 없게 된다. 그렇지만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다.


꼬리를 흔드는 건 개뿐이다. 목동의 옷소매를 물고 자꾸 어딘가로 이끈다.


그렇지만 가로등이 없는 길이니 곧 암흑이 찾아올 터다. 다시 소년이 되어서 그런 건지는 모르지만 이제 어둠과 밤이 무섭다.


그는 밤의 어둠 너머에 자신을 해치려는 귀신과 괴물들이 없다는 사실을 안다. 귀신들이 숨어있는 어둠 속보다는, 사람들 틈에 섞여 보내야 하는 한낮이 더 위험하다는 사실을 이미 전생의 경험과 기억으로 알고 있다.


그럼에도 다리가 떨리고 호흡은 가빠진다. 당장이라도 등 뒤의 어둠속에 숨어 있던 괴물이 뒷덜미를 낚아챌 것만 같다.


너무 많이 맞아서 그런 건가? 아니면 정말 소년이 되어서일까.


퉤. 뭐가 어찌 됐든 다 자라지도 않은 애를 때리는 건 정말 나쁜 짓이다.


어둠이 완연하다. 하늘에는 달이 떠 있다. 그나마 다행이다. 달조차 없었다면 횃불을 켜야 했을 텐데 목동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으니까. 아직 가을인 것 같지만 옷이 얇아 춥다.


일단 지칠 때까지 걸어 본다. 다시 숲과 들이 나온다. 어두워서 그곳이 정확히 낮의 그곳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양을 잃어버린 자리에 가까이 온 것 같기는 하다. 길게 자라난 풀을 밟으며 걷는 동안, 아직 나타나지도 않은 늑대가 두려워진다.


바로 코앞에서 걸어 나가던 개가 갑자기 사라진다. 어리둥절해져서 개가 있던 곳을 살피던 목동의 몸도 갑자기 아래로 훅 떨어져 내린다. 지면보다 훨씬 깊은 곳이다.


늑대를 잡으려 쳐둔 함정이나 덫에 걸린 줄 알고 몸서리를 치지만, 덫이 아니라 굴속이다. 땅속의 굴. 소년은 안도한다.


아오 진짜...! 죽는 줄 알았네!


토굴은 길고 좁다. 허리를 굽히고 네 발로 기어야만 움직일 수 있을 정도다. 정신 못 차리고 한참 헤맨 뒤에야 겨우 허리를 펼 수 있는 공간을 찾아낸다. 먼저 들어온 개가 목동을 기다리고 있다.


개를 따라 더 들어간다. 뱀의 뱃속처럼 끝까지 좁을 것만 같던 굴속에서 마침내 위아래가 탁 트인 곳이 나온다. 겨우 숨은 돌릴 수 있게 되었지만,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밖으로 나가 불을 구해올까 하다가 혹시나 하고 주머니를 뒤져본다. 주머니 속에 있던 부싯돌로 어둠을 긋자, 목동의 몸에 익숙해져 있던 습관이 등잔의 위치를 찾아낸다. 아마도 여러 차례 와 본 곳인 모양이다.


자그마한 고시원 방 넓이의 공간이다. 허리를 펴고 똑바로 서도 머리가 천장에 닿지 않는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곳인지 아니면 누군가 조성해놓은 곳인지 언뜻 보고는 판단하기 어렵다.


어쩌면 둘 다인지도 모르지.


소년의 손으로 만들 수 있는 공간은 아닌 것 같지만, 목동이 만들어 숨겨놓았을 법한 것들도 눈에 띈다. 많지는 않지만 말린 고기와 버섯, 과일도 있다. 동굴 천장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똑, 똑, 소리를 내며 고인다. 작은 나무그릇이 물방울 떨어지는 자리에 놓여 그 물을 받고 있다.


오래도록 차근차근히 준비해 온 곳이 확실하다. 그제야 그곳이 은신처임을 이해한다. 아마도 목숨을 걸고 만들어놓은 누군가의 전 재산일 것이다.


안에는 자궁 같은 안온이 자리하고 있다. 소년은 먼 길을 달려온 사람처럼 주저앉는다. 긴 하루가 끝을 맺는다. 현생의 첫 번째 날.


개는 끙끙대며 망가진 얼굴을 핥는다. 고마운 마음 한편으로 또 먹이를 바라고 그러는 것 같아 왠지 얄밉다. 먹이를 던져주고 소년도 먹는다. 개는 소년이 던져주지 않은 것은 먹지 않는다.


조금 더 던져줄 것을 그랬나?


배를 채우고 은신처 구석에 쌓인 건초 더미를 눕기 좋게 매만진다. 이것 역시 습관이 해주는 일이다.


고요 속에 누운 소년 옆에 개가 눕는다. 서로의 온기에 의지해 잠들 태세다. 건초 더미에 남은 향긋한 풀냄새가 콧속에서는 피 냄새를, 머리에서는 나쁜 기억들을 지워낸다. 그러나 여전히 내일이 보이지 않는다.


이대로 영영 이곳에서 나가지 않았으면.

어느 누구도 나를 찾아내지 못했으면.

굶주리고 병들어 죽는다 해도 그곳으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아.


소년의 바람은 그뿐이다.


춥지 않다. 좁은 굴의 창자 속을 기던 동안 아마도 땅 아래로 내려온 듯하다. 동굴 안은 불이 필요 없을 정도로 따뜻하다. 건초 더미에 몸을 눕히자마자, 손발이 따뜻해지기도 전에 까무룩 잠이 든다.


*


번쩍 눈이 떠진다.


새벽일까. 어차피 안은 어두워서 알 수 없다. 목동은 천천히, 그러나 잠들기 전보다는 더 능숙하게 등잔의 불을 켠다. 말린 사과와 버섯을 씹고 소화시키면서 몸속에 새로이 차오르는 맑은 기운을 만끽한다.


평화와 안식, 그리고 환희와 재충전. 소중한 시간이었다. 물론 동굴 밖의 처참한 세계로 나가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더 자도 되는 건가.


스르르 다시 잠이 든다. 아이답게.


*


어두운 동굴 건초더미 위에 누워 자고 있던 목동을 개가 깨운다. 시끄럽게 짖는 것이 아니라, 꼭 이등병이 선임을 깨울 때처럼 가만히 소매를 물고 당긴다.


혹시 군 경험이 있는 개인가? 예비역 아니야?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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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와 밤의 사분면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1 야만인들 23.03.11 8 0 10쪽
10 발각됨 23.03.09 10 0 10쪽
9 미녀와 물개 23.03.08 11 0 14쪽
8 아룬달 호수에 23.03.07 12 0 10쪽
7 회색악마 23.03.06 21 0 10쪽
» 은신처 23.03.05 13 0 10쪽
5 학대 받는 저녁 23.03.04 13 0 10쪽
4 늑대의 숲 23.03.03 15 0 10쪽
3 전생의 마지막 23.03.02 27 0 10쪽
2 불운한 새벽 23.03.02 22 0 10쪽
1 영웅전 23.03.02 34 0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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