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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증영대근

다시 쓰는 아라비안 나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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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증영대근
작품등록일 :
2023.02.16 11:49
최근연재일 :
2023.03.10 22:42
연재수 :
18 회
조회수 :
436
추천수 :
1
글자수 :
76,693

작성
23.03.10 22:42
조회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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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획기적

DUMMY

그곳에 이르자 샤는 굳이 고삐를 힘껏 잡아당겨 말로 하여금 두 발로 벌떡 일어서 직립하게 했다. 샤가 타고 있던 말은 주인의 비통한 심사를 알아차린 듯 바로 그 자리에서 일직선으로 몸을 일으켜 쑥 솟아올랐다. 당장 하늘을 뚫고 날아갈 것처럼 등짝을 꼿꼿이 세우고는 길게 울어 젖혔다.


이 끝내주는 광경을 본 항구의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감동의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우르르!


우레 같은 말발굽에 놀란 대지가 떨고 있었다.


*


그러나 이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등장 씬은, 사실 실수 때문에 벌어진 해프닝쯤으로 봐야 한다.


당시의 현장상황을 엿볼 수 있는 지도를 보게 되면 이 날의 상황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항구와 그 항구를 둘러싼 도시, 그리고 그 항구도시를 방어할 목적으로 세워진 성은 모두 왕성의 서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따라서 왕성을 떠난 샤가 가장 빨리 도착할 수 있는 곳은 성의 동문이었다.


샤 입장에서는 당연히 가장 가까운 동문을 향해 쇄도해 들어갔어야 했다. 그곳에서 성을 둘러싼 적군의 배후를 흔들고 성 안의 병력과 힘을 합해 포위망을 깨는 것이 상식적인 선택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샤는 굳이 동문을 지나쳐 성 밖 도시로 먼저 진입했던 것일까. 친구들의 무덤에 인사를 하기 위해서?


습관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수없이 궁을 빠져나와 항구도시에서 잠행을 해오던 동안 익숙해진 경로가 있었다. 샤의 아들이 터덜터덜 걸어서 항구까지 갔을 리 없으니 소년은 매번 말을 타고 있었을 터이고, 놀 수 있는 시간이 모자라 늘 조급히 서두르고 있었을 것이다.


술에 취해 말 위에서 잠든 김유신을 천관녀에게 데려다주던 전마의 그것과도 같은 습관이, 늘 가던 길로 샤를 인도했던 것이다. 그것은 샤 리아르의 직업병 같은 것이었다.


정신없이 달리던 도중 길을 잘못 들었다는 걸 깨달았지만, 생애 첫 군사작전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부하들 앞에 대고


어머 얘들아 이 산이 아닌가봐.


라고 이실직고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이대로 달리다가 공터 나오는 대로 유턴하면 되지 뭘!


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뜻밖에도 말을 돌릴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말을 몰아 뒤를 따르고 있는 기병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애마로 하여금 하늘을 보고 몸을 곧추세우게 만들었던 것은, 위용을 과시하려는 허세가 아니라 정말 그 이상 지체하면 안 될 것 같아서였을 공산이 크다. 말하자면 급브레이크를 밟은 것이었다.


하지만 무덤들이 보이는 공터에서 급브레이크를 밟고 불법 유턴을 하던 샤의 모습은, 절망에 빠져있던 항구 사람들의 눈에는 피를 보기 전에 친구들의 죽음을 기리고 애도하려는 애틋함 쯤으로 비쳤다. 전설 속 영웅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오해라는 게 이렇게 무섭다.


*


사실 이때 샤 리아르의 군대는, 당시 항구를 약탈하고 있었던 병력에 비해 수적으로 상당한 열세였다. 이에 관해서는 다시 설명할 시간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탁 트인 벌판이었다면 몰라도, 사방이 건물로 막혀 있는 도시에서는 적 병력과 군세를 파악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도대체 샤가 병력을 얼마나 끌고 온 건지를 아는 북군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충격파가 더 컸다.


심지어 샤 리아르 자신도 자기 병력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모르고 있었다. 한참 뒤에야 고작 거기까지 가는 동안 150기가 낙오했다는 사실을 보고받은 샤 리아르가 놀라서 칼을 바닥에 떨어뜨렸다는 기록이 아직 남아있다.


어쨌든 샤가 직접 원군을 이끌고 도착했다는 사실은, 압제에 신음하던 사람들에게 그 어떠한 희망보다도 더 큰 힘을 주었다.


사실 병력 차이 자체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왕실 근위대는 이미 봄 축제 때 항구도시 전역을 이 잡듯이 뒤져 폭력배들을 소탕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고작 반년 남짓이 흘렀을 뿐이어서 항구의 지형지물들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아무리 실전경험이 풍부한 정예병력이라고 해도 생전 처음 가보는 도시지형에서는 민활하게 기동할 수가 없다. 기동을 못하면 다행이고 아예 길을 잃고 미아가 되는 병력들도 생기는 판이다.


더군다나 정신줄을 놓고 전쟁범죄에 몰두해 있던 중이었다. 기습에 놀라 바지도 제대로 올리지 못하고 뛰쳐나오는 판이었으니 제대로 대처를 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근위대 병력은 지난 작전 때보다 더 능수능란하게 지형지물을 이용해 적들을 궁지로 몰았다.


반면 급습을 당한 침략자들은 엄청난 혼란에 직면했다. 그들은 도처에서 죽어나갔다.


*


그 고통스러운 축제를 겪은 뒤, 항구의 사람들은 사람은 죽으면 그뿐이며 칼침을 맞은 뒤에는 현금도 부동산도 아무 소용없다는 귀중한 가르침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그 가르침이 사람들의 삶에 획기적인 방향전환을 일으켰던 것은 아니지만, 소소한 변화들은 있었다.


그런 일이 언제 또 터질지 모르잖아?


사용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칼과 창 그리고 활을 장만해 집안에 장식하는 것이 유행했던 것이다.


그리고 샤와 그의 군대가 도시 이곳저곳을 들이받고 쑤셔대는 동안, 항구의 사람들은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왕성에서부터 한걸음에 달려온 왕과 그 군대를 보고서도 두려워 감히 적에게 저항할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그저 침략자들이 숨어있는 위치를 아군에게 알려주거나, 도망치는 적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는 정도였지만, 차츰 대범해졌다.


전날 밤을 새워가며 항구의 딸들과 어머니들을 욕보인 자들이었다. 항구 사람들은 장식장에서 칼과 창을 꺼내 빼들었다. 그리고는 혼란에 빠져 고양이에게 쫓기는 닭 모양으로 우왕좌왕하던 적들을 함께 사냥하기 시작했다.


길도 모르는 새끼들이 어딜 감히 기어 들어와?

형님. 저 구석에 숨어 있다가 나오는 대로 족치는 거 어떨까요?

여기다가는 올가미를 만들어 놓자고. 지나가다 걸리게. 이 개새끼들.

그럼 나는 활을 쏠 줄 아니까 지붕 위로 올라가 있을까?


항구에는 노예들이 살지 않았다. 불탄 집은 그들의 집이었고, 빼앗긴 금은보석은 그들의 재산이었으며, 죽어간 자들은 모두의 아들들이자 아버지들이었다.


항구도시 전체가 일어나 싸우기 시작했다.


획기적인 전환이었다.


*


이날의 전투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샤 리아르가 기병을 이끌고 왕성에서 항구까지 무사히 당도한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사실을 들어, 이 첫 번째 전투에 관한 기록 전체를 날조된 것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았다.


그런 식의 기동은 불가능하다는 학설이 불과 얼마 전까지의 다수설이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법한 일이었다. 공격자 입장에서 공성전을 할 때는 현장에 중무장기병을 투입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당연한 얘기다. 말을 타고 사다리를 올라갈 일이 없기 때문이다.


궁기병이라면 지원사격이라도 해줄 수 있겠지만, 막상 공성전 현장에서는 중무장 기병이 할 일이 별로 없다. 그렇기 때문에 공성전 시에 기병들은 대체로 아군이 기습을 당하지 않도록 후방에서 경계를 하거나, 성문이 뚫리거나 열려 양쪽 보병 전력이 직접 충돌하게 될 시 이를 신속히 지원하는 등의 임무를 맡는다.


북국 제1군의 사령관은 노련하고 경험이 풍부한 지휘관이었다. 그런 지휘관이 과연 샤의 왕성에서 지원군이 올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예측하지 못했을까? 성의 서쪽은 바다였고, 남쪽은 민간인 거주지였다. 원군이 올 수 있는 방향은 사실상 동쪽뿐이었다.


북국 기병 전력은 총 4천에 달했다. 내전이 거르고 걸러낸 정예들이었다. 그런데 제1군과 제2군으로 병력을 나눌 때, 어느 한 쪽에 기병 4천을 모조리 배치하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다.


적어도 1천에서 3천 정도의 기병이 제1군에 배속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제1군의 기병들은 도대체 어디 가 있었다는 말인가?


제1군 사령관이 동쪽 왕성으로부터의 원군을 예상하고 이 기병들을 후위로 돌려 경계하게 했을 경우, 샤 리아르와 오합지졸들은 항구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전멸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첫 번째 전투와 관련된 기록들의 진위는 의심스럽다,


는 것이 기존의 학설이었다. 큰 무리가 없는 논리다.


하지만 1871년 이전에 트로이가 실재했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인리히 슐리만이라는 남자를 제외하고는.


*


북국 제1군의 기병감과 북국 후속지원부대의 장이 나눈 밀담에 대한 증언 자료가 최근에 발굴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그 공과 과를 따지기 위해 만들어지기 시작한 이 자료는 아쉽게도 끝을 맺지 못하고 도중에 중단되고 말았는데, 그 이유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테니 여기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이 자료가 가진 진정한 가치는, 본편 128페이지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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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획기적 23.03.10 19 0 9쪽
17 직업병 23.03.09 12 0 9쪽
16 격리되어 23.03.08 18 0 10쪽
15 전쟁의 시작 23.03.07 16 0 11쪽
14 피와 바람 23.03.06 19 0 9쪽
13 집권 원년 23.03.05 16 0 10쪽
12 낙마 23.03.04 17 0 10쪽
11 신분상승 23.03.03 26 0 9쪽
10 꽃비 내리는 항구 23.03.02 19 0 10쪽
9 생사 23.02.28 17 0 10쪽
8 메르시하 23.02.27 17 0 9쪽
7 갑사들 23.02.22 22 0 10쪽
6 싸움 남 23.02.21 22 0 9쪽
5 사건사고 23.02.20 22 0 9쪽
4 엄살쟁이 23.02.19 27 0 9쪽
3 내기권투가 시작 23.02.18 27 0 10쪽
2 두 아들 23.02.17 37 0 9쪽
1 무적의 군주 23.02.16 84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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