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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증영대근

시간이 멈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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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증영대근
작품등록일 :
2022.09.27 18:35
최근연재일 :
2022.10.02 20:37
연재수 :
3 회
조회수 :
2,369
추천수 :
25
글자수 :
12,997

작성
22.10.01 19:58
조회
158
추천
2
글자
10쪽

유산이 백억이라는데

DUMMY

둘은 낮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는다. 비로소 서로의 얼굴을 제대로 들여다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유온은 긴 머리를 한 번 뒤로 묶어 반듯한 이마와 가지런하고 긴 눈썹을 다 드러내고 있다.


여자의 눈은 크고 깊다. 침착해 보이는 두 눈이, 도수가 높지 않은 금속테 안경 뒤에서 소년을 응시하고 있다. 약간 피곤해하는 듯도 한 쌍꺼풀이 깜빡인다.


콧날은 곧고 오뚝하지만 날카롭지 않다. 성형기 없이 서구적인 이목구비. 시야가 한 번에 다 깨끗해지는 것 같은 미모다.


화장기가 옅은데도 입술은 붉고, 곧고 가느다란 목의 선이 사슴을 떠올리게 한다. 희고 매끄러운 목의 피부색은 얼굴의 색과 일치한다.


여자는 바로 소년의 시선을 잡아챈다. 영원히 놔주지 않을 것처럼.


몸의 선을 드러내지 않는 옷을 입고 있지만, 늘씬하면서도 성숙한 몸매를 가졌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다. 키가 큰 편인 것 같았지만 앉은키는 훌쩍 낮아진다.


잠은 이미 달아나 버린 지 오래. 소년은 속으로 유산과는 전혀 무관한 산수를 하고 있다.


나랑은 몇 살이나 차이나는 거지?


그것을 알아내는 것이 소년의 유일한 지상과제가 된다. 순식간에.


그러는 동안 유온은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열 수 있는 보안가방을 테이블에 올려놓는다.


미모에 혹한 소년의 멍청한 반응에도 익숙한 듯 잠시 기다린다.


“크게 달라지는 건 없어요. 지금까지 양육비로 지급되던 금액이 그대로 계속 계좌에 입금될 겁니다. 다만 지금까지는 아버지께서 실종상태셨지만, 이제는 사망자가 되셨기 때문에 지급하는 주체 면에서 변화가 생기는 거예요.”


앞일이 어떻게 될지 필사적으로 궁금해 하던 정투호의 소원을 이루어주려는 요정처럼, 유온은 차분하게 안내와 정리를 해준다. 혹시 엄마가 소년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내려 보내준 사람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소년은 벌써 그 소원을 까맣게 잊은 뒤다.

새로운 소원이 생긴 듯한 얼굴.


“유고 시에 정투호 학생의 후견인으로 저를 지목해두신 상태거든요. 필요한 서류는 다 갖춰져 있지만, 여기 동의서와 확인서에 서명을 해주시면 절차 처리가 빨라집니다.”


서류를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정투호는 서명을 한다. 서명을 마친 뒤에야 그 경솔함을 부끄러워한다.


“양육비와는 별도로 아버지께서는 정투호 학생 앞으로 유산을 남기셨어요. 3억이 넘는 돈인데... 세금을 제하면 많이 깎여서 2억이 조금 안 됩니다. 이건 학생이 성년이 된 뒤에 지급될 거예요.”


정투호의 눈이 번쩍 떠진다. 얼굴도 가물가물한 아버지가 남겨준 2억이라는 큰돈.


막 코끝이 시큰해지며 눈이 벌겋게 물들려는 순간, 굳이 알 필요 없었던 이야기가 예쁜 입에서 흘러나온다.


“그런데 이게 큰돈은 아니에요. 정투호 학생 말고, 다른 유족들에게는 한화로 100억 정도가 상속될 예정이라서.”


정투호의 몸이 앉은 자리에서 바로 하늘을 꿰뚫을 것처럼 튀어 오른다.


“으... 엑!?”


언어가 되기 이전 단계의 신음이 소년의 입을 뚫고 튀어 나온다.


펄쩍 뛰던 소년의 정강이에 받힌 테이블이 격하게 들썩인다. 그 위에 놓인 가방을 유온이 지그시 눌러야 했을 정도. 하지만 정강이의 아픔도 느끼지 못한 채, 소년은 묻는다.


“배ㄱ... 백억이요?!”

“아마도... 어느 쪽이 더 많이 상속받을지의 문제를 소송으로 다투게 되겠지만, 저하고는 무관하고요, 정투호 학생과도 관계가 없어요.”

“아 나 이런 씨ㅂㅏㄹ...”


그러나 목까지 차오른 욕설을 차마 내뱉지 못한다. 그 대상이 아버지이기 때문.


하마터면 생전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아버지에게 쌍욕을 날릴 뻔했다가 간신히 마음을 돌린 효로자식이 맥없이 소파 위로 떨어져 내린다.


손이 떨리고 있다.


아마도 여우 과에 속할 이 미인은 고개를 슬쩍 돌리고 소년 몰래 슬며시 웃는다. 그러나 워낙 충격이 컸던 정투호는 그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혼자 아연해한다.


“아니 그게... 그게 사람이 할 짓이야?”


이게 뭐야? 무슨 경우가 이래? 그래도 외아들인데 좀 비슷하게는 맞춰줘야 하는 거 아니야?


물론 뇌의 울타리를 넘어 멋대로 말이 되어 튀어나오는 생각도 있다.


“...도대체 뭐하는 사람인데 그렇게 돈이 많아요? 부동산 같은 거 빼고 현금만 100억 넘게 있었다는 거예요 지금?”


유온은 묻는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차분히 쐐기를 박는다.


“이제 와서 어떻게 해도 달라질 건 없어요.”


2억씩이나 되던 큰돈이 바로 앉은 자리에서 2억밖에 안 되는 푼돈으로 둔갑해버린 기적의 현장이다.


“혹시 그 인간... 아니지. 아버지 재산형성에 엄마가 기여했다는 증거 같은 건 없나요?”


다시 웃음을 참느라 아랫입술을 깨문 유온이 말없이 고개를 흔든다.


소년이 찾는 증거 대신, 진작 테이블 위에 올라가 있던 가방을 정투호 앞으로 다시금 밀어준다.


“아버님이 남기신 유품이에요.”


하지만 낙심한 정투호는 그걸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당첨된 복권을 누군가 훔쳐갔다고 해도 그런 기분이 들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100억 원 대라는 유산 규모에 정신이 팔린 소년은 거의 넋이 나가 있다. 그래서 여자가 그만 자리를 끝내고 싶어 한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유온이 헛기침을 해 신호를 보낸 뒤에야 움찔 놀라며 제정신으로 돌아온다.


시간 관리에 철저한 사람이리라는 것 정도는 처음부터 미루어 짐작하고 있던 터다. 소년은 냉큼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것도 여자보다 먼저.


현관 앞에서 유온이 허리를 숙이고 플랫슈즈를 신는 동안, 뒤에 선 소년의 눈에는 여자의 늘씬한 다리와 허리가 조각처럼 새겨진다. 그 순간만으로도 유산 상속과정에서 발생한 막대한 손실(?)을 어느 정도 보상받은 듯싶어질 들 정도로, 예쁜 몸이다.


나가기 전, 유온이 뒤를 돌아본다. 흔히 연민이나 모성애라는 말로 수식되곤 하는, 측은지심이 여자를 잠시 붙잡아 세웠던 것.


하마터면 두 사람의 시선은 거기서 민망하게 교차할 뻔했으나, 마침 소년은 몸을 핥듯이 훔쳐보던 시선을 막 거둬들이던 참이다. 물론 유온과 그 몸에서 흥미를 잃은 것은 아니었고, 딴생각을 시작했던 것.


어쨌든 순식간에 모든 관심사가 흩어져 버린 덕분에, 그 순간 소년은 여자의 동정심을 자아낼만한 얼굴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소년은 말없이 염두를 굴리며 건성으로 배웅을 한다. 마치 자신에게 한 번이라도 등을 돌리고 선 이에게는 전혀 미련을 갖지 않는 사람인 양.


그래서 유온의 눈에는, 버려진 개처럼 빈집에 남겨진 소년이 꽤 남자다운 얼굴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집을 나서는 후견인의 마음도 얼마간 놓인다.


방문객이 사라진 뒤에야 정투호는 맹렬한 성욕을 느꼈다. 그런 스스로를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방금 보았던 몸에 대한 관심을 좀처럼 거두지 못했다.


가늘고 긴 목, 자리에서 일어날 때 미세하게 물결치던 가슴, 보기 좋게 치켜 올라가 있던 골반.


다른 유족에게 돌아가게 됐다는 거액의 유산에 대해서도 거의 잊은 채다. 미모와 젊음이, 거액 이상의 값어치를 가진다는 것을 소년은 욕망이라는 갈증 속에서 학습한다.


대강 살다가 요행을 노려보겠다는, 간밤의 계획을 정투호는 부끄러움 속에서 파기한다. 대신 뭔가 대단한 것이 되어야겠다는 야심을 갖는다.


무엇이건 좋으니까, 방금 전 눈앞에 앉아있던 여자와 어울리는 무언가가 되고 싶어.


어울리는? 아니, 그것만으론 충분하지 않은 것 같은데.


소년은 원하는 것은 그 이상이다. 그 유선형의 몸에 갈무리되어 있는 모든 곡선들을 거칠게 꺾고 험하게 압도하고 싶다.


그러나 어떻게? 온 세상이 다 단절돼 있고, 사다리는 전부 치워져 있다.


정투호는 심한 욕구불만을 느꼈지만, 그저 맥없이 소파에 드러눕는다.


“엄마. 혹시 정말 거기 아빠가 가 있다면, 잡아다가 두 시간 정도만 패주면 안 돼? 솔직히 이 정도면 맞아도 싸잖아.”


어제는 공허의 한가운데에, 오늘은 상실의 심연에 내던져진 정투호가 키득거린다.


웃는다. 정말 어른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


정투호가 아버지의 유품에 다시 주의를 기울이게 된 것은 깊은 밤이었다.


소년은, 집에 금고가 없는 듯하니 하나 장만하는 게 나을 것 같다던 변호사의 말을 기억해낸다.


뭐든 중요한 물건이 들어 있을 거 아니야?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튼튼한 가방에 넣어 보관할 리가.


유품 가방은 어벤져스에 나온 묠니르의 망치대가리와 비슷한 크기이며, 모양 역시 거의 비슷하다. 여섯 자리 비밀번호를 입력해야만 열 수 있는, 튼튼한 금속제 가방.


그리고 모든 상자는 열어 봐야만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있는 법.


정투호가 가진 균형감각으로는, 유족에게 100억 원대의 유산을 남긴 사람이라면 장남에게 몇 십 억짜리 귀중품 정도는 따로 물려줘야 형평성이 맞을 것 같다.


혹시... 문화재? 골동품?


뒤늦게 가방을 열어볼 생각을 하지만, 비밀번호를 풀 수 있을 리 없다. 변호사가 보는 앞에서 바로 열어달라고 할 걸 그랬나 후회를 하지만, 때는 이미 늦은 뒤.


유온이 주고 간 명함을 들고 인상을 찌푸린다. 늦은 밤에 전화를 걸기는 적이 미안하지만, 그렇다고 아침이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너무 답답하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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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뭐가 들었는데 22.10.02 155 2 10쪽
» 유산이 백억이라는데 22.10.01 159 2 10쪽
1 아버지가 사라졌다 22.09.30 235 2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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