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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만다의 서재

노디스팅:툼데어의 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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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만다
작품등록일 :
2020.02.08 20:59
최근연재일 :
2022.04.19 22:12
연재수 :
2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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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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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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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4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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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Chap3. 나무 없는 초원 (5)

"이질적인 사회나 시대를 파악한다는 것은 그 안에서 살아간 사람들의 생각과 느낌을 자신의 내면에서 발견해내는 것이다." - 중세를 여행하는 사람들 中




DUMMY

다른 소녀들은 화들짝 놀라며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 질문이라는 게······." 에네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바로 그 질문을 의미하는 거니? 사는 것은 과연 좋은 것인가 하는?"


"그래."


솔리사하르는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그녀의 어두운 피부 위로 반딧불이의 노란 빛이 지나갔는데, 희망이나 승리감 같은 것으로 가득한 그녀의 두 눈은 마치 그보다도 더 반짝이는 듯한 착각을 주었다.


"팔코니아와의 대화에서 알았어. 생각해보면 간단한 건데······ 왜 이전에는 몰랐는지 모르겠네."


"그래서 그 답이 뭔데?" 에네샤는 호기심을 견딜 수 없어 거의 초조해하는 말투로 물었다.


"우리가 이 초원에서 만난 스피라들을 생각해봐." 솔리사하르가 담담하게 말했다. "독립적인 신들을 섬기는 이들 말이야. 우선 우리들은 쉬지 않고 움직이는 스피라들, 모토리마라들을 만났지."


소녀들은 제각기 머릿속으로 시간의 여신 티메르의 모습을 떠올렸다. 마치 그물처럼 복잡하게 엉킨, 미약하게 빛나는 은빛 머리카락을 우주의 사방으로 늘어트리고 유영하듯이 누워있는 여인의 모습. 그녀는 자신의 곁을 지나가는 별을 잡아 늘이기도 하고 구부리기도 했으며, 은하의 강에 물결을 일으키거나 수면을 흐트리기도 했다. 영원히 하얗게 빛나는 두 눈으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두 들여다보았다.


"모토리마라들은 시간을 섬기는 것이 본능이기 때문에 잠도 휴식도 거부하면서 계속 노동하지. 우리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이지만 그들에게는 그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삶이야. 왜냐하면 그게 그들의 본능이기 때문이야. 그리고 우린 다음으로 약속된 스피라들, 피르타마라들을 만났어."


운명의 신 파투스는 새까만 머리카락으로 자신의 얼굴을 칭칭 감아, 우주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도 보거나 듣거나 말하지 않았다. 그는 티메르를 위해 별들을 모아 강을 만들었는데, 가끔은 무슨 생각인지 흐름을 끊어버리고 별들이 뿔뿔이 흩어지도록 만들기도 하며, 그렇게 결정한 일은 두 번 다시 바꾸지 않았다. 그의 세 아들은 차례대로 그의 손을 옮겨 이미 탄생한 것은 흘려보내고 매번 새로운 은하가 모이도록 했다.


"피르타마라들은 운명이 준 약속이 곧 그들의 본능이기 때문에 자신을 희생하면서 죽음을 기다려. 우리의 시각에서는 끔찍하지만 그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야. 왜냐하면 그들은 본능에 충실한 것 뿐이니까. 그리고 이게 바로 답이야. 우리 인간의 본능은······ 바로 살아가는 거야."


솔리사하르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산다는 건 그래서 좋을 수밖에 없어. 숨을 참으면 괴롭고 숨을 쉬어야 행복하듯이. 지칠 때 괴롭고 휴식할 때 행복하듯이. 본능은 충족되기를 바라는 욕망이고, 그래서 우리는 삶을 사는 본능을 따라야 좋은 거야."


"오!"


에네샤가 푸른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곧 그녀의 얼굴에도 커다란 미소가 퍼져나갔다.


"네 말이 맞아, 솔리스······. 그래, 그게 답이야!"


솔리사하르는 웃음을 터트렸다. 답을 알아내다니,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짐이 사라진 것만 같았다. 이제 다른 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와카티르몬 산으로 가서 루실레오스 여신을 만나고 그녀에게 자신이 알아낸 답을 들려주면 되었다. 그리고 자신은 당당한 영웅이 되는 것이다. 기분이 너무나 가볍고 상쾌해져서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어, 음······." 한편 버사미에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듣고만 있다가, 다른 소녀들과 눈이 마주치자 당황하며 중얼거렸다. "그래, 내 생각에도 그게 맞는 거 같아."


별로 열성적이지 않은 반응에, 솔리사하르는 웃음을 멈추고 무심코 눈을 찌푸렸다. 그게 맞는 것 같다고? 그녀가 언짢아하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버사미에트가 황급히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과연 동의하지 않지만 억지로 그러는 건지, 아니면 특유의 내성적인 성격으로 소극적으로 반응했던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솔리사하르는 굳이 화를 낸다거나 트집을 잡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속으로는 짜증이 차올랐다.


'저 애와 함께 있는 건 도무지 적응이 안 돼.'


잠시 후 솔리사하르는 여느 때처럼 다른 소녀들을 먼저 재우고, 자신은 피곤한 눈을 억지로 뜬 상태로 불을 지켰다. 근처에서 곤히 잠든 버사미에트의 얼굴을 보니 또 괜히 미운 마음이 차올랐다.


'노래만 아니었다면 난 저 애와 함께 가지 않았을 거야······.'


하룻밤에 많은 일을 겪었기 때문인지 벌써 달이 많이 기울어있었다. 솔리사하르는 졸린 눈을 몇번이고 비비면서, 오늘은 그냥 아예 잠을 자지 말아볼까 하고 생각했다. 얼마 안 있으면 해가 뜰 게 분명했다. 그러니 차라리 다른 두 사람을 편히 자게 하고 자신은 버티면 된다······. 그녀는 누구보다 강하니까······.


"저 애들은 힘든 일은 아무것도 안 하잖아, 그렇지?"


갑자기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속삭였다. 솔리사하르는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잠시 나른해졌던 정신이 금세 원래대로 돌아왔다. 혹시 또 괴물이 나타난 걸까,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리고 제발 오늘 밤은 이만 내버려두라고 마음 속 목소리가 소리쳤다. 안 그래도 갈증과 피로 때문에 힘든데 또 다른 괴물에게 시달리고 싶지 않았다······.


"항상 전부 네가 할 일이지." 새롭게 들려오는 목소리는 아주 부드럽게 속삭였다. "여정을 이끄는 것도, 앞으로 가자고 모두를 재촉하는 것도······. 게다가 봐, 오늘 넌 대단한 일을 해냈어. 위대한 질문의 답을 찾아냈다고······. 그런데 넌 그만큼 인정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니?"


"누구세요?" 솔리사하르는 미심쩍어하며 물었다.


"난 너의 진심이야." 목소리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어둠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반딧불조차 떠나버려서 사방이 적막했고, 푸른 불빛에 간간이 작은 벌레나 먼지만이 비춰질 뿐이었다. 빛이 닿지 않은 먼 곳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인간이 미지로부터 자유로운 공간은 겨우 그만큼일 뿐이었다. 그래서 솔리사하르는 경계를 풀지 않으며 푸른 불로 더 먼 곳을 비춰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이 장작에 닿는 순간······.


"저 애들은 너처럼 최선을 다 하지 않아." 목소리는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툭하면 감정만 내세우고 정작 위급할 때는 도망쳐버린다고······. 그런데 여정이 끝나고 나면 모든 영예는 같이 나누려 들겠지, 그렇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니? 저 애들은 약하고 어리석고 이기적이야······."


"에니를 그렇게 말하지 마!"


솔리사하르는 발끈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목소리가 마치 메아리처럼 초원에 퍼져나간 순간, 그 위를 어떤 웃음소리가 덮었다.


"에니는 저 애를 더 좋아해." 어둠 속의 목소리가 계속 웃으면서 말했다. "저 두 사람 간의 기류를 못 느꼈니? 저들은 네가 함께 있는 걸 성가시게 여기고 있어. 에니는 저 애가 더 좋대······. 왜냐하면 에니도 너의 희생을 너무 당연하게 여기거든."


지하생물이 찾아온 게 분명하다고 여기면서도, 솔리사하르는 무심코 버사미에트를 흘끗 내려다보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알지 못하고 두 눈을 꼭 감은 채 자고 있는 평온한 얼굴을 보자, 잠깐 잊었던 미움이 다시 솔리사하르의 가슴 속에서 살아났다.


"버사미에트는 거짓말쟁이야."


왠지 목소리가 한층 더 가깝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마치 정말로 마음 속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버사미에트는 모두를 속이고 있어. 네 가장 친한 친구인 에니를 속여서 너에게 등을 돌리게 만들었고, 여정이 끝나면 자기가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꾸며내서 네 명예를 다 가져가버릴 거야······."


솔리사하르는 피부 밑에서 흐르는 피가 점차 뜨거워지는 것 같은 환각을 느꼈다. 심장 속에서는 뜨거운 물이 끓어오르는 것 같았고, 거기서 나온 수증기가 머릿속을 뿌옇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녀의 가슴이 더 빨리 오르내리고 어깨와 팔이 뻣뻣해졌다.


"버사미에트는 혼자 고상한 척, 대단한 척은 다 하고 있어. 저 애가 할 줄 아는 건 아무것도 없어. 저 애가 부르는 노래도 결국은 또 다른 거짓말일 뿐이야······. 그리고 모두가 거기에 속아넘어가서, 솔리사하르, 너의 노력이나 희생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지. 안 그러니?"


"맞아." 마침내 솔리사하르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저 앤 옛날부터 항상 그랬어. 장로들의 옆에 착 붙어서는 자기가 특별한 것마냥 굴었어······. 나처럼 산을 빨리 오르지도, 화살을 멀리 쏘지도, 들소의 등에 오르지도 못하면서. 마치 자기가 선택해서 하지 않는 것처럼 굴면서 장로들이 자길 좋아하게 만들었어."


"그래!" 목소리는 갑자기 환희를 드러내면서 맞장구쳤다. "저 애는 네가 영웅이 되는 게 싫었던 거야. 그래서 네가 마침내 자신을 증명할 기회를 얻어냈을 때······ 너를 방해하려고 여기까지 따라온 거야. 하지만 그래놓고 정작 지금껏 뭘 했지? 노래를 부른 것 빼고 무슨 대단한 일을 했지?"


"저 앤 아무것도 안 했어. 그래서 난······."


"자, 말하렴, 태양의 아이야. 말해보렴!"


"난······."


솔리사하르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모든 게 억울하게 느껴졌고 부당한 취급을 받아온 것만 같았다.


"난 버사미에트가 싫어, 저 애가 없어졌으면 좋겠어!"


그리고······.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옳다고 동조하거나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하는 말조차. 솔리사하르는 제풀에 흠칫 놀라며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어둠 속은 고요했고 잔잔했다. '꿈을 꿨나?' 그녀는 어리둥절해서 눈을 세게 깜빡거렸다. '아니면 정말로 내 진심이었던 걸까?' 만약 지하생물이었다면 이렇게 얌전하게 그리고 조용하게 사라졌을 리 없었다······. 그러니까 어쩌면 그녀는 정말로 자기 자신과 대화한 걸지도 모른다.


'난 버사미에트가 싫어, 저 애가 없어졌으면 좋겠어!'


자신이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자, 솔리사하르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느꼈다. 그녀는 스르륵 도로 제자리에 앉았다. 어마어마한 잘못을 한 것만 같아, 이번에는 죄책감으로 가슴이 뛰었다.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감정 중 하나였다. 누군가에게 빚이 있다고 느끼는 것이나, 자신이 옳지 않고 틀렸다고 느끼는 것 만큼.


'아니야, 난······.' 그녀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난 틀리지 않았어.'


다시 한번 버사미에트를 노려보았다. 뜨겁던 분노가 가라앉으면서 반대로 가슴 속이 싸늘해졌다.


'이건 저 애가 잘못한 거야. 저 애가 잘못했으니까 내가 저 앨 싫어하는 거야.'


결론을 내리고 나자 그에 걸맞는 증거들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솔리사하르는 버사미에트에 관한 모든 기억을 떠올렸다. 정반대의 성격 때문인지 같이 자라나면서도 두 사람은 놀랄 만큼 교류가 없었고, 그들의 사이에는 언제나 장로들이 있었다. 솔리사하르가 벌에 쏘이거나 발목을 다치는 등의 사고를 겪으면 장로들은 그녀에게 버사미에트를 본받으라고 말했다. 그럴 때면 그녀는 언제나 장로들 뒤에 숨어있는 것처럼 조용히 앉아서 찰흙으로 무언가를 만들거나 완성된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속으로 날 얼마나 우습게 여겼을까?'


솔리사하르는 이를 악물었다. 여전히 피곤했지만 이제는 그런 기미가 느껴지지도 않았다. 아니면 너무 익숙해져버린 것일지도. 눈은 무거웠고 손가락 하나 움직이고 싶지 않았지만, 머릿속으로 많은 기억들이 홍수처럼 차올라서 도저히 잠들 수가 없었다. 화가 났고, 복수해주고 싶었다.


"솔리스?"


어느새 해가 떴고, 그때쯤 솔리사하르는 비로소 무릎에 얼굴을 묻고 조금이나마 자고 있었다.


"솔리스, 왜 우릴 깨우지 않았니?"


에네샤가 그녀를 깨웠다. 아침 햇살이 그녀의 진갈색 머리카락 위로 내리쬐고, 두 푸른 눈은 순수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솔리사하르는 잠에 취한 채 고개를 좌우로 젓기만 했다. 몸도 마음도, 그냥 피곤했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버사, 이제 일어나렴."


에네샤는 금방 솔리사하르에게서 몸을 돌리고 버사미에트를 흔들어 깨웠다.


"아, 너무 졸려······." 그녀는 마치 신음을 흘리듯이 중얼거렸다. "우리 조금만 더 자면 안 될까? 어젯밤엔 많이 자지도 않았잖아······."


"안 돼, 어서 일어나. 빨리 와카티르몬 산으로 가야지."


"조금만 더, 에니. 조금만······."


버사미에트가 투정을 부리는 소리가 솔리사하르에겐 마치 귓가에 벌이 윙윙거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짜증이 치솟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손을 휘저어 내쫓지 않으면 자신을 쏠 것만 같았다.


"걘 그냥 내버려둬." 솔리사하르가 차갑게 말했다. "더 자게 둬, 에니. 안 그러면 하루 종일 징징댈 거잖아. 난 쟤가 보채고 투정부리는 거 더는 못 들어주겠어."


에네샤가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친구를 돌아보았다. 몸을 돌리고 잠에 취해있던 버사미에트도 충격을 받아서 뒤를 바라보았다. 솔리사하르는 네가 뭘 어쩔 거냐는 식으로 무섭게 상대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버사미에트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그녀는 갑자기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두 눈이 붉어져 있었다.


"꼭 그런 식으로 말해야 하니?" 에네샤가 어이없다는 투로 물었다.


"내가 틀린 말 했어?" 솔리사하르가 따졌다. "여정을 시작한 이후로 제일 불평불만이 많았던 게 쟤야. 내가 그걸 왜 계속 참고 들어줘야 하는데?"


"글쎄, 난 저 애가 그렇게 심하다고 생각해본 적 없었는데. 그리고 설령 그렇다고 해도 왜 그렇게 굴욕을 주는 방식으로 말해야 하니?"


"넌 그렇게 말하겠지." 솔리사하르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빈정거렸다. "넌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러자 심한 모욕을 받은 것처럼 에네샤가 얼굴을 붉혔다.


"난 네가 버사를 싫어한다는 걸 잘 알고 있어!" 그녀가 톡 쏘아붙였다. "넌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도, 시작한 뒤에도 그 점을 아주 분명히 했잖아, 안 그래?"


"오, 그래? 네가 잘 안다고? 그럼 이유도 알겠네?"


솔리사하르가 이를 갈았다. 그 순간 버사미에트는 숨을 잠깐 헉 하고 들이마시더니, 에네샤의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그만해······." 그녀는 거의 간청하듯이 속삭였는데,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솔리사하르는 더욱 커다란 분노를 느꼈다.


"저 앤 배신자야." 그녀가 딱 잘라 선언했다.


"솔리스!" 에네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저 애는 어제 우리가 죽든 말든 내버려두고 혼자 도망쳤어."


솔리사하르는 손가락으로 버사미에트를 가리켰다. 상대의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보자, 미안하기는커녕 아주 특이한 감정이 느껴졌다. 마치 파괴하려는 욕망 같은 것이.


"다 함께 여정을 하겠다고 와놓고, 정작 위급한 순간에는 혼자 목숨을 부지하려고 도망쳤단 말이야. 내가 저런 애를 어떻게 믿고 같이 다닌단 말이니? 저 앤 배신자야. 겁쟁이고 철부지라고."


"그럼 나도 마찬가지야." 에네샤가 창백해진 얼굴로 조용히 말했다. "솔리스, 어제 나도 그랬어. 겁이 나서 도망치려고 했어. 다만 저 애처럼 빠르지 않아서 주저앉았을 뿐이야. 널 도와주지 못한 건 미안해. 하지만 그럼······ 그럼 너는 이제 나도 배신자이고 겁쟁이에 철부지라고 부르는 거니?"


에네샤는 파르르 떨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그녀는 더 이상 소리를 지르지도 눈을 휘둥그레 뜨지도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그녀를 봐왔기 때문에, 솔리사하르는 지금 그녀가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눈물을 보이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도.


"넌 달라." 솔리사하르가 낮게 말했다.


"난 왜 다른데?" 에네샤가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넌 저 애가 저지른 짓을 저지르지 않았으니까."


"저 애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데?"


솔리사하르는 다시 버사미에트를 마주보았다. '제발.' 눈물에 젖은 그녀의 두 눈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제발 말하지 말아줘.'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솔리사하르는 더욱 폭로하고 싶었다.


"저 앤 우리 언니도 배신했어." 그녀가 싸늘하게 말했다.


버사미에트의 얼굴에서 마지막 희망이 사라졌다. 그녀는 두 손에 얼굴을 묻더니 뒷걸음질쳤다.


"쟤는 오랫동안 우리 언니를 기만했어. 언니는 저 애가 정말로 진심인 줄 알았기 때문에, 가계를 독립하면 둘이 함께 살 계획까지 세웠어. 하지만 막상 그날이 다가왔을 때 저 앤 비겁하게 도망쳐버렸어. 그리고 나중에 보니까 저 애가 그렇게 거짓말한 여자들이 둘이나 더 있었다고. 우리 언니가 쟤 때문에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알아? 하지만 저 앤 한번도 자기의 업보를 책임지지 않았어."


솔리사하르는 경멸과 증오를 여과없이 드러내며 버사미에트를 노려보았다. 에네샤는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다물고는, 말없이 울고 있는 버사미에트를 잠깐 뒤돌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몸을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에네샤의 얼굴은 이제 상처받은 것보다는 착잡해보였다.


"저 애가 한 짓은 잘못됐어." 그녀는 마음을 정했다는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저 애의 과거는 이 여정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 솔리스······. 우리가 함께 여정을 하겠다면 과거의 일은 잠시 뒤로 미뤄둬야 해."


"저 애 편을 들겠다고?"


솔리사하르는 어이가 없어서 미소지었다. 마치 누군가 뒤에서 한 대 때린 것만 같았다.


"난 누구의 편도 들고 있지 않아." 에네샤가 침착하게 말했다.


"그래, 그게 문제야."


솔리사하르는 다시금 주먹을 꽉 쥐었다. 분노와 배신감과 복수심이 머리 끝까지 차올랐다.


"난 우리가 친구인 줄 알았어."


"우린 친구야, 솔리스······."


에네샤는 오해하지 말라는 듯 설명을 해보려고 했지만, 솔리사하르는 듣지 않았다. 그냥 모닥불의 불씨를 거칠게 손으로 잡아쥐고는 휙 뒤돌아 앞으로 걸어가버릴 뿐이었다. 혼자 성큼성큼 가버리는 그녀의 뒷모습으르 바라보며 에네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땅에 펼쳐져있는 휘장을 아무렇게나 대충 접어서 들고는, 버사미에트에게 얼른 가자고 제안할 뿐이었다. 버사미에트는 여전히 얼굴을 들지 못하며 고개만 끄덕였다.


"정말 멋진 아이디어였어, 코라그."


소녀들이 떠나고 난 자리에 기이한 모습의 세 생물이 모였다. 그들은 불씨가 떠나고 없는 모닥불 자리를 쿡쿡 찔러보기도 하고, 냄새를 맡아보기도 하면서 성물의 힘을 느껴보려고 했다. 그동안 소녀들을 지켜보는 내내 사실 궁금했던 것이다.


"어쩌면 이 방법이 제일 잘 통할지도 몰라. 저들을 밖에서 억지로 떼어놓으려고 하는 것보다, 안에서 스스로 분열되도록 만드는 것 말이야." 아비나알이 여섯개의 입술을 흔들며, 끽끽거리는 목소리로 감탄했다.


"그래, 나에게 맡기라니까." 코라그가 녹색 얼굴에 자부심 넘치는 미소를 띄우며 뽐냈다. "내 계획을 설명해줄 수는 없지만, 대충 이런 거야. 난 저 애들 앞에 직접적으로 나서거나 강제로 멈추게 하지 않을 거야. 다만 저들이 스스로 사기를 꺾고 여정을 포기하도록 만들 거야."


"그런 부분에선 내 계획과 비슷하네." 벨루아안이 튀어나온 치아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안 그래도 나는 또 다른 함정을 준비했어. 이번에는 절대 유혹을 이기지 못할 걸. 집에 돌아가겠다고 잉잉 울게 될 거야."


"혹시 그게 실패할 수도 있으니까, 나를 좀 도와줄래?" 코라그가 제안했다. "난 정말 확실한 방법을 아는데."


벨루아안은 자신의 계획이 실패할 수 있다는 말에 잠깐 자존심이 상한 듯 주름이 잔뜩 낀 얼굴을 씰룩거렸다. 하지만 곧 흔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좋아. 말만 해, 코라그."


"나만 계획이 없네." 아비나알이 우울하게 말했다. "구더기 괴물을 설득하려고 내가 가진 좋은 말린 심장은 다 내주었는데, 다음에는 또 뭘 주고 거래해야 하지?"


"그러게, 괴물을 데려오는 것만으론 안 된다니까." 벨루아안이 쉰 목소리로 구박했다. "주인님이 지금까지 뭘 했느냐고 물어보시면 뭐라고 대답할래?"


그러자 아비나알은 한숨을 쉬면서 안 그래도 축 늘어진 입술들을 더 늘어트렸다. 그런 모습이 꽤나 딱해보였는지 벨루아안이 혀를 쯧쯧 차고는 새로운 제안을 꺼냈다.


"나한테 썩은 눈알로 만든 젤리들이 좀 있어. 이걸 너한테 줄 테니까, 한번 다시 시도해볼래?"


"정말? 그래도 돼?" 아비나알이 끽끽거리며 웃었다.


"그래, 대신 다음에는 계획을 잘 짜야 해. 안 그러면 근방의 스피라들한테 소문이 다 퍼져나갈 거야."


"신중하게 할게."


지하생물들은 서로를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음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헤어졌다. 하나는 거대한 곤충으로 변해서 기어갔으며, 다른 하나는 땅 밑으로 순식간에 굴을 파며 들어가버렸고, 마지막 하나는 주위와 똑같은 모습이 되어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부패한 악취가 풍겼고 흙 속에 살던 벌레 몇 마리가 밖으로 나와 배를 뒤집으며 죽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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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Chap5. 무지개가 내리는 곳 (2) 22.04.19 9 0 18쪽
21 Chap5. 무지개가 내리는 곳 (1) 22.04.14 16 0 14쪽
20 Chap4. 숨 쉴 수 없는 사막 (4) 21.10.25 13 0 16쪽
19 Chap4. 숨 쉴 수 없는 사막 (3) 21.10.22 21 0 21쪽
18 Chap4. 숨 쉴 수 없는 사막 (2) 21.10.17 13 0 18쪽
17 Chap4. 숨 쉴 수 없는 사막 (1) 21.10.10 21 0 24쪽
» Chap3. 나무 없는 초원 (5) 21.09.04 17 0 22쪽
15 Chap3. 나무 없는 초원 (4) 21.09.03 17 0 20쪽
14 Chap3. 나무 없는 초원 (3) 21.08.30 20 0 14쪽
13 Chap3. 나무 없는 초원 (2) 21.08.29 14 0 18쪽
12 Chap3. 나무 없는 초원 (1) 21.08.24 24 0 22쪽
11 Chap2. 붉은 협곡 (7) 21.08.17 21 0 24쪽
10 Chap2. 붉은 협곡 (6) 21.08.14 15 0 17쪽
9 Chap2. 붉은 협곡 (5) 21.08.09 14 0 17쪽
8 Chap2. 붉은 협곡 (4) 21.07.21 15 0 16쪽
7 Chap2. 붉은 협곡 (3) 21.07.06 28 1 14쪽
6 Chap2. 붉은 협곡 (2) 21.05.20 27 1 19쪽
5 Chap2. 붉은 협곡 (1) 21.05.16 26 1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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