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템페라 님의 서재입니다.

라이노의 겨울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템페라
그림/삽화
Sage
작품등록일 :
2015.05.10 19:29
최근연재일 :
2015.05.19 19:35
연재수 :
7 회
조회수 :
473
추천수 :
0
글자수 :
46,806

작성
15.05.11 13:19
조회
82
추천
0
글자
18쪽

1. 늑약

DUMMY

성의 안으로 뛰쳐 들어온 그레이는 곧장 첫 번째 적을 맞이했다.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였다. 그레이는 눈을 찌푸리며 검을 그러쥐었다. 일반적인 적이 아니었다. 검은 갑옷의 틈사이로 검은 연기 같은 것들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얼굴을 덮는 투구에서는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그레이는 침을 꿀꺽 삼키며 발을 바짝 지면에 붙였다. 들어본 적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 지금은 굳게 닫혔다고 전해지는 이계의 구멍이 곳곳에 열려있었던 때에나 존재했다던 마물. 다양한 마물들이 존재했다고 하지만, 지금 눈앞에 보이는 기사와 같은 외양을 가진 마물을 본 기억이 있었다.


‘정녕 마물이란 말인가!’


인간이라면 몰라도 마물에 대한 전투 방법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레이는 피가 차갑게 식어가는 것을 느끼며 검을 그러쥐었다. 너무 오랫동안 머뭇대었던 건지 이미 적도 그레이를 발견한 듯했다. 그레이는 이를 악물고 검을 뒤로 길게 빼내었다.


“선수필승!”


그레이는 빠르게 내달리며 검을 곧게 내뻗어 마물의 검을 든 어깨 죽지를 찔렀다. 문헌에 의하면 마물의 약점은 일반적인 인간과는 다르다고 전해져왔다. 마물의 약점을 알지 못한다면, 최소한 무력화라도 시도하겠다는 판단이었다. 체중을 실은 강력한 찌르기는 마물의 어깻죽지를 꿰뚫었다.


‘생각보다 단단하지는 않..’


검을 다시금 빼내려던 그레이는 그의 검격에 아랑곳하지 않고 검을 휘둘러오는 마물의 검에 생각을 끝마치지도 못한 채 검을 놓치며 뒤로 몸을 던졌다. 마물의 검은 그레이의 흉부갑옷의 위를 길게 그어내었다. 그레이는 놀란 마음에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마물을 바라보았다. 마물은 빠르진 않았지만 깨끗한 검격을 구사하고 있었다. 그레이는 연이은 마물의 검을 몸을 틀어 피해내며 가볍게 혀를 찼다.

라이노의 갑옷은 단단하고 두껍다. 이 갑옷을 제 몸처럼 익숙하게 하는 것, 그것이 기사들의 첫 번째 과제일 정도로 갑옷을 입고 유연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지금도 한번 한번 피하는 횟수가 늘어갈 때마다 근육에 피로가 쌓이는 것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윽,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어. 이대로 가다간 다치는 게 문제가 아니고 지쳐 나가떨어지는 게 먼저겠다.’


그레이는 훅, 하고 숨을 내쉬며 휘둘러진 검을 몸을 낮춰 피했다. 머리 위를 지나는 서늘한 검의 감각이 지나자마자 그레이는 이를 악물며 마물을 어깨로 들이박았다. 마물이 휘청거리는 순간 그레이는 다시금 마물의 어깨에 박힌 검 자루를 양손으로 잡은 뒤 체중을 실어 아래로 내리 그었다. 쇠가 거칠게 긁혀 지나가며 불꽃이 튀어 올랐다. 어깨가 길게 찢어지자 찢어진 틈사이로 검은 연기가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좋아!”


그레이는 포효하듯 외치며 마물을 발로 밀어내며 뒤로 살짝 뛰어 간격을 넓혔다. 어깨 갑옷이 길게 베어나간 탓에 마물의 검 끝이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무리하게 철을 가른 그레이의 검 또한 이가 잔뜩 나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검심이 흔들릴 정도는 아니었다. 아직은 할 만해. 그레이는 그렇게 생각하며 마물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깨가 흔들리는 탓에 마물의 행동은 민첩하지 않았다.

그레이는 후-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며 검 끝을 가슴께로 올려들었다. 균형이 흔들리는 마물의 검을 무너뜨리는 것이야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강철이 흔들리는 소리가 복도를 울리고 있었다. 천천히 다가오는 강철기사를 바라보며 천천히 균형을 낮춘 그레이는 마물이 그의 간격에 들어서자마자 섬광처럼 뻗어나갔다. 종으로 크게 내리그어진 검이 마물을 양단하는 동시에, 힘을 견디지 못한 검날이 부서져 날아가며 그레이의 볼을 그었다. 역시 단단하네. 하고 그레이는 중얼거리며 부러진 검을 놓고 뒤로 몇 걸음정도 물러났다. 반으로 잘려나간 마물의 몸에서는 검은 연기가 피가 솟구치듯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부들부들 떨리며 흔들리는 마물의 검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레이는 마물의 어둠이 다 빠져나가고, 마물이 깃든 갑옷이 부서져 내리는 것을 기다려 마물의 검을 빼앗아들었다. 검은 검신에 깃든 마기가 미처 빠져나가지 않은 듯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지만 그레이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오직, 다음의 적만 있을 뿐. 그레이는 길게 숨을 내쉬며 왕성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마물들은 어떤 적이든 생소한 적들뿐이었다. 그레이는 끊임없이 검을 휘두르며 위로, 다시 위로만 향했다. 몇 마리의 마물을 베고, 몇 번째의 계단을 밟았는지조차 가물해질 무렵, 그레이는 작은 비명소리를 들었다. 지쳐있는 상황이었지만 되려 정신을 또렷해졌다.


누군가 살아있는 자가 있다.


지킬 사람이 있다.


기사를 가치 있게 해주는 상황이 그 곳에 있었다. 그레이는 거칠어진 숨을 몰아쉴 시간도 없이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달려갔다. 소리는 알현실 쪽에서 들리고 있었다. 문을 부수려는 듯 두드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누군가 알현실 문을 잠그고 농성을 하는 중인건가.’


그렇다면 그게 누구든 간에 지켜내겠다. 그레이는 그 생각만으로도 힘이 솟구치는 것만 같았다. 단단한 나무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그레이는 알현실 앞의 마물 무리에 달려들었다.


“비켜라!”


검은 연기를 뿌리는 갑옷의 마물들이 그레이의 묵직한 일격에 튕기듯 밀려났다. 그레이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문의 앞을 막아섰다. 기습이 성공한 덕에 어떻게든 마물들을 문 앞에서 비켜나게 하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마물들은 금세 몸을 일으키고 검을 세워들며 그레이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레이는 긴장감에 입술을 핥으며 손에 들린 검을 힘껏 그러쥐었다. 혈기만을 믿고 무턱대고 뛰쳐 들어오긴 했지만 한명의 적조차 그리 힘겹게 이긴 그였다.


‘그 전투를 통해 경험을 쌓긴 했지만..’


망설임이 틈을 만들어 낸 것인지 마물의 일제 공격이 시작되었다. 잘 훈련된 병사들처럼 숨 쉴 틈 없는 연계공격을 펼쳐오는 마물의 검을 자신의 검과 갑옷으로 막아내고 흘려내며 그레이는 문에 바짝 다가섰다. 오래 버틸 수는 없다. 적은 많고 그는 아직 미숙했다. 사명감에 타오르던 힘도 천천히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지쳐가는 그와는 달리 마물은 지치는 기색하나 없었다.


‘조금 더 신중했어야했나!’


갑옷의 겉에는 끊임없이 생채기들이 생겨났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며 시야가 차츰 좁아졌다. 마물들은 적을 몰아붙이는 훌륭한 연계를 사용할 줄 알고 있었다. 한계를 느낄 즈음, 갑작스레 문이 활짝 열렸다. 문에 바짝 붙어있던 그레이는 그와 동시에 뻗어져 나온 흰 팔에 감싸여 방 안으로 끌어들여졌다.


“윽?”


한심한 소리를 내며 끌어당겨진 그레이는 그대로 갑옷의 무게에 이끌려 바닥에 패대기쳐졌다. 아프다, 하고 엄살을 피우기도 전에 그레이는 얼른 몸을 일으켰다. 문이 열렸으니 그간 이곳에 들어오려 기를 쓰던 마물들이 들어오는 것이야 정해진 순리임이 틀림없었다. 그레이는 튕기듯 몸을 일으킴과 동시에 몸을 틀어 문안으로 들어오려는 마물을 거세게 후려쳤다. 둔탁한 손맛과 함께 밀어닥치던 마물들이 일제히 물러서자 그는 얼른 열려진 문을 닫아내곤 문손잡이에 자신의 검을 밀어 넣어 고정시켰다.


“굳이 검을 쓸 필요까진 없었는데.”


문 듯 들려온 목소리에 그레이는 황급히 눈을 돌렸다. 그레이를 방 안으로 끌어들인 인물은 작은 소녀였다.


“물건들로 문을 막는 것 좀 도와주겠는가.”


상황이 좋지 않음에도 소녀는 무척이나 침착했다. 그레이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휘둘러보았다. 이전에 물건을 쌓았던 것으로 보이는 가구들이 즐비했다. 소녀 혼자의 힘으로 이 정도를 해낸 것일까. 하고 그레이가 고개를 갸웃했을 무렵, 어딘가로 통할 것으로 보이는 작은 문이 보였다.


“저 문은..”


“쓸데없는 것에 신경 쓰지 말거라. 날 구하러 온 게 아니었더냐?”


소녀치곤 지나치게 권위가 넘치는 목소리였다. 그레이는 그제야 소녀를 바로 보았다. 황금빛 머리카락, 지나치게 새하얀 피부. 어려움 한번 겪어보지 않았을 듯한 그녀의 맑은 푸른 눈동자는 얼핏 얼핏 들리는 마물들의 문 두드리는 소리에 흐려지기도 했지만 결단코 그에 지지 않겠다는 결의의 기색마저 보였다.


“황녀.. 전하이십니까?”


그레이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소녀는 얼굴을 금세 찌푸렸다.


“그럼 누구인 줄 알았던 게냐.”


그 말에 그레이의 표정은 삽시간에 밝아졌다. 황가의 핏줄은 완전히 끊어진 게 아니었던 것이다. 라이노는 무너지지 않았다. 희망의 빛을 발견한 듯 그레이는 만연에 미소를 띄운 체 얼른 소녀의 앞에서 부복했다.


“황가의 명을 받아 황도 수호를 맡고 있는 흰 비늘 기사단소속 이등 기사 그레이 L 레이치노, 황녀전하를 뵙사옵니다!”


“윽, 그런 허례허식은 아무래도 좋다! 그레이경. 지금은 일단 문부터 막으라 하지 않았느냐.”


성가시다는 듯이 손을 내젓는 황녀의 모습에 그레이는 큭, 하고 가볍게 실소를 터트리며 몸을 일으켰다.


“생각보다는 터프하시군요, 황녀 전하.”


“에잇, 잔말은 되었다. 얼른 움직이지 않고 뭘 하는 게냐!”


다시금 그를 재촉하는 황녀의 말에 그레이는 명 받들겠습니다. 하고 대답을 한 뒤 주변에 치워져있던 가구들을 무너뜨리듯 문 앞에 쌓아올렸다. 황녀는 분주히 움직이는 그레이의 모습을 보자 그제야 안심했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무릎을 끌어안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강한 척은 했지만 황녀는 아직 10대 초반의 소녀였다. 상황이 채 무르익기도 전에 황제가 훌륭한 판단력으로 그녀를 이 문 안에 숨겨두어 난을 피했지만, 그럼에도 문틈으로 새어든 공기와 분위기로 황녀는 이미 그녀 이외의 황가의 핏줄이 전부 끊어졌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전부 다 쌓았습니다. 얼마간은 이곳으로 들어오지 못하겠지요.”


문 듯 들려온 그레이의 목소리에 황녀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걱정스런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그레이의 표정에 황녀는 얼른 몸을 일으켰다. 황가의 인물은 절대 약해져선 안 된다, 약한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 그녀의 유모에게서부터, 그리고 그녀의 어미로부터, 또한 그녀의 아비로부터, 귀에 딱지가 앉게 들어온 말이었다. 황실은 신과 용의 자손이며, 황가의 힘은 바로 그런 의연함과 그들을 따르는 민중의 신앙에서부터 오는 것이라고, 황가의 자식들은 전부 그렇게 배워왔다.


“걱정 말거라. 그보다 빠져나갈 방도를 찾아야 할 것이야.”


황녀의 말에 그레이는 금세 동정의 표정을 지웠다. 그 스스로도 그것이 불손한 행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신과 용의 핏줄을 그 누가 동정하고, 그 누가 안타깝게 여길 수 있단 말인가. 신은 언제나 경외 받는 신의 모습으로 있어야하는 것이다. 황녀가 의연하게 일어서는 모습을 본 그레이는 그런 사실을 깨달았다.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그레이는 다짐하듯 말하곤 주변을 둘러보았다. 열린 창문 바깥은 수십 미터의 상공. 막아놓은 문은 마물의 무리. 방안에는 멀쩡해 보이는 커튼과 이불, 그리고 장식용 칼과 방패.. 방의 구석구석을 살펴보던 그레이는 문 듯 방금 전에 보았던 구석진 방에 시선을 멈추었다.


“황녀전하, 저 문은 어디로 통하는 문 입니까?”


그레이의 물음에 황녀는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어딘가 꺼리는 기색에 그레이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꺼림칙한 것이라도 들어있는 겁니까?”


물음을 던지며 조심스레 몸을 일으킨 그레이는 황녀를 흘끗 바라보며 천천히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금단의 과실이 있다면 따 보고파 하는 것은 인간의 오래된 나쁜 버릇이었다. 황녀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그레이를 막으려 했지만 그레이는 이미 문을 반쯤 열어버린 뒤였다. 문 뒤에서는 역한 냄새가 풍겨왔다. 그레이는 눈을 휘둥그레 뜬 체 방안의 광경에 얼어붙었다. 목을 매단 여인 둘과 손목을 그은 여인 하나. 방안에는 총 세구의 시신이 있었다.


“닫아!”


서슬 퍼런 황녀의 외침에 그레이는 급히 문을 닫아버렸다. 굳은 얼굴이 쉽게 돌려지지 않았다. 누구의 시체인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두 구의 목매단 시체와 한 구의 손목을 그은 시체의 복식은 달랐지만, 그 복식이 어떤 것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전자는 하녀, 후자는 황녀의 유모일 것이다. 그레이는 착잡한 표정으로 닫아버린 문의 문고리를 붙들고 있었다.


“그대가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나도 저리 되었겠지. 그대가 조금이라도 빨랐으면 저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황녀의 조용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황녀는 죽을 준비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레이는 침을 꿀꺽 삼키며 말없이 문고리만을 붙들고 있었다.


“탓할 생각은 없다. 그대가 이곳에 올라오기 위해 어떤 위험을 무릅쓰고 왔는지는 익히 짐작하고 있으니. 고마워하고 있다. 그대가 오지 않았다면 황가의 핏줄은 끊겨 버렸을 게야.”


“전하..”


“빠져나갈 것만 생각하자. 자네는 그 자들을 못 본 것이다, 그레이경.”


황녀의 말에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시체와 황녀의 생각을 더듬는 것은 분명 불경한 것일 터이다. 인간은 신의 생각을 가늠해서는 안 된다. 그레이는 고개를 휘휘 내저으며 생각을 돌리기 위해 노력했다.


“커튼과 이불을 묶어 엮고 칼에 그것을 동여매어 창틀에 건 뒤, 아래층으로 탈출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이 칼이 비록 장식용이지만 제법 튼튼하고, 무엇보다 길이가 길어 그리 사용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듯합니다.”


그레이의 말에 황녀는 거세게 흔들리는 방문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경이 사용할 검이 한 자루 필요하겠구나. 나를 지키려면 말이다.”


“남는 검이 있습니까? 없다면 방패로 적들을 밀치고 나갈 생각뿐이었습니다만.”


하고 그레이는 의아한 표정으로 주변을 휘둘러보았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방안에 있는 검이라곤 날이 무딘 장식용 검 뿐이었다. 그레이의 말에 황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눈을 떴다.


“쓸 수 있는 검이 한 자루 남아 있느니라.”


황녀는 그렇게 말하며 자살한 세 여인이 있는 방으로 달려가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농익은 시체의 냄새가 역하게 밀려나오자 그레이는 눈썹을 찌푸리며 코를 틀어막았다. 황녀는 부릅뜬 눈으로 방안을 샅샅이 살펴보고는 유모가 자결할 때 사용한 피가 묻어있는 긴 장검을 어렵사리 끌며 나왔다. 이곳저곳에 묻어있는 피로 더러워지긴 했지만, 장검의 예리함은 외려 더 선명해보였다.


“이것이면 되겠지.”


황녀의 말에 그레이는 침을 꿀꺽 삼키며 검을 받아들었다. 검을 건네는 황녀의 얼굴은 분노인지 슬픔인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레이가 검을 잡아들자 황녀는 이를 으득 갈고는 아직 시취가 흘러나오는 방문을 거세게 닫았다.


“그레이경, 그 검과 내 목숨을 경에게 맡기겠다. 황가의 운명을 받들어 나를 지키고, 탈출시키도록 해라!”


“명과 의지를 받들겠습니다.”


그레이는 검을 꼭 쥐고 가슴께로 검을 올려 맹세의 자세를 취하였다. 굳어버린 피딱지들이 손아귀 안에서 으스러져 내렸다.


“좋아, 탈출하자.”


황녀는 그렇게 말한 뒤 커튼과 이불을 모조리 뜯어내어 엮어내기 시작했다. 그레이는 커튼의 끝에 검을 단단히 묶은 뒤 황녀를 도와 줄을 단단히 고정시키고 이어 묶었다. 곧이어 아래층으로 내려가기에 충분할 정도로 튼튼하고 긴 로프가 하나 완성되었다. 그레이는 묶인 곳이 어느 하나라도 허술한 곳이 있는지 시험 삼아 잡아당겨 보기를 반복한 뒤 창문틀에 장식용 칼을 창문 바깥쪽에 걸어 다시 한 번 체중을 실어 당겼다. 줄은 그레이의 체중을 버티기에 충분할 정도로 잘 묶인 듯 했다.


“내려 갈 수 있겠습니다, 황녀 전하.”


그레이의 확신에 찬 어조에 황녀는 고개를 끄덕이곤 창문 밖을 내려다보았다. 까마득한 지상의 풍경에 황녀의 얼굴빛이 순간 창백해졌지만 곧 마음을 굳힌 듯 창문에서 떨어져 여러 번 호흡을 나눠 뱉었다.


“긴장되십니까?”


황녀의 창백해진 얼굴을 보며 그레이가 물었다. 황녀는 도리질을 치며 치마를 허벅지 위로 올려 묶었다. 입고 있는 긴 드레스는 화려하기만 할 뿐 아무래도 움직이기에는 불편했다. 그레이는 황송한 표정으로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자 황녀는 그의 손을 이끌어 창문으로 향했다.


“경이 먼저 내려가는 것이겠지.”


황녀의 말에 그레이는 장식용 검을 창 안쪽에 걸어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먼저 내려가 상황을 살피겠습니다. 안전하면 신호를 드릴 테니 그때 내려오십시오.”


“그리 하겠다. 지금 경의 목숨은 곧 나의 것이라 해도 무관하니 각별히 조심하도록 하라.”


황녀의 말에 그레이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지금의 상황이 되자, 그레이는 어쩐지 자신은 지금의 이 사건을 만나기 위해 기사가 된 것 같기도 한 기분이 들었다. 명예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던가. 그레이는 불과 몇 시간 전의 자신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레이는 심호흡을 하며 커튼을 붙잡고,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명예는 역사가 평가하고, 그 역사는 기사가 싸워야할 전장에서부터 싹트기 마련이다. 아래쪽의 창문을 어깨로 부수어 들어가며 그레이는 장검을 높이 곧추세웠다.


“시대의 용이 꿈틀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구나, 나는 이곳에서 명예를 찾을 것이다.”


작가의말

하루만에 다시 뵙습니다. 기본적으론 자유연재지만 비축분이 있으니 며칠간은 일일 연재가 될겁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라이노의 겨울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7 1. 늑약 15.05.19 54 0 12쪽
6 1. 늑약 15.05.18 43 0 14쪽
5 1. 늑약 15.05.16 50 0 22쪽
4 1. 늑약 15.05.14 63 0 15쪽
3 1. 늑약 15.05.12 63 0 12쪽
» 1. 늑약 15.05.11 83 0 18쪽
1 1. 늑약 15.05.10 118 0 10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