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프로매니아 님의 서재입니다.

내 일상


[내 일상] 첫사랑

1

 

겨울로 접어드는 계절, 체온이 끊어진 도시의 적막한 침묵, 날카로운 바람이 비수가 거리의 모든 걸 꽤 뚫고 지나간다. 길가에 뜨문뜨문 세워진 가로등도 차디찬 어둠을 밀어내려 애쓰고 있다. 한계까지 올라선 건가? 깜박 깜박거리며 등 빛이 생을 다해가고 있다. 보임과 가림이 반복되는 것이 어지럽다.

 

그에게는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고즈넉한 보름달이 밝은 온기로 도시를 보듬어주고 있는 것.

 

외투 깃에 깊이 파묻은 머리에 잔뜩 움츠러든 어깨, 그는 흐느적거리며 불 꺼진 상점들을 지나쳐 도심 외곽의 거리로 걸음을 옮긴다. 졸업 후 한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들과의 술 한잔이 숨죽이고 있던 서정을 깨웠다. 이대로 걷다가 멈춰선 곳에 또 하나의 연이 있을 듯하다. 그는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거리를 배회하고 있다. 멈춰 설 곳을 찾지 못한 까닭이다.

 

외곽에서도 외진 골목 앞, 두 인영이 보인다. 작고 여린 몸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무얼 하는 거지? 정확히 알 수 있는 거리는 아니다. 그래도 그 느낌은 전해져 온다. 행복, 기쁨.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 것일까? 희미한 웃음소리가 차가운 바람에 섞여 귀에 담긴다.

 

삭막한 거리에서 발견한 따듯한 체온이다. 자신도 모르게 그는 웃음소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사거리 건널목의 붉은 신호등이 막아섰을 때, 지금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인식했다. 피식 웃음이 나온다.

 

언제 여기까지 온 거지.’

 

그는 발길을 돌릴까 생각했지만, 그냥 마음이 가는 데로 내버려 두기로 했다. 신호등의 허락이 떨어지고 두 인영의 모습을 바라보며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4차선 도로를 횡단했다. 그런 그의 느릿한 움직임과는 반하게 한 인영의 모습이 빠르게 그의 눈으로 빨려들었다.

 

일정하게 움직이던 그의 심장이 또렷해지는 한 인영의 모습에 점차 속도를 더해갔다. 그 깨질 것 같지 않던 견고한 심장의 흐름이 한순간 거칠게 흐트러지며 요동쳤다.

 

주위의 희미한 빛이 한 인영에게 모여들었고, 버림받은 공간은 어둠으로 잠식되어갔다. 그는 차디찬 어둠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둘러 빛을 향해 발을 재게 놀렸다. 작고 여린 한 인영이 점점 그의 눈을 가득 메웠다. 얼마나 가까워진 것일까? 인영은 자신의 공간을 침범한 낯선 이의 존재를 인식했다. 흠칫 놀라며 귀여운 몸짓이 멈췄다.

 

그는 의식의 경계에서 걸음을 멈추고 인영을 바라봤다. 찬바람 탓인지, 분주한 움직임 탓인지, 아니면 낯선 이를 경계해서인지, 조그마한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다.

 

그는 그 귀여운 몸짓을 볼 수 없다는 아쉬움과 인영의 즐거움을 깨뜨린 미안함에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인영도 경직된 몸으로 조용히 바라봤다.

 

한동안 답답한 정적이 흘렀다. 무슨 행동을 하지 않으면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고요함에 그는 백기를 들어야 했다. 미안하다고 말하려는 순간 청명한 목소리가 귀를 시원하게 해준다.

 

오빠 술 마시고 가. 서비스 잘해 줄게.”

 

오물거리는 입술의 움직임, 인영의 입가에 걸린 미소, 흡사 악마가 천사를 유혹할 때 저런 미소를 짓지 않을까? 그의 술먹은 혼미한 정신이 심해로 끝없이 가라앉았다. 몽롱한 감각, 몽롱한 시선, 그는 인영이 이끄는 데로 이끌려갔다.

 

2.

 

와인 잔과 장미가 그려져 있는 불 꺼진 간판이 보인다. 그는 간판을 보며 운치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마음이 머무는 곳

 

어두컴컴한 지하로 향하는 계단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는 그에게 인영이 다가와 스스럼없이 팔짱을 끼고 재촉하듯 이끈다. 마치 단단한 쇠사슬이 온몸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는 느낌이다, 부드럽고 따뜻한 빛이 자신을 단단하게 옥죄어오는 느낌이랄까. 상반되는 느낌은 벼락에 감전이라도 된 듯 온몸을 흩고 지나갔다. 그는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무형의 힘에 이끌려 인영에게 반하는 작은 의지마저 상실했다.

 

계단 아래 페인트가 벗겨진 빛바랜 문이 삐거덕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가 처음 마주한 건 붉은 조명 빛, 음습하고 칙칙한 냄새, 경쾌한 빠른 비트의 음악, 낮은 칸막이가 있는 테이블 위의 탐욕으로 일렁이는 눈들. 그가 한걸음 문을 넘어설 때 사람들의 시선이 경계의 빛을 띠고 일제히 모아졌다. 인영은 그런 시선이 만족스러운지 웃으며 목소리를 높인다.

 

호호호, 제가 아는 오빠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사람들의 시선은 다시 탐욕으로 번들거리며 각자의 자리를 찾아갔지만, 구석진 한 테이블의 남자는 여전히 경계의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다.

 

! 나하고 있기 싫어서 숨겨둔 애인을 부른 거야?”

 

찌푸려진 미관에 드러난 불만을 노골적으로 내뱉어 버리는 남자.

 

오빠, 그런 것 아니에요. 가게 앞에서 우연히 만났어요.”

 

인영의 가볍고 경쾌한 목소리에 작은 떨림이 감춰져 있다.

 

! 그래, 맘대로 해라.”

 

인영은 애써 태연한 척 중앙 테이블에 앉아 있는 농익은 여인에게 다가갔다.

 

그는 문 앞에 어색하게 서서 움직이는 인영의 뒤를 쫓고 있다. 시간이 너무 더디게 움직인다. 그러다 뒤돌아본 인영과 눈이 마주쳤다. 이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게 해달라는 그의 애절한 눈빛을 본 인영은 옅은 미솔를 지으며, 농익은 여인에게 귀엣말한다. 농익은 여인도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며 살포시 고개를 숙였다. 그도 엉겁결에 마주 고개를 숙였다.

 

-호호호…….

 

그 모습이 재미있는지 인영은 향긋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농익은 여인과 풋풋한 인영의 모습이 왠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여인과 몇 마디 더 나눈 인영이 그에게 다가왔다.

 

오빠, 불편하지. 우리 저쪽으로 가자.”

 

다른 사람의 시선이 닿지 않는 구석진 자리로 인도한 인영은 그가 자리에 앉는 모습을 보고 주방으로 향했다. 그는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차갑고 푹신한 감촉이 전해지며 작은 안도가 찾아왔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는 걸까? 왜 여기까지 따라왔지.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 걸까?’

 

그는 눈을 감고 상념에 젖어 들었다. 잠시 뒤 부드럽고 달콤한 음성이 그의 귀를 자극했다.

 

오빠. 내가 온 것도 모르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설마 예쁜 나를 두고 잠들었던 거야?”

 

상념에서 깨어나며 입꼬리가 올라갔다. 원하던 답을 찾았다. 예쁜 나? 그래, 이 아이는 예쁘다. 예쁘니까! 그게 여기까지 따라온 이유였다. 테이블에는 세 병의 맥주와 잘 구워진 오징어가 놓여있다.

 

오빠, 이런 곳은 처음이지? 어떻게 알았냐고? 초짜 티가 너무 나거든. 여기는 맥주 세 병에 안주 하나가 기본이야.”

 

조잘거리는 인영에게 시선을 돌렸을 때 그의 모든 감각은 활발히 깨어나고 있었다. 붉은 조명에 비친 인영의 모습, 푸른빛이 감도는 아이섀도, 반짝이는 쌍꺼풀, 기다란 속눈썹, 진한 마스카라, 오뚝한 콧날, 살포시 올라온 앙증맞은 입술, 붉은 립스틱, 외투에 가려져 있던 하늘색 원피스, 봉긋한 가슴에 붉게 수놓아져 있는 장미, 그리고 청순하고 가녀린 향. 그의 눈은 인영의 모습 하나하나 담으며 생기를 띄고 있었다.

 

3.

 

오빠, 창피하게 왜 이렇게 빤히 쳐다봐?”

 

인영의 발랄한 음성, 가냘픈 호흡이 그의 귀를 간지럽힌다.

 

오빠?”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바라보는 인영에게 그는 아무런 말 없이 빈 술잔을 내밀었다. 맥주가 소리를 내며 거품을 밀어 올렸다.

 

저도 한 잔 줘요.”

 

그는 갑작스러운 존칭에 괜스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가까웠던 사이가 멀어진 느낌이랄까. 술병을 받아든 그는 인영의 잔을 채웠다. 그와 인영을 가로막은 테이블, 둘 사이를 채우고 있는 맥주 가득한 잔, 또다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이 싫었을까? 인영은 입술을 비죽거린다.

 

오빠 정말 재미없다. 무슨 한마디 말도 없이 그렇게 앉아만 있어. 뭐 궁금한 거 없어? 오빠는 뭐 해? ! 그렇구나. 그럼 나이는? 나하고 세 살 차이나네…….”

 

인영의 질문에 하나하나 답 해주는 그의 얼굴엔 행복한 웃음이 맺혀 있었다.

 

쉼 없이 조잘거리는 인영의 모습은 흡사 둥지의 어미 새에게 모이를 받아먹기 위해 필사적으로 입을 놀리는 새끼 새를 닮아 있었다. ‘어색한 것이 싫은 걸까? 힘들지 않을까?’ 그는 인영의 수고스러움을 덜어주고 싶었다. 술잔을 비우며 인영에 대해 궁금한 것을 물었다. 인영은 그의 물음에 반색하며, 묻지도 않은 가정사에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덧대어져 앙증맞은 입으로 끊임없이 쏟아냈다.

 

어느새 빠른 비트의 음악은 은은한 발라드로 바뀌어 있었고, 테이블의 사람들도 하나둘씩 사라져 갔다. 그에 맞춰 사라지는 붉은 조명, 이제 지하의 넓은 홀은 어둠과 두 개의 붉은 공간으로 나누어졌다. 사방의 어둠이 붉은빛을 더욱 몽환적으로 만들었다. 이 지하의 공간은 세상의 시간과 단절되어 있었다.

 

쨍그랑!”

나른한 공간을 찢는 날카로운 소리, 이어지는 여인의 비명. 그와 인영은 소리의 실체를 찾아 일어섰다. 대각선 구석진 자리의 남자가 테이블을 뒤엎고 매섭게 여인을 다그치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너 만나려고 여기 오는 줄 알아?” 술 취한 짐승이 사납게 울부짖는다.

 

그는 남자를 향해 빠르게 다가가는 인영을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봤다. 그렇다고 자신이 지금 나서면 일이 더 커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지금까지 내가 여기서 쓴 돈이 얼만 줄 알아! 이것들이 나를 아주 호구로 알고 있었네.” 삿대질까지 해가며 계속되는 남자의 다그침에 더는 참을 수 없었는지 농익은 여인의 입에서도 앙칼진 목소리가 뿜어졌다.

 

누가 오라고 했어. 너 같은 놈이 술 팔아주는 거, 하나도 안 반가워. 왜 올 때마다 이 지랄이야!”

, !”

언니!”

 

그 순간 남자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고, 여인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뒤이어 인영의 비명이 그의 귓전을 때렸다. 이제 그에게 머뭇거릴 이유 따위는 사라졌다. 그는 빠르게 남자의 뒤로 돌아가 한 손으론 팔을 비틀고 다른 팔로 남자의 목을 감았다.

 

이 새끼, 이손 못 놔.” 남자는 거칠게 반항했지만, 그의 손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겁에 질려 가녀린 몸을 떨고 있는 인영이 보였다. 촉촉이 젖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인영의 모습에 그는 분노가 솟구쳤다. 남자의 목을 감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숨이 조여 오는지 남자의 얼굴은 금방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오빠!” 인영의 놀란 소리에 정신을 차린 그는 끌어당기던 팔에 힘을 풀었다. 그도 지금의 행동에 당황했는지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죽여라, 죽여!” 남자는 붙잡힌 상태에서 고래고래 악을 써댔다. 바닥에 쓰러졌던 여인이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오빠, 밖으로 내보내 줘요.” 그는 여인의 부탁에 남자를 문밖으로 밀어냈고 여인이 빠르게 다가와 문을 걸어 잠갔다.

 

쾅쾅, 쾅쾅 남자는 문을 발로 차고 주먹으로 두드렸다. “씨발, 문 안 열어. ! 개새끼야 너 나와!” 이제 남자의 분노는 그를 향해 있었다. 인영은 걱정스러웠는지 그의 팔을 꼭 붙들었다. “오빠! 나가지 마. 오빠가 참아.” 그는 한순간 술기운이 전부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참을 수 없는 강렬한 분노는 그에게 생소한 경험이었다. ‘술기운 때문이었을까?’

 

자신의 팔을 붙들고 있는 인영의 손을 통해 작은 떨림이 전해졌다. 엎어진 테이블, 깨진 유리 조각들이 붉은 조명 아래 반짝인다. 그는 조금 전 자신의 행동을 생각해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용기? 만용? !’ 다행히 큰일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생각에 그의 입에선 안도의 숨이 새어 나왔다. 잠시 숨을 돌리게 된 그는 점차 마음의 안정을 되찾아 갔다. 서서히 긴장이 풀리자 맥이 빠지며 몸이 축 늘어지고 있었다.

 

여인과 인영도 조금 안정을 되찾았는지 카페 공간에 남아있는 남자의 흔적을 지우고 있었다. 아직도 문밖의 소란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지만, 딱히 걱정되지는 않았다. 남자와 그를 가로막고 있는 10cm 두께의 육중한 나무문이 그에게 안정감을 주고 있었다.

 

부드러운 사랑 노래가 흐르던 공간이 남자의 욕설로 채워졌다. ‘빠른 비트, 폭발적인 가창력.’ 그는 지금 상황에서 엉뚱한 생각을 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실소를 흘렸다대충 정리가 끝났는지 인영과 여인이 그에게 다가왔다. 인영의 얼굴에는 짙은 수심이 그려져 있었다.

 

오빠, 이제 괜찮은 것 같아. 저 사람 저러다 제풀에 지쳐서 돌아가.” 한두 번 겪은 일이 아닌지, 그를 보며 힘들게 미소 짓는 인영의 모습에 슬픔이 느껴졌다. 그도 인영에게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

 

여인의 얼굴은 진한 화장에 가려있어 상처는 보이지 않았지만, 한쪽 뺨이 심하게 부풀어 있었다. “오빠, 도와줘서 고마워요. 지금부터 마시는 술은 제가 낼게요. 편하게 있다 가세요.” 인영은 주방에 들어가 얼음을 넣은 비닐을 가져와 수건으로 감싸서 여인에게 내밀었다. “언니, 이거 대고 있어. 그런데 밖에 있는 애들은 어떡하지?” 여인도 걱정스러운 눈으로 문을 바라봤다. “저 지랄을 떨고 있는데, 설마 주위에 있지는 않겠지.”

 

카페의 종업원들은 자신의 손님이 떠나가면 밖에 나가 호객행위를 한다. 손님의 매출에 일정 부분 팁으로 받아가는 영업의 형태 때문이다. 문제의 남자가 이 카페를 드나든 건 이른 봄이었다. 처음 그도 인영의 호객행위에 이끌려 이 카페를 찾았다. 그 후 일주일에 서너 번 꾸준히 카페를 찾아오던 남자는 봄이 더위에 밀려날 무렵 인영에게 반지를 선물하며 고백했다. 테이블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듣던 그는 불현듯 그 남자의 속마음이 궁금해 졌다. ‘사랑, 소유욕, 성적 욕망의 대상, 남자는 어디에 진심을 담았을까?’

 

4.

 

인영은 인천에 몇 남지 않은 판자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방 한 칸에 부엌이 전부인 집, 거미줄 같이 이어진 좁은 골목길, 보안등 하나 없는 판자촌의 밤은 희망의 빛마저 사라진 칙칙하고 음습한 공간이었다. 판자촌 대부분의 사람은 희망을 꿈꾸지 않는다. 일당을 벌어 근근이 먹고사는 이들에게 미래에 대한 생각은 사치였다.

 

인영은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판자촌을 벗어나 또래의 비교 대상이 생겼고, 가난과 창피함을 알게 되었다. 몇 명을 거쳐서 왔을지 모르는 빛바랜 옷과 운동화가 부끄러웠고, 버리는 천으로 만든 책가방과 실내화 주머니가 창피했다. 변변한 학용품 하나 없이 지내야 했던 학교생활은 어린 인영에게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창피하고 부끄러웠던 것은, 매년 학기 초에 하는 생활환경 조사였다. “텔레비전 없는 사람 손들어? 세탁기, 냉장고, 자동차, 자기 집 아닌 사람······· 손들어? 부모님 직업을 앞에서부터 말해봐.” 배려 없는 선생님의 목소리는 차갑게만 느껴졌다. 올린 손을 단 한 번도 내리지 못한 인영은 붉게 물든 얼굴을 푹 숙이고 있었다. 공사장 일용직, 집에서 종이봉투를 접는 일을 하는 부모님이 부끄러웠다. 인영은 자신의 차례가 오지 않기를 빌었다.

 

6학년이 되어 처음 맞는 미술 시간,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아이들은 준비해온 도화지와 물감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인영의 책상 위에는 덩그러니 도화지 한 장만 놓여있었다.

 

철준아, 나 물감을 깜박 잊고 못 가져 왔는데, 오늘 하루만 같이 쓰면 안 될까?”

내가 왜?” 철준의 눈썹이 사납게 꿈틀거렸다.

철준아, 미안한데 좀 같이 쓰자. 나중에 나도 빌려줄게.” 인영은 붉어진 얼굴로 재차 부탁했다.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내가 너한테 빌릴 게 뭐 있다고?” 철준은 일부러 반 아이들 모두 들리도록 큰 소리로 짜증을 냈다.

 

철준의 매몰찬 거절, 소리 내어 비웃는 아이들, 인영은 감당할 수 없는 모멸감에 몸을 떨었다. 주책없이 나오는 눈물을 참으려 떨리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 난 가난한 집에 태어났을까?’ 인영은 가난한 부모가 미워졌다. 그러다 문득 술에 취한 아빠가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이 생각났다. ‘내가 이렇게 사는 건, 부모가 날 안 가르쳐서 그런 거야. 내가 공부만 했어 봐! 저 잘난 놈들보다 더 떵떵거리며 살 수 있어!’

 

인영은 이를 악물었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목표가 생겼다. 인영의 눈에 뜨거운 불길이 타올랐다. 그때부터 하루 서너 시간 잠을 자고 코피를 쏟아가며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나려 기를 썼다. 밤이 되어 방 불이 꺼지면 침침한 백열전구가 달린 부엌에서 책을 들여다봤다. 오직 공부만이 가난을 벗어날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다. 중학교에 올라가서는 문제집 하나라도 더 사보기 위해, 시장 통에 있는 분식집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 노력이 얼마나 헛되고 부질없는 짓인지 깨닫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우수한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진학한 인영은 조금만 더 노력하면 가난을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교과서만 보고 공부했어요.” 서울대를 수석으로 입학한 오빠, 언니들의 기사를 읽으며 자신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3, 학교에서 배우는 공부의 한계는 여실히 드러났다. 중학교에서 전교 3등을 벗어나지 않던 성적은 천천히 하향곡선을 그렸다. 대다수 선생님의 일률 편향적인 주입식 공교육의 한계였다.

 

그 시절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던 것이 입시학원이었지만, 인영은 학원에 다녀볼 생각은 꿈조차 꾸지 못했다. 수업시간 칠판에 적혀져 있던, 선생용 학습서를 그대로 베껴놓은 것을 무조건 외우는 것이 고작이었다. 성적이 떨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래도 인영은 지금의 현실에 화를 내거나 탓하지 않았다. 항상 자신의 부족함을 탓했고 더 노력하려 애썼다. 아르바이트로 공부할 시간을 허비한 것을 탓하며 잠자는 시간을 더 줄였고, 그 뒤에는 자신의 머리를 탓했다.

 

3학년 2학기가 시작되고 인영은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대학 등록금조차 감당할 수 없는 가난한 집. 인영은 하향 지원으로 전액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지방으로 눈길을 돌렸지만, 진학을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지방에서 학업을 이어나갈 여유도 없을뿐더러, 4년 내내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는 지금과 똑같은 생활이 이어질 것이었다.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지방의 대학 간판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도 판단했다. 대학명이 사람의 능력을 결정하는 현실에서 더 이상의 학업은 무의미한 일이라 생각했다.

 

소리 없는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인영은 지금까지 노력한 시간을 후회하진 않았다. 단지 공부라는 탈출구가 막혀버린 것이 슬펐다.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집으로 가는 길이 유난히 멀게 느껴졌다. 미추홀 레코드 상점에서 들리는 슬픈 음악이 인영의 감정을 뒤흔들었다. “교복을 벗고~ 처음으로 만났던 너~” 소리 없이 흐르던 눈물은 오열로 이어졌다. 그동안 참고 있던 설움이 일시에 쏟아져 나왔다.

 

인영의 이야기(2)

 

5.

 

인영은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책도 손에서 놓았다. 다른 것은 일절 바라보지 않고 한길만 걸었던 후유증은 컸다. 눈동자는 생기를 잃어버렸고 수업시간 내내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거나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1학년부터 담임을 맡고 있던 선생님은 인영의 노력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알게 모르게 인영을 도와주며 마음으로 응원했었다. 그런데 2학기가 시작되고 인영이 찾아와 입시를 포기하겠다는 말을 꺼냈다. ‘지쳐서 그런 거겠지, 조금 지나면 괜찮아 지겠지 일단은 조용히 지켜보기로 했다. 그런데 대학입시가 코앞으로 다가와서도 고집을 꺾지 않는 인영이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그래서 몇 번 교무실로 불러 설득했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마지막으로 인영의 부모님을 설득해보자는 심정으로 판자촌을 찾았던 선생님은 10분도 채 말을 나눠보지 못하고 문을 나서야 했다. 자신이 상상할 수 없는 가난.......

 

선생님은 판자촌을 빠져나오며 담배에 불을 댕겼다. 깊이 연기를 들여 마시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섞어 천천히 내뿜었다. 시커먼 하늘을 반짝이는 별들이 아름답게 수놓고 있었다. “이런 더러운 세상. 하늘은 왜 이렇게 맑은 거야. 아주 지랄 맞게도 별이 잘 보이네.” 선생님은 인영의 노력과 희망을 빼앗아간 현실을 향해 뇌까렸다.

 

인영의 공허한 나날은 고등학교 졸업식까지 이어졌다. 졸업식이 끝나면 학교 주변은 도떼기시장으로 변한다. 부모님과 함께 사진을 찍는 아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왁자지껄 떠들며 교문을 빠져나가는 아이. 젊은 혈기를 가두어 놓은 둑이 한순간 무너져 내린다. 누구에게나 같은 3년이었지만 기쁨과 슬픔은 공존했다.

 

졸업식이 끝나고 교문을 벗어난 인영은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들어가 3년 개근상과 노력상을 갈가리 찢어버렸다. “노력상!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거였어. 이 지긋지긋한 가난은 아무리 노력해도 변하지 않아!” 인영은 눈물을 흘리며 모든 울분을 토해냈다. 지독한 가난에 대한 분노였다.

 

인영아?” 인영은 소리의 실체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눈에 고인 눈물이 시야를 막고 있어 흐릿한 형상만 보였다.

누구야!” 인영의 신경질적인 반응에 흐릿한 형상이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나야, 민정이.”


댓글 0

  • 댓글이 없습니다.


댓글쓰기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글목록
번호 제목 작성일
» 내 일상 | 첫사랑 23-06-05

비밀번호 입력
@genre @title
> @subject @ti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