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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예쓰 님의 서재입니다.

내 일상


[내 일상] 여러분은 어떤 계기로 글을 쓰겠다고 마음 먹으셨나요?

  다른 작가들은 어쩌다가 글을 쓰겠다고 마음 먹게 됐을까.

  적어도 나에게는 확고한 계기가 하나 있었다. 하지만 그 하나만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경험은 축적되는 것이며, 인생은 사진이 아닌 필름이니까. 나는 그 이전부터 줄곧 글과 인연이 있었다.
그럼, 내 인생이라는 필름의 가장 과거부터 영사해보자. 물론 ‘글’이라는 요소가 들어간 장면만 말이다.

  작가라면 기본적으로 글 읽는 것을 좋아해야한다. 좋은 작품을 많이 읽을수록 좋은 글이 나온다. 이건 만고불변의 진리다. 나도 읽는 것을 좋아하는 편에 해당한다.

  그러나, 내가 처음부터 독서광이었던 건 아니었다. 여느 아이들처럼 책 대신 뛰어노는 걸 좋아했다.  
본격적인 소설 중독자가 된 것은 <제로니모의 환상 모험>이라는 동화책을 접하고 나서부터였다.

  엄마는 12권의 분량을 한꺼번에 주문했다. 재밌는 책을 읽히면 독서에도 습관이 붙을 거라는 의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엄마의 선택은 옳았다.

  그 동화책은 읽다보면 마치 내가 환상 속의 세계로 들어간 것만 같았다. 여러 종족과 배경을 다뤘고, 재미와 감동을 모두 챙긴 소설이었다. 나이가 먹고나서도 그 두꺼운 시리즈는 내 방 책장 한 켠을 지켰다.

  재밌는 소설을 한 번 맛보고 나니, 그 이후로도 소설을 찾게 됐다. 그 때는 장르 소설 같은 것을 보는 방법을 몰랐으므로, 자연스럽게 고전 문학 소설들에게 손이 갔다. 반에 읽으라고 가져다둔 책자의 소설이란 소설은 다 읽었다. 도서관에서 따로 빌리기 귀찮아서 읽은 것을 반복해서 읽기도 많이했다. 

  형제가 국어 학원에서 책을 받아오면 내가 선발대 역할을 했다. 형제는 항상 재밌다는 말로 내게 독서할 것을 권유했다. 어른이 되고서야 고해성사를 들었다. 사실 자기는 안 읽었었고, 내가 재밌다 안 재밌다 감평해주면 재밌다고 할 때만 읽어 갔다나. 덕분에 많은 명작을 읽긴 했다.

  중학교 시절에는 해리포터를 접했다. 어릴 적 1장을 읽다가 이게 뭔 재미인가 싶어서 덮었는데, 초반을 참고 읽자 그 뒤로는 한 삼일은 해리포터 세계 속에 빠져 살았다. 사회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읽지 말라고 압수해 가버릴 정도로 말이다. 며칠 뒤 돌려주실 쯤엔 도서관 구석에서 이미 다 읽은 상태였다.

  고등학교 때 강한 인상을 남겼던 작품은 <천개의 찬란한 태양>이었다. <연을 쫓는 아이>를 쓴 작가의 차기작으로, 역시 아프가니스탄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였다. 전작의 퀄리티를 기대하고 샀기에 처음에는 좀 실망스러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인물이 많이 등장하고 이야기가 정신없이 전개된다고 느꼈다. 

  그래도 명작은 명작이라고, 몰입력은 상당했다. 저녁에 읽기 시작해서 새벽 4시까지 1부를 다 읽을 수 있었다. 다만, 1부가 끝나는 지점에서는 독서를 잠시 멈출 수 밖에 없었다. 20분을 내리 울음이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고 눈물이 나본 경험이야 몇 있지만, 그리 길게 운 적은 처음이였다.
활자로 사람의 심금을 울릴 수 있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라고 느꼈던 순간이었다. 

  난 이때까지는 글을 읽는 것만 좋아했지, 쓰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단편이나 끼적여봤어도 세상 사람에게 보여줄만한 긴 ‘이야기’를 조형한 적은 없었다.

  그럼 나는 언제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을까.
  글쓰기도 처음부터 좋아하지는 않았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일기에 쓸 게 없다고 썼다가 담임선생님에게 빨간 글씨의 피드벡으로 내 게으름을 몇 줄씩 지적 당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담임 선생님은 내게 글쓰기의 정을 붙게 해주신 분이기도 했다. 선생님은 카메라를 연결해서 다른 학생의 일기를 낭독해주셨다. 나는 당연히 낭독되지 못하는 입장이었는데, 어느날 설날 연휴에 한 번 잘 쓴 일기가 낭독되자, 아주 벅찼던 걸로 기억한다. 항상 낭독되던 친구가 내게 밀려 기가 죽은 모습마저도 뿌듯했다. 

  그 이후로도 내 일기는 항상 잘 쓴 일기로 꼽혀 반 아이들에게 읽혀졌다. 정성들여 글을 쓰고 일기 제출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쓴 7개의 일기 중 어떤 게 읽힐지 예상하는 것도 즐거웠다. 생각해보면 이때부터 글쓰는 걸 좋아하기 시작한 것 같다. 정확히는, 누군가가 내 글을 읽어주는 것을. 

  초등학교 이후로 딱히 글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냥 읽는 게 좋다는 수준. 끼적여봤자 한 두편의 단편 2차 창작이었다.

  그런 내가 본격적으로 글에 대해서 생각해본 건 그 날 밤이었다.

  입시 시절, 독서실에서 평소처럼 띵가띵가 놀다가 새벽에 집에 들어갔다. 날 기다리던 두 형제는 인터넷 방문 기록 좀 확인하자고 했다. 그 시간까지 공부할 리가 없다는 예측이었고, 정확했다. 분명히 남은 증거에 호되게 혼날 줄로 알았건만, 정작 둘은 진지하게 내 미래에 대해서 고민했다. 심각한 얼굴의 모습에 나도 덩달아 덜컥 겁이 났다. 둘이 입모아 물은 질문의 본질은 하나였다.

  너, 뭐 해먹고 살래.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고민이었다. 그러게. 내가 좋아하는 건 뭘까. 잘하는 건 뭘까. 그 때쯤 나는 그냥 떠밀려서 살아가고 있었던 것 같다. 내 인생을 남의 인생처럼 대했다. 하나 분명한 건, 좋아하는 게 뭐냐고 했을 때, 글쓰기 외에는 답한 게 없었다는 거다. 그것만큼은 아직도 기억난다. 

  남의 말 한마디에 내 인생은 바뀌지 않는다. 

  난 그냥 이후로도 그렇게 적당히 방황하다가, 잘 볼 거라 떵떵거리던 국어에서조차 2등급을 받고, 갈 일 없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던 대학에 다시 눌러앉았다. 자존심이 안 내켜서 대부분의 친구들과 연락을 끊었다. 동창의 SNS에 올라온 학교 축제 사진을 본 날에는 한숨도 못 잤다. 몇 시간을 울었고 어머니에게 재수하겠다는 장문의 카톡을 보냈다.

  엄마는 단호하게 반대했다. 난 조금만 힘든 일이 있다면 도피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일단 거기서 견뎌보라고 했다. 그렇게 나는 연고도 없는 지방에서 홀로 생활하면서 힘든 시기를 보냈다.

  내가 그 해 1학기 들었던 글쓰기 교양 수업은, 그 수렁에서 나를 끌어올려준 고마운 계기였다. 또한 내가 글을 쓰기로 결심한 방아쇠가 된다.

  안 알아보고 수강신청을 한 덕에, 내 수업은 소위 말하는 헬교양이었다. 특히 다른 글쓰기 교양에 비해서 과제가 빡빡했다. 나는 비문학적인 글쓰기에는 약했기에, 처음과 두번째로 제출한 과제까지는 그닥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마지막 과제의 주제는 기행문 쓰기였다. 부모님이나 가족, 연인과 같이 걷고 보고서를 쓰라는 주제였다. 나는 막막했다. 대학에 와서 새로 사귄 친구는 있었지만, 여행을 같이할 수준의 사이는 아니었다. 연고지와 멀었기에 워낙 친하던 애들보고 오라고 할 수도 없었다. 결국 나는 부모님에게 말해서 와달라고 했다. 바쁘신 두 분이었기에 안 오실 줄 알았건만, 엄마는 나를 위해 시간을 비우고 와주셨다.

  우리가 함께한 건 하루 이틀 남짓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의미가 있었다. 난 그 경험을 토대로 여행 뿐만 아니라 내 삶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꾸려서 과제를 제출했다. 기행문보다는 일기에 더 가까운 형식에 좋은 평가를 못 받을 줄 알았다. 

  하지만 평가는 예상과는 달랐다. 항상 감점이 들어갔던 과제에 처음으로 +1점이 찍혀 있었다. 늘 날 구구절절 지적하던 빨간 피드벡 글씨는 그 과제에만큼은 한 문장이었다.

  “글 진짜 잘 쓴다. 고칠 점이 없음.”

  첫 일기를 낭독 받았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 들었다. 그 때보다 더 동요했을지도 모른다. 내게 잘하는 게 남아있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시기였기에 더욱. 심장이 박동하는 소리가 귀를 채웠다. 모 소설의 표현을 빌리자면, ‘내 인생의 장르가 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해당 수업에서는 조에서 가장 잘 쓴 사람의 글을 꼽고, 그 글 중 반에서 가장 잘 쓴 글을 뽑는 방식으로 가산점을 줬다. 세 과제 중 처음으로 내 글이 가장 조에서 잘 쓴 글로 올라갔다. 거의 만장일치였다. 

  낭독 후 반에서 잘 쓴 글을 뽑을 때는 조금 표가 나뉘었다. 같은 대학 의대생의 글이 2표. 내 글이 2표. 슬슬 우쭐대던 꿈에서 깰 때가 다 되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오직 한 사람만 뽑겠다는 교수님의 말에, 나는 내가 질 거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지는 게 익숙해 절망도 느껴지지 않았다. 적힌 +1 점은 지적하기 귀찮아서 준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이어진 교수의 말은 내 확고한 예측을 깨는 말이었다.

“이번 학기에 +1점을 준 학생은 저 학생 뿐입니다. 그러니 저 학생 글로 선택하겠습니다.”

  수십 명이 듣는 수업이었다. 입결이 높은 학과 학생들도 꽤 섞여 있었고. 의대생이면 나랑은 성적을 비교하기가 미안한 지경이다. 그래도, 글만큼은 내가 더 잘 썼다. 나만이 더 인정 받았다. 

  그 사실을 깨닫자, 어둠 속에서 갑자기 내게 환한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진 느낌이 들었다. 내 손으로 바닥에 처박은 것만 같았던 인생에, 무엇도 잘하는 게 남지 않은 것 같던 폐허에 남은 게 있다는 걸 알았다.

  남의 말 한마디에 내 인생은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남의 말 몇 마디에는 내 인생이 바뀔 수도 있다.

  두근대긴 했지만 당시엔 그게 끝이었다. 학기가 끝날 때까지는 말이다. A-와 B+, C를 오가는 다양한 공학계열 전공 학점 속에, A+이 적힌 글쓰기 성적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재수 학원 속에서 받은 반 1등, 강남 재수학원 전체 1등급의 국어 모의고사 성적에도 나는 기쁘지 않았다. 부모님께 자랑할 생각도 안 들었다. 그러나 유일한 +1 점은 사뭇 감회가 남달랐다. 그 감회는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 공모전을 참여하는 방식으로 표출되었다. 

  누군가는 지방대 교양 수업에서 인정 받은 게 뭐 대수냐고 비웃을지도 모른다. 첫작품을 안고 공모전에 참여해도 독자들 눈에 안 차는 현실이 슬프고, 추천글을 달아준 팬에게 죄송하고, 내 글의 부족한 점이 한없이 보이며 쪽팔리기도 한다.

  그래도 난 일단 우직히 쓸 거다. 이건 내가 가진 몇 없는 장점이니까. 이게 내가 글을 쓰게 된 계기다. 

제 짧은 필름은 여기까지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계기로 글을 쓰겠다고 마음 먹으셨나요?

댓글 5

  • 001. Lv.17 moontray

    23.06.03 13:44

    저는요~~

    분명한 계기가 있었죠.
    죽고 싶었으나 지키고 싶은 것을 잃지 않기 위해 살아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을 때.
    내가 사는 세상을 이분법 하는 방식으로 버텨냈답니다.
    하나는 현실, 다른 하나는 내가 만든 세상.

    숨 쉬기 위해 글을 씁니다.
    나를 위해서.

  • 002. Lv.11 오예쓰

    23.06.03 14:21

    글쓰기는 하나의 또 다른 세상을 만드는 일이죠. ^^
    달쟁반님,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바라겠습니다.

  • 003. Personacon 고봉밥한개

    23.06.03 16:13

    작가님을 자유연재 때부터 본 팬으로서, 작가님이 신인이라는 점은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작가님이 창작 소설을 정말 처음으로 쓰신 거라고는 상상을 못했네요. (필력이 워낙 우수해서요)
    작가님이 아직도 학생 분이신지, 아니면 졸업을 하시고 저처럼 본인의 살 길을 찾은 분이신 지는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만. 엄청난 재능과 잠재력이 있는 분이라는 것은 알겠습니다. 현재까지 본인이 원하는 분야의 성공 경험이 적은 탓에, 방황하고 계시는 걸로 보이지만요.

    그렇지만 분명 길지 않은 시간 내에 눈부신 성장을 이루고 많은 이들에게 좋은 작품을 보여주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수입이 없는 신인에게, 공모전 기간 동안의 1일 1연재는 매우 힘든 일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동안 작가님의 필력이나 글의 전개력이 얼마나 성장했는 지, 저는 직접 보았기에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의 리메이크 결정을 비난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동안 작가님의 글을 못 본다는 것은 정말 아쉽지만, 이후 작가님이 가지고 오실 글은 정말로 기대가 되니까요.
    항상 응원하겠습니다.

  • 004. Lv.11 오예쓰

    23.06.03 16:17

    서재까지 방문해주시고 이런 정성스러운 댓글을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품앗이식 칭찬이 아니라, 저는 개인적으로 고봉밥한개님의 '회귀 후 빵집 헌터' 작품을 신선하게 느꼈습니다. 고봉밥한개님은 따뜻한 마음과 제게 부족한 플롯의 논리적 개연성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독자들에게 친근한 소재를 잘 활용하실 수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비록 1화밖에 못 본 작품인만큼 가타부타 말씀드리기 어려우나, 고봉밥한개님도 본인만의 소설을 써보시는 건 어떨까요?

    물론 제 소설에 시간을 투자해주시고, 응원해주신 시간과 열정은 정말 몸둘 바를 모를 정도로 감사드립니다. 제가 인생에서 감사한 분을 꼽자면 한 손가락 안에 드실 정도입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 005. Lv.11 오예쓰

    23.06.03 16:35

    엇.. 다시 확인하니 작품을 비공개로 돌리셨을까요? 알아보지 못하고 작품명을 언급해서 죄송합니다. 불편하시다면 언질 주세요. 답글은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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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일상 | 여러분은 어떤 계기로 글을 쓰겠다고 마음 먹으셨나요? *5 23-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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