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전 - 표물이 된 소녀 : 희몽
“아!”
잠에서 깨어 세수를 하고 머리를 단장하기 위해 거울 앞에 앉은 희몽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토하고 말았다.
“누, 눈이······.”
그녀를 놀랍고도 기쁘게 한 것은 거울 속에 비친 모습, 정확히는 자신의 눈이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늘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한 자신의 눈동자는 여느 사람들과 달리 붉은색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그것 때문에 무척이나 마음고생이 심했다. 할아버지와는 다른 눈동자의 색, 그것은 그녀에게 공포에 가까운 이질감을 주었다.
“시간이 흐르면 제 색깔을 찾을 것이니 걱정하지 말거라. 네 눈동자의 색깔이 검게 변하면 네 병은 다 나은 것이나 다름없어 질 것이다. 지금은 병이 나아가는 단계이니 남들과 다르다고 해서 이상하게 여길 필요도 없고, 그것에 대해 마음 쓸 필요도 없다. 그저 치료에 충실하면 된다.”
자신의 눈동자가 다른 사람과 다른 것에 대해 실망하고 실의에 빠진 희몽에게 할아버지가 들려준 말이었다.
병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니 그것을 마음 쓰기보다는 몸이 건강을 찾을 수 있도록 마음을 단단히 먹고 치료받는데 성심을 다하라는 것이다.
세상 모든 병은 병자의 마음가짐에 따라 낫는 것이 빨라지기도 하고 늦어지기도 하며, 때론 치료가 어렵고 불가능한 병도 기적처럼 낫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그날 이후로 희몽은 자신의 눈동자에 대한 걱정과 근심을 접었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아직도 그것에 대한 마음이 응어리져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몇 년 전, 사경을 헤맨 후 그녀는 자신의 눈동자, 피처럼 붉은 그 빛이 조금 옅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얼마나 기뻐했던가. 할아버지 역시 그녀만큼, 아니 어떤 면에서는 그녀보다 더 기뻐해주었다.
“잘 됐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나 앞으로의 치료는 더욱 힘들어 질 것이다. 마음을 단단히 먹어라.”
할아버지는 기뻐하면서도 다시 한 번 치료의 고통을 강조하고 그걸 이겨내라고 응원했다.
“눈동자의 색이 옅어졌다는 것은 제가 나아가고 있는 증거라고 하셨죠? 걱정 마세요. 어떤 고통이라도 이겨낼 준비가 되어있어요.”
희몽은 아이처럼 앙증맞고 핏기 없는 새하얀 손을 꽉 움켜쥐며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이어진 처절한 고통을 수반한 치료. 앞서 받았던 치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피로감을 경험해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다른 사람과 같아지기 위해 그녀는 그 어떤 고통이라도 견뎌냈다.
그렇게 험난한 하루하루가 지나갔고, 드디어 그 시련의 결실이 맺어진 것이다.
그녀는 하염없이 거울을 바라보았다. 흑요석 같은 까만 눈동자,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그 검은빛이 이렇게 황홀한 느낌을 전해줄 지는 그녀도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다.
“너무 예뻐.”
그녀의 까만 눈동자가 별처럼 빛났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녀의 영롱한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간 치료를 받느라 겪었던 육체적 고통 때문이 아니었다. 드디어 자신도 다른 사람들과 같아졌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그저 조금 다른 것일 뿐, 틀린 것이 아님에도 마치 자신에게 크나큰 잘못이 있는 것처럼, 스스로 위축되어 자신감을 상실하고 타인의 눈길에 엄청난 부담감을 가지며 자괴감에 빠져들고, 결국엔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처절한 아픔을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다른 것은 틀린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다름을 틀리게 보는 그 지독한 시각이 틀린 것이고 나쁜 것이다.
그러나 그걸 인지하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과 그리고 평범한 것과 조금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것을 마치 큰 죄악이라도 되는 것처럼 욕하고 손가락질하며 경멸하고 혐오한다.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곤 한다.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그 마음이 진정 틀린 것이란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면 언젠가 자신에게도 욕설과 손가락질이 따르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세상사람 모두가 같을 수는 없다. 언뜻 보기에는 자신은 남들과 같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람마다 타고난 천성이 다르고 생김새가 다르고 환경과 배경과 배움과 익힘, 경험이 다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 각양각색의 사람들 틈에서 자신이라고 남들과 똑같을 수 없음을 자각하고, 조금 다르다고 그것을 나쁘게 보고, 그것을 틀린 것이라고 손가락질해서는 안 된다.
다르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이 갖지 못한 어떤 특별함을 가졌다는 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희몽은 신이 나서 방을 뛰쳐나가며 소리쳤다. 아침나절 갑작스런 희몽의 외침에 할아버지는 물론 안궁과 쿤상, 돌마가 놀란 모습을 숨기지 않은 채 달려왔다.
“무, 무슨 일이냐? 왜? 어디가 또 아픈 것이냐?”
할아버지는 걱정이 듬뿍 담긴, 조금은 떨리는 음성으로 희몽을 맞이했다. 할아버지의 곁에 선 안궁 등도 같은 심정이었다.
언제나 연약하고 병 때문에 고통 받은 희몽이다. 그런 그녀가 이제는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날기를 바라는 마음은 모두가 같았다.
그런데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희몽의 표정은 싱글벙글 이다. 마치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행복감이 진하게 묻어나온다.
“보세요. 할아버지. 제 눈을 보세요.”
한껏 들뜬 희몽의 밝은 목소리에 할아버지와 안궁 등은 크게 뜬 희몽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누, 눈동자가······. 아! 아가씨!”
제일 먼저 소리친 것은 돌마였다. 돌마는 기쁨에 들떠서 와락 희몽을 끌어안았다. 항상 가까이서 자매처럼 지내온 돌마는 희몽의 가장 큰 걱정거리가 피처럼 붉어 때론 괴기스럽기까지 한 눈동자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 드디어······. 잘 되었구나. 정말 잘 되었어.”
할아버지 역시 감격스런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감격스런 말투에 담긴 조금은 이질적인 감정에 대해 알아채는 사람은 없었다.
“자, 이리 오너라. 맥을 집어보자꾸나.”
할아버지는 희몽을 데리고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매우 진지한 모습으로 어느 때보다 집중하여 희몽을 진맥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감았던 할아버지가 눈을 떴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할아버지의 눈 속에 담긴 환희를 모두가 느낄 수 있었다.
“이제 거의 다 되었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나았다고 볼 수는 없다. 앞으로 일 년. 힘들겠지만 일 년만 참도록 하여라. 일 년이 지나면 너는 완전해질 수 있다.”
할아버지의 목소리에서 진한 떨림이 묻어나왔다.
“정말이죠? 일 년만 치료를 더 받으면 낫는단 말이죠?”
할아버지의 말에 희몽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래, 일 년이다. 일 년 후에 넌 완전해질 것이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구나. 장하다.”
완전해질 것이라는 할아버지의 말이 조금은 이상할 법도 하건만 희몽이나 다른 사람은 그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병이 완전히 낫게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인 것이다.
“아! 일 년······. 일 년이 지나면 저 아름다운 세상으로 나갈 수 있어.”
희몽의 눈에는 그토록 바라던, 돌마에게 들었던 세상에 대한 동경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세상으로 나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오직 할아버지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돌마의 손을 잡고 환하게 웃으며 깡충깡충 뛰고 있는 희몽과 그런 그녀를 보며 웃고 있는 안궁, 쿤상의 모습을 보는 할아버지의 눈빛은 깊게 가라앉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눈빛에는 성취감과 안도감이 흐르고 있었고, 그 저변엔 안타까움과 망설임이 담겨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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