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한 컨셉
「 ······그날의 기억은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각인되었다.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거대한 마력 폭발은 세상을 뒤집어 놓았기에. 」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지구인이 처음으로 아르티아 대륙으로 납치된, 1회차 튜토리얼의 날.
「 거대한 폭발과 함께 바닷속 깊은 곳에서 흑색의 탑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
지극히 평범했던 대륙에, 거대한 탑 하나가 나타난 그날.
그때부터 인류는 시스템을 사용할 수 있었고, 탑을 등반할 수 있게 되었다.
「 ···전례없이 높고 거대한 탑의 등장은 모두의 현실감각을 나락으로 떨어트렸다. 」
모두가 불길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탑을, 악마의 탑이라고 불렀다.
「 악마의 탑은 원하는 자에게 힘을 주었고, 그 힘은 대륙의 근간을 뒤흔들었다. 」
약육강식(弱肉强食).
순리이자, 생존의 법칙이 대륙의 근간이었기에.
「 악마의 탑은 기회다! 」
시간이 흐르면서 인류는 탑을 적극 활용하기 시작했다.
탑.
시련을 통해서 강해질 수 있는 수련의 장소.
모두에게 내려진 축복의 기회였다.
「 ······탑은. 」
각 층마다 마련된 시련.
그 시련의 난이도는 계층에 비례했다. 말도 안 되는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탑이 생긴 이유도, 시련의 의도도 모르지만, 모두가 한층 한층 올라가며 강해진다는 것은 확실했다.
「 ···공평했다. 」
시련을 이겨내 업적을 이룬 자에게는 보상을.
「 ···탑은 공평하다. 」
나태하고, 게으르며, 나약한 자에게는 벌을.
「 탑은 위대하다···. 」
위대했다는 것이 탑의 간단한 설정이었다.
[ 라이트 ]
영창을 외우자, 데힐레트의 손끝에서 응집된 빛이 회전하며 퍼지기 시작한다.
평범한 재능이라면 일 년이 족히 걸릴 마법이었지만, 데힐레트에게는 한 시간이면 충분했다.
게임 속 데힐레트의 기억으로 비롯된 것은 아니다.
눈을 떴을 때부터, 정확히는 빙의를 인지한 순간부터 숨만 쉬어도 주변의 마나가 느껴졌고, 처음 펼치는 마법이었음에도 발현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냥.
그저, 재능이었다.
파앗─!
빛이 어둠을 밀어내자, 데힐레트가 짧게 감탄했다.
헤일로 미궁(迷宮).
게임 속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시련이었기에, 나름의 자료 조사도 하고 신경 써서 설계했던 기억이 난다.
어느정도였냐면, 실제로 지도를 그리면서 제작했을 정도로 애착을 두었을 정도.
현실 보정도 확실했다.
상상 이상으로 공간은 웅장했고, 벽면은 알 수 없는 기하학적 무늬들로 빼곡했다.
무엇보다 주변의 그윽한 한기가 피부 사이로 스며들어와 온몸이 얼어붙는 듯 일렁이는 느낌은 이곳이 지구가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켜주었다.
‘······1. 다음은 6.’
그게 끝이다.
갈림길 선택에 생사가 달렸었던 결사대와는 달리, 데힐레트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처음 한 번만 긴장했을 뿐.
두 번, 세 번 통과하자 움직이는 발걸음에는 거침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 헤일로 미궁 돌파에 성공했습니다! ]
[ 헤일로 미궁 ─ 난이도 A ]
[ 난이도 A, 고유 등급의 시련을 이겨냈습니다. ]
엘프 결사대의 2/3가 죽는 시련이 허무하게 소멸한다.
때문에, 결사대의 목적인 세계수를 치료할 유일한 방법이 사라졌지만···.
내 알 바 아니다.
[ 세상이 주목할, 서사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
[ 업적 포인트 1,000을 획득했습니다. ]
[ 대량의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 수많은 알림창이 눈앞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 튜토리얼에서 A 난이도의 시련을 완료했습니다. ]
[ 업적을 계산 중입니다······. ]
맥이 빠지면서도 안도감이 든다.
만족감이 뇌까지 차올랐을 때, 시야 한 켠에 또 다른 알림창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 제21회차 튜토리얼이 종료되었습니다. ]
[ 플레이어의 업적이 포인트로 전환되어 나타납니다. ]
‘···?’
판단은 그 어느 때보다 빨랐다.
“닉네임 공개로 전환!”
[ 닉네임이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
“······핵폭탄!”
[ 닉네임 공개로 전환합니다. ]
[ 제21회차 튜토리얼의 랭킹을 공개합니다. ]
1위 핵폭탄 2,532,700 포인트
2위 주강혁 117,000 포인트
3위 칸 세이시로 88,600 포인트
4위 하멜른 빌 67,200 포인트
5위 레온 스틸하트 59,600 포인트
[ 튜토리얼 랭킹 1위 달성을 축하합니다. ]
[ 아르티아 대륙으로 자동 이동합니다. ]
······어그로 한 번, 제대로 끌었다.
***
[ 튜토리얼 랭킹 1위 달성을 축하드립니다. ]
[ 튜토리얼 랭킹 1위 달성 추가 보상이 지급됩니다. ]
[ ······ ]
[ 핵폭탄 플레이어의 업적이 지나치게 높습니다. ]
[ ······ ]
[ 의견을 참고하겠습니다. ]
“말하는 건 모든 줄 수 있나.”
[ 업적에 맞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가능합니다. ]
“추천은?”
[ 테일러 지팡이를 추천합니다. ]
가치없는 충고는 무시한 채, 고민하기 시작했다.
‘······기회다.’
본능적으로 느낀다.
지금의 선택이 앞으로 크게 적용된다는 확신을.
죽음의 변수가 제일 많은 초반에, 힘이 되어줄 단 하나의 기회라는 것을.
···업적에 맞는 것이라.
“엘릭서(Elixir)?”
[ 엘릭서를 선택하시겠습니까? ]
아니다.
영웅 등급의 아이템인 엘릭서가 귀한 아이템이긴 했지만, 보류했다.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존재했고, 알고 있었으니까.
‘쉽게 얻지 못하는 아이템. 특히, 초반에 효율이 높아야 한다.’
상기하자. 목표는 생존.
동시에, 게임의 끝을 보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선두에 서야 한다.’
그 누구보다 앞에 서야 하며, 이끌어야 한다.
······통칭, 선두자가 되기 위한 자격.
뛰어난 화술, 인덕이나 카리스마, 높은 명예와 평판, 부와 권력.
그 중 제일은, 일신의 무력(武力).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아이템 하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정수(Essence)가 낫겠군.’
······아니, 아니다.
‘튜토리얼에서 A급 시련 클리어는 역대급 업적이다.’
잊어서는 안 된다.
탑은 공정하고, 업적에 걸맞은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일단, 간을 볼까.
“위그드라실(Yggdrasil).”
[ ······? ]
“얻을 수 있나?”
[ 업적이 부족합니다. ]
“프라가라흐(Fragarach).”
[ 업적이 부족합니다. ]
“아스트라(Astra).”
[ 업적이 부족합니다. ]
당연히 신화 등급은 안 되고.
“신수의 알(Lengedary creature).”
[ 업적이 부족합니다. ]
역시 전설 등급도 안 되나.
“오리하르콘(Orichalcum).”
[ 오리하르콘으로 결정하시겠습니까? ]
‘고유까지 된다고?’
보상은 기대, 아니 상상 이상이었다.
‘운이 좋아야 영웅 등급일 줄 알았는데.’
···잠깐, 고유?
그대로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슈레이 오브로 결정한다.”
호로메의 반지, 무의 정수, 화이트 크리스탈, 칠각수의 뿔···.
머릿속에 나열되는 수많은 고유 아이템들.
싹 다 머릿속에서 지워버린다.
우우웅─
나선을 그리는 빛. 백색의 섬광.
그 빛이 점차 순환에 가속을 붙이며 하나의 형상을 이루어가기 시작한다.
그렇게 형성된 허공을 수놓는 새하얀 구.
[ 아슈레이 오브 ]
등급 ─ [ 고유 (Unique) ]
[ 사용하시겠습니까? ]
게임 후반.
평범한 4위계 마법사가 아슈레이 오브를 얻고 랭커가 됐다는 설정의 캐릭터가 있었다.
‘극단적으로 강한 악당 하나가 필요했으니까.’
이렇게 좋은 아이템이 고유 등급인 이유는 단 하나.
페널티가 너무나도 강해서였다.
10이 넘는 능력치는 모조리 10으로 줄어들며, 몸에 내제된 마력의 절반이 증발하니까.
‘근데, 이걸 초반에 쓴다면···?’
머릿속에서 수차례 돌아가는 시뮬레이션.
그것이 게임 개발자가 가장 듣기 싫은 한 가지 단어를 떠올리게 했다.
밸런스 파괴.
꿀꺽─
꿈틀거리는 목울대, 두근거리는 심장.
올라간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아슈레이 오브를 사용한다.”
동시에.
[ 아슈레이 오브를 사용합니다. ]
[ 아슈레이 오브가 심장에 자리 잡습니다. ]
“커, 커헉!”
온몸이 팽창한다.
심장이 찢어지고 폭발하는듯한 고통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런 설정은 없었잖아?’
쾅! 쾅! 쾅! 쾅!
뜨겁게 달궈진 송곳이 관자놀이를 쑤신다.
참을 수 없는 온갖 고통들이 두개골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쾅! 쾅! 쾅! 쾅!
지독한 통증이 온몸을 전율하게 만든다.
알 수 없는 이명은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었고, 올라오는 구토감은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미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쾅! 쾅! 쾅! 쾅──
허약한 신체와 맞물린 끔찍한 통증은, 평범하게 살아온 데힐레트가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척추에서 전달되는 근육통이 사지를 찢고, 시야가 수증기가 낀 것처럼 뿌옇게 변해가기 시작했을 때.
‘···끝난 건가.’
서서히 고통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호흡이 정연해진다.
죽음에 가까운 통증이 일었지만, 후유증은 없었다.
[ 아슈레이 오브가 성공적으로 심장에 자리 잡았습니다. ]
[ 체력 능력치가 2에서 2로 유지됩니다. ]
[ 근력 능력치가 3에서 3으로 유지됩니다. ]
[ 민첩 능력치가 4에서 4로 유지됩니다. ]
[ 마력 능력치가 11에서 10으로 하락합니다. ]
[ 마력량이 줄어듭니다. ]
[ 마력량 10/10 ]
이보다 더 최고의 효율이 있을 수 있을까.
[ 튜토리얼에서 고유 아이템을 획득했습니다. ]
[ 파도의 근원, 유일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
[ 업적 포인트 100을 획득합니다. ]
[ 특성 ‘아슈레이’ 획득에 성공합니다. ]
어질어질해질 정도로 떠오르는 수많은 알림.
그런 메시지를 뒤로한 채 상태창을 확인했다.
「 린 하드로 데힐레트 」
▶ 레벨 ─ [ 8 ]
▶ 종족 ─ [ 인간 ]
▶ 클래스 ─ [ 無 ]
▶ 능력치
[ 체력 - 2 ]
[ 근력 - 3 ]
[ 민첩 - 4 ]
[ 마력 - 10 ]
능력치 포인트 ─ [ 7 ]
▶ 특성 ─ [ 7 개 ]
[ 초감각 ]
[ 냉혈한 ]
[ 만성 두통 ]
[ 걸어 다니는 시체 ]
[ 광인 ]
[ 시한부 마법사 ]
[ 아슈레이 ─ 레벨 7 ]
- 오브를 생성할 수 있습니다.
- 전격 속성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습니다.
- 전격 속성을 제외한 다른 속성 통제에 제한을 느낍니다.
▶ 성격 ─ [ 5 개 ]
▶ 업적 포인트 ─ [ 1,100 AP ]
‘······미친.’
초감각은 특히나 초반부터 매우 강한 9 레벨 특성인데, 튜토리얼에서 레벨 7의 특성까지 얻었다.
처음이 중요한 게임에서, 초반부 깡패였던 캐릭터에게 날개를 달아준 꼴.
다른 속성 제어에 어려움을 느끼는 건 꽤 안타깝지만─
[ 수명이 줄어들었습니다. ]
[ 남은 시각 : 544시간 26분 27초. ]
······?
마력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수명이 줄었다. 그것도 상당히.
‘······.’
아무래도, 아이템 페널티로 줄어든 마력을 사용했다고 판단한 듯했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좆망겜 수준.”
데힐레트는 그렇게 읊조리며, 가진 능력치 포인트 모두를 마력 능력치를 올리는 데 사용했다.
마력 능력치 17.
마력량 81.
‘마법 하나 쓰면 오링인가.’
수명이 한 달도 남지 않은 일회용 마법사.
컨셉은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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