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말선초가 시대 배경인 소설입니다.
아무래도 대중적 인지도가 없는 인물이 많이 등장합니다.
최영, 이성계, 정몽주, 정도전 등 네임드급 인물을 제외한 주요 등장 인물의 약력을 올립니다.
(빠르게 사라지는 등장인물은 제외합니다.)
목차
7. 지용기
6. 김성우
5. 나세
4. 박자청
3. 이문정
2. 유영
1. 마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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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지용기
1388년에는 요동정벌에 안주도부원수로 참가했다가 우군도통사 이성계의 편을 들어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389년(공양왕 1)에는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세운 공으로 문하찬성사에 발탁되었으며, 중흥공신녹권을 받고 충의군에 봉해졌다.
그 뒤 판삼사사를 지냈으나 이·초의 옥에 연루된 김종연의 당인으로 지적되어 탄핵을 받아 삼척에 유배되었다. 당시의 대사헌 김사형 등이 지용기의 죄를 덜어 고신과 공신녹권만 거두자고 하였다. 그러나 낭사 진의귀 등이 역모를 꾸몄다고 하여 매 1백을 쳐서 삼척에 귀양보냈으며, 가산은 적몰하였다. 1391년 처의 재종 왕익부의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유배지에서 죽었다.
비록 역모와 관련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기는 했으나 지용기의 행동은 전장에서는 관우)와 장비의 용맹에 비교되었으며, 곽자의와 이광필과 같은 자질을 소유한 자로 평가되기도 하였다.
6. 김성우
본관은 광산이고, 판도판서 김윤장의 아들이다. 고려 말 우리나라의 연안지방에 왜구들이 침범해 곡식을 약탈하는 등 피해가 심하였는데, 충청도에서는 보령의 남포지방의 피해가 가장 컸다.
이에 그는 초토사가 되어 보령으로 와서 성주산)에 진을 치고 왜구를 몰아내었다. 이후 그곳에 살던 사람들을 불러 모았으며, 군사들도 머물러 함께 농사를 짓게 함으로써 평화를 되찾았다. 그러나 고려가 멸망하자 크게 탄식하고는 자결하였다. 충청남도 보령에 그의 유허비와 전공비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성우 (두산백과)
5. 나세
원나라에서 귀화한 인물이다. 1363년(공민왕 12) 홍건적을 격퇴하여 2등공신이 되었다.
그 뒤 판도사판서를 역임하였고 1374년에는 제주도의 목호들이 말의 공출을 거부하자 동지밀직사사로서 부원수가 되어 최영등과 함께 제주도를 평정하였다.
이후, 전라도상원수 겸 도안무사가 되었는데, 이때 부령현에서 왜구를 크게 격파하였으며, 뒤이어 판개성부사가 되었다.
그 뒤 강화 등지에서 왜구 격퇴에 공을 세워 연안군에 봉해졌으며, 1380년 해도원수가 되어 심덕부·최무선 등과 함께 전함 100척을 이끌고 진포에서 최무선이 만든 화약과 화포를 실전에 처음으로 사용하여 왜선 500척을 쳐부수는 전과를 거두었다.
[출처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4. 박자청
내시로 출사해 낭장에 오르고,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중랑장으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입직군사로 궁문을 지킬 때에 왕제 의안대군이 들어가려 하자 왕명이 없다고 거절하였다. 의안대군이 발길로 차며 상처를 입혔는데도 끝내 거절하였다. 태조가 이 사실을 알고 은대를 하사해 내상직에 임명하고 어전 밖을 지키도록 하였다.
문묘를 새로 지을 때 역사의 감독을 맡아 주야로 살피고 계획해 4개월 만에 완공시켰다. 그러나 모화관을 남지에 닿게 하는 작업은 시일만 끌고 완성하지 못해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1408년 판공안부사·공조판서를 역임할 때 제릉과 건원릉 공사를 감독하였다. 1413년 지의정부사로 경성수보도감제조를 맡아 도성을 수축하였다.
그 뒤 좌우군도총제, 1415년 판한성부사를 지내고, 1419년(세종 1) 참찬의정부사·판우군도총제부사에 이르렀다. 이 해 인정문 밖의 행랑 축조를 감독했으나 측량 실수로 기울어지자 직무 태만으로 하옥되기도 하였다. 성품이 각박하고 인정이 적다는 평을 받았다. 시호는 익위이다.
[참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이문정
전주 이씨의 종친으로 이성계보다 항렬이 높다. 공민왕 시절 관직을 내려놓고 낙향하여 후학을 양성했다. 훗날, 이성계가 황산대첩에서 대승을 거두자 전주 이씨 종친을 모아서 오목대에서 연회를 개최했다. 이때, 이성계가 답례로 '대풍가'를 읊었다.
2. 유영
1376년(우왕 2) 전라도원수 겸 도순문사가 되어 영암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쳤으며, 다시 전주목사 유실과 함께 낭산·풍제 등지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하고, 왜적이 노략질하였던 소와 말 200필을 빼앗아 그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그러나 이 해에 임무를 소홀히 하였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평민으로 강등되고, 유실과 함께 밀려났다. 하지만, 곧 풀려나와 이듬해 최영·변안렬·유실 등과 함께 해주와 평주를 공격하던 왜적을 물리치고, 뒤에 고성군에 봉해졌다.
1. 마천목
본관은 장흥. 1381년(우왕 7) 산원에 처음 제수된 뒤 여러 차례 승진하여 태조 초에 대장군이 되었다.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 때에는 정안군을 도와 공훈을 세웠고, 1399년(정종 1) 상장군에 승진하였다. 이듬해 제2차 왕자의 난이 발생하자 다시 정안군의 선봉이 되어 크게 공헌하였다.
1401년(태종 1) 익대좌명공신 3등에 녹훈되었다.
이듬해 10월에 전라도 도절제사에 복직되었다.
1411년 1월 각위절제사를 설치하면서 용기시위사절제사가 되었고, 이듬해 5월 전라도병마도절제사 판나주목사로 파견되었다. 1414년에 장흥군으로 개봉되었다.
1416년에는 도총제에 개수되었다가 곧 전라도병마도절제사로 파견되고, 1418년 2월에 내시위절제사가 되었다. 1418년(세종 즉위년) 8월 좌우패를 좌우금위로 개편하면서 우금위절제사가 되고, 그 달에 장흥군에 제수되었다. 1423년 9월에 판우군도총제부사를 지냈다.
1424년 3월 편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고향인 곡성현으로 내려갔으며, 곧 어머니 상을 치렀다. 1428년 7월 장흥군에 복직되었다. 이듬해에 연로를 이유로 치사를 청했으나 도리어 장흥부원군에 진봉되었고, 부원군으로서 죽었다. 성품이 광심(너그러우면서 마음이 깊음)하고 순근(온순하면서 근신함)하며, 무략이 있어 시위와 국방에 공헌이 있었다. 시호는 충정이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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