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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Ly 님의 서재입니다.

남쪽 하늘에 뜨는 별, 天南星

웹소설 > 일반연재 > 로맨스, 퓨전

HaLy
작품등록일 :
2019.01.24 00:53
최근연재일 :
2021.04.15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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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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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20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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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39화 안개 속의 자두

DUMMY

새벽부터 깔린 희뿌연 안개가 아침이 되도록 걷히지 않았다.


궁으로 향할 채비를 마친 설화가 창밖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안개 때문에 하늘에 뜬 해가 달처럼 보였다.


“날이 어찌 이렇누.”


설화가 혀를 끌끌 찼다.


오늘은 빈궁마마께 가기로 약속한 마지막 날이다.


그 말인즉슨 오늘이 바로 합궁일이라는 것.


세자와 빈궁의 합궁은 아무 날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초하루, 그믐날은 달이 보이지 않는다 하여, 보름날은 달의 기세가 꺾인다 하여 합궁을 피했다. 일진에 사(巳)자가 들어가는 뱀 날이나, 인(寅)자가 들어가는 호랑이 날 역시 합궁을 하지 않았다.


날씨 또한 합궁일의 중요한 요인이었다. 비바람이 불거나 천둥이 치는 날은 하늘이 진노하였다 하여 합궁을 하지 않았다.


이렇게 짙은 안개가 깔리는 날이라면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합궁이 취소될 수도 있음이었다.


“얼른 걷혀야 할텐데······.”


설화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동창을 닫았다.


그때였다.


저벅 저벅 저벅-


황급하게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설화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행수 어른. 저기······영상대감께서 오셨습니다요.」


덕구가 방금 깬 듯 잔뜩 잠긴 목소리로 고했다.


그러더니 설화가 어찌할 새도 없이 장지문이 열렸다.


“어디 가려던 참이더냐?”


심학조가 방 안에 우뚝 선 설화를 보며 물었다.


“아침부터 어쩐 일이십니까?”


되묻는 설화를 등지고 심학조가 자리에 앉았다.


“자네가 그런 멍청한 질문을 하다니 실망이군. 기방에 무슨 일로 왔겠느냐. 술을 마시러 왔지.”


목소리에는 기품이 흘렀으나, 그 말투에는 몰강스러움이 잔뜩 묻어있었다.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 모시기 힘드옵니다.”


“선약이라······혹 궁으로 가려 하느냐?”


“궁에는 제가 뭣 하러 가겠습니까.”


설화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을 고했다.


저 독사 같은 심학조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인지 짐작조차 되질 않았다. 빈궁전을 드나든 것을 알게 된 것인가......아니면 그 이상도......


“그래? 나는 혹 네가 아직도 미련이 있어 궁을 어슬렁거리나 했지. 그런 것이 아니라면 됐다.”


별일 아니라는 듯 심드렁하게 말을 마친 심학조가 품에서 접선을 꺼냈다.


살랑살랑 부채질 몇 번을 하던 그가 갑자기 탁, 부채를 접고는 매섭게 설화를 바라보았다.


“궁의 일도 아니라면 그 선약 좀 깨거라. 이 조선 팔도에 나와 함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 터. 누구와의 선약인지 모르겠지만, 그 정돈 할 수 있겠지.”


“······알겠사옵니다.”


설화의 대답에 만족스러운 듯 심학조는 다시 부채를 펼쳐 들었다.


“그래. 그래야지. 내 좋은 일을 앞두고 있다. 허니 기분 좋은 술을 한잔해야겠군.”


“······.”


“좋은 일이지 무엇인지 묻지 않는군. 뭔가 알고 있는 겐가?”


“저같이 천한 기생이 어찌 영상대감께 일어나는 일들을 알겠습니다. 저는 세고(世故)를 알지 못하옵니다. 그저 노래와 춤, 술을 팔 뿐이지요.


“그래. 그것이 좋아. 너무 많이 알면 머리가 아프거든. 어디 아프다 뿐이겠어. 목숨줄이 위험해지기도 하지.”


“······.”


“그러니 머리 아픈 일은 집어치우고 술상을 좀 준비해야겠다.”


“술은 어떤 것으로 준비해 올릴까요?”


“술은······”


잠시 생각에 잠긴 심학조가 눈을 번뜩이며 답했다.


“아아, 그것이 좋겠어. 감홍로. 세자가 백성의 고혈로 만들어낸 술이라고 했었지만, 그보다 더 좋은 술을 내 아직 맛보지 못하였으니. 그걸 마시면 더 기분이 좋아지겠군.


“알겠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




밖으로 나온 설화의 발걸음이 급해졌다.


별채로 들어선 그녀는 숨 돌릴 틈 없이 방으로 돌진했다.


“행수 어른.”


방으로 들어선 그녀를 세계가 의아하게 바라보았지만, 일일이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오늘 궁은 너 혼자 가야겠다.”


“네?”


“지금 영상대감께서 오셨다.”


“영상대감이라면······”


아버지를 죽인 원수이자 빈궁마마를 위협하고 있는 그자?


“허니 눈에 띄이지 않도록 뒷문으로 나가거라. 휼이 길을 안내할 것이다.”


어느새 설화의 뒤에 휼이 서 있었다.


“알겠습니다.”


세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것.”


설화가 무언가를 세계에게 건넸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나 설화가 답하기도 전에 세계는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건네받은 주머니에서는 백단향이 그윽하게 올라왔다.


“그것을 빈궁마마께 전해드려라. 그분께서 좋아하신 것이니, 세자 저하께서도 필시 좋아하실 것이다. 합궁하실 때 꼭 품고 계시라 말씀드려라.”


“네. 전해드리겠습니다.”


“잊지 말거라. 오늘은 결코 그곳에 오래 머무르면 아니 된다. 미시 전에는 돌아와야 할 것이다.”


“오가는데 한 시진은 족히 걸립니다. 궁 안에서도 한참 움직여야 하고요.”


“그래도 그리해야 한다. 오늘은 합궁일이니 빈궁마마께서 궁 밖에서 들어온 이와 오래 함께 있어 좋을 것이 없다. 미시까지 꼭 돌아와야 한다. 명심하거라.”


설화의 거듭된 당부에 세계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시간이 없다. 당장 떠나거라.”


“저를 따라오십시오.”


휼이 낮은 목소리로 세계를 인도했다.




***



빨간 자두가 바람결에 흔들렸다.


푸드득-


가지 끝에 앉아 탐스러운 자두를 노리던 까치가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놀라 날아갔다.


“꽃이 그득하게 피더니 자두 역시 풍년이구나.”


새벽녘부터 깔린 안개로 마음이 심란했던 단혜의 얼굴에 희색이 띠었다.


*


본디 합궁일의 빈궁전은 새벽부터 바빴다.


단혜는 몸을 깨끗이 씻고, 닭이 채 울기도 전에 우물물을 손수 길어왔다. 첫새벽의 정화수. 그 맑고 정한 물을 놓고 새벽이슬을 맞으며 기도를 올렸다.


오늘이야말로 합궁하게 해주시옵소서. 부디 이 나라 세손이 될 아이를 잉태하게 해주시옵소서.


단혜는 천지신명, 월궁항아, 삼신할미. 그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들어달라고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이것은 이제 자신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오늘 합궁하지 않으면 세자, 은마저도 그 자리가 위태로워지리라.


헌데, 새벽녘부터 안개가 깔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대로라면 오늘의 합궁이 취소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언제 다시 합궁일이 정해질지 모를 일.


말은 하지 않았지만 빈궁전의 상궁들과 내관들의 분분함을 단혜가 모를 리 없었다. 그녀의 마음도 불안감으로 알찌근해져왔다.


해서, 그녀는 새벽기도가 끝나자마자 숨 돌릴 틈 없이 옥천교로 달려왔다. 이곳의 자두나무를 보면 어지러운 속내가 뻥 뚫릴 것만 같았다.


이 자두나무는 은이 알려준 것이었다. 이리 더운 여름날 옥천교의 자두를 먹으면 더위가 잊히질 만큼 달고 맛있다고. 흘러가듯 한 말이었지만,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와 가족이 보고 싶었던 단혜에게는 작은 위로가 되었다.


그 후로 가끔 자신을 바라봐주지 않는 은에게 서운함이 들 때면 이곳에 들려 한참 자두나무를 올려다 바라보곤 했었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앙상하게 마른 가지가 봄이 되면 잎을 틔우고, 꽃이 피고, 결국에 이리 달콤한 열매를 맺는 것이 언젠가 은의 마음이 자신에게 향하게 될 것이니 기다리라 말하는 것 같았다.


*


“빈궁마마. 안개가 걷혔습니다.”


조 상궁이 밝은 목소리로 고했다.


신기하게도 단혜가 자두나무를 올려다보는 사이 안개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덕에 모습을 감추었던 해가 위풍당당하게 위세를 떨쳤다. 단혜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힐 정도였다.


“그래. 이리 안개가 사라지니 저 자두가 더 빨갛게 보이는구나.”


단혜가 자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조금만 더 뻗으면 닿을 것 같은데, 일호만큼의 차이로 닿지 않았다.


평소라면 엄전한 그녀가 까치발 따위는 들지 않겠지만, 왠지 이 자두를 따면 좋을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단혜가 조심스럽게 까치발을 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조 상궁은 화들짝 놀라며 그녀를 말렸다.


“빈궁마마. 제가 따드리겠습니다.”


“아니다. 이것은 내가 딸 것이다.”


단혜는 단호한 목소리로 거절했다. 조 상궁이 잠시 망설이다, 그녀가 손을 뻗기 쉽게 가지를 잡아 내려주었다.


잘 익은 자두를 손아귀에 쥐고 살짝 힘을 주자 톡하고 떨어졌다.


단혜는 빠알간 자두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참으로 어여쁘구나.”


“정녕 그러하옵니다. 이리 예쁜 자두는 처음 보았나이다. 몇 개 더 따갈까요?”


“아니다. 하나면 충분하다.”


“하오면 이제 돌아가시지요. 조금 전, 그 아이가 빈궁전에 도착했다 하옵니다.”


“그래?”


단혜가 두 눈을 반짝이며 발길을 옮겼다.




***




휼이 길을 안내해주긴 했지만, 궁 가까이에 이르자 말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궁궐 안으로 들어와 빈궁전까지는 오롯이 세계 혼자 이동해야 했다. 그것도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말이다.


긴장감이 괴어오르기도 했지만, 그와 동시에 설렘이 일었다.


빈궁마마를 만날 수 있다······.


세계도 이제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 나는 여자이고, 계집종이며, 반역을 저지른 아버지 때문에 숨죽이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그렇지만 마음이 저 스스로 설레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좋은 것을 싫은 것으로 만드는 일은 그 뉘라도 쉽사리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더구나 저리 섹시한 얼굴을 마주하면 말이다.


“많이 기다렸느냐?”


“아니옵니다.”


한참 단혜의 얼굴을 바라보던 세계가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내렸다.


“어제도 왔다가 그냥 갔다지.”


“네, 일이 그리되었습니다.”


“헌데, 오늘은 왜 너 혼자인 것이냐?”


“행수 어른께 일이 생겨 오늘은 저 혼자 왔사옵니다. 대신 이것을 전해드리라 하였습니다.”


세계가 품 안에서 두루주머니를 꺼내 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것이 무엇이냐?”


“백단향입니다. 세자 저하께서 좋아하실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저하께서 백단향을 좋아하셨던가?”


단혜가 시립하고 있던 조 상궁에서 물었다.


“저는 듣지 못하였사옵니다.”


“행수 어른께서 무언가 알고 계신 듯했습니다. 합궁하실 때 꼭 품고 계시라 하셨습니다.”


“알겠다. 내 믿어보지.”


단혜가 눈짓을 하자, 조 상궁이 살포시 걸어와 두루주머니를 챙겨갔다.


“그래, 오늘은 나에게 어떤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줄 참이냐?”


단혜가 흔연히 웃으며 물었다.


시원한 입매에 걸린 미소······참으로 예쁘네······.


저도 모르게 단혜의 얼굴로 빠져든 세계가 황급하게 체머리를 흔들었다.


“왜 그러느냐? 어디가 불편한 것이냐?”


“아, 아니옵니다.”


“허면······.”


“오늘은 이야기를 해드리러 온 것이 아니옵니다.”


“충언을 하러 온 것이 아니다? 그럼 오늘은 나에게 무엇을 알려줄 것이냐?”


단혜가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오늘은 화장하는 법을 알려드릴 것이옵니다.”


“화장?”


온화하던 단혜의 얼굴이 단번에 찡그려졌다.


설화에게 들어 담장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단혜의 반응은 생각 이상으로 단호하게 돈담무심했다.


삽시간에 방 안의 공기가 어성버성해졌다.


“그것이라면 배울 필요가 없다. 나는 그것을 할 일이 없을 것이다.”


“왜 화장을 그리도 싫어하시는 것이옵니까?”


“화장은 가면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 제 마음을 숨기고 거짓을 말하는 것이다. 성정이 깨끗하다면 그리할 필요가 없겠지.”


“화장은 숨기는 것이 아니옵니다.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이지요.”


“돋보이게 한다라······.”


여전히 단혜는 미간을 찌푸린 채 세계의 말을 곱씹었다.


그런 단혜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세계가 이어 말했다.


“나의 단점은 가리고, 장점을 부각하는 것이 화장술이옵니다. 장점을 내세우는 것이니 돋보이게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분명 빈궁마마께서 화장을 하시면 더 아름다우실 겁니다.


이리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여인일수록 화장이 더욱 빛을 발하지요.


세계가 확신에 차서 이야기하자, 단혜가 한발 물러났다.


“흐음.”


짧은 헛숨을 내쉰 단혜가 세계에게 물었다.


“그럼 내 얼굴의 단점은 무엇이냐?”


“없사옵니다.”


한 치의 생각도 하지 않고 단숨에 세계가 답했다.


진심이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단혜가 아름답지 않다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단혜를 보고 나면 바뀌어버린 제 얼굴의 단점을 찾는 일이 많아지기는 했을지언정. 단혜의 얼굴에서는 결단코 단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단혜의 입장은 달랐다.


은이 자신을 외면하는 것이 자신의 얼굴 때문임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단혜의 얼굴은 빈궁의 상이 아니었다.


처음 궁에 들어왔을 때 저런 얼굴을 가진 여인이 어찌 빈궁으로 들어왔냐며 궁인들이 숙덕이는 것도 들었다. 대제학의 여식이 마마에 걸리지만 않았어도, 좌상의 여식이 빈으로 책봉되지 않았을 것이라고도 했다.


큰 눈망울, 지나치게 길게 늘어진 입매, 까무잡잡한 피부까지 그 어느 것 하나도 빈궁의 얼굴로는 어울리지 않았다. 차라리 눈앞에 들어앉은 저 아이. 저 계집종의 얼굴이 도리어 빈궁의 상에 가까웠다.


“나는 놀리는 것이냐?”


단혜가 노기 띤 목소리가 다시 물었다.


“정녕 제 눈에는 없사옵니다.”


“내 눈에는 온통 단점이다. 옅은 눈썹도 싫고, 화등잔만 한 눈도 싫다. 길게 늘어진 가는 입술도 보기 싫다. 온통 보기 싫은 것들 투성이인데, 너는 어찌 내 얼굴에 단점이 없다고 하는 것이냐.”


“제 눈에는 정녕 빈궁마마의 얼굴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사옵니다.”


단혜는 세계의 눈을 응시했다.


저 깊은 눈. 음험함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아이는 정녕 나를 미려하다 생각하는 것인가?


단혜는 혼동스러웠다. 이제껏 자신에게 아름답다 예쁜다 말해주는 이가 없었거늘......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느낀 세계가 이어 말했다.


“허나······”


“허나?”


“그런 것들을 단점으로 여기신다면······화장으로 얼마든지 바꿀 수 있습니다.”


세계가 자신이 가져온 보따리를 풀어 재꼈다.




***




“더위로 인해 저하의 기력이 조금 쇠하신 것 같은데 어떠하신가. 어제저녁에는 미열도 조금 있으셨네.”


오 내관의 말에 김 참봉이 신중하게 은의 맥을 짚었다.


“그리 걱정하실 정도는 아니십니다.”


“그것 보아라. 나는 기쇠하지 않았다 하지 않았느냐. 이런 침과 뜸도 필요 없느니.”


은이 어깨를 쭉 펴며 호기롭게 말했다.


“저하, 그래도 침과 뜸은 받으셔야 하옵니다. 이는 예후와는 다른 문제이옵니다.”


오 내관이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으나, 은 또한 알고 있었다.


오늘 내관이 시술할 침과 뜸은 건강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합궁을 위한 것임을.


“세자저하. 기수 우에 누우시지요. 이제부터 음액(陰液)을 흐르게 하고, 정기(精氣)를 고양해주는 뜸과 침을 올리겠나이다.”


김 참봉의 말에 은이 마지못해 이불 위에 가로누웠다.


“먼저 태계혈에 침을 올리겠나이다. 허혈을 내리고, 신장경락의 순환을 도울 것이옵니다.”


말을 마친 김 참봉이 침을 들었다.


침을 든 그의 오른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김 참봉은 주변이 알지 못하도록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김 참봉은 왼손으로 떨리는 오른손을 잡쥐었다.


“왜 그러는가.”


은의 곁에 시립하고 있던 오 내관이 촉기 빠르게 물었다.


“아, 아닙니다. 침을 확인했습니다.”


말을 마친 김 참봉이 얼른 은의 발목에 침을 놓기 시작했다.


“괜찮으시옵니까.”


김 참봉이 속내를 숨기고, 은에게 물었다.


“늘 같은 것을 뭘 물어보느냐. 얼른 끝내고 싶으니 재게 움직이거라.”


“아, 알겠사옵니다, 저하. 그럼 이제 뜸을 뜨겠나이다.”


김 참봉의 말이 떨어지자, 나인이 다가와 은의 속적삼 대조를 풀었다.


김 참봉이 초 끝에 뜸을 가져다 댔다. 불이 붙은 뜸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동궁전 방 안이 매캐한 연기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뭘 하는 것이냐. 재게 움직이래도.”


이미 불이 붙은 뜸을 아직도 초 끝에 대고 있는 김 참봉을 향해 은이 지청구를 내렸다.


“네, 네 알겠사옵니다. 저하”


김 참봉이 마침내 손을 움직였다. 그는 불이 붙은 뜸을 은의 배꼽 위에 올렸다.


“이곳에는 내 처음 뜸을 떠본다. 여기는 무슨 자리냐?”


“시, 신궐혈이라 하옵니다. 체증이나 복통이 있을 때 좋사옵니다. 어제 석수라를 물리셨다 하기에 이곳에도 기운을 보충하기 위해 뜸을 올렸나이다.”


“그래?”


“네. 저하.”


김 참봉이 머리를 조아렸다. 여름의 더위와 뜸의 열기, 그리고 괴어오는 긴장감으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도리어 자신이 의원을 찾아가고픈 심정이었다.


“알겠으니 빨리 뜸을 뜨거라. 더위에 몸이 더 축나는 기분이다. 무엇이 이리 번다하단 말이냐.”


얼굴이 불콰하게 달아오른 은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김 참봉을 채근하였다.




***




어느새 어두워진 중희전에 촛불이 하나둘 밝혀지기 시작했다.


왠지 모를 긴장감이 빈궁전을 휘감았다.


“세자저하 납시셨나이다.”


세자의 도착을 알라는 소리에 다소곳이 앉아있던 단혜가 일어나 은을 맞이했다.


방 안에 들어선 은이 멈짓, 걸음을 멈추었다.


이상하다. 무언가 달라졌다. 빈궁도······이 방도······


은이 천천히 단혜의 얼굴을 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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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59화 들어봤습니다. 그 이름. 21.04.02 15 0 13쪽
59 58화 후회라는 건 그냥 일찍 해버리는 게 나아. 20.10.30 17 0 13쪽
58 57화 곧 그 효과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20.09.12 14 0 13쪽
57 56화 오해를 풀고 싶습니다. 20.05.16 41 0 14쪽
56 55화 개똥 같은 소리 20.02.21 29 0 13쪽
55 54화 네가 해다오 20.01.13 27 0 13쪽
54 53화 그녀를 곁에 둘 각자의 방법 19.12.31 27 0 12쪽
53 52화 그게 그토록 궁금하셨나요? 19.12.24 24 0 13쪽
52 51화 없던 병이 더 생기겠군. 19.12.06 30 0 14쪽
51 50화 천 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일 19.11.24 33 0 16쪽
50 49화 이대로는 아니 되옵니다. 19.11.17 28 0 14쪽
49 48화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19.11.10 35 0 12쪽
48 47화 그들의 속내 19.11.01 31 0 13쪽
47 46화 그 아이의 정체를 모르실 것 같은가? 19.10.27 37 0 14쪽
46 45화 모든 것이 비로소 이해되었다. 19.09.28 45 0 14쪽
45 44화 저를 궁으로 보내주십시오. 19.09.20 43 0 12쪽
44 43화 이미 오래전에 끝난 일 19.08.29 37 0 15쪽
43 42화 마마신의 저주 19.08.15 43 0 13쪽
42 41화 불안의 시작 19.08.11 40 0 12쪽
41 40화 붉은 입술 19.07.27 63 0 13쪽
» 39화 안개 속의 자두 19.07.20 54 0 17쪽
39 38화 합궁, 내 꼭 해주지. 19.07.12 78 0 13쪽
38 37화 역시 말렸어야 했다. 19.07.06 48 0 14쪽
37 36화 더 강력한 명분 19.06.28 47 0 12쪽
36 35화 선물이 향하는 곳 19.06.22 60 0 13쪽
35 34화 누구의 편이십니까? 19.06.16 54 0 16쪽
34 33화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정답은 하나 19.06.01 67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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