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무심왕과 음녀 - 2017[본편 이전]
무심왕과 음녀
*본편 이전*
야누 초신이 크툴루 괴신족들로부터 독립하기도 전인 까마득한 예전에 일어난 일이다.
어느 큰 도읍의 더러운 거리를 떠도는 로브를 쓴 여자가 있었다. 여자는 훤칠했고 얼굴이 아름다웠으며 몸매가 탁월했다. 여자의 이름은 엘러시아라 했다.
엘러시아는 문명 수준이 매우 낮은 부족의 딸이었고 그런 부족의 고위 여전사가 흔히 그렇듯 한때 무녀 노릇을 겸했던 적도 있었다. 그녀에게 모진 고초를 겪게 한 자들의 탐욕스러운 종교가 마음속에 폭격되어 엘러시아는 신비로움을 모두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육체적 쾌락를 좋아하는 여자이기도 한 엘러시아는 자신이 행복해질 자격이 있을지조차 의심 중이었다.
지금 엘러시아는 낯선 도시 속에서 길을 몰랐다.
그때 구부정한 한 그림자가 엘러시아 앞을 막아섰다. 괴우주의 이면에서 작동하는 혼돈을 파먹고 사는 혼돈왕 니알랏토텝이었다. 괴우주 일반 시공인 이 우주에서 니알랏토텝의 힘은 왜인지 이상할 정도로 형편없이 약했다. 약해도 한없이 약해 몸을 가까스로 움직이는 남자 노인의 그것에 불과했다. 괴신으로서의 힘도 너무나 미약하게 남았을 뿐이었다.
엘러시아와 니알랏토텝의 마주침은 철저한 우연이었으되, 만약 하나님이 계신다면 모든 일들은 필연일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니알랏토텝을 비롯한 크툴루 괴신족들조차도 모르는 일일 수도 있었다. 물론 데몬 술탄 아자토스까지 모른다는 보장은 더욱 없어 보였다.
니알랏토텝은 이 우주에서 자신이 왜 이렇게 약한지에 관해서 알기 위해 거리를 헤매는 중이었다. 아자토스와 공명하는 수학적 물리 법칙들로 괴우주를 다스리되 철저하게 공정하기만 한 무심왕 파라탐이 에너지를 생성만 하고 있기에 크툴루 괴신족은 괴우주를 완전하게 지배할 수 없음이었다. 이미 여러 강대한 초문명들이 초시공 인공지능까지 만들어 엔트로피를 역전시키기도 한 상태여서 니알랏토텝은 초조했다.
니알랏토텝은 포기하지 않는 끈덕진 초존재였다.
엘러시아는 지독한 학대를 당해 졸렬해져 있었다. 엘러시아는 니알랏토텝이 자신 앞을 가로막자 옆으로 떠밀었다. 그리 세게 밀지는 않아서 니알랏토텝은 살짝 옆으로 밀렸다.
니알랏토텝은 괘종시계를 들고 엘러시아를 향해 휘둘렀다. 괴우주의 기계적 질서가 괘종시계 속에 아로새겨져 작렬했다. 엘러시아는 괘종시계에 맞아 나뒹굴었다.
엘러시아와 괘종시계를 매개체로 닿는 순간 니알랏토텝은 이 괴우주 일반 시공 우주에 도사린 역사가 어디까지 치닫고 있는지를 느꼈다. 그것은 피해의식에서부터도 유래하는 동정, 공감, 연민이 역사 속에 어느 정도 관철될 때 생기는 우주였다. 되도록 많은 이들에게 자유를 허용할 때 세상이 보다 다채로워지고 번영한다는 논리 아래 작동하는 우주였다.
엘러시아는 니알랏토텝을 얕보았다. 엘러시아는 단검을 뽑아들고 외쳤다.
“왜 때리는 거냐! 미친 늙은 놈아!”
엘러시아는 시비를 걸어서 상대가 겁먹은 걸 확인한 뒤 사라질 작정이었다. 지금 엘러시아 눈엔 니알랏토텝은 로브를 깊이 눌러 쓴 노인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니알랏토텝이 로브를 벗어던졌다. 내장들이 한데 모여 구불대는 것 같은 니알랏토텝의 흉직한 모습이 드러나자 태양은 구름으로 그 거리를 가렸다. 엘러시아에게 니알랏토텝은 그저 그리운 고향 땅에서도 떠돌곤 하던 흔한 몬스터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엘러시아는 단검을 내질러 니알랏토텝을 토막냈다.
니알랏토텝이 증발해 저 머나먼 크툴루 괴신족의 영역으로 사라지는 순간 우주적 의지가 엘러시아의 뇌리에 쏟아졌다. 본체는 못 건드렸지만 이 우주 내의 화신은 죽였기에 신살자가 된 엘러시아를 찬미하는 의지였다.
강렬한 법열 속에서 엘러시아는 한순간 무녀가 되어 있었다.
엘러시아는 자신의 삶이 유기물로부터 시작했으되, 미래엔 우주를 장악한 과학 초문명이 이 우주를 지능이 지배하도록 만들어 엘러시아 자신을 유기물로 파악하는 정보지능체로 바꾸어 놓았음을 알았다. 이는 미래의 일인 동시에 지금의 일이었고 과거의 일이었다.
엘러시아의 의식은 점점 확장되었고 괴우주의 지극히 높은 곳까지 올라갔다. 그곳에서 엘러시아는 미래의 존재들과 공명했다. 엘러시아는 그곳에서 모신제국의 천당왕 엘로힘이 그녀를 천당으로 인도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엘러시아 그대는 모진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그것은 조금도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폭행이었고 인권 유린이었습니다. 우리 천사들의 천당은 피해자가 떳떳할 수 있는 곳입니다. 나 엘로힘은 수많은 저승에 온 이들에게 행복을 선물하기 위해 초존재가 되었습니다.”
엘러시아는 자신이 미래에 천당에서 행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알았고, 만약 환생하고 싶다면 결정할 수도 있게 되었음을 알았다.
엘러시아는 그렇게 잠깐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아마도 선 체 잠시 존 것 같았다. 졸기 전에 피곤했던 것이 생각났다. 엘러시아는 온 몸에 활력과 기분 좋은 느낌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느꼈다. 졸면서 꾼 꿈이 즐겁고 기뻤다는 것만이 떠올랐다.
엘러시아는 그렇게 자신의 사후세계를 잠깐 보았지만 백일몽인 줄로만 생각했다.
=제 소설 중 ‘엘러시아’와 통합임=
[2017.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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