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설하랑님의 서재입니다

곤륜환생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새글

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최근연재일 :
2024.06.15 18:10
연재수 :
288 회
조회수 :
1,507,539
추천수 :
30,257
글자수 :
2,199,617

작성
24.04.13 18:10
조회
1,949
추천
57
글자
20쪽

오랜 약속

DUMMY

※※※



산양현(山阳县)에 자리한 작은 객잔이었다.


땅거미가 내려앉은지도 한참된 야심한 시각. 달도 구름 사이로 숨어든 한밤이다. 본래라면 이미 장사를 접고 들어갔어도 한참 남았을 것이건만, 이곳만큼은 아니었다.


“이봐. 술 좀 더 내와라.”


그극.


두꺼운 나무로 된 탁자가 종잇장이라도 된 듯 단검이 반쯤 박혀들어갔다. 팔뚝이 자신의 허리만한 거한을 보며 객잔주인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 금방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떨리는 손을 다잡으며 객잔주인은 황급히 술을 가지러 발을 옮겼다.


지난 며칠간 계속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다. 어느날부터 마을을 점거한 무뢰배들은 이 장소가 처음부터 자신들의 것이었던 양 들어앉아 마을 사람들을 갈취하는 중이었다.


아주 드문 일은 아니었다. 상산(商山) 인근의 외딴 마을에 쳐들어오는 시정잡배나 산적들은 한둘이 아니었고, 그때마다 마을 사람들은 조용히 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며 버텼다. 그렇게 하면 주기적으로 순찰을 나오는 종남파의 무인들에 의해 이들은 처리되거나, 그 전에 도망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항시 사방을 오가며 민초를 수호하던 정파 무림의 검(劍)들.


간혹 그런 정파 무인들 중에서도 오만하고 콧대 높은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감사했다. 그들의 검은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민초를 향하는 일은 없었기에.


허나 어느 순간부터 그 검들은 사라졌다. 불과 몇주 전의 일이었다.


소문은 바람보다 빨랐다. 어디서는 매화검수의 목이 잘려 사마외도의 현판 위에 내걸렸다는 말도 돌았고, 어디에서는 개방도들의 시체가 떼거지로 발견되었다는 말도 흘렀다. 올곧은 기세를 흘리며 관도를 오가던 정도 무림의 검객들은 이제 거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를 꿰찬것은 여태껏 정파의 눈치를 보며 숙이고 있던 사파의 시정잡배들이었다.


‘......종남의 도인분들 앞에서는 고개도 못들던 작자들이.’


속으로는 그리 생각했으나, 객잔주는 그것을 입밖으로 내뱉을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불과 며칠에 한번씩 이 마을에서도 죽어 목이 내걸리는 사람이 있는 까닭이기도 했다.


사파의 무인들도 마주치는 모든 사람을 죽이고 약탈할만큼 생각이 없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기분에 거슬리는 사람을 죽이는 것을 거리끼지는 않았다.


저들의 눈에는 민초가 가축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들에게 물건을 가져다 바치고 돈을 공급하는 가축.


“술을 시킨지가 언젠데......”

“여기, 여기 있습니다!”


객잔주가 황급히 병을 한아름 안고 달려나가 탁자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뒤이어 그가 방금 익혀낸 닭고기를 옆에 슬며시 두자, 막 단검에 손을 올리고 있던 거한이 혀를 쯧 차며 단검을 놓았다.


“이만 가라.”


축객령이었다. 그러나 객잔주는 거한의 눈매에서 퍽 만족스러운 기분을 읽어내었다. 속으로 한숨을 삼킨 객잔주가 터덜터덜 돌아 주방의 뒷 공간으로 향했다.


저리 말한 이상 저들이 이날 밤에 그를 다시 부르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객잔주는 처세에 능한 사람이었고, 저자들은 마을을 점거한 무뢰배중에서도 꽤나 관대한 자들이었다. 물론 그 도끼 끝에 옆집 노인들의 핏물이 묻어 있다는 사실은 명백했지만.


“......아빠?”


그때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머리가 위층에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초하야. 어서 자지 않고! 내려오지 말고 문 꼭 닫고 있으라 했잖니.”

“잠이 안와요.”


그리 말하며 손짓으로 바깥을 가리킨다. 그에 객잔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마을 바깥으로는 환히 불이 밝혀져 있고, 여기저기서 커다란 소음이 들렸다. 마치 어디 커다란 도시의 홍등가라도 온 듯 했다. 평시 조용한 곳에서 잠들던 아이에게 큰 소음이었다. 그렇잖아도 예민한 딸아이기에 더욱 그랬다.


게다가 오늘따라 바깥에서 울리는 소음은 더욱 커다랬다. 무슨 싸움박질이라도 하고 있는지.


그럼에도 객잔주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럼 이리 내려오려무나. 아빠가 꿀물이라도 타줄테니까.”


주방의 한켠에 걸터앉아 불을 올리고 물을 끓이기 시작한 객잔주의 옆에 작은 소녀가 슬며시 와 앉았다.


그 사이 밖에서는 호탕한 음성들이 울리고 있었다. 본래 저런 것은 아예 안듣는게 낫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객잔주였지만 자연스레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요즘 서안의 공기가 심상찮다던데.”

“신주흑림이라 했지? 만금장과 합세해 서안을 크게 포위하고 있다고.”

“흑림은 림도들을 꽤 받고 있다 하던데, 한번 가볼까.”

“쯧. 나는 별로다. 녹림도와 수적들 중에 우리보다 약한 놈들도 많았는데, 밑에서부터 올라가기에는 수지가 안 맞아. 차라리 만금장에 가서 돈을 받고 고용되는게 낫다.”

“아빠, 물 다 끓었어요.”

“음? 그렇구나.”


자리에서 일어난 객잔주가 고이 숨겨둔 꿀을 꺼내어 김이 올라오는 물에 타기 시작했다. 여전히 귀는 바깥을 향해 열어둔 채였다.


“애초에 서안을 뚫는건 무리 아닌가? 거기에는 왜, 그 암휘군이......”

“쉿. 함부로 그 괴물의 이름을 입에 담지 마라. 요상한 술법을 부리는 놈이잖나.”

“여튼, 그자를 뚫고 서안을 먹는다? 기약없는 싸움이야. 아무리 녹왕(綠王)이 있다 해도.”


암휘군. 이야기로 알음알음 전해만 들은 별호에 객잔주가 눈을 크게 떴다.


저자들의 이야기대로라면 지금 서안은 안전한 것인가. 적어도 도시 안은 괜찮은 듯 보였다. 고립되어 있다고 한들 종남파의 무인들 또한 거기에 있을 것인데.


어떻게든 도시 안으로만 들어갈 수 있다면 지금보다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까.


“차라리 사천으로 가는건?”

“헛소리 집어치워라. 수라궁은 적이고 아군이고 없는 괴물 족속들이야. 짐승들이랑 대화는 안통한다. 여차하면 옆에 있는 이들을 반으로 찢어버리려 할 놈들인데.”

“어렵구만. 이대로 여기 계속 눌러앉아 있을 생각인가?”

“좋은 기회가 오기 전까지는 그게 낫겠지. 아니면 차라리 상산사호(商山四皓)의 유적을 찾아보는 것도......”


그때였다.


한껏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객잔주의 귓가에 들리던 소리가 줄어들었다. 갑자기 바깥의 무뢰배들이 목소리를 줄인 모양이었다. 그에 흠칫 놀란 객잔주가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끼익-


“계십니까?”


투명한 목소리가 울렸다. 객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에 벌떡 일어난 객잔주가 주방 사이로 눈을 슬쩍 내밀었다.


그리고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저런 분이......?’


한순간 시선을 빼앗겼다. 처음 내뱉은 목소리도 맑고 투명해 옥구슬이 구르는 듯 했는데, 문을 열고 들어온 이의 외양은 그보다도 더 투명하다 느껴졌다.


별밤을 녹여낸 듯한 길다란 흑발 사이로 엿보이는 것은 눈처럼 새하얀 피부였는데, 언뜻 일렁이는 불빛 아래 투명하게 비쳐온다. 길게 늘어진 속눈썹 아래로는 옅은 자색이 감도는 흑안이 신비로웠고, 스러질 것 마냥 얇은 선 위로는 백도를 빚어놓은 것 같은 뺨과 요요하게 뻗은 콧날이 눈에 들어왔다.


그 밑, 고급스러운 백청색 장포 위로 대충 걸쳐입은 흑포가 언뜻 엿보인다. 밤길을 위해 덧대 입은 것인 모양이었다. 그 사이로 언뜻 길쭉한 검 두자루가 눈에 비치는 듯도 했으나 금새 시야에서 벗어난다.


전부 합쳐 눈을 떼기 힘든 사람이었다. 그 옆에 살풋 더 키가 작은 동행인이 있었음에도 한사람에게만 시선이 갈 정도로.


남녀 누구든지 여럿 홀렸겠다 싶은 미모. 그러나 객잔주는 동시에 그 자신만이 그런 생각을 한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들어오시면 안되는......!’


객잔주는 속으로 외쳤으나, 그것을 입 밖에 내지는 못했다. 그의 뒤에서 조용히 꿀물을 홀짝이는 딸이 있었던 까닭이었다.


“호오?”


그랬기에 그는 귀에 들려오는 옅은 감탄 소리를 들으며 소리없이 절망할 수 밖에 없었다.


“객잔주는 이미 자러 갔는데.”

“손님분이신가 보군요.”


침착하게 답하는 음성. 그에 화답하는 낮은 웃음소리가 귓가를 파고든다.


“그래. 그쪽도 밤을 보낼곳을 찾으러 온건가?”

“아니요. 잠시 식사라도 하고 갈까 해서 말입니다.”

“이밤에?”

“사정이 있어 늦게 움직이던 터라......”

“거참 용감한 소저로군. 위험한 길을 그리 돌아다니고.”

“소저......?”


옅은 당황이 섞인 목소리로 들려오는 반문. 그러나 그 목소리는 뒤따르는 나직한 속삭임에 금새 흩어졌다.


“백연. 배고파.”

“주무시러 가셨다는데? 밖에서 요리라도 해줄까.”

“......잘해?”

“사형이 만족할 정도로는?”

“그럼 좋아.”


그리 대화를 마치고 몸을 돌리는 두 사람. 객잔주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저대로 이 객잔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러나 그 기대는 그들이 두걸음도 떼기 전에 무참히 부서지고 말았다.


“잠깐.”


드르륵.


의자를 끌고 일어나는 소리였다. 같이 앉아있던 사람중, 덩치가 큰 거한 쪽이었다.


“늦었는데 밖은 위험하지. 합석은 어떤가?”

“드시고 있던 것 아닌가요? 남의 음식을 뺏어먹을 만큼 파렴치하진 않은데.”

“제안은 아닌데.”


그극.


객잔주가 몸을 흠칫 떨었다. 거한이 옆에 기대어 두었던 도끼를 집어드는 소리. 그것을 미모의 손님도 인지한 듯 눈썹을 치켜올린다.


그렇게 잠시간 거한을 응시하던 손님이 태연히 어깨를 으쓱였다.


“좋습니다 그럼. 그렇잖아도 궁금한게 좀 있었거든요.”

“......음?”


이번만큼은 거한도 당황한듯 목소리를 내었다. 그 사이 성큼성큼 걸어간 손님은 의자 하나를 빼 탁자 앞에 걸터앉았다. 길다란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턱을 괴고 앉는 자세가 참으로 가벼웠는데, 흡사 사마외도의 무림에서 구르고 구른 칼잡이 같은 느낌도 났다.


“이건 술인가요?”

“그런데......”

“감사합니다.”


그리고는 길다란 손가락으로 병목을 쥐곤 들어 그것을 단숨에 죽 들이키는 모습까지. 소리도 없이 한번 목울대를 움직이곤 병을 내려놓는 눈매가 야살스러웠다.


한번의 움직임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고정시킨다. 그리고는 태연히 입을 열어 묻는다.


“제가 지금 서안을 향해 가고 있는데.”

“서안? 거긴......”

“예. 사마외도의 군세에 포위당했다 하더군요. 그쪽에서 도망쳐 나오는 사람들의 말로는.”

“그걸 알고도 가는건가? 그러지 말고 여기 마을에서 같이 머무는건 어떻지.”


낮게 흐르는 음성에 묻어나는 음심. 그러나 그것을 느끼지도 못한 듯이 어깨를 으쓱이곤 말을 잇는다.


“궁금한건 그게 아니라, 암휘군이 움직이고 있는가에 대한거에요. 성화방이 가만 보고 있을리는 없을텐데. 하오문도들이 힘을 쓰면 쉬이 포위될 도시는 아닐것을.”

“......”

“음, 하령이 움직이고 있지 않다면 역시 서고의 방비 때문일련지. 대체 무엇이 있길래......”


말끝을 흐리며 혼자 고민에 잠기는 것까지도 자연스럽다. 객잔주는 점점 옅은 위화감과 함께 머릿속에 의문이 피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저런 외모와 이름, 어디서 들어본 것도 같은데.


“그것에 대해서는 아는것이 없어 보이는군요. 그렇다면 다른걸 하나 물어도 될까요?”

“허어?”


이번에는 고기를 들어 한점을 죽 찢어 입에 넣고는 오물거린다. 뒤이어 생긋 웃으며 묻는 목소리가 천진했다.


“상산사호(商山四皓)의 유적은 뭔가요?”


덜컥.


의자가 흔들렸다. 흑발 손님의 앞에 앉아있던 칼잡이가 번쩍 일어나려 했던 탓이었다. 허나 그는 끝까지 움직이지 못했다. 어느 순간 그의 등 뒤에 훌쩍 나타난 다른 동행인.


작은 키의 소년이었다. 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어느새 몸을 반쯤 빼 상황을 지켜보던 객잔주의 눈에는 돌연 귀신이 나타난 듯 느껴질 정도였다. 그제서야 작은 소년의 외양도 제대로 눈에 들어온다.


약간 졸린듯한 눈매. 자그마한 얼굴과 하얀 외양.


시린 광채를 흘리는 검을 역수(逆手)로 뽑아들곤 비스듬히 칼잡이의 목에 가져다대고 있었는데, 그 예리함이 객잔주의 피부로도 느껴질 정도였다.


그제서야 거한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뭐냐, 넌.”

“아직 질문에 대답을 안해주셨는데.”

“......한 고조(漢高祖)때 상산에 은거하던 네 기인에 관한 이야기다. 전설로 치부할 소문이지. 그들이 남긴 기연이 있다고.”

“아하.”


고개를 끄덕이곤 볼을 톡톡 두들기며 중얼거린다.


“상산에 오를 시간은 없고......다른걸 하나 더 묻죠.”

“......”

“마을 앞에 걸린 목은 마을 사람들의 것인가요?”


그제서야 객잔주는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이 마을. 지금 자리를 점거하고 앉은 무뢰배들로 가득하다. 저런 외양의 소저가 함부로 헤집고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 객잔까지 걸어오기 전에 겁탈당하거나 목이 날아갔을 터.


그러나 저 둘은 객잔에 산책하듯 걸어 들어왔다.


‘......소음이?’


문득 객잔주는 알아차렸다. 객잔 바깥이 쥐죽은 듯이 적막하다는 사실을.


“그렇다면......”


거한이 말끝을 길게 늘이던 그 순간이었다.


“어쩔거지?”


찰나지간 외치는 것과 동시에 그가 기운을 끌어올리며 곁의 도끼를 덥석 집어들었다. 한순간 거한의 신형이 크게 회전하며 도끼가 섬전처럼 허공을 갈랐다. 그때까지도 자리에 앉아 있던 손님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종격. 금방이라도 몸을 반으로 쪼개버릴 듯 한없이 강맹했다.


“안됩......!”


그에 객잔주가 경악성을 뱉으려던 찰나.


쩌어어엉!


맑은 소리가 한차례 크게 울렸고.


쿠웅.


커다란 소리와 함께 도끼날이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정확히 반으로 갈라진 채였는데, 철로 된 날이 나무토막이나 된듯 반듯하게 잘려나간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정작 자리에 앉은 손님은 아직도 검을 뽑아들지 않았음에도.


“어......?”


거한이 얼빠진 듯 중얼거렸다. 그 사이 손님의 앞에 놓인 병이 느릿하게 미끄러져 내렸다. 비스듬히 베인 술병을 보곤 스스로도 놀란듯 볼을 긁적이는 모습.


“어라, 잘라먹었네. 죄송합니다. 이건 좀 이따가 배상할게요?”


객잔주에게 툭 던지는 말이었다.


뒤이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말한다.


“갈길이 바빠 그냥 지나치려 했는데, 멀리서부터 피냄새가 진동하더라고요.”


그리 말하며 흑포를 툭 털어내듯 가볍게 벗는다. 죽 미끄러져 내리는 흑포 아래로 드러난 것은 청실로 수놓아진 자그마한 용(龍)의 형상이었다.


“난세가 도래했다 하더니, 잡것들이 사방에서 날뛰어서.”


검파를 쥔 음성이 한없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직전까지 생긋생긋 웃으며 말하고 있던 사람이 맞는가 의심이 될 정도였다.


“서주에 합류하는 일이 늦다 해도 전부 정리하고 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거든.”

“대, 대체, 누구......?”

“그건 알것 없고, 사형.”

“응.”


짧은 대답이 울린 순간 검광이 번뜩였고, 외마디 소리와 함께 시체 한구가 쓰러져 내렸다. 직후 거한이 자리를 박차며 도망치려던 순간.


화르르르륵!


객잔주의 시야 전체에 시뻘건 화염의 꽃이 스쳤다. 한순간 눈앞을 스치는 붉은 꽃잎의 향연에 객잔주가 눈을 크게 뜨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작금의 중원 무림에 저런 화염을 다루는 것은 한 문파밖에 없었기에.


그리고 그 문파에서 가장 유명한 소년의 이름은 이런 외진 마을의 객잔주마저 들어본 까닭이었다.


“암화......! 암화 백연!”


쿠웅.


직후 둔중한 소리와 함께 거한의 몸이 쓰러져내렸다. 어느새 뽑았던 검을 납검한 소년이 객잔주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바깥도 전부 정리했습니다. 며칠간은 안전하겠지요. 다만 여기 이대로 머물면 또다시 같은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마을 사람들과 다같이 모여 좀 더 안전한 산속으로라도 잠시 피신을......”

“가, 감사합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대협!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어찌 이런곳까지.”

“......감사하네요. 그건 그렇고 여기.”


품을 뒤적거린 백연이 작은 전낭을 꺼내 객잔주에게 건네었다.


“여비로 쓰세요. 날이 밝으면 잠시 피신하는게 좋을겁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도 갈곳이 딱히 없습니다.”

“다른 곳으로 가라는게 아닙니다. 잠시만 피해 기다리면 된다는 거지요.”


객잔주가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무엇을 기다리라는......”

“비무제전이 끝났고, 새로운 맹(盟)이 탄생했습니다. 종남파를 비롯한 구파와 오대세가의 힘이 결집해 난세를 평정하러 오니, 이곳에도 곧 맹의 무인들이 그 기치를 드리우겠지요.”


객잔주가 멍한 기색을 드러냈다가, 이윽고 그의 눈이 점점 커진다. 믿을 수 없는 희망을 발견한 듯이.


“매, 맹이라 하심은.”

“무림맹(武林盟).”


백연이 답했다. 어느새 벽에 새겨진 커다란 무(武)자를 응시하면서였다.


“사마외도가 난립하는 중원을 위한 새로운 기치입니다.”



※※※



두 인영이 몸을 훌쩍 날렸다. 상산 아래에서부터 달려나가는 경공 기파가 짙었다. 그 뒤로는 마을 한 가운데에서 시체 수십구가 타오르는 불길이 밤 아래 요란했다.


“......잘한게 맞나 모르겠네.”


백연이 뒤를 힐끔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괜히 희망을 준건가 싶은데.”

“......아니.”

“하지만 맹의 힘이 전부 닿는다는 보장이 없어.”


백연이 옅은 한숨을 삼켰다.


직전 지나친 마을 뿐만이 아니었다. 섬서에 들어서면서부터 멀쩡한 마을이나 도시가 거의 없었다. 좀 규모가 큰 곳은 그래도 무인들이 뭉쳐 방비하고 있었지만, 사파의 무뢰배들을 막을 힘이 없는 마을은 여지없었다.


마을 하나를 지나칠 때마다 코끝을 찌르는 혈향에 과거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전장에 온 것인가 싶을 정도로.


백연은 그런 마을들을 전부 정리하고 무림맹이 온다는 말로 희망을 심어주었다. 그로써는 궁여지책이었다.


“맹......종남파도 곧장 섬서로 향하겠지만, 그들만으로 이리 넓은 장소 전체를 수호할 수는 없어.”

“......”

“어쩌면 거짓 희망을 불어넣은 걸지도 모르겠네.”


백연이 쓰게 웃었다.


만일 무림맹의 무인들이 제시간에 오지 못하고, 다음번에 들어닥친 사파의 무뢰배들에게 저 객잔주와 딸이 죽는다면.


그렇다면 저들은 죽을때 누구를 원망할까.


“암화라는 이름에 쌓이는 업(業)이 깊을지도.”

“백연.”


그때 소홍의 조용한 음성이 끼어들었다. 달려가는 와중에도 그를 가볍게 스치는 손길이 부드러웠다.


“잘했어.”

“......그건.”

“사형의 말은, 항상 옳아.”

“......”

“그러니까, 걱정 마. 넌 잘했어.”


그에 피식 웃은 백연이 고개를 저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건지.


그러나 왠지 모르게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느낌도 들었다. 그렇게 조용히 입을 다문 백연과 소홍은 밤길을 가로질러 쉴새없이 내달렸다.


그리 밤잠도 없이 사흘에 가까운 시간을 거쳐 마침내 두 소년은 걸음을 멈춰섰고.


화아아아아악-!


이른 새벽.


야트막하게 치솟은 언덕 위에서 두 소년은 시야 저편을 응시했다.


섬서 서안.


세번째로 찾아온 도시였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여태껏 그들이 기억하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무슨 숫자가.”


움터오는 새벽의 푸르스름한 하늘 아래, 끝도 없이 늘어선 거대한 무인들의 군집체가 눈에 들어온다. 높다랗게 늘어선 깃발 위로 펄럭이는 글자들이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그 중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두가지였다.


신주흑림(新州黑林).


그리고......


“만금장(萬金莊).”


그림자 속에서 암약하던 사파의 상회가, 그 거체를 서서히 세상에 드러내고 있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4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곤륜환생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62 무극(無極)(2) +6 24.05.15 1,473 53 22쪽
261 무극(無極) +8 24.05.14 1,493 57 20쪽
260 권마(拳魔)(5) +8 24.05.13 1,468 55 17쪽
259 권마(拳魔)(4) +9 24.05.11 1,590 55 18쪽
258 권마(拳魔)(3) +8 24.05.10 1,463 54 15쪽
257 권마(拳魔)(2) +6 24.05.09 1,474 53 16쪽
256 권마(拳魔) +6 24.05.08 1,547 56 16쪽
255 서주(4) +6 24.05.07 1,560 57 16쪽
254 서주(3) +7 24.05.06 1,573 56 14쪽
253 서주(2) +7 24.05.03 1,825 57 17쪽
252 서주 +6 24.05.02 1,756 55 17쪽
251 푸른 별(9) +7 24.05.01 1,624 60 16쪽
250 푸른 별(8) +5 24.04.30 1,660 55 16쪽
249 푸른 별(7) +8 24.04.29 1,667 59 20쪽
248 푸른 별(6) +6 24.04.27 1,759 56 20쪽
247 푸른 별(5) +5 24.04.26 1,619 55 18쪽
246 푸른 별(4) +6 24.04.25 1,683 55 18쪽
245 푸른 별(3) +7 24.04.24 1,649 62 14쪽
244 푸른 별(2) +5 24.04.23 1,709 62 19쪽
243 푸른 별 +5 24.04.22 1,833 58 14쪽
242 약속(2) +8 24.04.20 1,854 55 22쪽
241 약속 +6 24.04.19 1,756 53 16쪽
240 북명(北冥) +7 24.04.18 1,793 60 18쪽
239 그날의 이야기(2) +8 24.04.17 1,757 60 18쪽
238 그날의 이야기 +5 24.04.16 1,771 56 17쪽
237 오랜 약속(2) +5 24.04.15 1,852 58 18쪽
» 오랜 약속 +4 24.04.13 1,950 57 20쪽
235 난세(5) +6 24.04.12 1,870 60 16쪽
234 난세(4) +6 24.04.11 1,864 65 15쪽
233 난세(3) +7 24.04.10 1,882 63 20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