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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살면 일이 몰린다

웹소설 > 일반연재 > 라이트노벨, 판타지

홍휘사자
작품등록일 :
2019.05.11 22:09
최근연재일 :
2019.05.16 09:00
연재수 :
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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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514

작성
19.05.1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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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이계인

DUMMY

간밤에 경비대 소속 치안 1, 2, 3대가 공동으로 수행한 작전은 불법 경매인 바체의 체포다. 최근 불법노예경매가 다시 성해지는 경향이 있었고, 그것을 전문으로 하는 상인도 많아지는 추세였다. 개중 귀족과 부유한 평민을 끌어들이며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것이 바체와 샹그릴이었다.

그 바체를 체포하기 위해 나선 작전에서, 상당수의 인원을 구해내고 샹그릴을 비롯해 조직의 반수 이상을 체포했다. 구해낸 인원들 가운데, 이계인으로 의심되는 소년이 있다. 와서 그 소년을 확인해줬으면 좋겠다.

이 것이 치안대원의 용건이었다. 비나에와 리는 치안대원의 용건을 같이 앉아서 들었다. 리는 어쨌거나 이 가문의 손님이었기 때문이다. 손님이 치안대의 협조요청을 받았는데 주인이 모른척 할 수는 없다며 비나에는 굳이 자리에 합석했다.

치안대원은 다소 불편한 기색이었지만 거절할 명분이 없어서 비나에와 리에게 함께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귀가하기가 무섭게 이런 얘길 듣게 되다니, 리는 다소 짜증스러운 기분이었지만 이계인으로 추정되는 소년이란 소리에 기분을 가다듬었다. 자신의 경우가 몇 세대에 한 번 있을까말까 희귀하다는 걸 안다. 이런 요청에 응답하는 것이 셰어라고 불리는 귀족의 의무다.

“그래서 내게 협조를 요청하는 거군요.”

“예, 그렇습니다, 셰어 리.”

리는 선선히 응했다.

“좋아요. 지금 그 소년은 어디 있습니까?”

치안대원이 환하게 웃었다.

치안대 본부에 오는 게 처음은 아니다. 리는 꽤 오래전이라고 생각하다가 사실 그렇게 오래되지는 않았다는 걸 상기했다. 본부의 현관앞에 미리 대기하고 있었던 사리마를 보면서, 그 때도 마찬가지였지, 같이 있었지 하는 걸 떠올리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득한 옛날 같기만 하다.

리의 뒤를 따라 내리는 비나에를 보고 사리마가 이마를 구겼다.

“뭐야? 비나에. 넌 왜 온 거야?”

“우리 집으로 전갈을 보냈으니까.”

비나에가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셰어 리가 너네 집에 있으니까 그런 거잖아!”

못마땅한 얼굴을 한 채 퉁퉁 부어서 비나에를 구박하던 사리마는 결국 휙 몸을 돌렸다.

“따라오세요, 셰어 리. 그 앤 사무실에 있어요.”

복도를 걷던 사리마가 이윽고 문을 열어 젖히고 안으로 들어섰다.

“셰어 란, 셰어 리예요.”

“어서 오십시오, 셰어 리.”

란이 일어서서 고개를 숙였다. 리도 인사에 답하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멈추고 의례적이나마 미소지으려던 얼굴이 딱 굳었다. 리는 입구에 우두커니 서서 소년을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리의 외모는 꽤 눈에 띈다. 밝고 고른 미색의 피부, 검고 곧은 머리카락, 눈은 크지만 입술도 코도 작아 오목조목하고 굴곡이 없는 얼굴.

사리마는 리의 얼굴과 소년, 융희의 얼굴을 비교하고 그녀를 불러오기로 한 자신의 판단이 맞다고 결론지었다. 융희와 리는 어딘가 흡사했다. 같은 냄새를 풍겼다. 아니 같은 인종임이 분명하다.

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저렇게 융희의 얼굴에서 눈을 못 떼고 있지 않은가. 사리마는 어깨를 으쓱였다. 리의 뒤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비나에가 보였다. 사리마는 한심스러워하며 두어 번 혀를 차고는 리를 불렀다.

“셰어 리!”

리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사리마를 바라보았다. 사리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감한 얼굴. 평소와 다를 것이 없는 얼굴이었다. 평소처럼 리는 표정을 읽기 힘들었다.

하지만 사리마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돌렸다. 아니 평소보다 더 차가웠다. 싸늘하게 얼어붙은 눈빛, 자신을 철저하게 닫아걸고 누구에게 그 무엇도 보여주지 않으려는 눈빛이었다. 쌍꺼풀이 없는데도 큼직한 리의 눈은 반들반들 빛만 도로 비쳐낼 뿐이었고, 사리마는 무서웠다.

“이 소년이 이계에서 온 소년입니까, 어린 키사드.”

리가 냉정하게 경어를 쓰는 건 평소와 마찬가지인데도 사리마는 움찔거렸다. 자신이 말 못할, 어마어마한 잘못을 저지른 듯한 기분에 사리마는 조금 전까지 자신이 적임자를 찾았다는 의기양양했던 자신이 한심스러워졌다.

동시에 사리마는 당장이라도 이 방을 뛰쳐나가고 싶은 짜증을 느꼈다.

“네.”

“왜 그렇게 생각하죠?”

당신과 닮았으니까. 사리마가 그 말을 말할까말까 망설이다 말하려는 찰나에 셰어 란이 말을 가로챘다. 사리마의 입술에서 자신도 모르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 소년이 직접 말합니다.”

셰어 란이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말을 이었다. 리의 시선이 란에게 향했다.

“제대로 말은 못하지만 본인이 직접 여기 사람이 아니라는군요. 세계지도를 그려주었지만 그 지도가 틀리답니다. 융희?”

열중해서 리를 바라보고 있던 융희는 셰어 란을 돌아보았다. 그는 사람을 안심시키는 미소를 지었다.

“아까부터 말했던 사람이 왔습니다.”

“사람?”

어눌하긴 하지만 제대로 내뱉는 발음이었다. 리는 발을 옮겨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사리마의 곁에 섰다. 융희의 탁자 맞은편이었다.

“당신에게 말했던 분입니다. 당신과 마찬가지로 이계에서 오신 분이지요. 혹시 융희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결례를 무릅쓰고 청을 드렸던 것입니다.”

마지막 말은 리를 향한 것이었다.

[당신도?]

리는 그 말을 들은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다음 순간 리는 환하게 웃는 융희의 얼굴과 벌려진 입술을 보고, 기쁨과 의혹이 서린 눈동자를 보고 그것이 환청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직 모국어를 잊어버리지 않았다. 리는 등줄기를 훑는 오한을 무시하며 셰어 란에게 예의바른 웃음을 보였다.

“도움을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저도 우연히 이 세계에 떨어진 사람, 다른 사람이 어떤 세계에서 어떻게 왔는지 모릅니다.”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는 리에게 서글서글한 목소리를 마악 란이 던지려는 순간, 비나에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소년의 신병은 제가 인수하겠습니다.”

리도 란도 사리마까지 놀란 눈으로 비나에를 쳐다보았다. 일동의 시선을 받게 된 비나에는 결심을 내린 듯한 표정을 지으며 셰어 란에게 말했다.

“이제 그 소년의 신병은 공중에 뜨게 되겠죠? 오면서 듣기로는 소년이 보호자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비합법적인 경로를 통해 풀려나게 된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럼 소년은 공식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보호자가 없는 상태가 될 거고, 잘해야 신전으로 가는 거 아닌가요?”

“그건 맞습니다만, 실례지만 누구신지요?”

어쩐지 심상찮은 분위기가 감도는 이 상황에서도 셰어 란은 말투에 장난기를 띄워, 잔뜩 긴장한 비나에에게 미소를 던졌다. 그 시도가 성공한 듯 비나에는 굳었던 표정을 풀고 부끄러운지 뺨에 미미한 홍조를 띠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비나에 가니타입니다.”

가니타 가(家)에 전갈을 넣은 셰어 란이 그를 모를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최근 묘한 소문까지 돌고 있는 형편이다. 물론 물밑으로 도는 소문이지만. 셰어 란은 능숙하게 분위기를 이끌었다.

“아아, 가니타 본가(本家)의 독자셨군요. 그럼, 어린 가니타. 융희를 데려가시겠다는 말씀입니까?”

“네.”

아직까지 말투가 희미하게 떨리지만 이미 비나에는 마음을 굳힌 듯 결정지어 대답했다.

“제가, 또한 가니타가 한 사람도 돌보지 못할 능력은 아닙니다.”

“물론 가니타는 사람의 가문이지요.”

그 말은 가니타 가문이 의례적으로 받는 찬사였다. 수많은 식객을 거느렸던 가문이고, 인맥이 곧 재산인 가문이며, 인재를 무수히 배출하는 가문이기 때문이다. 그 가문의 직계 후손인 비나에가 찬사를 받고 싱긋 웃었다.

“신전으로 간다 해도 신관들이 얼마나 그를 살펴주겠습니까? 가니타가 그를 돌보겠습니다.”

비나에는 무의식적으로 리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지만, 셰어 란과 사리마는 리를 살폈다. 리는 여전히 아무 표정을 짓지 않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얼굴로, 안그래도 리의 편평한 얼굴은 뭔가를 읽어내기가 어려웠다.

그런 얼굴을 해서 더욱 철통같이 자신을 닫아버리고 커다랗게 눈을 채운 검은 홍채를 유리알같이 반짝거리기만 하는 그녀는 존재감을 강하게 과시하면서 사람을 숨막히게 만들었다.

셰어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기타 조서를 꾸미는 데 필요한 진술은 구두로 받은 겁니다.”

“예.”

비나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란은 잠깐 천정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긴 채 말을 꺼냈다.

“어린 가니타. 당신을 무시하려는 건 아닙니다만 당신은 아직 성인이 아닙니다.”

잠깐 항의하려는 비나에를 란은 손을 저어 막았다.

“아, 물론 혼자 결정을 내리기에 부족함 없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이 건은 당신이 그의 보호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가니타 가(家)가 융희를 후원하는 것이죠. 당신은 아직 셰어 가니타가 아닙니다. 셰어 가니타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비나에는 말뜻을 알아들었다. 그건 당연히, 가니타 본가(本家)에만도 숱한 가니타의 성인일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가니타의 가주(家主)이자 비나에의 모친인 마이안 가니타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비나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사람을 보내 동의서를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린 가니타.”

란은 융희에게 고개를 숙여 오랜 시간을 들여 천천히 간단한 말로 설명을 했고, 그 동안 리는 물끄러미 그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란은 최대한 정성스럽게 이해하기 쉽도록 쉬운 단어만 썼다. 그 광경을 보며 비나에는 리의 눈치를 계속 살폈다. 리가 매몰차게 돌아서려는 순간 엉겁결에 자신이 나서긴 했지만 비나에는 자신없었다.

하지만 리는 먼저 등을 돌렸고, 자신과는 관계없다는 듯 비나에를 기다렸다. 밖에 서 있는 리를 보고 비나에는 한숨을 내쉬며 융희에게 손짓했다.

“가죠. 융희라고 했나요?”

멀뚱하게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던 융희는 자신의 이름을 불리자 미소지었다.

[김융희.]

어차피 못 알아듣는다는 걸 안다. 융희는 이름만 말했고, 비나에는 뭔가 자기 이름을 말했다는 걸 알고 마주 웃어주었다.

그렇게 웃으면서 치안대 바깥에 나온 일이 거짓말같이, 비나에는 침묵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처음 마차에 탔을 때 자신을 가리키며 비나에, 비나에 가니타라고 소개해주고 리의 이름을 가르쳐주자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순서가 지나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건 융희도 마찬가지였다. 말을 전혀 모르니 뭔가 물어볼 수도 없었다. 짤막한 아는 단어라도 꺼내볼까 했지만 워낙 분위기가 무거웠다. 비나에의 표정도 계속 어두웠고, 융희가 뭔가 말해볼 분위기가 전혀 되지 않았다. 자신을 데려가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불안해진 융희였지만 어차피 이리저리 끌려다녔던 처지다. 그나마 그동안의 처지 중에서 가장 나은 곳으로 가게 된다는 눈치는 채고 있었다.

융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에게 걸쳐준 에스라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리가 손을 들었다. 마차에 올라탄 후 처음으로 움직인 것이다. 비나에도 융희도 리의 손에 바짝 긴장했다. 리가 마차안의 줄을 한 번 당겼다. 딸랑, 종이 울린다. 마차가 멈췄다.

“먼저 가세요, 비나에.”

“리는요?”

비나에는 자신이 매달리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는 걸 깨달았지만 부끄러워할 틈도 없었다. 리가 성큼 마차에서 이미 내렸다.

“셰어 리!”

“저는 나중에 들어가겠습니다. 내일.”

리가 고개를 들어 달을 살피고 말을 고쳤다.

“아침식사 전까지는 들어가지요.”

더 이상 말도 못 붙이게 리는 탁 문을 닫아버렸다. 비나에는 한숨을 쉬면서 줄을 당겨 마차를 출발시켰다. 저렇게 고집스러운 리는 어떻게 해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비나에는 옆에 앉아있는 소년, 융희를 쳐다보았다.

리의 고향에서 온 것이 분명하다. 비나에는 그렇게 확신했다. 그 때 보였던 표정과 그 기색. 게다가 이렇게나 비슷한 얼굴. 피부색도 매끄러워보이는 게 비슷하고, 아까 이 소년이 뭐라 말한 것도 알아듣지만 모르는 척하는 거다. 하지만 왜 같은 고향에서 온 사람을 싫어할까.

비나에는 잠시 이해할 수 없었지만 원래 리는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다. 그렇게 단정짓고 어떻게든 소년을 집에 데려가기로 마음먹은 비나에였다. 어머니에게 허락을 받는 건 일도 아니었다. 비나에가 끌어안은 가장 큰 고민은 어머니가 아니라 눈앞에 있었다. 대체 이 소년한테 뭐라고 말해야 될까. 말도 모르는데.

비나에는 난처하게 웃었다. 융희도 물끄럼 마주보고 웃었다.

두 사람은 웃는 거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상자마차가 새벽나루를 떠나 포석을 울리며 달려간다. 리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완전히 새벽나루를 벗어나는 걸 확인하고 몸을 돌렸다. 이 시간, 이미 한 밤중도 지나 새벽으로 가고 있는 시간에도 문을 열고 있는 술집은 한두 군데가 아니다.

당당하게 불을 켜고 있을 리는 없지만 리는 새벽나루의 뒷골목 지리는 꿰뚫고 있었다. 마차에서 내렸을 때부터, 몸을 돌려 발을 내디뎠을 때부터 곳곳에서 찌르는 듯한 시선이 느껴져온다. 리는 희미하게 웃으며 태연하게 걸었다.

한 번 골목을 돌자 시선들이 몇몇 사라졌다. 간판도 없이, 그저 벽에 현관도 없이 덜렁 붙어있는 문짝은 홍수 때 잠겼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물에 절반가량이 잠겨 있었던 문은 그 부분이 퉁퉁 그대로 불어 있었고, 때문에 아귀가 들어맞지 않는다. 녹슨 경첩에 기름을 치긴 했지만 이 집의 게을러터진 주인은 문을 갈아칠 생각조차 않는다. 리는 그 문을 삐그덕 열고 안의 계단을 올랐다.

“리?”

리는 대답대신 씩 웃어보였다. 안에 있던 주인은 꼬고 있던 다리를 풀며 손을 들었다.

“오랜만이군.”

궐련을 문 채 잔을 나르고 있던 청년이 이쪽을 돌아본다. 창문을 약간 열어놓긴 했지만 바람도 불지 않는 새벽, 환기가 전혀 되지 않아 안은 담배연기로 가득했다.

“술 받으러 왔어.”

“얼마나 줄까?”

“두 병.”

“잔은?”

리는 잠깐 생각했다. 주인이 나무를 깎아 만든 자그마한 잔을 내준다. 리는 잠자코 술병과 잔을 받아들었다. 호리병은 출렁출렁 무거웠다.

“자주 오지는 말라고.”

그 말에 리는 말없이 손을 들어 보이고 도로 술집을 나섰다. 술집을 나오자 시선들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었다. 리는 주인이 내주었던 통 안에 병과 잔들을 담은 채 계속 걸었다. 한 사람만이 간신히 통과할 듯 좁은 골목길을 구불구불 따라간다.

이따금 부츠의 감촉이 이상했지만, 바닥에 뭔가 수상한 것이 있는 듯 물컹한 감촉도 왔지만 리는 상관않고 걸었다. 발소리가 울린다. 이 골목길은 포석도 깔리지 않았다. 그저 다져진 흙바닥일 뿐. 그 바닥에 부츠가 삭삭 스치는 소리만이 울린다.

누구도 따라오지 않는다. 이 새벽, 선연한 달빛, 차갑고 싸늘한 공기, 리는 완전히 혼자였다. 리의 머리위로 무수한 창문들이 김을 피웠지만 어떤 것도 열려 있지 않았다. 리는 걸음을 재촉했다. 점점 리의 걸음이 빨라졌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리는 견딜 수 없는 심정으로 문고리에 손을 뻗었다.

리가 손을 멈춘 것은 목에 축축한 것이 흘러내렸기 때문이었다. 어느 틈엔가 얼굴과 목이 눈물로 뒤범벅이었다. 목 근처의 옷깃이 젖어 있었다. 리는 끝내 문고리를 잡지 못하고 손을 거두었다.

이 집 안에, 라우렌이 있다. 2층의 침대에서 잠들어있을 것이다. 문을 두들기면 자다가 일어나, 무뚝뚝한 얼굴로 리를 맞이할 것이다. 두터운 담요를 던져주고 불이 꺼져갈 난로를 높이고, 뭐라도 꺼내어 리가 가져온 술의 안주로 삼을 것이다. 말없이 리와 술을 나누고 빈 침대를 데울 것이다. 리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볏짚이 깔려 있었다. 말없이 떨리는 손을 들어 잔을 들고, 술병을 기울였다.

라우렌.

리는 목소리로 나오지 않는 말을 중얼거렸다. 술잔을 비워도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백화주 빚는 솜씨는 일품이다. 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건만 향기만은 더없이 그윽하다. 그러나 술기운이 짜르르 올라오기만 할 뿐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라우렌.

리는 다시 중얼거리고 술잔을 비웠다. 소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융희, 라던 이름도 떠올랐다. 그것밖에 모른다. 그 뿐이다.

자신은 라우렌을 찾아온 것이 아니다. 리는 또다시 술잔을 채웠다.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리는 자신이 왜 이렇게 눈물을 끊임없이 흘리는지, 무엇 때문에 이렇게 가슴이 먹먹한지 설명할 길이 없었다. 왜 갑자기, 한동안 찾지 않았던 라우렌을 찾아왔는지도 말할 수가 없었다.

입밖으로 흘러나올 것만 같은 오열을 리는 술로 막았다. 메어오는 목을 술이 타고 흘러내려간다. 리는 고개를 들었다. 머리가 너무나 무거웠지만 리는 버텼다.

절대 고개를 숙이지 않겠다고, 힘없이 굴복하지만은 않겠다고 입술을 짓씹어댔지.

이곳, 새벽나루에서, 이 땅에서, 내가 죽어갔던 이 땅에서, 내가 피흘렸던 이 땅에서, 간신히 벗어난 이 땅에서 나는, 나는 내가 잃어버린 걸 보았다. 나는 여기서 몇 년을 보냈다. 나는 그 몇 년이 내가 떠나온 고향의 몇 년과 같은 시간인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여기서 지내온 시간이 얼마나 됐는지도 모른다.

리는 병이 빈 것을 확인하고 한숨을 토했다. 내뱉는 숨결이 흔들렸다. 술냄새가 진했다. 리는 일어서서 엉덩이에 붙은 볏짚을 툭툭 털었다. 눈도 뜨겁고 얼굴과 목이 척척했다. 손을 대강 에스라에 닦아내며 리는 술병과 잔을 챙겨 가지런히 놓아두었다. 놔두면 알아서 라우렌이 마시고 돌려줄 것이다.

흔들리는 숨을 천천히 고른 뒤 리는 등을 곧게 폈다. 이제 눈물이 완전히 멎었다. 동이 터 오고 있었다.

리는 정확하게 말을 지켰다. 비나에는 아침 식탁에서 리를 쳐다보았다. 들어온 리에게서는 술냄새가 풍겼다.

“술 마시고 왔어요, 리?”

“냄새납니까?”

전혀 모르겠다는 듯 입앞에 손바닥을 펼치고 숨을 뱉어 냄새를 맡는다.

“네, 무척.”

비나에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리는 말없이 우묵한 그릇에 담긴 스프를 숟가락으로 퍼올렸다. 빨간 수프에서 김이 모락모락 난다. 당근을 흐물흐물하도록 끓여낸 수프는 맛있었다. 안주도 없이 급하게 술을 마셔댄 속을 달래주는 효과도 있었다. 먹고 있는 리를 쳐다보던 비나에가 질린 표정을 했다.

“안 뜨거워요?”

“별로.”

그렇게 태연히 이걸 먹다니. 비나에는 한숨을 쉬고는 숟가락을 후후 불어 먹기 시작했다. 자그마한 식탁에 달랑 둘이서만 먹는 식사다. 리의 시중을 드는 베다니가 들락거릴 뿐, 리의 거처는 조용했다.

“융희는 지금 자고 있어요.”

조금전까지만 해도 평소와 같이, 말은 없어도 온화하던 사람이 돌연 냉랭한 기색으로 비나에를 쏘아보았다. 누가 물어봤느냐, 비나에는 이 사람이 말할 리가 없는 환청을 들으면서 난감하게 미소지었다.

“여기서도 긴장했었나 봐요. 어제 들어와서 밥 먹고 자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무섭게 노려보지 말아요, 리.”

리가 눈을 내려깔고는 수프그릇을 마저 비웠다. 비나에는 이제 겨우 반만 먹었을 뿐이지만 원래 그의 평소 식사량은 적었다. 더구나 비나에는 당근을 싫어한다. 이정도 먹은 것만도 리 앞이기 때문이었다. 베다니는 씨익 번지는 웃음을 감추며 그릇을 치우고 차를 내왔다.

팔팔 끓인 물을 포트에 붓는다. 포트안에 가라앉아있던 찻잎이 위로 떠올라 포트 안을 빙글빙글 맴돈다. 향기가 피어올라 그윽하게 퍼졌다. 색이 우아하게 퍼져나가고, 포트는 붉게 물들었다.

베다니는 과자가 아니라 따끈하게 부풀어오른 빵을 내놓았다. 비나에는 주먹보다 작은 빵을 반으로 찢어 안에 버터를 발랐다. 폭신폭신하고 뜨거운 빵이다. 버터가 금방 녹아 스며들었다. 사과쨈을 발라 먹고 있는 리를 바라보던 비나에가 빵의 향기를 한 번 들이키고, 천천히 빵을 베어 물었다.

아무리 해도 그를 놓칠 수는 없다.

도착했을 때에는 밤이 깊었다. 하지만 분명히 먹은 것도 제대로 없을 테고, 집에 온 손님을 아무것도 먹이지 않고 재우는 접대라는 건 적어도 가니타 가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호렌은 베테랑 집사다.

한밤중에 갑자기 데려왔지만, 요리사도 잠들어있는 시간에 능숙하게 제대로 된 요리를 만들어오고 잠자리까지 돌봐주면서 조금의 놀람도 보이지 않는 사람이다.

손님접대가 1년 내내 끊이지 않는 가문에서 20년 근무하면 누구라도 그렇게 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호렌의 접대는 밤이든 낮이든 다를 바 하나 없었고 때문에 왜 융희가 갑자기 놀라는지 알 수 없었다.

놀랐다기보다는 신기한 표정을 지었고, 제대로 못하는 말로 물어보았다.

“저것, 뭐? 모르는 거? 난 모르는 거? 난 모르는 거야. 저건 뭐지?”

똑같은 단어를 반복하며 간신히 제대로 된 문장을 구사해내고 융희는 뿌듯해하고 있었다. 비나에는 뭘 말하는지 모르다가 호렌의 말을 듣고서야 알았다.

“아무래도 손님은 이것을 신기하게 보시는 듯합니다.”

호렌이 방금 구사했던 마법을 손으로 펼쳤다. 비나에에겐 너무나 익숙한 빛, 호렌의 갈색을 퍼뜩퍼뜩 뿜는 흰 빛이 호렌의 가슴께에서 떠올랐다. 침대의 온도를 높이는 술식을 구현하고 사그라들다가 완전히 사라졌다. 융희는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로 해줄 방법이 없어서 비나에는 난감하게 웃어보이기만 할 뿐이었고, 그 표정을 읽은 융희도 머리를 긁다가 순순히 잠들었다. 돌아서서 나오는 길, 자신의 방에서 비나에는 뜨거운 홍차를 호렌에게 주문했다. 잠을 잘 수 없을 거라고 우려하는 걸 손을 흔들어서 치워버리고, 홍차를 마시면서 생각에 잠겼다.

비나에가 리를 처음 보았을 때, 리는 이미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카이스릴이 그녀를 데리고 왔을 때에도 그렇게 소개했다.

이계인이 새벽나루에서 실력을 썩히는 게 안타까웠다- 라고. 리는 파드 학원의 그 깐깐한 학원장과 이사장, 이사들, 교수들을 만족시켰고 학회에 진입할 정도의 실력이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단 한번도 생각을 못했다. 마법이 없는 세상에서 왔을 거라고는 단 한 번도.

그러니까 그, 융희를 놓칠 수는 없다. 비나에는 다 식어버린 홍차를 마저 마시면서 다짐했다.

“비나에 님, 이대로라면 늦을 겁니다.”

베다니가 챙겨주는 에스라를 입으며 리가 말했다. 이미 의장을 다 갖추고 있던 비나에는 다급하게 일어났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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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살면 일이 몰린다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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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사망자 19.05.16 15 0 24쪽
5 귀찮은 치안대 19.05.15 15 0 21쪽
4 붉은 반점 19.05.14 17 0 25쪽
3 일단은 말부터 19.05.13 20 0 18쪽
» 이계인 19.05.12 27 0 23쪽
1 노예 경매 19.05.11 55 0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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