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성전은 이제 끝났다. 1-1 >
리처드는 자신의 수하들을 모으고 의견을 물었다. 아무래도 수뇌부들과 회의 전에 자기 생각부터 정리하려는 게 분명했다.
"이제 야파를 점령했다. 이곳에 머문 지 한 달, 성벽도 보수했고 곧 아크레와 티레에서 사람들도 넘어올 것이야."
지도를 펼쳐놓고 얘기를 던지는 이유는 명확했다. 이겼으니 다음에 이길 곳을 찾는 것이다.
류는 지도를 보아 십자군이 세력을 넓힌 곳을 찾아봤다. 나사렛 지방은 탈환해서 성채를 보강하고 있어 든든한 벽이 될 것이다.
발리앙의 영지, 나블루스는 나사렛의 아래쪽인데 살라흐앗딘의 배려인지 공격받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든지 공격을 받을만한 곳이라 이곳도 성채를 보강하고 있었다.
그다음 치고 들어간 선발대가 하데라와 네타냐를 점령했다.
네타냐는 예루살렘에서 구십여 킬로 정도 떨어진 곳. 다시 성스러운 도시가 눈앞에 다가왔다. 사실 아스푸르에서 대패한 살라흐앗딘이 견제를 포기하고 물러난 덕분이기는 했다.
"결국 둘 중 하나 아닌가요? 예루살렘이냐? 아니냐?"
한참을 지도를 보던 류가 편안하게 얘기를 꺼냈다. 이런 데서 격식이나 차리는 왕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렇지. 영주들은 어서 예루살렘을 탈환하자고 목을 매고 있고 말이야."
"그런데도 저희에게 물어보시는 건 왕께서도 힘들다는 걸 아시는 거 아닙니까?"
정곡을 찌르는 말에 리처드의 얼굴은 굳어졌고, 뒤에 한발 물러선 랜포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바보 덩치들인 윌리엄과 제임스만이 고개를 갸우뚱거릴 뿐이다.
"그래, 지금까지 상대보다 적은 수라도 싸울만했던 건 보급이 해결된 덕분이지. 하지만 예루살렘은 내륙으로 오십 킬로 이상 들어가 있는 땅이다."
"맞습니다. 땅 안에 있는 외딴 섬이죠. 저희는 그런 곳을 포위해야 합니다. 아크레에서 이 년 동안이나 안팎으로 적을 맞아 싸웠듯이 싸워야 합니다. 이번엔 보급도 없이요."
"힘들겠지?"
류는 고개를 끄덕였고 랜포트도 양팔을 서로 팔짱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영주들에게 인제 그만하자고 할 수는 없잖아."
"왕께서는 처음 출진할 때 계획이 있으셨을 거 아닙니까? 저희에게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류의 물음에 리처드는 머뭇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걸 본 랜포트가 조용히 입을 열어 리처드의 가슴을 후벼팠다.
"사실, 왕께서도 이리 잘 이길지 모르셨겠지. 너무 잘 이기셔서 뒷생각은 안 하시고 달려온 거겠지."
리처드는 민망하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더니 창가로 가서 뒷짐을 지고 말았다.
맙소사.
***
류와 랜포트가 지도를 놓고 마주 앉았다. 원래 왕이란 이런 것이었다는 듯이 멀찍이 떨어진 리처드가 창가에 걸터앉아 다리를 흔들거렸다.
점점 빨라지는 다리가 어서 답을 내놓으라는 듯이 재촉하기 시작했다.
"정신 사납습니다. 전하."
한마디들은 리처드의 다리는 다시 느려졌다.
"난 이곳의 지형은 잘 몰라. 그래도 말이야. 이곳 예루살렘도 분명 목줄이 있을 거야. 그렇지 않나?"
랜포트의 물음에 류는 손으로 지도 한편을 가리켰다. 아스칼론. 네타냐에서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백여 킬로 떨어진 곳이다.
"여기가 예루살렘과 이집트를 잇는 항구도시야. 아스칼론. 여길 점령하면 적들의 증원을 막을 수 있어. 오랜 시간이 걸려 사막을 가로질러 와야 하니 많은 수를 동원하기 힘들겠지."
"여기가 목줄이다. 그런 건가?"
유심히 주변을 둘러보는 랜포트의 눈이 매서웠다. 류는 아는 몇 가지를 덧붙여 설명했다.
"게다가 우리가 썼던 전법을 계속 쓸 수 있지. 함대가 동행하는 거 말이야. 그래서 여길 튼튼히 쥐어놓고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거야. 하지만······."
"하지만?"
"이렇게 우리도 뻔히 아는 사실을 적들이 모를까? 게다가 가장 큰 문제점이 있어."
"그래, 우린 숫자가 적지."
"맞아. 예루살렘에 처박힌 살라흐앗딘의 군대는 소문으로는 오만이래. 그런데 우리는? 기껏해야 만오천이나 동원할까? 동원하다가 아스칼론이나 야파를 뺏기면? 회군해야 할 거야. 해안에서 떨어진 영토를 집어삼키기에는 우리 역량이 너무 적어."
류는 심각하게 설명을 했고 랜포트는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하지만 뾰족한 수가 없는 문제였으니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심각한 둘의 뒤로 조그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윌리엄, 제임스···. 사냥이나 갈까? 요즘 뻐근하지 않아?"
"에이, 여기 뭐 사냥감이나 있겠어요? 전 빠지렵니다."
"그냥 달리자는 거지. 윌리엄. 너는?"
"예···. 예. 저라도 함께 해야죠."
랜포트의 잔소리가 한참이나 왕과 동료를 힐난했고, 둘은 풀죽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며 딴청을 부렸다. 하지만 랜포트는 그러거나 말거나 쓴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결국 이어진 회의에서 아스칼론을 점령한 후 최대한 협상하는 쪽으로 방향을 끌고 가기로 결정 내렸다. 그때쯤에 유럽에서 다시 십자군이 증원된다면 예루살렘을 공격하기로 말이다.
'이제 예루살렘이 눈앞이다. 마지막 신의 병사가 되어라.'
이렇게 유럽 전역에다가 교황과 리처드의 이름을 빌려 소문을 내고 병사를 더욱 모으려는 것이었다.
"자···. 윌리엄. 가자. 히스테리 가득한 여자 품에서 벗어나서 우리는 자유를 되찾자."
리처드의 투덜거림을 마지막으로 정신없던 회의는 끝났다. 하지만 방을 나서는 둘에게 랜포트의 히스테리는 멈추지 않았다.
"병사들 대동하십시오. 귀찮다고 하지 마시고!"
"쳇···."
***
한참을 말을 몰고 사냥감을 찾아다니던 리처드와 윌리엄은 커다란 나무 그늘에 누워 쉬고 있었다.
"젠장, 제임스 녀석 말대로 그림자도 안 보이네."
"저야. 전하께서 가자고 하셔서 왔을 뿐. 희생양일 뿐입니다."
"쳇, 기분 좋아서 앞서 달리던 녀석이 이제는 딴소리냐?"
"착각하신 겁니다. 저 아닙니다."
둘은 땀에 젖었던 몸이 시원한 바람에 식어가자 즐겁다는 듯이 얘기를 주고받았다. 서로 면박을 주기에 바빴지만 중간중간 키득거리며 즐겁기 그지없었나 보다.
"아스칼론. 거기로 가실 건가요?"
"영주들이 반대하겠지. 나 혼자 쳐들어가기도 그렇고 말이야. 그래도 얘기해봐야지."
"지쳐서 힘들 겁니다. 대부분 이년이 넘었어요. 영지로 얼마나들 돌아가고 싶겠습니까?"
"왜? 너도 돌아가고 싶어?"
"쳇, 아직도 모르십니까? 우리가 여기에 왜 왔는지. 랜포트 녀석은 사귀던 여자가 문란하다는 얘기로 파혼한 후에 낙도 없던 녀석이고. 제임스 녀석은 말할 거도 없지요. 사창가의 모든 여자가 제 애인인 바람둥이인 데다가······. 저도 뭐 반쪽짜리 취급이었는데요."
"그러니 성도 탈환이라는 좋은 일을 하면 말이야. 축복이라도 내려주시지 않겠니?"
"풋······. 아. 죄송합니다."
잠시 웃음을 참지 못하던 윌리엄은 사과한 후 말을 이었다. 평소와 달리 진지한 표정이 어울리지 않았지만 조곤히 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전하, 당신이 있어서 왔을 뿐입니다. 저희는 다른 이유가 없어요. 전하 곁에 있고 싶어서 그런 것일 뿐. 솔직히 저희는 믿음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녀석들입니다."
리처드는 조금 감동했다는 듯이 아무 말 없이 먼 곳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쑥스러워하던 윌리엄이 그만 됐다고 얘기하려고 했다.
"저거 뭐야?"
리처드의 말에 고개를 돌려 먼 곳을 바라본 윌리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사라센의 정찰대였다. 숫자가 적지 않았다. 적어도 오백은 되는 숫자.
부근에서 본 적 없는 숫자였다. 요즈음 주변에서 무슬림을 본 적이 없어 너무 안일하게 생각한 것인가? 리처드와 윌리엄이 재빨리 말에 올라탔다. 맞서 싸우기에는 너무 부족한 무장이다. 갑옷을 걸치지도 않았고 전투용도 아닌 가벼운 사냥용 창이 하나. 사냥감의 목을 끊을 단도 한 자루.
도망쳐야 한다.
녀석들이 조금이라도 늦게 알아챘으면 했지만 이미 넓게 벌리며 포위하듯 다가오는 걸 보니 이미 그른 일이었다.
"전하, 이제 제가 약속을 지킬 때인가 봅니다. 어서 돌아가셔서 아군을 데려오소서."
"무···. 무슨 소리냐?"
"언젠가는 전하의 목숨 한번 구해보겠다고 약조했잖습니까? 이제는 지켜야죠."
말을 마친 윌리엄은 박차를 가하며 적들 사이를 헤집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커다란 목소리로 윌리엄은 외쳤다. 몇 알지도 못하는 아랍어를 말이다.
"내가 말릭이다! 내가 영국의 말릭이다! 내가 사자왕이다."
아랍어로 왕이라는 말과 함께 갑작스레 달려든 사내는 적들의 이목을 끌 만했다. 리처드가 말을 돌려 달아나는 사이에 윌리엄은 계속 시간을 끌다가 최후를 준비했다.
하지만 왕이라는 몸값에 눈이 먼 그들은 리처드는 내버려 두고, 윌리엄을 포박해 재빨리 사라져갔다. 그들도 주변에 왕을 호위할 기사들이 있을 거라 걱정한 것이었다.
윌리엄 드 프레오, 체스터 백작의 말썽꾸러기 막내아들. 그는 약속을 지켰다.
- 작가의말
오늘도 보실만하면 좋겠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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