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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자(話者) 님의 서재입니다.

무사, 기사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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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화자(話者)
작품등록일 :
2018.04.09 10:01
최근연재일 :
2018.10.11 15:10
연재수 :
210 회
조회수 :
1,085,165
추천수 :
23,051
글자수 :
904,559

작성
18.10.11 14:30
조회
1,933
추천
67
글자
10쪽

< #17. 성전은 이제 끝났다. 6-1 >

DUMMY

하늘의 구름은 참 아름답다.


바람결에 휘날려 이리 모였다가 저리로 사라지는 모습이 잔망스럽기도 기품있기도 했다.


기분 좋은 구경을 하는 류의 눈에 커다란 얼굴이 들이밀어 졌다.


"괜찮으냐?"


"......."


뭐라 말하기 모호했다. 아니 입이 고통에 열리지 않았다. 한참을 견디다 겨우 힘을 모아 투덜거렸다.


"몇 군데 부러진 거 같습니다."


"그러면 됐지. 뭐."


리처드는 손을 내밀어 류의 손을 맞잡았다. 그러자 류의 몸이 벌컥 들려 일으켜 세워졌다. 주변의 환호가 귀를 멍하게 했다. 병사들은 사자와 류의 이름을 연호했다.


결투의 순간이 제대로 생각나지 않았다. 무아지경이었다. 날아오는 창을 막고 흘려내며 빈틈을 노리고 힘을 주었다 뺐다가. 순간순간의 동작만이 기억났다.


원 없이 가진 모든 수를 펼쳐보았다. 씁쓸했다. 병사들의 수군거림에 류의 이름이 계속 오르지만 결국 졌다.


"이봐. 손 좀 들어서 흔들어봐. 졌다고 토라지면 계집이다."


갑작스러운 말에 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껄껄거리다가 갈비뼈가 욱신거려 허리를 굽혔다. 하지만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머리 다친 거 아니지?"


뜬금없이 묻는 리처드의 말투에 걱정이 담겨있었다.


“아니요. 머릿속에 있던 악마가 사라졌습니다.”


류는 해맑게 웃었다. 리처드는 류의 말을 알아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계속 친구인 거냐?”


“그럼요. 나의 왕이시여.”


“쳇······.”


류의 말에 리처드는 뾰로통한 표정을 짓더니 류의 어깨를 위협적으로 주무르며 얘기했다.


“내가 두 살이 많지 않더냐? 그냥 형이라고 불러라. 아니면 왕이라고 하지 말고 주인님이라고 부르던가. 이 노예 자식아. 평생 부려먹을 테다.”


자신이 말하고도 어처구니없던지 웃는다. 참 속이 드러나는 인물이다. 너무 좋았다. 류는 고개를 마주 끄덕이며 웃을 뿐이었다. 한동안 벌어졌던 난장판이 정리되며 모두 집으로 돌아갈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리처드는 자신의 천막으로 사라졌다.


잔뜩 화가 난 표정의 랜포트가 뚜벅뚜벅 걸어 류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분명 왕도 어찌할 줄 모르는 잔소리가 시작될 것이다.


“네 녀석.”


“미안해.”


“잘했다.”


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더니 랜포트는 자기가 봤던 것을 주변을 살피며 조용히 얘기했다.


“네 녀석이 이겼다. 진짜 창이라면. 먼저 리처드의 옆구리에 꽂혔어.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했겠지만.”


“어···. 그래?”


“우쭐할 건 없어. 넌 목숨을 걸고 덤볐고. 왕은 장난이었으니까. 그러니 감사하는 마음으로 모셔라.”


랜포트는 그리 말하고는 리처드의 천막으로 걸어갔다. 류는 몰랐지만 분명 리처드의 옆구리에는 커다란 멍이 들었을 것이다. 그걸 감싸주려 한 것이다. 어쨌든 류는 살며시 새어 나오는 입김을 들이켜며 정신을 차렸다.


이제는 다시 집으로 돌아갈 때였다.



***



사내아이였다. 집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연이는 아이를 낳았다. 아이를 받아내던 나이든 하녀는 빙긋 웃으며 아이를 류의 품에 안겼다.


류는 아이의 얼굴이 낯설었다. 쪼글쪼글한 얼굴이 원숭이 같았다. 당황한 류에게 연이는 눈을 흘겼다.


“고생했어.”


류는 서른셋이라는 나이에 첫 아이를 낳아준 연이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더불어 미안했다. 어찌 보면 너무 늦은 나이에 결혼한 것도. 전쟁터에서 나날을 보낸 것도. 모두 미안했다.


“너무 늦게 고생했네. 미안해.”


땀에 젖은 연이의 얼굴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영주님, 무슨 말씀이신가요? 마님을 보세요. 아이 같지 않습니까? 나이를 가늠 못 할 정도라니까요. 저 피부가 반들거리는 거 보세요. 어찌 아이의 어머니라고 누가 생각할까요?“


하녀는 아직도 고려 사람이 어려 보이는 걸 모르나 보다. 퍽퍽한 피부와 주름살이 이십 대 초반부터 생겨버리는 그네들에겐 우리는 나이 먹지 않는 요정 같은 사람들인가보다. 그냥 웃었다.


연이는 하녀의 말에 수줍다는 듯이 얼굴을 붉혔다.


”아이의 이름은요?“


”형의 이름을 따자. 이쪽에서는 그리도 많이 한다고 하니 말이야. 아, 아버지에게 여쭤봐야 하나?“


그때 문밖에 있던 아버지가 수척한 모습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얼굴에는 기쁨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류의 말에 연이는 웃었고 들어서는 아버지도 웃고 있었다.


”내가 나이 먹어서 할 게 뭐가 있었겠냐? 네 녀석이 비어버리면 연이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그때 이름 얘기도 많이 나왔었고. 우리도 겸이 이름을 땄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했어.“


”그러면 겸이입니다. 김겸. 형님이 하늘에서 지켜줄 겁니다. 형보다 더 강한 사내가 될 겁니다.“


류는 아이를 치켜들고 웃으며 외쳤다. 놀란 아이는 얼굴을 찡그리며 빼애액 울어 재꼈다. 힘 있는 울음이라며 하녀가 자랑스러워하며 웃었다. 즐거운 날이었다.



***



아버지에게는 겸이가 마지막 소원이었나보다.


모든 소원을 이뤘으니 삶의 끈을 붙잡을 힘이 없었나 보다.


부쩍 수척해지던 아버지는 병치레가 잦아졌다. 아니 폐병은 달고 살았으니 다른 병마까지 괴롭히기 시작했다고 해야 하나?


마지막으로 숨을 몰아쉬며 아버지는 얘기했었다.


”그래도 겸이에게 활 쥐는 법이라도 가르쳐야 할 텐데······.“


자신도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넋두리처럼 읊조리며 겨울밤 눈을 감았다. 조용한 죽음이었고 고통 없이 마지막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다.



***



아버지의 죽음 이후, 일주일이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벽난로의 앞에 류는 눈을 감고 따뜻함을 느끼고 있었다. 팔에는 겸이를 안았고 곁의 의자에는 연이가 노곤한 표정으로 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얕은 잠에 빠져있었다.


갑자기 외성 문 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본능적으로 일어선 류는 팔에 안았던 겸이를 연이에게 넘겨주고는 검을 들었다.


저벅거리며 복도를 지나쳐 걸어가는 류의 옆으로 로저와 견습기사, 병사들이 분주하게 따라붙었다.


류가 도착하기도 전에 성문이 열리고 있었다. 류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성주의 명이 없이도 문이 열리다니. 보나 마나다.


류는 무릎을 꿇었고, 기사들과 병사들도 무릎을 꿇었다.


”지나가다 들렀다.“


두꺼운 가죽 코트를 걸친 리처드가 말 위에서 웃으며 얘기했다. 뒤에는 구시렁대는 윌리엄이 보였다. 귀빈이 오셨으니 분주히 식사와 마실 것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리처드는 바로 전에까지 류가 차지했던 의자에 걸터앉아 몸을 녹였다. 윌리엄은 자리가 없나 살펴보다가 눈치를 보며 가죽깔개 위에 털썩 주저앉아 손을 녹이기 시작했다.


”전하, 이 누추한 곳까지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누추하기는···. 좋은 곳이라고 줬는데 불만이 많은가 보군. 불만이 있으면 말해보라고 에브뢰 남작 나리. 남작 부인! 류가 내 험담을 하지는 않소? 그 잠자리에서는 이리저리 말이 많아지는 게 남자 아닌가요?“


”그런 일 없습니다. 전하. 제 남편의 충성심은 한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쳇, 받아줘야 재미가 있는데. 남작 부인도 재미가 없군요. 대신 류가 괴롭히거나 말썽을 부리면 얘기하시오. 내가 군대를 끌고 올 테니.“


리처드의 말에 연이는 참지 못하고 입을 가리고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보고 싶었다는 듯이 그제야 리처드도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로 야밤에······.“


류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리처드는 좀 쉬게 해달라는 말로 말을 마무리했다. 피곤해 보이는 왕을 배려해 따뜻한 방에 모시고 편히 쉴 수 있게 배려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윌리엄은 여전히 구시렁댔다.




***




다음날, 리처드는 아버지의 묘소를 찾아와 묘비를 어루만지다가 잠시 고개를 숙여 기도를 올렸다.


”류, 말에 올라라.“


윌리엄이 가져온 말에 훌쩍 올라탄 리처드가 그리 말하고는 달렸다. 곧이어 정신 차릴 새도 없이 윌리엄도 달려나갔다. 그들을 쫓아 류도 숨 가쁘게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기병들이 급하게 쫓아도 저 멀리 떼어내고는 세 사내는 하염없이 말을 달렸다.


몇 시간을 달려 강을 건너고, 나무다리를 건넜다. 작은 돌산을 돌았고 눈이 가득 쌓인 경작지를 가로질렀다.


에브뢰 영지를 조금 벗어난 곳이었다. 리처드는 손을 가리켜 산 위를 가리켰다. 눈발이 휘날리는 높은 산 위에 커다란 돌벽이 올라서고 있었다.


”샤토 가이야르다. 이 년 동안 내가 가진 돈을 몽땅 부어서 만든 성이야. 외성과 내성 두 개고, 모두 해자를 이중으로 가졌다. 올라서는 길목은 든든한 석재 망루의 화망 안에 들어온다. 열 배, 아니 스무 배의 병력이 와도 막을 수 있다.“


”네. 그런데요?“


”네 것이다. 더불어, 에브뢰에서 여기까지 모두 너의 땅이다. 에브뢰 남작. 그러면 봄이 되면 보자꾸나.“


할 말을 했다는 듯이 리처드는 말을 돌려 자신의 영지를 향해 달려갔다. 그 모습을 보던 윌리엄은 한숨을 쉬며 류에게 말을 더했다.


”류, 아니 에브뢰 남작님. 전하께서 아버님의 부고를 들으시자마자 바로 달려오신 거네. 저렇게밖에 표현 못 하는 거 알지?“


류의 눈가에 갑자기 눈물이 솟구쳤다. 윌리엄은 자신도 안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말을 돌렸다.


”저 성, 노리던 사람이 많았어. 난공불락이야. 너에게 맡기는 이유는 너를 믿는다는 얘기다. 어쨌든 부러워.“


윌리엄은 말을 달려 리처드의 뒤를 따랐고, 류는 잠시 말에 내려 눈밭 위에서 리처드를 향해 절을 올렸다. 멀리 사라져버린 왕을 바라보던 류는 눈을 돌렸다.


하늘 위의 성이다. 이 성은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요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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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 < #17. 성전은 이제 끝났다. 6-2 > +12 18.10.11 2,585 65 9쪽
» < #17. 성전은 이제 끝났다. 6-1 > +12 18.10.11 1,934 67 10쪽
206 < #17. 성전은 이제 끝났다. 5-2 > +10 18.10.11 1,896 62 9쪽
205 < #17. 성전은 이제 끝났다. 5-1 > +16 18.10.08 2,078 67 11쪽
204 < #17. 성전은 이제 끝났다. 4-2 > +21 18.10.07 2,108 69 10쪽
203 < #17. 성전은 이제 끝났다. 4-1 > +9 18.10.06 2,091 60 11쪽
202 < #17. 성전은 이제 끝났다. 3-2> +10 18.10.05 2,108 69 10쪽
201 < #17. 성전은 이제 끝났다. 3-1> +8 18.10.04 2,085 64 10쪽
200 < #17. 성전은 이제 끝났다. 2-2> +20 18.10.02 2,226 69 10쪽
199 < #17. 성전은 이제 끝났다. 2-1> +8 18.10.01 2,147 67 10쪽
198 < #17. 성전은 이제 끝났다. 1-2> +14 18.09.30 2,235 75 10쪽
197 < #17. 성전은 이제 끝났다. 1-1 > +10 18.09.29 2,257 64 9쪽
196 < #16. 야파를 향해서 6-2 > +14 18.09.28 2,166 66 11쪽
195 < #16. 야파를 향해서 6-1 > +6 18.09.27 2,170 66 9쪽
194 < #16. 야파를 향해서 5-2 > +16 18.09.25 2,245 65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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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 #16. 야파를 향해서 4-1 > +8 18.09.18 2,296 68 11쪽
190 < #16. 야파를 향해서 3-2 > +4 18.09.17 2,301 67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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