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용이, 쓰러졌다.
그 누구도 가능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던 일이 실현된 것이다.
"우와아아아아!!!"
"우리가 해냈다!!"
방금 전까지 잔뜩 겁에 질려 있던 병사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왕궁의 잔해 더미에 파묻힌 마녀를 피투성이가 된 채로 간신히 숨만 내쉬는 전사가 구출한다.
마치 살아있는 시체마냥 잔뜩 피로해 보이는 성녀를 용의 피가 묻은 검을 쥔 용사가 조심스럽게 부축한다.
싸움은 끝났고, 모두가 달콤한 승리를 즐기며 뒷풀이를 시작한다.
용사는, 영웅들은 한데 모여 용의 머리를 짓밟고 선언했다.
"오늘, 우리는 승리했습니다!!"
모든 인간들은 영웅들이 용에게서 승리한 이 날을 기억하고 축하할 것이다.
모두가 기뻐하고, 모두가 환호한다.
모두가 달콤한 승리의 기쁨을 즐길 때, 용은 흐려져 가는 시야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봤다.
어째서 이런 일이 된 걸까?
분명히 저들은 자신을 수호룡이라 불렀는데.
나 또한 저들을 아껴왔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나는 내가 지켜오던 인간들의 발밑에 쓰러지게 된 걸까?
모르겠다.
지금은 그저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저 1초라도 빨리 눈을 감고 자고 싶을 뿐이다.
나는, 너무 지쳤다.
콜록.
비늘 사이를 뚫고 심장에 틀어박힌 칼과 창 때문인지 입에서 기침이 터져나온다.
꺼저가는 생명의 불꽃이 움찔거리며 주위로 불똥을 흩날리자, 승리를 즐기던 인간들 사이에 공포심이 다시 피어오른다.
"사룡이 아직 살아있다!!"
"숨통을 끊어라!!"
다 죽어가는 연약한 촛불 따위가 뭐가 그리도 두려운지, 저들은 목소리를 높힌다.
혼탁해지는 내 눈동자 위로, 성녀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저 아이의 성장과 탄생을 지켜봤던 내 눈동자엔, 이젠 나에게 칼을 겨누는 아이의 모습이 담긴다.
내 비늘을 닦던 하얀 손에 쥐여진 검이, 내 목으로 다가온다.
검이 비늘 사이로 파고들며 서늘한 감각이 느껴진다.
심장에 박힌 서늘한 강철.
나와의 약속을 기록했던 동상을 거리낌 없이 박살내는 인간들.
꿈틀.
무언가, 지금껏 단 한번도 느끼지 못했던 묘한 감정이 느껴진다.
다 꺼져가던 불씨가 다시 한번 화염을 피어올릴 정도로 강렬한 감정이다.
그리고 그 감정은.
"증오한다! 저주한다! 너희를, 이 세계를 저주한다!!"
증오심.
분노.
어두틔틔한 것들.
저 아이들에게 느끼리라고 단 한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감정들.
그 모든 것이 폭발하며 나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내 몸을 일으킨다.
내가 더 움직일 것이라 생각하지 못한 것인지 성녀가 놀란 표정을 짓고, 용사가 당황하며 검을 뽑아든다.
"약속을 짓밟은 너희에게 저주가 있으리라. 너희가 번성한 만큼, 너희에게 저주가 닥치리라! 내 다시는 너희에게 동굴 안으로 숨지 않게 해주겠다 약속했으니, 그 약속은 지켜질 것이다. 너희는 몰락하지 않으리라. 너희는 멸절할 것이다. 그 어디로 숨더라도 내 저주를 피할 수 없으리라. 동굴 안으로 다시 숨어도, 바다 저 멀리로 나가도, 하늘 저 위로 도망쳐도 숨는 것은 불가능하다. 너희는 모두 죽을 것이다. 너희가 내게 행한 것은, 너희 모두에게 돌아올..."
분노로 달아오른 머리에서 나오는 말을 되는 대로 입 밖으로 내뱉는다.
언제나 지킬 수 있는 약속만을 하기 위해 굳게 다물었던 입으로 저주와 증오를 내뱉는다.
저들이 너무나도 밉고, 너무나도 미워서.
이대로 내버려둔다면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았던 나의 저주는, 내 머리가 바닥에 나뒹굴며 끝나고 말았다.
그렇게 나는 죽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눈을 떴다.
다시 눈을 뜬 내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게임 오버]
-포인트를 정산합니다...
-생존 시간: 1522년 1달 22일 12시간 (+1500점)
-멸망 진척도: -1035% (-10350점)
-획득한 경험치: +9553602 Exp (+1500점)
-튜토리얼 지급 포인트: (+10000점)
[정산 완료]
-획득 포인트: 2650점
반투명한 상태창과.
"설마, 튜토리얼도 클리어하지 못할 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오랜만에 봐도 그리 달갑지 않은 미녀의 얼굴.
"시작 전에 제가 말했잖아요? 이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는다면, 당신의 세상이 멸망할 거라고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내 눈 앞에 들이밀어지는 냉혹한 현실.
- 작가의말
저장용이에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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