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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RD 님의 서재입니다.

인간이 아닌 것들의 이야기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중·단편

SCRD
작품등록일 :
2020.08.02 01:25
최근연재일 :
2020.08.02 0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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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 0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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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에 대한 이야기

DUMMY

‘로드킬’이라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자그마한 다람쥐, 토끼부터 꽤나 큼지막한 고라니나 멧돼지까지, 도로 위에서 굉음을 내며 달리는 자동차의 고무 바퀴나 철제 보넷 앞에 허무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라 해도 될 만큼 자주 일어난다.


하지만, 하필 다른 동물도 아니고 여우라니.

공중을 빙 도는 차체 안에서 그는 눈을 질끈 감은 채 그렇게 생각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지나가는 차량은 커녕, 고속 방지 카메라나 흔한 안전 표지조차 없는 시골 국도. 늦지 않기 위해 속도계의 바늘을 100 아래로 떨어뜨리지 않은 채 주행을 계속하던 그의 시야 앞에, 돌연 어느 물체가 불쑥 치고 들어왔다. 낡은 차의 침침한 헤드라이트가 밝히는 전방거리 안에서 눈을 밝히며 멈추어 서 있는 그것은 분명한 동물의 형상이었다.


고양이? 그보다는 조금 컸다. 삵이나 여우 같은 녀석일까. 하나 확실한 것은, 털이 선명한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대로 치고 지나가도 상관 없다는 것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게 현명한 선택지였다. 저 정도 크기라면 딱히 치고 지나간다 해도 사방에 튈 피만 제외한다면 차에 악영향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미련하게도, 그는 핸들을 꺾고 말았다. 반사적으로 피하고 보자는 실수를 저지른 것일까, 아니면 여우라는 다소 보기 힘든 동물에 그만 정신이 팔리고 만 것일까.


이유가 뭔들 때는 이미 늦어, 막 속도계가 120km를 찍은 차체는 갑작스러운 방향전환이 가해짐과 함께 그대로 공중을 한 바퀴 돌았다.



그는 이때 처음으로 주마등이라는 것을 경험했다.



곧이어 엄청난 충격이 그를 몇 차례 엄습했고, 사방이 빙글빙글 돌았다. 유리파편이 튀며 살갗을 스치고 지나가는 느낌과 아스팔트 도로에 쓸리는 철이 타는 냄새가 생생히 느껴졌다. 옆으로 넷 하고도 반 바퀴를 구른 차체는, 하늘이 도왔는지 철제 난간에 부딪혀 간신히 위아래가 뒤집힌 채 멈추었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이내 날아간 창틀 사이로 그는 힘겹게 기어 나왔다.


간신히 버티고 선 그는 어질어질한 몸의 균형을 잡기 위해 노력하며 몸 곳곳을 더듬어 보았다. 뜨뜻미지근한 액체가 만져지는 것을 보아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은 명백하지만, 어디가 날아가거나 꿰뚫리거나 한 곳은 없는 듯 했다. 놀랍게도, 치명상은 전무했다.




“이런 망할-“


박살이 난 차체와 엉망이 된 자신의 모습을 번갈아 내려다보는 그의 입에서는 욕지거리가 흘러나왔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 따위 축생을 살리기 위해 핸들을 꺾은 것일까. 자신의 바보 같음에 돌연 화가 끓어올랐다.


허나 그것도 오래 가지 못했다. 사고를 당한 직후에 갑자기 화를 낸 탓일까, 아니면 생각보다 상처가 심했던 걸까. 갑작스러운 어지럼증이 그를 엄습해 왔다. 차마 도움을 부르기도 전에, 그는 정신을 잃은 채 그 자리에 곧바로 쓰러지고 말았다.



------



이마 위에 느껴지는 따스하고 축축한 감촉에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상반신을 천천히 일으키자 무르팍에 물에 적신 수건이 떨어졌다. 잠시 균형을 잃을 듯한 어지럼증이 그의 뇌리를 훑고 지나가는 듯 했지만, 머리를 몇 번 흔드니 시야가 또렷해 지기 시작했다.


가구라고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흰 배색의 좁은 방. 그는 그 한 가운데 가지런히 펴진 이불 위에 눕혀져 있었다. 머리맡에 놓여있는 것은 아직도 김이 피어 오르는 온수가 담긴 바가지와, 붕대 따위가 담긴 구급상자. 그리고 차에 탈 때 가지고 있던 소지품이 고이 뉘여져 있었다.



“눈을 뜨셨네요.”



어리둥절한 채 주변을 둘러보던 그의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뒤를 돌아보자, 한 여자가 문 가에 서 있었다.


흰색 천 재질의, 고풍스러운 옷을 입고 있는 그녀는 이상할 정도로 창백한 피부를 하고 있었다. 길고 검은 머리칼은 가지런히 내리고 있었고, 미려한 얼굴에서는 어딘가 날카로운 느낌이 묻어나는 듯 했다.



“상태는 어떠신가요?”



그 차가운 겉모습과, 귓바퀴를 타고 흘러 들어오는 부드러운 목소리의 모순됨이 실로 기묘하고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기에, 그는 잠시 넋을 빼앗긴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기는 어딥니까? 어째서 제가 여기에 있는 거죠?”



분명, 마지막으로 겪었던 일에 대한 기억은 명확했다. 사고로 인한 기억 손실은 커녕, 공중에서 차체가 구를 때의 울렁거림 마저 생생히 떠올라 구역질이 치솟아 오를 정도였다. 따라서, 어째서 눈 뜬 곳이 – 애초에 눈을 뜰 수 있었던 것이 천만다행이지만 – 이런 방의 이불 안인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것도 자명했다.


그리고 여인은 그 정도는 충분히 예상했다는 듯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오늘 아침 잠시 산책길에 나선 도중에, 길가에 상처입은 채로 쓰러진 당신을 보았습니다. 그대로 놔둘 수는 없었기에, 이렇게 모셔와 간호를 하게 되었습니다. 부디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그, 그건 감사한 일입니다만···”


보통이라면 병원으로 먼저 데려가는 것이 정상 아닌가. 허나 일단 도움을 준 사람에게 따지는 것도 도리가 아닌 듯하여 입을 다물기로 했다.




“일단은 경찰한테 연락을-“



그 말과 함께 그는 머리맡에 놓인 소지품 더미에 손을 뻗었다. 휴대폰의 액정은 산산조각이 나 있었지만, 다행히도 작동은 되는 모양이었다. 황급히 번호를 누르고 귀에 갖다 댔지만, 오직 ‘통화 불가능 지역입니다’라는 음성이 흘러나올 뿐이었다.



“혹시, 전화 좀 빌릴 수 있겠습니까. 사고에 대해서 보고도 해야 되고, 경찰이나 보험사한테도 연락해서 박살난 차도 치워야 하고···”


“죄송합니다만, 그건 불가능합니다.”


“뭐라구요?”


“여기에 전화선은 없습니다. 아주 기초적인 생활을 위한 전력만이 약간 보급될 뿐.”


“그럼 도대체 어떻게 연락을-“




그녀는 그의 말을 끊으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외부로의 연락은 불가능합니다.”



무어라 더 따지려는 순간, 그는 잠시 그 자리에 굳을 수 밖에 없었다.


일순- 아주 짧은 한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노란빛으로 빛나는 듯 보인 것이다.


사고의 충격 때문일까. 그는 잠시 눈을 감고 머리를 흔들었다. 역시나, 눈을 뜨자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잘못 본 것이 틀림 없었다.




“아무튼, 여기에 가만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하다못해, 일단 병원에라도···”




그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왼쪽 다리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지만, 무시하고 절뚝거리며 방을 걸어 나가 바깥으로 향했다. 그런 그의 뒤에서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그저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방을 나서자 도달한 곳은 단조로운 풍경의 거실. 나가는 길을 찾던 그의 눈가에 나무문이 보였다. 급히 그쪽으로 다가가 문고리를 비틀어 열고 바깥으로 나섰다.


아무래도 저런 여인 혼자서 쓰러져 있는 그를 데리고 멀리 가는 것은 불가능. 따라서 이 곳은 사고지역과 멀지 않을 터라고 그는 판단했다. 마지막으로 달리고 있던 산길이 정확히 어디쯤 인지 잘 알지는 못했으나, 적어도 도로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면 다른 차량을 찾아 도움을 구할 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바깥으로 나선 그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사방을 뒤덮고 있는 자욱한 안개. 그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것은 끝없어 보이는 나무숲 뿐이었다. 아래를 내려다 보아도, 위를 올려다 보아도 같은 모습. 오직 방금 그가 나온 집 한 채를 제외하고는 건물이나 도로는 찾아볼 수 조차 없었다.



“···제가 당신을 여기로 데려온 것도, 전부 사정이 있어서입니다.”



조금은 안타깝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어느 새 뒤에서 나타난 그녀는 차분히 말했다.



“어디서 사고를 입으셨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곳은 안개가 짙게 끼기로 유명한 '묘호산.' 가장 가까운 시내까지는 도보로 몇 시간이나 걸리기에, 저도 여기로 데려올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물며 그 다리로는-“



그제서야 그는 자신의 왼쪽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손을 쓴 것일까, 부분부분 검붉은 색으로 물든 붕대가 감겨 있었다. 확실히 편하게 걸을 만한 상태는 아니었다.



“···며칠 정도만 있으면 나을 테니, 그 동안이라도 제가 간호하는 걸 허락해 주시기를. 그 후에는 길 안내를 해드리겠습니다.”


“그냥 그쪽이 구조대나 다른 사람들을 불러오면 안 되는 겁니까?”


“그건···곤란합니다. 이 근방은 안개가 많아서 안개가 걷히지 않는 이상 쉬이 움직일 수는 없어요. 더군다나 이곳에 살고 있는 것은 개인적인 신념 문제도 있기에, 사정상 발을 뗄 수가 없습니다.”


아무래도 별 선택권이 없다는 것을 그는 납득할 수 밖에 없었다. 적어도 도로에 널브러져 차갑게 식은 주검이 될 처지에 있던 그를 데려와서 간호해 주는 것에 대해서는 감사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런 문명과 떨어진 곳에서 연락도 끊긴 채 며칠을 보내는 것이 썩 내키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한들, 병자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는가.


결국 어깨를 떨군 그는, 여인의 안내에 따라 도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자 마자 다시금 몰려오는 피로와 어지럼증에 그는 다시 이불에 누울 수 밖에 없었다. 구급상자 안에서 약을 꺼내며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저는 편하게 ‘미호’라고 불러 주시길. 이래 보여도 사람의 생명에 있어서는 잘 알고 있는 몸이오니, 꼭 회복시켜 드리겠습니다.”




그녀는 약 몇 알과 물 한 잔을 건네주며 ‘항생제랑 진통제입니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약간은 미심쩍은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그는 이내 고분고분하게 약을 받아 들고 입에 털어넣은 후 꿀꺽 삼켰다. 몸을 눕히자 마자, 저항할 수 없는 졸음이 몰려왔다.



“그럼, 편안히 쉬시길.”



흐릿해져가는 시야 앞에서 미호는 천천히 뒤돌아 방을 나섰다.



문득, 그녀의 모습에 이상한 상이 겹쳐 보이는 듯 했다. 머리 위로 솟아 있는 뾰족한 한 쌍의 무언가와, 허리 근처에서 나풀거리는 꼬리 같은 것이. 하지만 이내 졸음기가 완전히 의식을 지배했고, 그는 의식을 잃듯 잠에 빠져들었다.




--------




그가 눈을 떴을 때에는 미호가 죽을 끓여 온 후였다.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무려 처음 만난, 이름 빼고는 모든 것이 불명인 여자에게 죽을 떠 먹히는 일까지 겪은 후, 그는 그녀가 다시 건네 준 약을 받아먹고 잠에 들었다.


그리고, 이후는 똑 같은 일의 반복이었다. 정신을 잃듯 잠에 빠져들었다가, 일어나 식사를 한 후 약을 먹고 잠에 든다. 창문도 없었을 뿐더러 백색등이 항상 켜져 있었기에 시간개념도 사라진 지 오래. 휴대폰이나 지갑도 어느 새 사라져 있었다. 며칠 정도만 있으면 여기서 나갈 수 있다고 미호는 단언했지만, 물어 볼 때마다 지금이 얼마나 지난 건지는 결코 말 해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의심만 할 수는 없는 것이, 명백히 그는 자신의 몸 상태가 나아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졸음기와 어지럼증을 제어하지 못하던 상태에서 의식도 점점 맑아져 가고 있었고, 다리도 -어째서 상처가 그리 빨리 아무는 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걸을 수 있을 정도까지는 회복된 후였다. 이 정도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산에서 나갈 수 있을 듯 보였다.


하지만 호전되는 상태와는 별개로 그 희한한 환각증상만은 계속되었다. 매번 미호의 모습이 이상하게 바뀌어 보이는 일이 더욱 자주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때때로는 눈만, 때로는 머리칼의 색깔만, 때로는 모습이 바뀌어 보일 때도 있었다.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환각증이 겹쳐질 때엔 그녀의 모습이 크게 왜곡되어 보이기도 했다. 머리칼은 흰색으로 변하며 눈동자는 노란색에 동공이 세로로 찢어지고, 머리 위로는 동물의 귀로 보이는 것이 솟아올라 있으며 허리 근처에는 털이 북슬북슬한 꼬리가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무엇보다도, 환각이 심할 때는 그녀의 양 손이 피로 물들어 있는 모습이 보일 때도 있었다.


허나 매번 이러한 환상이 겹쳐 보일 때마다 눈을 잠시 감았다 뜨면 그것들은 이내 없어져 있었다. 처음에는 눈의 착각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하지만 이윽고 그는 모순을 깨닫고 점점 의식하기 시작했다.



어째서 몸 상태가 점점 나아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환각은 선명해지는 것인가?



그가 본격적으로 의심을 시작한 것은 상처가 거의 나아갈 때쯤 이었다. 돌연 그녀가 ‘머지않아 헤어질 테니 제대로 된 식사라도 하자’면서 거실로 불러낸 것이다. 실로 오랜만에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서자, 그의 앞에는 제대로 된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식재료 같은 건 직접 구해오는 겁니까?”


“네, 근처 밭에서 재배하고 있는 것들을 가져오는 거죠.”


“흠.”



의심스러운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가 내내 침대에 정신을 놓고 누워있는 동안, 미호는 무엇을 하는 걸까. 사실은 단순히 잡일 따위의 개인 생활을 할 수도 있었지만, 계속된 환각으로 정신이 지칠 대로 지친 그에게는 모든 것이 의심 덩어리였다.


그런 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호는 평온한 얼굴로 식사를 시작했다. 이따금 물을 따라 주거나, 빈 반찬 그릇을 다시 채워 주거나 하는 것을 제외하면, 두 사람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갑작스런 질문을 해 오기 전까지는.



“여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여우, 말입니까···?”



실로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딱히 떠오르는 대답은 없었다. 알고 있는 것 정도는 동물이고, 수가 줄어가고 있고- 그러고 보니, 그가 로드킬을 피하려다 사고를 낸 동물도 여우 아니던가. 선명한 은빛 털 덕분에 기억하고 있었다.


좀체 답이 돌아오지 않자, 그녀는 좀 더 구체적으로 질문해 왔다. 별 것 아닌 질문 치고는 꽤나 대답을 바라는 듯 보인다고 그는 생각했다.



“보통, 여우는 부정적인 동물이라고 하지요··· 교활하고, 이기적이며, 인간에게 해를 입히는 요호. 그런 요괴와도 같은 동물을, 당신은 나쁘게 생각하지 않나요?”


“그거야···”



그렇게 묻는다고 한들, 대체 무어라고 대답해야 할까. 잠시 고민한 끝에, 그는 입을 열었다.



“솔직히, 특별한 생각은 없네요. 하필 여우 때문에 이런 바보 같은 꼴에 처하긴 했지만, 결국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분명 그 때 그는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가 핸들을 꺾지 않았다.

그렇다면 여우를 탓할 수는 없다.



“요즘 누가 옛날 이야기 같은 걸 신경 쓴답니까. 애완동물로도 키우는 시대인데, 나름 애교도 많다 하고요···


아니, 그나저나 갑자기 왜 물어보시는 겁니까···?”



미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니요, 딱히 중요한 건 아닙니다.”




--------




시간이 흘렀다.


시종일관 안개로 뒤덮여 있는 이 어둑어둑한 장소에서 낮과 밤의 경계는 더 이상 희미해진 채 의미를 잃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아무리 찾아봐도 시계는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 답답함에 미치게 만들었다.



‘이제 곧 산에서 나갈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시간이 흐르는 감각이 무뎌진 이 공간 안에서, 그는 그녀를 찾아 나설 수 밖에 없다고 다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내야 할 때였다.


본격적으로 미호의 자택 내부를 살피는 것은 처음이었다. 주인에게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이리저리 들쑤시고 다니는 것을 썩 바람직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은 그 정도는 그의 안중에 없었다.


미호의 자택은 그의 생각보다 상당히 넓은 듯 했다. 방을 나서서 거실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자, 긴 복도가 쭉 뻗어 있었다. 창문 하나 존재하지 않는 하얀 복도. 그는 안으로 걸어 나섰지만, 걸어도 걸어도 끝이 존재하지 않는 듯한 기분이었다.


마침내 끝에 다다르자, 그곳엔 나무문이 하나 있었다. 거실과 그가 누워 간호를 받던 방을 제외한 유일한 공간. 이 안에 그녀가 있음이 틀림없었다.


노크를 하여 보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그는 문을 살짝 열고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대체, 뭐지?”



그 곳은 안개로 가득 찬, 어두운 공간이었다. 바깥의 풍경과는 다르게 어느 방향을 보아도 오직 어둠 뿐. 자택의 실내에 이런 장소가 있다니, 너무나 이질적인 공간이었다. 아니, 애초에 복도를 통해 안쪽으로 들어온 이상 이런 공간이 있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 ‘그녀’가 있었다.



환각. 여태껏 그가 봐 오던 환각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그는 여느 때처럼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모든 것이 환각이기를, 이내 평소 때처럼 미소를 짓고 있는 미호가 ‘무슨 일이죠?’ 라고 물어 오기를 기대하며.



아니, 환각이 아니었다.


환각이라고 생각했던 그 이질적인 상은, 눈을 씻고 보아도 원래대로의 돌아가지 않은 채 또렷히 남아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명백히 평범한 인간의 모습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은빛의 머리칼로 일부를 가린 것만 제외하면 완전한 나체에, 머리 위로 뻗은 뾰족한 동물의 귀, 날카로운 이빨, 그리고 하나- 아니, 둘, 세 개의 하얀 꼬리까지. 신화나 설화에서나 나오는 요호의 모습과 쏙 빼닮았다는 것을 그는 이제서야 깨닫고 말았다.


안개 한 가운데 서 있는 그녀의 주위로는 검붉은 액체가 사방으로 흩뿌려져 있었다. 그가 서 있던 곳 까지 느껴지는 강렬한 비린내. 피였다. 그리고, 그 근원인, 바닥에 널브러진 움직이지 않는 사람의 형체마저-



그가 넋을 놓은 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차, 미호- 아니, 요호는 갑작스레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와 그의 눈동자가 마주치고, 길게 찢어진 노란 눈동자가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순간-


그녀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




그는 비명을 지르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거칠게 심호흡을 하며 옆을 돌아보자, 미호가 약간 놀란 듯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안 좋은 꿈이라도 꾸셨나 보군요.”



환각? 이번에도 단순한 환각이나 악몽인 걸까? 그렇다기에는 너무나도 또렷했다. 이 곳은 정상이 아니었다. 눈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미호도, 정상이 아닌 것은 마찬가지였다. 미쳐가지 않는 이상 이렇게 생생하고 오래 남는 환각 따위가 있을까 보냐.


그는 여전히 반은 두렵고, 반은 의심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는 그였지만, 미호는 별 신경은 쓰지 않는 듯이 말을 이었다.



“이제 몸도 전부 회복되신 듯 보이네요. 곧 시내로 가는 길을 안내해 드려도 될 것 같습니다. 다만 그 전에-“




그녀는 마지막으로 알약 한 알을 건넸다.




“이걸 드시기를. 이후 염증이 번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니까요.”




방금 전 ‘환각’까지 본 그가 의심하지 않을 리는 없었다.하지만 그는 이번에는 망설임 없이 알약을 받아, 곧바로 입에 집어넣었다. 미호는 그 모습을 보며 어딘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자 마자, 그는 입에서 약을 뱉어냈다.



-그러고 보면, 매번 약을 먹자마자 잠에 들었었지.




이번에야말로 제정신을 유지하고 이 반복적인 환각의 정체를- 그리고 미호의 정체를 알아내겠다고 그는 결심했다.


이 산은 제대로 된 장소가 아니었다. 하루빨리 빠져나가야만 하는 연옥이었던 것이다.


조금 용태를 살핀 후, 그는 조심스레 바깥으로 나섰다. 그녀로부터의 확신도 있었으니 홀로 하산하는 것도 가능하리라. 아니, 애초에 시내까지 네 시간이 걸린다는 말도 거짓말일 가능성도 있다. 이 미쳐 돌아가는 상황에서는 모든 것이 의심스럽게 느껴질 뿐이었다.


문을 열고, 안개가 자욱한 바깥으로 뛰쳐나간다. 앞에 드문드문 보이는 숲을 향해서 전력을 다해 달려갔다.




“젠장, 어느 방향으로 가야 되지?”




얼마나 달렸을까. 문득 자신이 가는 방향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생각해내고 주변을 둘러 보았지만, 안개가 한층 더 자욱하게 끼어 있을 뿐이었다. 어느 쪽으로 향해도 안개 뿐. 한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는 빙글빙글 돌며 헤메고 있을 뿐이었다.




“쓸모없는 행동입니다.”




차가운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화들짝 놀라며 돌아보자, 어느 새 미호가 바싹 쫓아와 있었다.




-아니, 저건 미호가 아니다. 애초에 인간조차 아니다.


꿈에서 본 모습 그대로. 드문드문 나타나던 환각 대로의 모습. 요괴. 요호가 분명해. 여우의 귀와 꼬리가 뻗은, 인외의 마물인 것이다.




“나는··· 여우에 홀린 건가?”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으며, 그는 허탈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사람을 홀리는 여우라니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였지만, 애초에 지금 이 상황 자체도 있을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 아닌가. 차라리 악몽이면 바랄 뿐이었다.


요호는 안개 속을 사뿐사뿐 헤치고 걸어와 그의 앞에 섰다. 그 양 손은 선명한 붉은 피로 물들어 있는 채였다.




“괜찮아요··· 당신에게 해를 입히는 일은 없을 테니까.”



그렇게 말하고는, 그녀는 손을 들어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차갑고 미끌미끌한 핏물의 감촉이 느껴짐과 동시에 그의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황급히 몸을 뒤로 피하며 외쳤다.



“거짓말은 집어쳐! 그 피는 그럼 대체 뭐지? 아니, 만약 이 모든 게 환각이 아니었다면-“



‘꿈’ 속에서 목격한, 피투성이의 요호와 그 근처에 널부러진 시체들.


그 이미지를 떠올리자 마자 그는 속이 메스꺼워지는 기분이었다.




“역시, 죽일 생각이지!”




그 발언이 신경에 거슬렸는지, 요호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그녀는 입을 벌려 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내 보이며 대답했다.




“죽인다? 아니요, 그럴 리가. 전 결코 사람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저··· 불행한 사고일 뿐. 당신이 겪은 자동차 사고와 비슷한 ‘사고’ 말이죠.”



“···뭐?”




“그래요, 우연찮게도 당신이 사고를 당했던 바로 그 도로에서, 우연찮게도 똑 같은 은빛 여우를 만난 사람들. 저는 단지 거기서 사고에 휘말려 죽은 자들의 영혼을 여기로 데려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게 죽인다는 말이잖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산길에서의 사고와 관련되어 있고, 그 말고도 많은 희생자들이 있었다는 것 만은 명확했다.



“어째서, 왜 이런 일을 하는 거지?”



요호는 사뿐사뿐 걸어 그의 등 뒤로 돌아가, 그를 뒤에서 살포시 끌어앉았다. 맨 살갗이 그의 등에 닿는 동시에, 따듯한 숨결이 귓가에서 느껴졌다.



“보시다시피, 저는 요괴. 인간을 죽이거나, 반대로 살리는 것 쯤은 간단하게 해 낼 수 있죠. 하지만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서는 그 대가가 필요한 것이 당연.”


“사람을 살린다고?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다른 사람을 희생시킨다는 건-“



그는 점점 피바다가 되어가고 있는 주변을 쳐다보며 외쳤다. 그러한 그의 태도가 답답하게 느껴졌는지, 요호는 감싸고 있던 양 팔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래도 당신은 자신의 입장을 잘 파악하고 있지 못하는 모양이군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두 손가락을 맞부딪혀 ‘딱’ 하는 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주변을 뒤덮고 있는 안개가 점점 녹아 내리며 주변 풍경이 바뀌어가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들은 야밤의 도로 위에 서 있었다. 옆에는 박살난 차량이 뒤집힌 채로 누워 있었다.




“여기는-“



틀림 없었다. 그가 사고를 당한 장소. 로드킬을 피하려고 핸들을 꺾은, 바로 그 지점이었다.



“여전히 기억나시지 않으시는 모양이군요.”


“···무엇 말이지?”




그 때, 돌연 그의 전신을 강렬한 고통이 휩쓸었다.


그가 자신의 양 팔을 내려다 보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손목과 팔의 관절 전체가, 정상이라고 할 수 없는 방향으로 천천히 돌아가 꺾이고 있었던 것이다.


곧이어 날카로운 고통과 함께 근육이 찢기고, 뼈가 부서졌다. 다음은 다리. 균형을 잃고 바닥에 쓰러지는 도중에도 관절의 왜곡은 멈추지 않는다.


참을 수 없는 격통에 그는 비명을 지르려고 했지만, 그것조차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날카로운 파편과 같은 것에 목이 반쯤 찢겨 나가 사방으로 선혈을 흩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리 없는 정적 속에서 고통으로 몸을 뒤트는 그를 안쓰러운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요호는 말했다.




“당신은 사고를 당한 그 때부터, 이미 죽어 있었다는 것을.”



-죽어?


확실히, 지금 상태라면 금방이라도 죽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격통에 몸부림치는 와중에도, 그의 머릿속에서 의문은 피어났다. 여태껏 멀쩡히 회복되던 그의 몸은 도대체 무엇인가. 뚜렷하게 살아서 작동하던 의식은 전부 주마등에 그치지 않는 것일 뿐일까?


요호가 다시 손가락을 맞부딪히자, 그들은 다시 안개로 둘러싸인 공간으로 돌아왔다. 그의 몸도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한 채로 약간의 통각만이 잔류하고 있을 뿐이었다.



“죽기 직전이던 당신을, 저는 직접 만들어낸 이 환각의 공간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자신이 죽었다는 걸 자각하지 못 한 채로, 하루하루 몸이 나아져 가는 것처럼. 눈치를 채고 만 것을 보니 완벽하지는 못했던 듯 하지만요···



그리고 매일같이, 당신의 말대로, 인간들을 죽였습니다. 도로에서 저주를 걸어 사고를 일으켰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죽였습니다. 숨이 붙어 있다면 이 손으로 직접 숨통을 끊었습니다. 그리고 그 영혼을 회수해서, 매일같이 당신에게 불어넣는 것을 반복했습니다.”



고백, 아니, 자백과도 같은 말에, 그는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어째서.”



고개를 푹 숙인 채 중얼거렸다.



“어째서, 그런 짓을 한 거지?”



“이유야 간단합니다-“



요호는 가까이 다가와 그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바싹 갖다 대었다. 양 손으로 그의 뺨을 감싸고 눈을 정면으로 맞춘 채 가까이서 속삭였다.



“이 모든 것은, 여우의 보은. 은혜 값기이자 보상일 뿐.”


“그저 보은을 위해서···”



그의 입가에서는 헛웃음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보은을 위해서,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고?”


“물론 그것뿐만은 아닙니다. 저는 이래뵈도 요괴. 근본적으로 인간을 좋아하기보다는 싫어하는 쪽에 가까운 것. ‘보은’이라는 명목만 가지고 수고를 들여 인간을 살리지는 않으니까요.”


“그렇다면 대체-“




소리 높여 따지려던 그의 입을 한 손으로 막은 채 요호는 대답했다.




“그야, 당신이 마음에 들었으니까요-“


“뭐···라고?”



요호는 가슴팍에 손을 살포시 얹은 채 이야기를 시작했다.




“본래 저는, 수백 년 전 봉인된 요괴였습니다. 아··· 이젠 잘 기억도 나지 않는 오래 전 일이네요. 저를 봉인한 자는 봉인이 풀리기 위해 세 가지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첫 번째, 봉인된 돌이 깨질 것. 여기까진 간단했습니다··· 시간이 지나 강산이 바뀌니, 도로가 생기고 봉인석도 깎여 나가더군요. 조금은 힘이 돌아온 것입니다.”


“하지만 두 번째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 직접 던진 질문에 거부 받지 않는 것.”


“질문이라고···?”



그는 과거를 되돌아보며 그녀가 자신에게 질문을 한 때를 곰곰이 생각했다.


‘여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그 뒤에 따른 질문-


‘여우에 대해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나요?’




“설마-“



요호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어 보였다. 교활하고, 잔혹한 미소였다.



“저는 밤마다 환영이자 분신인 여우를 불러내어 사람들을 유인했습니다··· 하지만 모두 여우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지나가 버릴 뿐.


하지만, 당신이 나타났고, 마침내 질문을 던질 사람이 나타난 것이죠.”



“그렇다고 해도, 왜 하필 나지? 대답을 받은 순간 죽였을 수도 있을 텐데, 어째서 다른 자들을 죽여 가면서까지 날 살려낸 거야?”



“그도 그럴 게, 말했지 않나요···”



요호는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왔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씩.



“당신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으니까’라구요···”




바닥에 쓰러진 채 반쯤 몸을 일으키고 있는 그를 향해 다가온 요호는, 사냥감이 먹이를 도망가지 못하게 하는 듯이 양 팔로 가두고는 위에서 내려다보며 말했다.



“세 번째 조건··· 그것은 바로 ‘동반자’를 찾는 것. 증오의 대상이자 모두가 멀리 하는 요괴로서는, 충족하기 어려운 세 가지 조건이죠. 하지만 당신은 실로 흥미로운 형태로 그 조건을 모두 만족해 준 거에요.”



“내가··· 그런 일을 했다고?”


“첫 번째로는 사고가 일어났던 그 때. 차에 그대로 치이더라도 요괴인 저는 어차피 죽지 않았겠죠. 하지만 만약 당신이 그대로 치고 지나갔다면, 저는 괘씸함에 당신을 죽였을 겁니다.


허나 결과적으로, 당신은 그러지 않았어요. 자신의 목숨을 내맡기고서도 그 작은 동물을 구하려고 했습니다. 아, 그 자상함이란!


“그리고, 여우에 대한 질문을 했을 때도, 당신은 올바른 대답을 해 주었죠. 그걸로 두 번째 조건까지 만족··· 평생을 요괴로써 쫓겨 오고, 마침내 봉인되고 만 저에게는 처음으로 겪어 보는 일이었습니다.


그걸로 확신한 거에요. 이 수 백년을 홀로 살아온 몸에게 어울리는 짝은 바로 당신이라는 것을.”




그가 도망갈 길은 없었다. 요호의 손아귀에서 무슨 짓을 해도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당신은 살아야만 해요.”


“···”




그는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방금, 요괴한테 강요에 가까운 고백을 받은 셈이었다.



보은이라기에는 너무나도 무거운 결과. 단 한번의 잘못된 선택이 너무나도 크게 번져버리고 말았다.




“···그럴 수는 없어.”




“네?”




“그럴 수는 없어!”




그는 그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며 외쳤다.



“나는 내 삶이 있다고! 이런 데 남아있을 수는 없어! 다른 사람들을 죽여가면서까지, 살아갈 수는 없다고!”



그가 그렇게 외치자, 요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노란 눈동자가 차갑게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바보 같은.”




그녀는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덮었다.




“앞으로 세 명. 세 명의 영혼만 더 확보한다면, 당신은 완전히 회복될 거라구요. 그리고 이 곳에서 영원히 저와 함께 살아가는 것. 오직 그것 뿐이에요!”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그를 제압한 채, 그녀는 마지막으로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다시 잠에 드세요.”




------




이마 위에 느껴지는 따스하고 축축한 감촉에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상반신을 천천히 일으키자 무르팍에 물에 적신 수건이 떨어졌다. 잠시 균형을 잃을 듯한 어지럼증이 그의 뇌리를 훑고 지나가는 듯 했지만, 머리를 몇 번 흔드니 시야가 또렷해 지기 시작했다.


가구라고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흰 배색의 좁은 방. 그는 그 한 가운데 가지런히 펴진 이불 위에 눕혀져 있었다.



“눈을 뜨셨네요.”



옆에는 미호가 앉아 미소를 짓고 있었다.



“조금 쉬고 계시길. 금방 식사를 준비할 테니까요.”



그 말을 남기고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그는 그녀가 방을 나가는 것을 보고는, 등을 기대고 앉아, 방금 겪은 생생한 일을 떠올렸다.



-요호. 피투성이. 그녀가 고백한 진실들.



‘···환각인가?’



다시 모든 것이 평소처럼 돌아온 듯 했다. 몸은 거의 다 회복된 상태였고, 똑 같은 이불에 누워 그녀가 준비해 오는 식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이번에는 환각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 요호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있지 않았으니까.


머리 위로 뻗은 뾰족한 여우귀. 노란 눈과 은빛의 장발. 그리고 새하얀 털의 꼬리 세 개 까지. 본연의 요호의 모습 그대로 눈뜬 그를 맞이한 것이다.


그 말인 즉슨- 그녀는 선택지를 제시한 셈이다.



하나. 이 끔찍한 진실에서, 타인의 희생으로 죽음을 면하고 영원히 여기에 처박혀 살아야만 하는 처지를 벗어나기 위해 도망가라.


둘. 요호의 짝으로서 살아가는 것을 납득하고 여기에 남아라.


그것이 정체를 더 이상 숨기지 않는 그녀가 제시해 준 선택지였다.


-어찌 보면 선택지는 두 가지. 하지만 결론적으로, 그에게 주어진 것은 하나 뿐. 결국 답은 정해져 있는 셈이다.


여기서 다시 자택을 뛰쳐나가 도망가는 것을 선택해도, 아마 똑 같은 일이 반복되겠지. 요호는 환각을 풀어낸 진실을 보여주고 그를 원래 상태로 되돌려 놓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그를 죽게 하지 않을 것이고, 억지로 데려와 또 다시 선택지를 제시할 것이 틀림없었다.



무력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뿐.


납득하는 것. 이 ‘보은’이라는 것을 납득하고, 다른 사람이 죽음으로써 자신이 살아나는 것을 납득한다. 요호의 환심을 샀다는 사실도 납득하고, 앞으로 그녀의 짝으로 평생 살아가야 한다는 운명에도 납득한다.


그것 뿐이었다. 이 요괴 앞에서 환각 속에 갇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 뿐이었다.




어두운 표정으로, 그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서자, 기다리고 있던 미호가 그를 살갑게 맞아 주었다. 이 모든 상황에 절망감을 느끼며, 그는 천천히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저항할 방법은 없었다.


부디, 그 자신이 눈 앞의 이 ‘사랑스러운’ 요호와의 삶에 익숙해 지기를 빌 뿐이었다.


그것이 어떠한 희생을 낳던 간에.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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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은에 대한 이야기 20.08.02 14 0 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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