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2년(숙종 38년) 백두산에 세운 비석으로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선을 표시한 경계비이다. 정상이 아닌 해발 2,200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쪽의 압록과 동쪽의 토문을 분수령으로 삼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비석은 인적이 드문 곳에 설치되어 사람들 사이에서 잊혀졌다. 그 후에 러시아와 일본 등이 이 일대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자, 청나라와 조선도 비석의 내용을 다시 관찰하게 되었다. 양측은 1883년 비석을 다시 조사했는데, 비석 내용의 ‘토문’이라는 말을 놓고 조선과 청나라는 의견이 엇갈렸다.
우리는 만주 쑹화 강의 한 부분이라고 주장했고, 청나라는 두만강이라고 주장해 합의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백두산 북쪽 지역에 우리 민족이 많이 이주해 있어 현실적으로는 조선 영토로 인정이 되었다. 1909년 일제는 청나라와 간도 협약을 맺어 남만주의 안동-봉천 간 철도 부설권을 얻는 대신, 간도를 청나라에 넘겨버렸다. 비석도 1931년 만주 사변 당시 일제가 철거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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