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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래스몽키 단편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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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래스몽키
작품등록일 :
2021.09.16 18:30
최근연재일 :
2024.05.03 03:03
연재수 :
18 회
조회수 :
1,662
추천수 :
98
글자수 :
255,287

작성
22.06.03 11:58
조회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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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글자
31쪽

단편 8. 오컬트, 개그

DUMMY

학교 괴담, 기숙사, 미약한 백합(gl) 한 스푼




“룸메이트인 세라 양이 기숙사 안내를 해줄 거예요.”


사감 선생님은 급한 일이 생겼다며 그 말만 하고 떠났다. 사감 선생님은 급하게 기숙사 사감실을 나갔지만 나는 사감 선생님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선생님들은 대개 귀찮은 일을 학생에게 떠넘기곤 했으니까.


“안녕.”


사감 선생님이 기숙사 안내를 떠맡긴 불우한 학생이자 앞으로 방을 같이 쓸 룸메이트는 대단한 미소녀였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는 마치 사파이어처럼 빛났다. 이런 뻔한 묘사를 해서 미안할 정도로 그간 봐온 푸른 눈동자와 채도가 달랐다.


빛나는 눈동자가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다면 다음에 눈에 들어오는 건 모난 곳 하나 없이 빼어난 얼굴과 전신이다.


남자처럼 짧게 자른 흑발과 시원시원한 미소, 큰 키와 거기에 늘씬하고 긴 팔다리 때문에 언뜻 보아선 대단히 잘생긴 남자애 같았다.


“앞으로 잘 부탁해, 난 세라 핀처야.”


세라는 목소리도 아름다웠다. 나는 소위 말하는 ‘여학교의 왕자님’의 이상같은 존재를 현실에서 만날 줄 몰라 당황했다. 아니, 왕자님을 만나서가 아니라 살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이를 본 적 없어서 당황했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소녀와 같은 방을 써야 하는 미래를 떠올리고 충격 받았다.


‘얘랑 같은 방을 써야 한다고?’

“클라라 커들.”


충격이 너무 커서 말을 길게 할 수 없었다. 나는 세라가 무뚝뚝한 답변을 불쾌해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룸메이트에게 시작부터 밉보이기 싫었다.


다행히 세라는 나의 무뚝뚝함을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


“클라라, 예쁜 이름이네. 그럼 따라와, 일단 방에 가서 짐부터 풀자.”


세라는 사감실 문을 열고 나를 기다렸다. 걷는 모습이 무용수나 고양이처럼 우아했다. 나는 보이지 않는 목줄이 당겨지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의 뒤를 따랐다.

수업 중이라 기숙사 건물 내엔 사람이 없었다. 세라는 내 안내를 맡아 수업을 빠지게 되었다고 했다. 수업을 하루 빠지면 지장이 많을 텐데 목소리가 밝았다.


“룸메이트가 생겨서 정말 기뻐. 그 동안 혼자 방을 쓰고 있어서 외로웠거든.”

“그렇구나.”


나는 세라의 말에 단답으로 대답했다. 살면서 본 중 가장 예쁜 사람과 같은 방에서 지내게 되었다는 긴장을 풀기 위해 현실 도피 중이었기 때문이다.


‘여학교의 왕자님’과 같은 방을 쓰게 되어서 닥쳐오는 고난과 역경, 왕자님과의 금단의 로맨스를 다룬 순정만화 수십 편이 머릿속에서 연재되었다. 해피 엔딩도 좋지만 금단의 로맨스가 주요 소재이니 비극적인 엔딩도 좋을 것 같아 쉬이 결정하기 어려웠다.


“여기가 우리 방이야.”


세라는 이번에도 문을 열어주었다.


큰 창문이 하나, 책상과 치매, 의자, 옷장이 두 개씩. 유서 깊은 명문 기숙 학교의 기숙사를 상상하면 바로 떠올릴 법한 정석적인 방이었다. 가구는 오래되었지만 촌스럽지 않고 고풍스러웠다. 무엇보다 세라가 방에 있으니 그자체로 완벽했다.


“내가 혼자 쓰다 보니까 청소를 소홀히 했거든. 우리 방이니까 지저분하다 싶으면 바로 얘기해.”


세라는 미안한 듯 말했다. 청소를 소홀히 했다고 엄살 떠는 것에 비해 방은 깨끗했다. 하얀 침대보엔 머리카락 한 올 떨어져 있지 않았고, 지나치기 쉬운 창틀이나 옷장 위는 먼지 없이 깨끗했다. 누가 보면 룸메이트를 맞이하기 앞서 공들여 청소한 것 같았다.


‘그럴 리 없잖아. 정신 차리자.’


현실 도피하느라 머릿속에서 순정만화를 상상했더니 망상이 정신을 오염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묵묵히 짐을 풀었다.


“짐정리 도와줄게.”


방상태를 보면 세라는 꼼꼼하고 야무진 성격인 듯 했다. 나는 그녀의 도움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이내 후회했다.


“으악! 책이 무너진다!”


세라는 책을 조금씩 들어 책장에 꽂기 싫다며 한 번에 들었다가 전부 떨어트렸다.


“괜찮아? 다치지 않았어?”

“괜찮아. 살짝 실수했어. 이번엔 안 그럴 거야.”


물론 그랬다.


“으악! 책 쏟아진다!”


나는 세라에 대한 선입견을 수정했다. 세라는, 아름답고 우아해보이는 세라는 덜렁이였다. 내 예상과 다르게 세라는 꼼꼼하고 야무지기는커녕 무슨 일이든 건성건성에 대강 해치우고 싶어하는데 덜렁이기까지하는 아이였다.


책을 한 번에 옮기려던 것은 그렇다 치자. 의자를 밟지 않고 높은 곳에 물건을 두겠다고 욕심 부리다가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는 바람에 나는 들고 있던 가방을 던지고 그녀의 지탱해야 했다.


포장지는 구겨서 방바닥에 방치하는가 하면, 자기 옷장이 빈다고 가방을 보관해주겠다고 해서 가방을 맡겼더니 개놓은 옷 위에 가방을 쑤셔넣으려고 했다. 나는 기겁해서 그녀를 말렸다. 이 성격으로 용케 이리 깨끗하게 방을 치웠구나 싶었다.


“머리? 불장난하다가 태워먹어서 잘랐어.”


심지어 그녀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은 불장난을 하다가 태워서 짧게 자른 것이라고 했다. ‘여학교의 왕자님’이 ‘학교 공인 덜렁이’로 정정되는 순간이었다.

왕자님이 덜렁이로 바뀐 게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덕분에 나는 긴장을 풀고 보다 편하게 세라를 대할 수 있었다.


“불장난은 위험한데, 학교에서 한 건 아니지?”

“당연히 기숙사에서 했지. 선생님들도 알아.”

“그럼 퇴소나 퇴학 아니야?”


기숙사에서 불장난을 하면 어느 집안 자제든 무조건 퇴소조치하지 않을까? 내 의문에 세라는 어깨를 으쓱였다.


“귀신이 그랬다고 하면 다들 봐주거든.”

“귀신?”


세라는 목소리를 낮추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응. 성 릴리 여학원 기숙사엔 귀신이 나와. 들어봤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가는 소문으로 들은 적 있었다. 하지만 오래된 건물, 유서 깊은 학교나 병원이면 으레 지닌 소문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어느 학교든 귀신 나온다는 소문이 돌잖아. 내가 전에 다니던 학교도 그랬는걸.”

“그래, 근데 여긴 좀 더 특별해.”


세라는 특별을 말할 때 강조했다. 나는 건성으로 듣고 넘겼다. 어디든 귀신 얘기를 좋아하는 아이가 한 명 쯤은 있는 법이다.


“그럼 이제 기숙사를 안내해줄게.”


나는 방에 올 때보다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세라의 뒤를 따랐다.


**


기숙사는 4층 건물이고 우리의 방은 4층에 있기 때문에 세라는 1층부터 둘러보자고 제안했다. 나는 불평 없이 그녀의 제안에 따랐다.


세라가 가장 먼저 소개해준 곳은 기숙사 후원이었다. 정원사가 관리를 잘 하는지 가지치기 잘 된 조경수가 돋보였다. 하지만 건물 뒤편이라 응달이 져서 그런 것일까? 계절에 비해 조금 음습한 기분이 들었다.


“성 릴리 여학원 기숙사 생존수칙 하나. 뒤뜰의 우물을 들여다보지 마라.”

“뭐?”

“말 그대로야. 뒤뜰의 우물을 들여다보지 말 것. 우물을 봉인해둬서 들여다보기 힘들지만 가끔 봉인이 풀려있으면 들여다본 학생을 잡아먹는대.”


나는 맥이 빠졌다. 우물이 학생을 잡아먹는다니, 괴담이라쳐도 참 한심한 이야기였다.


“우물은 학생이 빠지면 위험하니까 막아둔 거고, 들여다보지 말라는 것도 위험하니까 주의를 준 게 귀신 얘기로 와전된 거겠지.”

“저 우물은 정말 위험해. 괜히 생존수칙 첫 번째인 게 아니니까 꼭 기억해 둬. 우물이 개방되어 있으면 아예 후원에 가지마.”

“알겠어.”


귀신이 나오지 않더라도 우물 근처에 갈 생각은 없었다. 내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세라는 다음 장소로 나를 안내했다.


세라가 다음으로 나를 이끈 장소는 1층의 식당이었다. 기숙사생은 모두 기숙사에서 아침 식사와 저녁 식사를 먹기 때문에 규모가 상당했다.


나는 매점 이용 방법이나 식사 시간, 규칙 등에 대한 설명을 들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세라는 식당을 지나쳐 식당과 이어진 주방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나는 얼떨결에 세라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갔다.


“성 릴리 여학원 기숙사 생존수칙 둘. 밤에 주방에 들어가지 마라.”

“뭐?”

“밤에 주방에서 귀신이 나오거든. 귀신에게 붙잡히면 요리 재료가 된대. 밤에는 절대 주방에 들어가지마. 가끔 식당도 위험해질 때가 있는데 그러면 운이 안 좋은 거고.”


나는 이마를 짚었다. 후원 우물이야 장난삼아 그럴 수 있다 치지만 두 번이나 괴담을 얘기할 줄 몰랐다.


“주방에서 귀신이 사람을 식재료로 쓴다니, 무섭네.”

“그치? 무시무시하지?”

“근데 나는 그런 것보다 기숙사 규칙이 더 궁금해. 식당 이용 시간이나 주방 이용 시간 같은 거.”

“그런 건 기숙사 입소자 규칙집보면 적혀 있잖아. 나중에 시간 나면 읽어봐.”


규칙집에 적혀 있어도 중요하고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걸 알려주기 위해 기숙사 안내를 부탁한 것일 텐데 세라는 그 사실을 무시했다.

결국 나는 한소리를 더했다.


“애초에 밤에는 주방 사용 금지지?”

“응. 낮에도 사감 선생님에게 허락 받아야 사용할 수 있어.”


물론 혈기왕성한 학생들은 밤에도 몰래 주방에 들락거렸을 것이다. 아마 그런 일을 방지하려고 귀신이 나온다고 겁준 것이 진짜처럼 퍼진 게 아닐까?


“주방은 위험한 게 많으니까, 몰래 들어가지 말라던 말이 와전된 거겠지.”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야. 그래도 위험하니까 들어가지마.”

“그럴 생각이야. 난 겁이 많아서 위험한 곳에 안 가고 위험한 일은 안 하거든.”

“좋아, 클라라! 넌 우리 기숙사에서 생존할 자세가 되어 있어.”


내가 한소리를 더했음에도 불구하고 세라는 쾌활하게 웃었다. 나는 그녀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예쁘고, 착하고, 털털한 룸메이트라니. 정말 최고였다. 심하게 덜렁이고 귀신 얘기를 좋아하는 것만 빼면.


우리는 중앙 현관 계단을 밟았다. 세라는 무게가 없는 것처럼 통통통 앞서 오르더니 계단이 꺾이는 구간에서 멈추고 돌아섰다.


“성 릴리 여학원 기숙사 생존수칙 셋!”

“잠깐만, 이번엔 내가 맞춰볼게. 밤에는 계단 숫자가 변한다, 맞지?”

“땡, 틀렸습니다.”


세라는 두 팔을 좌우로 교체해 X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정답을 밝혔다.


“정답은 계단에서 무언가 튕기는 소리가 나면 발밑을 보면 안 된다 입니다!”

“이번 건 좀, 특이하네.”


내가 예상한 괴담은 계단 숫자가 변하거나, 귀신이 발목을 잡거나, 밤에는 중앙 계단을 사용해선 안 된다 정도였다.


보통 중앙 계단 사용 금지 괴담은 학교 본관에 적용되기 때문에 기숙사엔 해당이 안 된다쳐도 이번 괴담은 특이했다. 계단에서 튕기는 소리가 들리면 밟을 수 있으니 발밑을 봐야하지 않을까? 그런데 보지 말라니?


“튕기는 소리가 나면 밟을 수 있으니까 위험하지 않아? 계단 오르내릴 때 아래보고 다니는 애들도 있으니까 일부러 보지 말라고 하면 위험할 것 같은데.”

“머리만 있는 귀신이 계단에서 놀고 있는데 눈이 마주치면 위험하거든. 그러니까 아래를 보면 안 돼.”

“흠, 그렇구나.”

“참고로 기숙사에 있는 계단엔 전부 적용되는 얘기니까 중앙 계단 말고 다른 계단에서도 금지야.”

“계단에서 아래 보고 걷는 애들은 어떻게 해?”

“그래서 보통은 내려갈 때 계단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내려가.”


세라는 시범을 보여주려는 듯 계단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내려갔다. 동화책에서 나오는 공주님처럼 우아했다.


나는 눈살을 찡그렸다. 이번 괴담은 계단에서 뛰지 못하게 하고 자세 안 좋은 애들을 교정하기 위한 게 아닌가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럼 다음으로 가자.”


그런 의심은 세라가 계단을 두 칸씩 겅중겅중 뛰어올라가는 걸 보고 확신으로 바뀌었다. 아마 이렇게 다니는 애들을 막기 위해서 생긴 괴담일 것이다.


세라가 다음으로 안내한 장소는 3층에 있는 휴게실이었다. 휴게실은 각 층마다 있지만 3층 휴게실은 베란다에 있어서 외출하기 싫지만 바깥 공기를 쐬고 싶을 때 좋아 보였다.


세라는 휴게실로 나가지 않고 휴게실 문을 가리켰다.


“성 릴리 여학원 기숙사 생존수칙 넷. 해가 지기 전에 3층 휴게실 문을 반드시 잠글 것.”

“해가 지기 전에?”


베란다 문을 잠그는 것이야 당연한 일인데 일몰 전이라는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 보통 이런 규칙은 일몰 전이란 애매한 기준 대신 8시 이후나 소등 시간 이후라는 명확한 기준을 두기 때문이다.


“보통 가까운 방 애들이 미리 잠그는데 어쩌다가 그러지 못할 때가 있어. 아니면 잠갔는데 풀리거나.”


세라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일몰 후에 3층 휴게실 문이 열려 있는 걸 발견하면 즉시 사감 선생님에게 알리고 해가 뜰 때까지 방을 나가면 안 돼. 누군가 문을 두드려도 절대 나가면 안 돼.”


세라는 분위기를 잡고 싶어했지만 나는 계단 괴담보다 쉽게 이번 괴담의 내막을 이해했다. 3층이지만 옛날 건물이다보니 외부 장식이 많아 붙잡거나 발 디딜 곳이 많다. 나무 잘 타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오르내릴 수 있는 높이였다.


예전에 외부인이나 야생동물이 침입한 게 아닐까? 외부인이든 야생동물이든 위험한 건 마찬가지니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주의 주던 것이 괴담으로 와전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음, 그렇구나. 밤에 벌레들이 빛을 보고 들어올 수 있으니 문을 닫아두는 게 좋긴 하겠네.”


나는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울창한 숲을 보고 말했다.


“벌레? 말도 마. 엄청 큰 옥색 나방이 나오는데 우리는 팅커벨이라고 불러.”


세라는 벌레 얘기가 나오자마자 기숙사 생활하면서 본 온갖 벌레 얘기를 늘어놓았다. 솔직히 귀신 얘기보다 벌레 얘기가 더 무섭고 소름끼쳤다.


세라는 우리 방이 있는 4층을 지나 옥상으로 올라갔다. 보통 학교에선 옥상으로 가는 문을 잠가놓지만 성 릴리 여학원 기숙사는 옥상을 개방해 정원으로 쓰고 있었다.

후원이 조경수 위주였다면 옥상 정원은 관상화 위주로 정원을 꾸며 알록달록하고 예뻤다. 곳곳에 티테이블이 놓여 있어 차를 마시기에도 좋아 보였다.


하지만 기분탓일까? 이상하게도 카메라 필터를 씌운 것처럼 알록달록한 꽃이 약간 빛바랜 듯 보였다. 가까이서 보면 놀랄 만큼 생생한데 멀리서 보면 생기가 없었다.

볕이 너무 강해도 꽃잎이 바랠 수 있다. 산성비를 맞으면 꽃잎이 바랜다. 나는 옛날 책에서 읽은 내용을 떠올리고 납득했다.


“성 릴리 여학원 기숙사 생존수칙 다섯. 혼자서 옥상 정원에 가지 마라.”

“위험하니까. 자살 방지.”

“꽃향기에 취해 눈을 뜰 수 없게 된다고 해.”

“꽃향기가 그렇게 짙은 것도 아니잖아. 자살 방지 목적이겠지.”


앞선 괴담에 비하면 시시한 수준이라 나는 투덜거리듯 말했다.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 소녀를 모아두었으니 자살 소동 한 두 번쯤 일어날 법하고, 옥상은 자살 꿈나무들의 주된 표적이었을 것이다.


“그럼 내려가자.”


나는 세라를 따라 내려갔다. 튕기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괜히 아래를 보지 싫어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계단을 밟았다.


“오늘은 일단 이걸로 끝. 방으로 가자.”

“생존수칙이 모두 몇 개인데?”

“일곱 개.”

“그리고 일곱 개를 전부 알면 죽는 거야?”

“뭐? 그럴 리가.”


세라는 배를 잡고 웃었다. 내 얘기가 재밌었다기 보단 원래 잘 웃는 성격인 듯 했다.


“나머지 두 개는 천천히 알려줄게. 첫날에 전부 알려줘서 네가 무섭다고 전학가면 안 되잖아. 기껏 생긴 룸메이트인데.”

“일곱 개인 거는 맞구나.”

“진짜 위험하고 반드시 지켜야하는 게 일곱 개고 그 외에도 자잘한 수칙이 있어. 예를 들면.”


세라는 눈동자를 굴리면서 시시한 괴담을 열거했다. 나는 그녀의 말을 건성으로 들으면서 복도 창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수업이 끝났는지 기숙사 현관으로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성 릴리 여학원의 교복은 검은색이었지만 다들 꽃처럼 화사하고 빛났다. 밝고 경쾌한 웃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4층까지 전달되었다.


텅 비었던 기숙사가 금세 북적였다.


“안녕, 세라. 걔가 룸메이트야? 룸메이트 생겨서 좋겠네?”

“안녕하세요, 선배! 응, 룸메 생겨서 너무 좋아요! 저녁 시간에 정식으로 소개할게요.”

“안녕하세요, 세라 선배. 같이 계신 분이 새로 전학 온 선배님이세요? 안녕하세요, 선배님!”

“응, 이따 저녁 시간에 제대로 소개할게.”


세라는 인기가 좋았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세라에게 친근하게 인사했고 세라는 상큼한 미소를 돌려주었다. 나도 얼떨결에 관심을 받게 되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세라는 여학교의 왕자님은 아니지만 학교의 인기인이 확실했다.


“안녕하세요, 언니.”


후배인 것일까. 뒤에서 상냥하고 부드러운 인사말이 들렸다. 목소리는 방울이 울리는 듯 맑고 귀여웠다.


나는 전학생이니 세라에게 건넨 인사일 것이다. 나는 몸을 비켜 후배가 세라와 마주볼 수 있도록 배려해주려 했다.


하지만 세라는 내 배려를 무시하고 냉정하게 고개를 돌리더니 내 손을 잡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어? 잠깐만, 쟤가 너한테 인사.”

“쉿. 아무 말도 하지 마. 무시해.”


세라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입에 검지 손가락을 올리더니 방문을 열고 나를 떠밀었다. 나는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큰소리를 냈다.


“갑자기 무슨 짓이야! 후배의 인사는 왜 무시해?”

“성 릴리 여학원 기숙사 생존수칙 여섯.”

“그 재미 없는 괴담은 그만 해!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인사는 다 받아주더니 갑자기 무시하는 건 무슨 경우야! 설마 집단 따돌림이야?”


세라같이 쾌활하고 털털한 아이가 집단 따돌림에 가담할 정도면 상황이 심각하단 이야기다. 그냥 학교에서 집단 따돌림이 일어나도 답답한데 도피처 없는 기숙사에서 집단따돌림이 일어난다고? 농담처럼 얘기한 옥상 투신이 사실이 될 가능성도 있었다.


“쉿, 클라라.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게 아니면 왜 인사를 무시해!”

“성 릴리 여학원에선 언니를 안 써.”

“그런 게 어딨어. 언니라고 부르고 싶으면 마음대로 부르는 거지.”

“적어도 기숙사에선 아무도 안 써. 못 쓰게 해. 우린 무조건 선배나 이름으로만 불러. 언니는 쓰지 않아.”

“말이 되는 핑계를 대야지!”


세라는 문을 열고 나가려던 나를 붙잡고 벽에 밀쳤다. 힘이 장사라 도저히 벗어날 수 없었다.


세라는 진정하라는 듯 내 볼을 어루만졌다. 아름다운 얼굴이 너무 가까워서 깜짝 놀랐다.


“성 릴리 여학원 기숙사 생존수칙 여섯. 복도에서 언니라고 인사하는 소리가 들리면 반응하지 마라. 끌려가서 진짜 언니가 되는데, 출몰 확률이 낮거든. 나중에 얘기해주려고 했는데 하필 딱 마주쳤네.”

“귀신 핑계로 따돌리는 게 아니고?”

“진짜 아니라니까. 나 그런 거 싫어해.”


세라의 푸른 눈은 진실해 보였지만 나는 믿을 수 없었다. 분명히 뒤에서 인사하는 소리를 들었고 그걸 무시하는 걸 봤기 때문이다.


내가 믿지 못하자 세라는 계속 나를 설득하려다가 포기했다. 그녀는 설득 방식을 바꿨다.


“그럼 이렇게 하자. 우리 기숙사에선 규칙상 언니를 쓰지 않아. 그래서 언니가 들어간 인사는 모두 무시하기로 했어. 이럼 됐지?”

“핑계로 따돌리는 게 아니고?”

“진짜 아니라니까. 우리 기숙사는 귀신이 많이 나와서 기숙사생끼리 관계가 끈끈한 편이야.”

“그렇게 끈끈한 사회에서 벌어지는 따돌림이 더 무섭다고 했어.”

“정말 아니야. 맹세할 수 있어.”


세라의 신실한 눈빛에 나는 더 따지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하기야, 만약 그녀의 말이 추잡한 따돌림을 덮으려는 거짓말이라고 해도 이제 막 전학 온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 외부인이다. 내부 사정을 모르면서 무작정 비난하고 거부할 수 없었다.


“알겠어.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한 것 같아. 미안해.”

“괜찮아. 나도 그런 거 진짜 싫어해.”


내가 사과하자 세라는 상쾌하게 웃고 손을 내밀었다. 손을 잡자 그녀는 손을 힘차게 흔들었다. 나는 세라가 조금 더 마음에 들었다.



**



저녁 시간에 나는 기숙사생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자기소개를 해야 했다. 정말 하고 싶지 않았지만 다른 학생들도 입소할 때 했다니 피할 수 없었다.


기숙사 밥맛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나는 기숙사 내 학생회를 소개받아 그토록 원한 평범한 기숙사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세탁실은 1층과 3층에 있고, 대욕탕은 1층에 있어. 아무래도 1층에 시설이 밀집된 편이야. 4층이라 다니기 힘들겠지만 남는 방이 전부 4층 뿐이라 참아줘.”


남는 방이 있다는 소리에 나는 불쑥 물었다.


“방을 혼자 쓸 수도 있나요?”

“응, 근데 혼자 쓰는 사람은 드물어. 혼자는 무서우니까 같이 쓰는 걸 선호하는 편이지. 세라가 룸메이트 생겼다고 엄청 좋아하더라.”

“세라는 무서워할 것 같지 않던데요.”


무서워하기는커녕 괴담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기숙사를 안내해주던 선배는 피식 웃었다.


“이전 룸메이트가 무섭다고 방을 바꿨거든. 세라는 인기가 좋으니까 같은 방 쓰고 싶어한 아이들이 많았는데 전부 무섭다고 다시 방을 바꿨, 어머. 세라가 말하지 말랬는데.”


선배는 입술을 오므렸다. 나는 귀를 의심했다. 세라가 덜렁이여서가 아니라 무서워서 방을 바꿨다고? 겉으로만 왕자님같고 실은 털털이에 덜렁이인 세라가 폭력배라도 되는 것일까?


아니면 첫인상과 다르지만 여전히 매력 넘치는 세라 때문에 룸메이를 다른 학생들이 질투해서 그런 건 아닐까? 머릿속에서 세라를 처음 봤을 때 떠올린 순정만화가 다시 연재되기 시작했다.


“세라가 방을 안 바꾸는 걸 보면 괜찮지 않을까요?”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우리 기숙사에 괴담이 많긴 한데 다 납득가는 내용이잖아?”

“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언니.”


선배가 하는 말이 내 생각과 비슷해 친근하게 언니라고 부르고 말았다. 그러자 선배는 미소를 지우고 입을 다물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보는 선배의 모습은 세라가 내내 설명해준 괴담보다 무서웠다. 나는 슬쩍 시선을 피하고 고쳐 말했다.


“고마워요, 선배.”


선배는 그제야 미소를 되찾고 상냥하게 말했다.


“별말씀을.”


기숙사에서 언니를 쓰면 무시당한다. 집단따돌림이 아니라 엄격한 규칙임이 밝혀져 나는 안심했다.


**


저녁 점호는 8시, 소등은 12시였다. 방 밖으로 나가는 건 소등 전까지 허용되었으며 기숙사 밖으로 나가는 건 8시까지만 허용되었다.


점호는 생각보다 느슨했다. 사감 선생님이 아니라 기숙사 내 학생회에서 점호를 해서 그런지 기숙사 내 학생 숫자만 맞으면 이후는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다.


“가끔 기숙사 내에 사람이 더 많을 때도 있는데, 어쩔 수 없지.”

“외부인이 들어온 거면 어떡해?”

“학생 수가 적은 것보단 낫잖아.”


세라는 태평하게 말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늘어난 외부인이 남자나 어른이라면 당연히 문제삼을 것이다. 같은 학생이니까 관대하게 넘어가나보다 생각했다.


점호를 마친 후 나는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갑작스런 전학에 기숙사 생활, 아름다운 룸메이트까지. 온통 긴장의 연속이었다. 피곤해서 일찍 자고 싶었다.


“클라라, 사실은.”

“무슨 일이야?”

“이 방에서 귀신이 나오거든.”

“제발. 마지막 일곱 번째 생존수칙이야?”


내가 이마를 짚으며 묻자 세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닌데 귀신이 나와. 그냥 나오기만 할 뿐이니까 너무 무서워 하지마.”


생존수칙은 목숨을 위협하지만 방에 나오는 귀신은 목숨을 위협하지 않는다고 세라가 부연설명했다. 나는 하품을 하며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진짜 나오기만 할 뿐인데 다들 무서워하더라고. 아니면 같이 잘래?”


피곤한 나를 위해 일찍 자겠다던 세라가 자신의 침대를 가리켰다. 나는 진지하게 고개를 저었다.


“나 다른 사람이랑 같이 못 자.”

“알겠어. 그래도 무서우면 나한테 와.”


세라의 이전 룸메이트들이 방을 나간 원인이 결국 귀신이었다니. 어이없었다. 정말 귀신이 나오면 세라가 왜 이 방을 혼자 쓰겠어? 천장에서 쥐가 돌아다니거나 바람에 창문 흔들리는 소리를 듣고 괴담이 가득한 기숙사에 예민해진 아이들이 귀신이라고 오해한 게 틀림없다.


세라가 괜찮은 이유? 세라는 태평하고 대범한 성격이라 괜찮은 게 아니었을까?


나는 베개에 뒤통수를 누르고 눈을 감았다. 베개는 너무 푹신해서 딱딱한 베개를 선호하는 나는 잠을 잘 못 이룰 것 같았지만 너무 피곤해서 의식이 저절로 멀어졌다.

가까이서 시선이 느껴졌다.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설핏 잠에서 깬 나는 시선을 무시하고 계속 자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너무 신경쓰였다.


세라일까? 세라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일까? 세라도 자고 있을 텐데? 어쩌면 세라는 몽유병이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룸메이트들이 모두 나갔나? 몽유병은 위험하니까 혼자 자게 두지 않을텐데? 방을 나가지 않아서 혼자 자게 두는 건가?


무시하고 그냥 잠들고 싶은데 시선이 너무 집요해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다. 나는 결국 이불을 쥐어뜯으며 눈을 떴다.


그리고 나는 피처럼 붉은 눈과 마주쳤다.


“꺄아아아아아아악!”


나는 이불로 몸을 숨기고 있는 힘껏 비명을 질렀다. 귀신이다. 귀신이 있었다. 누군가의 분장이나 장난감이 아니라 정말로 핏발 선 흉측한 귀신이 침대 옆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피처럼 붉은 눈은 과장이 아니라 진짜였다. 검은자 없이 피처럼 붉은 눈이 거기 있었다. 머리는 먼지가 가득 앉은 거미집을 뭉쳐둔 것처럼 헝클어지며 더러웠고 옷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아야 정상인데, 사물의 선의 흐릿해야 하는데 귀신은 어둠 속에서 뚜렷했다.


기숙사 생활 첫날이니 다른 아이들이 장난친 것일지도 모른다고? 아니다, 그건 정말 귀신이었다. 보는 순간 전율이 일었고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건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니라고.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지르던 나는 누군가 나를 끌어안는 감각에 미쳐 날뛰었다.


“으아아아악! 놔! 놔아!”

“진정해, 클라라! 나야, 세라야!”

“으아아악, 세라, 귀신, 귀신이!”


나를 끌어안은 이는 귀신이 아니라 세라였다. 세라는 내가 갑옷처럼 두른 이불을 벗기고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세라의 어깨에 턱을 괴고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인간의 온기가 피부에 닿으니 살 것 같았다.


“진정해, 너무 놀라지 마. 그럼 더 괴롭힌단 말이야.”

“귀신! 귀신이! 귀신이 나왔어!”

“응, 나온다고 했잖아. 자는 걸 구경하다가 사라지니까 안심해. 너무 무서워하면 해꼬지를 하니까 무시하는 게 좋아.”

“진짜 귀신이 나왔는데! 안심하라고? 무시하라고?”


나는 세라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얘가 지금 제정신인지 귀신에 홀린 건지 의심스러웠다. 환하게 불을 키고 싶었지만 소등 시간이 지나 불을 킬 수 없었다. 나는 책상 위 스탠드를 켜서 침대로 가져왔다. 귀신은 빛이 생기자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귀신이 나오는데 방에서 혼자 지낸 거야? 남는 방이 있다고 들었는데, 설마 거기도.”

“빈 방은 거의 다 나올 걸. 안 나오는 방도 있겠지만 그건 자 봐야 알지.”

“그럼 귀신 안 나오는 방을 확인하고 거기서 자야지! 여지껏 계속 귀신이랑 같이 산 거야?”

“착한 귀신이야. 반응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방 청소를 해준다고.”


세라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방을 둘러보았다. 그렇다. 겨우 하루 보았지만 세라는 많이 털털한 편이다. 교복은 벗어서 아무렇게나 집어던지고 책도 펼쳐놓은 걸 그대로 엎었다. 빗질을 한 다음에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치우지 않았고 쓴 수건도 바닥에 던져 두었다.


그런 세라의 방이 단정하고 깔끔했던 이유는?


귀신이 청소해줘서!


정신이 아득해져서 나는 관자놀이를 지압했다. 여태 건성으로 들었던 괴담들이 떠오르고 개중 진실이 있을지도 모르며 어쩌면 전부 진실일 수 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나, 다른 방에서 잘게.”


나는 이불로 몸을 싸매고 비틀비틀 일어났다. 아직도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세라는 나를 말렸다.


“클라라, 소등 후엔 방 밖으로 나가면 안 돼. 지금은 그들의 시간이거든.”


나는 그들이 뭐냐고 묻는 대신 침대에 걸터 앉았다. 세라는 내 어깨와 머리를 쉬지 않고 쓰다듬어 주었다.


“방 바꿀 거야?”


그녀는 잘 놀다가 물벼락 맞은 강아지처럼 나를 보았다. 날이 밝자마자 방을 바꾸려던 나는 그녀의 시무룩한 표정에 말문이 막혔다.


“제발, 그냥 같이 있으면 안 돼? 혼자는 심심하단 말이야.”

“같이 방을 바꾸면 되잖아.”

“그치만 다른 방에 있는 귀신들도 청소해준다는 보장이 없는 걸. 다들 더럽다고 나갔어.”


알고보니 세라의 룸메이트는 귀신이 무서워서가 절반, 세라의 털털함과 지저분함을 참지 못해해서 절반 방을 바꿨단다.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찾지 못하는 나를 세라가 자신의 침대 쪽으로 끌어당겼다.


“같이 자면 안 무서울 거야. 응?”


은은한 불빛 아래 촉촉하게 젖은 그녀의 눈빛을 보고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는가. 나는 말없이 세라가 당기는 대로 움직여 그녀의 침대에 누웠다. 같은 침대, 같은 이불보, 같은 베갯잇이지만 내 침대와 다른 냄새가 났다.


“이러면 안 무서울 거야.”


세라는 나를 품에 안고 스탠드를 껐다. 어둠이 돌아오자 나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따뜻한 세라의 온기가 비명을 막았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끌어안고 있으니 덜 무서웠다.


눈을 감았더니 잠이 오는 것 같았다. 세라의 규칙적인 숨소리에 최면에라도 걸린 것처럼 잠이 몰려오던 와중, 시선을 느꼈다.


아까 전의 그 귀신이다. 귀신이 돌아왔다.


절로 몸이 굳었다. 세라는 작은 목소리로 괜찮아를 반복하며 내 등을 토닥였다. 귀신이 우릴 내려다보고 있는데 괜찮냐는 말이 턱끝까지 치밀었지만 반응하면 해꼬지한다는 말이 떠올라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괜찮아, 괜찮을 거다. 해가 뜨면 귀신은 사라질 거야.


거칠어진 숨을 억지로 세라와 맞췄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 써서 시선을 차단하고(그래도 느껴졌지만) 세라의 품에 파고들었다.


정말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지만, 놀랍게도 나는 잠들었다.


“좋은 아침!”


세라의 활기찬 아침 인사에 나는 퍼뜩 잠에서 깨었다. 아침이 될 때까지 그녀의 품에서 오들오들 떨것이라 생각했는데 어느 새 잠들었던 것이다.


세라는 지난 밤 머리카락이 흩뿌려져 있던 바닥을 가리켰다.


“봐바! 청소하고 갔어!”


세라의 말대로 방은 어제 잠들기 전보다 깨끗했다. 바닥에 흩뿌려져있던 머리카락이 사라졌고 대강 꽂았던 책들은 질서정연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교복은 구김 없이 다려져 옷걸이에 걸려 있고 시들하던 꽃병의 꽃은 새 꽃으로 갈려 있었다.


“자는 것만 보게 해주면 청소를 해줘! 진짜 친절한 귀신이잖아. 그러니까 너도 같이 살자. 방 옮기지 마, 응?”

“생기를 빨아먹고 있거나, 저주 같은 걸 하고 있을 수도 있잖아.”

“그럼 내가 먼저 알았겠지. 클라라, 제발. 응? 매일 같이 자면 되잖아.”


화창한 아침 햇살 아래 세라의 푸른 눈동자가 이슬처럼 영롱하게 빛났다. 살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이가 내게 매달릴 일이 얼마나 될까? 아마 이번이 내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나는 예언자가 아님에도 밤마다 후회하리라 확신했다. 그럼에도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와아! 정말 좋아! 우리 잘 지내자!”


세라는 어린아이처럼 활짝 웃으며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어색하게 손을 올려 그녀를 마주 안았다.


작가의말

로망스가 이북 출간되었습니다. 많은 관심과 구매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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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단편 18. 동양풍, 로맨스 판타지, 진지 24.05.03 12 3 43쪽
17 단편 17. 무협,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 +1 24.03.26 19 3 6쪽
16 단편 16. 로맨스 판타지, 진지 +2 23.09.08 54 1 81쪽
15 단편 15. 판타지, 진지 23.04.07 48 3 22쪽
14 단편 14. 로맨스 판타지, 진지 +1 23.04.02 50 3 43쪽
13 단편 13. 판타지, 환생, 개그 22.12.14 57 4 23쪽
12 단편 12. 무협, 개그, 노근본 22.11.25 52 5 11쪽
11 단편 11. 현대, 판타지, 개그 22.10.19 53 4 33쪽
10 단편 10. 판타지, 개그 22.10.13 47 4 7쪽
9 단편 9. 현대, 판타지, 개그 22.07.22 54 4 35쪽
» 단편 8. 오컬트, 개그 22.06.03 59 3 31쪽
7 단편 7. 무협, 로맨스, 진지 +1 22.02.26 71 5 54쪽
6 단편 6. 판타지, 개그 +1 22.01.29 75 7 24쪽
5 단편 5. 로맨스 판타지, 진지 +1 21.09.16 177 13 58쪽
4 단편 4. 로맨스 판타지, 개그 21.09.16 158 10 22쪽
3 단편 3. 판타지, 진지 21.09.16 155 8 20쪽
2 단편 2. 판타지, 개그 21.09.16 168 8 24쪽
1 단편 1. 판타지, 개그 21.09.16 354 1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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