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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 님의 서재입니다.

내 일상


[내 일상] 금사 목종 영가

母弟穆宗,諱盈歌,字烏魯完,景祖第五子也。南人稱揚割太師,又曰揚割追諡孝平皇帝,號穆宗,又曰揚割號仁祖。
동복 아우 목종(穆宗)은, 휘(諱)는 영가(盈歌)로, 자(字)는 오로완(烏魯完)이며, 경조(景祖/오고내烏古乃)의 5남이다.
남인(南人/송나라 사람)은 태사(太師) 양할(揚割)로 칭(稱)하였으며, 
또 말하길 효평황제(孝平皇帝)로 추시(追諡)된 양할(揚割)이라 하였으며,
호(號)는 목종(穆宗)인데, 또 말하길 인조(仁祖)로 불리는 양할(揚割)이라 하였다.

金代無號仁祖者,穆宗諱盈歌,諡孝平,「盈」近「揚」,「歌」近「割」,南北音訛。
금나라 시기에 인조(仁祖)로 불리는 이는 없었으니, 목종의 휘는 영가이고, 시호는 효평인데, 
영(盈)은 양(揚)과 비슷하고, 「가(歌)」는 「할(割)」과 비슷하니, 남북(南北)의 음이 와전 되었기 때문이다.
*현 중국발음 영(盈 Ying) ↔ 양(揚 Yang), 가(歌 Gē) ↔ 할(割 Gē)

遼人呼節度使爲太師,自景祖至太祖皆有是稱。凡《叢言》、《松漠記》、張棣《金志》等書皆無足取。
요나라 사람은 태사(太師)를 절도사(節度使)라 부르니, 경조(景祖)에서 태조(太祖/아골타阿骨打)에 이르기까지 이를 칭하였다.
무릇 《총언(叢言)》과 《송막기(松漠記)》와 장체(張棣)의《금지(金志)》등의 서적에서 취하였는데 충분하지 않다.

穆宗,遼重熙二十二年癸巳歲生。肅宗時擒麻產,遼命穆宗爲詳穩。大安十年甲戌,襲節度使,年四十二。
以兄劾者子撒改爲國相。
목종은, 요(遼) 중희(重熙/흥종興宗의 연호) 22년(1053년) 계사년(癸巳年) 생이다.
숙종(肅宗/파자숙頗刺淑)이 마산(麻產)을 사로 잡을 당시, 요에서 목종을 상온(詳穩/요 관직)으로 삼았다.
대안(大安/도종道宗의 연호) 10년(1094년) 갑술년(甲戌年)에, 절도사를 이어 받았으니, 42세 였다.
형 핵자(劾者/부 핵리발의 장남)의 아들 살개(撒改)를 국상(國相)으로 하였다.



三年丙子,唐括部跋葛勃堇與溫都部人跋忒有舊,跋葛以事往,跋忒殺跋葛。
使太祖率師伐跋忒,跋忒亡去,追及,殺之星顯水,紇石烈部阿疏、毛睹祿阻兵爲難,
穆宗自將伐阿疏,撒改以偏師攻鈍恩城,拔之。
3년째 되던 병자년(丙子年/1096년)에, 당괄부(唐括部) 발갈(跋葛) 발근(勃堇/여진 관명)이 
온도부(溫都部) 사람 발특(跋忒)과 친분이 있어, 발갈(跋葛)이 일이 있어 갔는데, 발특이 발갈을 죽였다.
태조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발특을 토벌하게 하였는데, 발특이 도망가니, 뒤쫓아 따라붙어, 성현수(星顯水)에서 죽였는데,
흘석열부(紇石烈部) 아소(阿疏)와 모도록(毛睹祿)이 병력을 막고 난을 일으키자,
목종이 장차 아소를 토벌하고자, 살개(撒改)에게 일부 병력을 주어 둔은성(鈍恩城)을 공격하게 하여, 빼앗았다.

阿疏初聞來伐,乃自訴於遼。遂留劾者守阿疏城,穆宗乃還。
아소가 처음에 토벌군이 온다고 들었을 때, 이에 요나라에 호소하였다.
드디어 핵자가 아소성을 수비 하고자 머물렀는데, 목종이 이에 돌아오게 하였다.


會陶溫水、徒籠古水紇石烈部阿閣版及石魯阻五國鷹路,執殺遼捕鷹使者。遼詔穆宗討之,阿閣版等據險立柵。
方大寒,乃募善射者操勁弓利矢攻之。數日,入其城,出遼使存者數人,俾之歸。
도온수(陶溫水)와 도롱고수(徒籠古水)에서 흘석열부 아각판(阿閣版)이 석로(石魯)와 함께 회합하여 
오국(五國)의 응로(鷹路/매 조공로)를 막고, 요의 매사자(使者)를 잡아 죽였다.
요에서 조(詔)를 내려 목종에게 토벌케 하니, 아각판등이 험한곳에 근거하여 책(柵)을 세웠다.
바야흐로 혹한이 오자, 이내 활 잘 쏘는 자들을 모아 경궁(勁弓/탄력이 좋은 활)을 잡고 날카로운 화살로 공격하였다.
수일후, 그성에 들어 가, 요의 사자가 남아 있는 수명을 데리고 나와, 데려가게 하였다.


統門、渾蠢水之交烏古論部留可、詐都與蘇濱水烏古論敵庫德,起兵于米里迷石罕城,納根涅之子鈍恩亦亡去,於是兩黨作難。
통문(統門)과 혼준수(渾蠢水)가 만나는 오고론부(烏古論部)의 유가(留可)와 사도(詐都)가,
소빈수(蘇濱水) 오고론(烏古論) 부족의 적고덕(敵庫德)과 함께 미리(米里)의 미석한성(迷石罕城)에서 병을 일으키고,
납근열(納根涅)의 아들 둔은(鈍恩) 역시 도망가니, 이로써 두 무리가 난을 일으켰다.

八月,撒改爲都統,辭不失、阿里合懣、斡帶副之,以伐留可、詐都、塢塔等。謾都訶、石土門伐敵庫德。
8월에, 살개를 도통(都統)으로 삼고, 사불실(辭不失)과 아리합만(阿里合懣) 및 알대(斡帶)를 부장(副將)으로 삼아,
이로서 유가와 사도, 오탑(塢塔)등을 토벌하게 하였다.
만도가(謾都訶)와 석토문(石土門)은 적고덕(敵庫德)을 토벌하였다.

撒改欲先平邊地城堡,或欲先取留可,莫能決,乃命太祖往。
살개는 먼저 변방의 성보(城堡/성과 보,요새)를 평정할지, 혹은 먼저 유가를 취할지, 능히 결단할 수 없어, 
이에 태조에게 명하여 오게 하였다.

鈍恩將援留可,乘謾都訶兵未集而攻之。
石土門軍既與謾都訶會,迎擊鈍恩,大敗之,降米里迷石罕城,獲鈍恩、敵庫德,釋弗殺。
둔은이 장차 유가를 구원하고자, 만도가의 병력이 아직 모이기 전에 공격하려 하였다.
석토문군은 이미 만도가를 만나 함께 하였는데, 둔은을 영격(迎擊/맞 받아침)하여, 크게 깨트렸으니, 
미리의 미석한성이 항복하여, 둔은과 적도덕을 생포하니, 용서하지 않고 죽였다.

太祖度盆搦嶺,與撒改會,攻破留可城,留可已先往遼矣,盡殺其城中渠長。
還圍塢塔城,塢塔先已亡在外,城降於軍。詐都亦降于蒲家奴,於是撫甯諸路如舊時。
태조가 분닉령(盆搦嶺)을 넘어, 살개를 만나 함께, 유가의 성을 공파(攻破/공격하여 파괴함)하니, 
유가는 이미 먼저 요나라로 가버렸고, 그 성중의 거장(渠長/우두머리)를 모두 죽였다.
다시 오탑의 성을 포위하였는데, 오탑은 이미 먼저 외국으로 도망가 버려, 성이 군대에게 항복하였다.
사도 역시 포가노(蒲家奴)에게 항복하니, 이에 어루만져 편안하게 하여 여러 지방을 옛날과 같이 하였다.



太師因致穆宗,教統門、渾蠢、耶悔、星顯四路及嶺東諸部自今勿復稱都部長。
태사직이 목종에 이르게 되자, 통문(統門)과 혼준(渾蠢), 야회(耶悔), 성현(星顯)의 4로(路)와 더불어 
영동(嶺東)의 각 부족은 이후 부터는 다시는 도부장(都部長)을 칭하지 못하게 하였다.

命勝官、醜阿等撫定乙離骨嶺注阿門水之西諸部居民,又命斡帶及偏裨悉平二涅囊虎、二蠢出等路寇盜而還。
승관(勝官)과 추아(醜阿)등에 명하여 을리골령(乙離骨嶺)과 주아문수(注阿門水)의 서쪽 각 부에 사는 백성들을 
어루만져 평정하게 하였고, 
또 알대(斡帶)와 편비(偏裨/부장) 이열낭호(二涅囊虎)와 이준출(二蠢出)등에게 명하여 길가의 도적떼를 
남김없이 평정하고 돌아오게 하였다.




七年庚辰,劾者尚守阿疏城,毛睹祿來降。阿疏猶在遼,遼使使來罷兵。
7년째 되던 경진년(庚辰年/1100년)에, 핵자(劾者)가 아소성(阿疏城)을 주관하여 수비하고 있었는데, 
모도록(毛睹祿)이 항복해 왔다.
아소가 이미 요나라에 있었는데, 요에서 사자를 보내 파병(罷兵/병사를 물림)하게 하였다.

未到,穆宗使烏林答石魯往佐劾者,戒之曰
「遼使來罷兵,但換我軍衣服旗幟與阿疏城中無辨,勿令遼使知之。」
因戒劾者曰:
「遼使可以計卻,勿聽其言遽罷兵也。」
아직 도착하기 전에, 목종이 오림답(烏林答)의 석로(石魯)로 하여금 핵자를 가서 돕도록 하고, 경계하며 말하길
「요사신이 파병하기 위해 오는데, 다만 우리의 군의 의복과 기치(旗幟/군기)를 바꾸어 아소성 무리와 분별할 수 없게 한다면,
   요사신이 안다해도 명령하지 못할것이다
핵자가 분부를 받고 하는 말이
「요사신은 계책으로 물러나게 하는것이 옳으니, 그말을 쫓아 군을 물리지 않겠다.

遼使果來罷兵,穆宗使蒲察部胡魯勃堇、邈遜孛堇與俱至阿疏城。
요사신이 마침내 군을 물리기 위해 당도하자, 
목종은 포찰부(蒲察部) 호로(胡魯) 발근(勃堇/여진 관명)과 막손(邈遜) 패근(孛堇/여진 관명)으로 하여금 
아소성에 더불어 함께 이르게 하였다.

劾者見遼使,詭謂胡魯、邈遜曰:
「我部族自相攻擊,幹汝等何事?誰識汝之太師?」
乃援創刺殺胡魯、邈遜所乘馬。
핵자가 요사신을 보고, 호로와 막손을 속여 말하길, 
우리 부족을 공격하는, 너희들은 대체 누구냐? 누가 너의 태사냐?
이내 창을 잡아 호로와 막손이 탄말을 찔러 죽였다.

遼使驚駭遽走,不敢回顧,徑歸。居數日,破其城。狄故保還自遼。在城中,執而殺之。
요 사신이 경해(驚駭/몹시 놀람)하여 급히 달아나니, 감히 돌아보지 못하여, 경귀(徑歸/임지를 버리고 돌아감)하였다.
몇일후에, 그성을 깨뜨렸다. 적고보(狄故保)가 요에서 돌아와 있었다. 성안에 있어, 잡아 죽였다.

阿疏復訴於遼。遼遣奚節度使乙烈來。穆宗至來流水興和村,見乙烈。
問阿疏城事,命穆宗曰:
「凡攻城所獲,存者復與之,不存者備償。」
아소가 다시 요에 호소하였다. 이에 요에서는 해족(族) 절도사 을열(乙烈)를 파견하여 왔다.
목종은 내유수(來流水) 흥화촌(興和村)에 이르러, 을렬을 만났다.
아소성 일을 묻자, 목종이 명하여 말하길
「무릇 성을 공격하여 소획(所獲/싸움을 통해 획득)한것은, 남아 있는 자에게 모두 돌려 주었으며,
   남아 있는 자들에게 비상(備償/배상)케 하지 않았다.

且征馬數百匹。穆宗與僚佐謀曰:
「若償阿疏,則諸部不復可號令任使也。」
또 말 수백필을 취하였다. 목종이 요좌(僚佐/하급관리)를 속여 말하길
만약 아소에게 돌려준다면, 곧 각부족을 다시 호령(號令)의 임사(任使/임무를 책임짐)을 할 수 없게 될것이다.

乃令主隈、禿答兩水之民陽爲阻絕鷹路,復使鱉故德部節度使言于遼曰:
「欲開鷹路,非生女直節度使不可。」
이어 주외(主隈)와 독답양수(禿答兩水)의 백성으로 하여금 응로(鷹路/매 조공로)를 끊고 막히게 하고, 
다시 별고덕부(鱉故德部)의 절도사가 요에게 하는 말이
「응로를 열고자 한다면, 생여진(生女直) 절도사가 아니면 불가(不可)합니다.

遼不知其爲穆宗謀也,信之,命穆宗討阻絕鷹路者,而阿疏城事遂止。
穆宗聲言平鷹路,畋于土溫水而歸。
是歲,留可來降。
요는 그것이 목종의 모략임을 알지 못했으니, 신뢰하여, 목종에게 응로를 막은 자를 토벌하라 명하니, 
이로써 아소성의 일은 드디어 멈추게 되었다.
목종이 응로를 평정 했다고 성언(聲言/소리내어 말함)하고, 토온수(土溫水)에서 사냥하다가 돌아 왔다.
이해에, 유가(留可)가 항복하였다.




八年辛巳,遼使使持賜物來賞平鷹路之有功者。
8년째 되던 신사년(辛巳年/1101년)에, 
요가 사자를 보내 응로를 평정함에 있어 공을 세운 자에게 포상으로 사물(賜物/임금의 하사품)을 내리게 하였다.



九年壬午,使蒲家奴以遼賜,給主隈、禿答之民,且修鷹路而歸。
9년째 되던 임오년(壬午年/1102년)에, 포가노(蒲家奴)로 하여금 요의 하사품을, 
주외(主隈)와 독답(禿答)의 백성에게 주게 하니, 또한 응로가 다시 통하게 되었다.


冬,蕭海里叛,入於系案女直阿典部,遣其族人斡達剌來給結和,曰:
「願與太師爲友,同往伐遼。」穆宗執斡達剌。
겨울에, 소해리(蕭海里/요의 귀족)가 배반 하였는데, 여진의 아전부(阿典部) 경계로 들어와, 
그 부족인 알달랄(斡達剌)을 파견하여 화친을 맺고자, 하는말이
「원컨데 태사와 벗이 되어, 요를 칠때 같이 가겠나이다.
하니 목종이 알달랄을 사로 잡았다.

會遼命穆宗捕討海里,穆宗送斡達剌於遼,募軍得甲千餘。女直甲兵之數,始見於此,蓋未嘗滿千也。
요에서 목종에게 해리(海里)를 잡아 죽이라 명하니, 목종이 알달랄을 요에 보냈으며, 
갑옷 천여벌을 획득하고 군을 모집하였다. 여진의 갑병(甲兵)의 수가, 비로서 이에 이르러서야, 천여명이 되었다.

軍次混同水,蕭海里再使人來,復執之。既而與海里遇。
군이 다음에 혼동수(混同水)로 향하였는데, 소해리(蕭海里)에서 재차 사자를 보내오니, 다시 사로잡았다.
이윽고 해리와 조우하게 되었다.

海里遙問曰:
「我使者安在?」
對曰:
「與後人偕來。」
海里不信。
해리가 멀리서 묻기를
「우리의 사자는 잘 있는가?
대답하여 말하길
뒤사람과 함께 올것이다.」하니
해리가 믿지 않았다.

是時,遼追海里兵數千人,攻之不能克。穆宗謂遼將曰:
「退爾軍,我當獨取海里。」
이때, 요가 해리병(海里兵) 수천인을 추격하여, 공격 하였으나 능히 이길수 없었다.
목종이 요 장수에게 아뢰어 말하길
「그대의 군은 퇴각하고, 내가 혼자서 해리를 취해 보겠소.

遼將許之。太祖策馬突戰,流矢中海里首,海里墮馬下,執而殺之,大破其軍。
使阿離合懣獻馘於遼。金人自此知遼兵之易與也。
요의 장수가 허락하였다. 태조가 말을 채찍질 하여 돌전(突戰)하였는데, 
유시(流矢/누가 쏜 화살인지 모름)중에 해리의 우두머리, 해리를 말아래로 떨어 뜨리니, 잡아 죽여, 그 군을 대파(大破)하였다.
아리합만(阿離合懣)으로 하여금 요에 헌괵(獻馘/적장의 머리를 바침)하게 하였다.

是役也,康宗最先登,於是以先登並有功者爲前行,次以諸軍護俘獲歸所部。
穆宗朝遼主於漁所,大被嘉賞,授以使相,錫予加等。
이일은, 강종(康宗/오아속)을 제일로 기재하고, 이어 공이 있는자를 기재 하였으며,
다음은 각군에서 사로잡은 부획(俘獲/포로)은 그 부족에게 나눠 주었다.
목종이 요의 임금을 알현하자 , 크게 베풀고 칭찬 하였으며, 
사상(使相/관직, 재상이 추가된 절도사)을 수여 하였하여, 등급을 올려 주었다.



十年癸未二月,穆宗還。遼使使授從破海里者官賞。高麗始來通好。
10년째 되던 계미년(癸未年/1103년) 2월에, 목종이 돌아 왔다.
요가 사자를 보내 해리를 깨뜨린 공을 쫓아 벼슬을 내려 주었다.
고려와 비로소 통호(通好/사이 좋게 지냄)하였다.

十月二十九日,穆宗卒,年五十有一。
初,諸部各有信牌,穆宗用太祖議,擅置牌號者置於法,自是號令乃一,民聽不疑矣。
10월 29일, 목종이 졸(卒)하니, 수는 51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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