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의(李資義)1)는 중서령(中書令)을 지낸 이자연(李子淵)의 손자이며 시중(侍中)을 지낸 이정(李頲)2)의 아들이다. 선종(宣宗) 때에 거듭 승진해 호부상서(戶部尙書)가 되었으며 헌종(獻宗) 원년(元年, 1095)에는 중추원사(中樞院使)로 임명되었다.
애초 선종이 상서(尙書) 이석(李碩)3)의 딸을 왕후4)로 삼아 왕(헌종)을 낳았으나 그 후 다시 이자의의 누이를 원신궁주(元信宮主)로 맞아들여 한산후(漢山侯) 왕윤(王昀)을 낳았다. 왕이 유약한데다 병까지 있어 국정을 처결하지 못하니 모후(母后 : 사숙태후)가 국사(國事)를 마음대로 하는 바람에 신하들이 그 사이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자의는 재물 욕심이 많았으며 무뢰한 용사들을 모아 말타기와 활쏘기를 일삼으면서 늘,
“주상께서 병이 있어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판에 외부에서 왕위를 엿보는 자5)가 있다. 너희들은 힘을 다해 한산후를 받들어 왕위가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지 않도록 하라.”
고 부추겼다. 그 후 병사들을 궁중에 집결시켜 반란을 일으키려 했는데6) 당시 숙종(肅宗)이 계림공(鷄林公)으로 명복궁(明福宮)에 있다가 그 기미를 탐지하고 평장사(平章事) 소태보(邵台輔)더러, “국가의 안위가 재상들에게 달렸소. 지금 사태가 급하니 공께서 행동할 때요.”라고 설득했다. 이에 소태보가 상장군(上將軍) 왕국모(王國髦)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입궐해 경호하게 하였다.
왕국모가 먼저 장사(壯士) 고의화(高義和)7)에게 명해 이자의를 선정문(宣政門) 안에서 참수하게 하고 그 일당인 합문지후(閤門祗候) 장중(張仲)과 중추원당후관(堂後官) 최충백(崔忠伯) 등을 선정문 밖에서 처형시켰다. 또 병사를 나누어 보내 이자의의 아들인 주부 이작(李綽), 흥왕사(興王寺) 대사(大師) 지소(智炤), 그리고 장군 숭렬(崇列)과 택춘(澤春), 중랑장 곽희(郭希), 별장 성보(成甫)와 성국(成國), 교위 노점(盧占), 대정 배신(裵信) 등 17명을 붙잡아서 모두 처형했다.
또 평장사 이자위(李子威)8), 소경(少卿) 김의영(金義英), 사천소감(司天少監) 황충현(黃忠現), 봉어(奉御) 황영(黃榮)9), 소감(少監) 서황(徐晃), 시어사(侍御史) 왕태소(王台紹), 지후(祗侯) 이자훈(李資訓)10), 녹사 이경비(李景泌)11)와 최연(崔淵)12), 주부 전총(全寵)과 왕진(王縝), 판관 이자령(李滋令)과 김표(金彪), 사진(司辰) 황완(黃玩), 전전승지(殿前承旨) 염정(廉正), 장군 이보(李甫)와 오창(吳昌), 낭장 구현(仇賢)과 양개(良玠), 별장 안린(安鱗)과 진기(珍奇), 산원(散員) 유총(惟寵)·최행(崔幸)·임자성(林自成)·후선(侯善)·김전(金錢)·이현맹(李玄孟)·강희백(康希白)·정정좌(鄭貞佐) 등 50여 명을 남쪽 변방으로 유배보냈다. 그리고 역당(逆黨)의 처자를 적몰하여 양계 주·진(州鎭)의 노비로 삼았다.
숙종 초에 어사대(御史臺)가,
“역적 이자의 등이 사사로이 미곡을 모아 둔 것이 수 만석에 이릅니다. 이것은 모두 백성들에게서 긁어 모은 것이니 모두 관으로 몰수하시옵소서.”
라고 건의하자, 이를 허락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자의 [李資義] (국역 고려사: 열전, 2006. 11. 20., 경인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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