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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가짐 님의 서재입니다.

리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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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가짐
작품등록일 :
2020.11.11 17:14
최근연재일 :
2020.11.20 23:00
연재수 :
9 회
조회수 :
485
추천수 :
9
글자수 :
53,953

작성
20.11.11 19:00
조회
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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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글자
13쪽

이것은 저주다 (1)

DUMMY

*




남자는 당황했다.

불과 조금 전까지 퀴퀴한 홀아비 냄새와 빈 컵라면 용기로 가득한 더러운 방 안에서 한창 게임에 몰두하고 있던 그였는데...


잠시 눈을 붙였다 일어나 보니 난생처음 보는 곳에 누워 있었다.

근 10년간 외출하지 않고 온라인 게임에만 파묻혀 살던 그였다.

갑자기 주변 환경이 바뀌자 극도의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10년간 늘 그래왔듯이, 남자는 온라인 게임 ‘더 월드’의 최상급 플레이어로 군림하며 다른 이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이날도 커피와 컵라면의 힘을 빌려 3일간 밤을 지새운 끝에 유물급 무기를 손에 넣었고, 다음 공성전 이벤트까지 잠시 눈을 붙일 셈이었다.


그렇게 잠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뭐야?’


자리에서 일어선 후,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남자가 더욱 패닉에 빠졌다.


늘 입던 반팔티와 츄리닝 대신 웬 로브 같은 것을 걸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기에.

그런데 더 가관인 것은, 그의 손이...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게 뭐야!!”


남자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손이 그야말로 백골 그 자체였다.

뼈만 남은 손이 까딱까딱 움직이는 모습은 공포 그 자체였다.


남자가 황급히 주변을 탐색했다.


축축하고 어두운, 지하실로 보이는 이곳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폭발이라도 일어난 것인지 벽과 바닥 곳곳에 그을음이 잔뜩 묻어 있었고, 산산이 조각난 가구와 각종 실험 도구들, 그리고 책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벽에 걸려 있는 거울이 무사한 것이 기적으로 보일 따름이었다.

남자는 황급히 거울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후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장난하나?”


로브의 후드를 뒤집어쓴 해골이 거울 너머에 멀뚱멀뚱 서 있었으니까.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이, 이는 현재 남자의 모습을 그대로 비춘 것이었다.


이때, 어처구니를 상실한 나머지 망연하게 서 있는 남자의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흠, 생각보다 반응이 열렬한데. 역시 숙주가 숙주다 보니 당연한 건가?”


장난기가 묻어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음산한, 그러면서도 위엄 있는 한 마디.


남자는 거울 너머로 자신의 등 뒤를 바라보았다.

분명히 방금까지 아무도 없었는데, 어느새 낯선 자가 거울 속에 나타나 팔짱을 끼고 히죽거리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괴한이 능글맞게 손을 들어 보였다.


“어서 와. 이방인.”




*




잠시 후, 뼈만 남은 남자는 그나마 멀쩡한 의자에 걸터앉아 있었다.

눈앞에서 미친 소리를 나불대는 괴한의 말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그러니까 난 지구에서 이미 죽었고, 내 영혼을 이 해골바가지에 덮어씌운 게 당신이라 이겁니까?”

“해골바가지라니, 그건 너무 언데드 비하적인 발언인데? 이건 무려 리치라고. 그 악명 높은 리치 데릭. 9서클의 경지에 도달하고 신격에 도전하려던 시건방진 녀석이지. 뭐 꼴을 보아하니 실패한 모양이지만. 당연하게도.”


뼈만 남은 남자, 이제는 데릭이라고 불려야 할 그의 얼굴에는 어떠한 표정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야 백골 상태였으니까.


눈앞에서 신이 나 떠들어 대는 이 괴한의 정체는 차플란.


‘악의와 기만의 신’.

신격이었다.

지구에서 우연히 흘러들어온 남자의 영혼을 리치의 육신에 주입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거짓이 아니다.’


데릭은 생각했다.

리치의 몸에 빙의하면서, 놈이 가지고 있던 생전의 지식과 기억을 그대로 활용할 수 있었다.

눈앞에서 저 까불대는 남자는 틀림없이 그 차플란이었다.


신격들의 왕위 쟁탈전에 가장 열성적으로 참여 중인 악신.


“자, 그것보다 이제 본론에 들어가 볼까?”


마치 법왕이라도 되는 양 호화로운 옷차림에 탐스러운 콧수염을 기른 차플란이 두 손을 비볐다.


“리치의 기억을 이어받았으니 이 세상이 지금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고 있겠지?”

“...그런 것 같군요.”


당연하게도 이곳은 지구가 아니었다.

게임이나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중세풍의 세계관이었다.

검과 마법, 몬스터와 악마, 그리고 신격.

마치 판타지에 관련된 모든 것을 그대로 옮겨둔 듯한 곳이었다.


인간의 왕국들은 서로 대립 중이었고, 그 와중에 몬스터들이 활개치고 있으며, 사나운 드래곤들이 이따금 나타나 무자비한 폭력과 갈취를 일삼기도 했다.


평민들에게는 하루하루가 고달픈 시대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은 신격들의 왕위 쟁탈전이었다.


신들의 신, 절대신 레오폴드가 사라진 이후, 텅 빈 왕좌를 차지하기 위한 신격들의 경쟁이 치열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는 교단끼리의 세력 다툼으로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한 신격의 힘은 결국 그 신도들의 양과 질에 달려 있지.’


데릭은 차플란이 자신을 왜 되살렸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세계에서 날아온 영혼.

이를 강력한 숙주에 집어넣는다면, 그리고 잘 통제한다면, 이 쟁탈전에서 회심의 한 방을 먹일 조커가 될 테니까.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은 이질적인 영혼이기에, 다른 신격들은 직접적으로 데릭에게 영향을 끼칠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신격이라도 다른 차원의 영혼에게 대놓고 뭔가를 강제할 수 없다.

격을 발하여 위협할수도, 명령할수도 없다.


‘절대신 레오폴드, 그리고 저놈만 빼고 말이지.’


데릭은 싱글싱글 웃고 있는 차플란을 노려보았다.

자신의 정수(精髓)를 일부 희생하는 리스크를 짊어지며 영혼 이식을 시행한만큼, 차플란만큼은 데릭에게 어느 정도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있었다.


영혼을 고문하는 것.

놈이 원한다면, 데릭의 영혼은 영겁의 시간 동안 끊임없이 고통받을 수도 있다.

천 년이고, 만 년이고.

육체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가혹한 고통을.


물론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인지라, 데릭에게 문제가 생기면 투자한 정수를 모조리 잃게 된다는 단점이 있었다.

단지 차플란이 그 정도는 기꺼이 감안할만큼 또라이일 뿐.


“좋아. 그럼 내가 왜 널 되살렸는지도 잘 알 것 같은데?”

“힘을 키우고 언데드의 군단을 만들라는 것 아닙니까? 세상에 공포를 가져다주고, 그로 인해 당신의 신도를 늘리려는 것이겠지요.”

“바로 그거야.”

“하지만 이미 알고 있지 않습니까? 제 혼은 이 해골과 싱크가 맞지 않아요. 마나가 빠른 속도로 흩어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데릭의 전신에서 끊임없이 푸른 기운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통제되지 않는 마나가 대기 중으로 흩어져 가는 것이었다.


이는 본래 숙주가 직접 쌓아 올린 강대한 힘.

굴러들어온 돌이 온전히 이어받을 수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이대로라면 5분 안에 마나가 모조리 흩어져 버릴 것이었다.

한때 9서클의 경지에 올랐던 이 리치는 다시 밑바닥부터 시작해야 하리라.


그러나 차플란은 비릿하게 웃을 뿐이었다.


“뭐, 일이 너무 쉬우면 짜릿하지 않잖아? 걱정말라고. 리치의 기억과 지식을 가지고 있으니 금방 제 실력을 되찾을 수 있을 거야.”

“아무리 리치라 해도 1서클 정도로는 일반병보다 조금 나은 수준입니다만?”

“그렇지. 그래서 네가 인간 행세를 하며 수행을 해야 하는 거다.”

“...뭐라고요?”


데릭은 기가 찼다.

무려 리치가 1서클 주문밖에 쓰지 못하는 것도 어불성설인데, 이놈은 그에게 인간들과 행동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보통 리치란 것들이 던전 깊숙한 곳에 숨어 마법 연구와 음모 획책에 몰두한다는 걸 생각해보면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차플란은 침묵하는 데릭을 힐끗 보더니, 손을 휘휘 내저었다.


“물론 이 해골의 꼬라지로는 무리겠지. 내가 좀 도와주겠어. 꽤 요긴할 거다.”


갑자기 방 안이 격렬히 요동치기 시작했다.

차플란이 그의 권능을 발하여 데릭에게 뭔가 하려 하고 있었다.


새카만 연기가 실내를 가득 메웠다.

자신의 손조차 볼 수 없을 만큼 자욱했다.

악신의 정수가 가득 담겨 있는, 사악하기 그지없는 기운이었다.


그러나 연기가 걷혔을 때, 데릭은 그 어떤 변화도 느낄 수 없었다.

자신은 여전히 백골의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흩어지는 마나가 진정되는 것도 아니었다.


“...뭘 한 겁니까?”


자연히 그의 말투는 퉁명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차플란은 빙글빙글 웃을 뿐이었다.


“내적인 ‘변장’을 시켜 줬잖아.”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요.”

“그 어떠한 감각, 탐지 능력, 주문으로도 네놈이 언데드인걸 확인할 수 없게 해 놨어. 심지어 다른 신들조차도 말이지. 나 기만의 신이야. 그 정도는 쉽다고.”


확실히 차플란이라면 가능한 일이었다.

기만의 신이라는 이명답게, 놈의 변신 능력은 가히 최고 수준이었다.

그 날고 기는 신들조차도 차플란의 변장에 번번이 속아 넘어가고 골탕을 먹곤 했으니까.

이 녀석이 ‘변장’을 시켜줬다면 신들은 물론이고, 필멸자들에게도 들킬 일은 없을 것이었다.


‘내적인’ 변장이라는 멘트가 몹시 신경 쓰였지만.


차플란은 데릭의 뼈만 남은 얼굴에서 의심스러운 표정이라도 읽어낸 것인지 음흉하게 웃었다.


“물론 외적인 부분은 알아서 하라고. 자기의 일은 스스로 해야 착한 어린이지? 휴, 이만큼이나 현세에 개입했더니 정수 소모가 꽤 심하군. 슬슬 돌아가 봐야겠어.”


파지직!


그들의 사이에서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새카만 균열이 드러났다.

차플란은 데릭에게 손을 한 번 흔들어 준 후 균열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균열 속으로 완전히 모습을 감추려던 차플란이 갑자기 고개를 빼꼼 내밀고 한 마디 툭 던졌다.


“기대하겠어. 난 투자한 만큼은 반드시 뽑아내고야 마니까. 그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을 때는...알지?”


그의 말투에서는 어느새 장난기가 싹 사라져 있었다.

형용할 수 없는 악의가 뚝뚝 떨어져 나오고 있었다.


“...”


데릭은 대답하지 않았다.

차플란이 픽 웃더니, 곧 균열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빌어먹을.”


짜증 나는 악신이 완전히 사라지자, 데릭은 나직이 욕설을 내뱉었다.





*




‘아직 9서클 주문 사용이 가능하다. 하지만 시간이 없어. 서둘러야 해.’


데릭은 황급히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육체와 영혼의 싱크가 맞지 않았기에 곧 마나가 모두 흩어져 버릴 것이었다.

그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외적’인 변장.


마나를 잃고 나면 다시 1서클부터 차근차근 수련해 나가야 할 터인데, 그러려면 대외 활동이 필수적이었다.


아무리 리치의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해도 실전 경험 없이 높은 경지로 가는 건 불가능했다.


좋든 싫든 이 음침한 던전을 떠나 속세로 나갈 필요가 있었다.

그러려면 당연히 외모를 조금 더 참고 봐줄 만한 수준으로 바꿀 필요가 있었다.


데릭은 거울 앞에서 주문을 외웠다.


“[시간 역행].”


그러자 그의 전신이 환하게 빛나더니, 백골만 남은 육체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주문으로 인해 시간이 역행하면서, 리치의 신체에 발생했던 부패가 역순으로 진행되었다.


썩어 문드러진 살점이 뼈 위에서 돋아나기 시작했고, 그 위에 피부가 생겨났다.

머리털이 자라나기 시작했고, 안구가 생성되었다.


데릭은 거울을 통해 그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가, 더 이상 진전이 없음을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다음 주문을 외웠다.


“[달립의 값비싼 향수].”


부패 과정이 역으로 진행되며 풍겨오던 지독한 악취가 돌연 사라졌다.

그 대신 방 안을 가득 메운 것은 향긋한 레몬 향이었다.

살 썩는 냄새를 완벽히 가려줄만한 향기였다.


“[제한된 영구적 시간 정지].”


그 후 다소 긴 이름의 주문을 자신의 몸에 시전했다.

시곗바늘이 똑딱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갈수록 느려지더니, 마침내 멈추었다.

이로써 먼저 사용한 두 가지 주문의 효과가 영구적으로 적용될 것이었다.


한편, 동시에 고위 주문을 3개나 사용하자, 마나가 급격한 속도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모래시계의 옆구리에 구멍을 낸 것 같았다.


‘마지막이다.’


데릭의 눈이 테이블 위에 놓인 낡은 놋쇠 반지로 향했다.


리치의 보험이자, 한편으로 아킬레스건이기도 한 것.

성물함을 만들 차례였다.


리치는 자신의 영혼이 담긴 성물함이 파괴되지 않는 한 절대로 죽지 않는다.

거꾸로 말하자면 이 성물함을 잃는다면 허망하게 죽어버린다는 의미도 되었다.

그렇기에 리치들은 이 성물함을 보호하는 데 굉장히 공을 들이는 편이었다.


성물함을 토끼의 배 속에 집어넣은 후, 그 토끼를 다시 사자의 배 속에, 그 사자를 고래의 배 속에 넣어 바다에 풀어놓는다든지.


그런데 데릭은 그렇게까지 할 수가 없었다.

마나가 계속 흩어지고 있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또 싱크 문제인가.’


데릭이 이를 갈며 반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오오오!


어느새 흰 머리칼이 길게 자라난 그의 머리에서 희뿌연 영체가 솟아올랐다.

그 후 순식간에 놋쇠 반지로 빨려 들어갔다.


데릭의 성물함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반지를 집어 들어 손가락에 끼웠다.

그리고 거울로 시선을 돌렸다.


아까 전보다는 제법 사람의 모양새를 갖춘 데릭이 거울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무심한 듯한, 그러면서도 서늘함을 품고 있는 날카로운 눈매가 거울 속을 노려보았다.


“뭐, 그래도 생각보다는 쓸만해졌네.”


자조적인 중얼거림과 함께, 데릭의 남은 마나가 모조리 공중으로 흩어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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