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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밀리옹

잠식된 세계의 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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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밀리옹
작품등록일 :
2021.12.15 14:42
최근연재일 :
2022.01.17 23:55
연재수 :
2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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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1
글자수 :
126,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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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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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3쪽

2. 북부로 (2)

DUMMY

2층으로 올라가는 아덴에겐 꽤나 따가운 시선들이 쏟아졌다. 마왕이라는 이름, 그리고 그걸 잡겠다는 말까지. 전부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당길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마왕을 잡겠다고 떠났던 이들은 많았다.


비록 성검을 들진 못했어도, 사람들은 그들을 용사라 불렀다. 저마다 마음 맞는 동료들을 모아 마왕을 토벌하기 위해 떠났던 이들. 허나 그들이 전부 어떻게 되었는지를 떠올리면, 그야말로 우스갯소리에 불과한 것이다.


마왕성 입구조차 가지 못했다. 들려오는 것은 모두 처참한 패전보. 왕국에서 가장 강한 기사라 불렸던 이가 죽었고, 성국의 차기 성녀가 죽었다.


용사는 죽었다. 사람들은 그 의미를 이제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용사라도 될 생각인가? 동료를 모아서 마왕을 죽이겠다니.”

“그런 건 아닙니다. 마왕을 죽인다고 전부 용사는 아니지 않습니까.”


용사란, 단지 마왕을 죽이기 위해 나섰기에 얻은 칭호가 아니었다. 성검을 뽑았다는 건 의지가 있다는 것이었다. 세상을 구하겠다는 신념, 어떤 역경에서도 그것을 관철하겠다는 의지. 아덴은 제게 그런 것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살기 위해 검을 들었고, 마왕을 죽이려 하는 건...기껏해야 복수하기 위해서이지 않은가. 인간적인 이유였다. 남에게 그런 것까지 말하고 싶지 않아 입을 닫자, 레크는 눈썹을 꿈틀거리곤 다시 앞으로 향했다.


1층과 달리 2층은 그리 북적이지 않았다. 애초에 마정석을 교환하기 위해서만 사용하는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기다란 복도를 걷기도 잠시, 문 앞에 다다른 레크는 아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 안으로 들어가면 보상을 지급 받을 수 있다네. 뭐, 모쪼록 몸조심하길 바라지.”

“감사합니다.”


여기서 헤어지면 아마 다시는 못 볼 얼굴일 터였다. 야만족의 영역인 북부, 발을 들이기도 어려웠지만. 한 번 발을 들였다 다시 나오는 것이 더욱 어려운 곳이었다. 동료를 찾는다고 했던가. 요즘 들어 듣기 힘든 말이었지만, 레크는 그 말이 그리 허황된 것처럼 들리진 않았다.


처음 보는 사이인데도, 어쩐지 묘한 신뢰감이 느껴지는 듯 했다.


#


묵직해진 주머니를 들어 올린 아덴은 저 멀리 보이는 것에 시선을 옮겼다. 사람에게 길들여진 극지 늑대로 움직이는 이 근방의 교통수단. 50골드의 대부분은 저걸 타고 북부로 이동하는 데에 써질 예정이었다.


50골드, 저 썰매를 타는 데에 30골드. 그 외에도 실버나 쿠퍼가 있긴 했지만, 그런 건 물약을 몇 개 사느라 써버린 지 오래였다.


붉은색의 액체가 찰랑거리는 물약, 얕은 상처를 치료하는 효과가 있기에 유사시의 상황엔 이만한 것이 없었다. 동료 중에 마법사나 치유사가 필요한 이유이리라. 붕대를 감고 상처를 꿰매는 정도는 아덴도 할 수 있었지만, 그건 응급치료일 뿐이었다.


마왕을 잡기 위해선 뼈가 부러지더라도 치유할 수 있는 실력자가 필요했다.


물론 북방에선 찾기 힘들 테지만, 아덴은 치유사보다도 지금 찾으려는 야만족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용사가 죽은 뒤 몇 년이나 흘러버린 뒤였다. 수많은 인재들이 남부에서 죽었지만, 여전히 북부 곳곳에서는 나름의 실력자들에 대한 소문이 흘러들어오기 마련이었다.


남부 근처에서 살던 것은 그런 이유였다. 자신과 함께 마왕을 잡을 수 있는, 그리고 도움이 될 사람들이 필요했다. 한편으론 의문이 일기도 했다. 용사마저 실패한 일을 동료를 모았다고 해서 자신이 해낼 수 있을까. 아덴은 그 의문을 머릿속에 지워내며 고개를 붕붕 저었다.


설령 모자라다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마왕을 죽이겠다는 목표를 세운 이상, 그걸 저버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기기긱, 등에 매달린 커다란 대검이 끌렸다. 허리춤에 달린 것은 롱 소드와 도끼, 대검과 함께 매달려 있는 창이란 마치 기인(奇人)처럼 보일 따름이었다. 많은 무기를 들고 다니는 그 행색은 무릇 사람의 호기심을 일으키는 법이었다.


허나 목도리처럼 천을 두르고, 얼굴을 가린 채 거리를 걷는 아덴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간혹 걸인이 시선을 보냈지만,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내리기 급급했다. 용병이나 모험가들이 가득한 이곳에서도 특이한 행색, 허나 본인은 그런 것에 대해 자각이 없었다.


이런 차림새로 돌아다닌 지도 벌써 몇 년이었으니, 남들의 시선을 느끼는 감각은 이미 무뎌진지 한참이었다. 짤그랑, 묵직한 가죽 주머니 안에서 움직이는 금화 소리를 들으며 걸음을 옮긴다. 썰매를 타고 움직여야 했지만, 그 전에 준비해둬야 할 것들이 있었다.


“얼마입니까?”


한 노점 앞에 들린 아덴이 입을 열었다. 잡동사니 같은 물건들 사이에서 삐죽 튀어나온 병, 그 속에 찰랑거리는 것은 성수였다. 이걸 이런 곳에서 볼 줄이야. 살 계획은 없었지만, 이런 건 있을 때 사두는 편이 좋았다. 상인은 그것의 가치를 모르는 건지 꽤나 싼 값을 불렀다.


“5실버만 주쇼.”


원래라면 몇 골드는 가볍게 호가할 것이 성수였다. 성직자들의 신성력을 토대로 만들어진 부산물, 아덴은 병을 챙기며 작게 미소지었다. 운이 좋았다. 생각보다 마정석의 값을 많이 받은 것도 그렇고, 오늘의 운수는 꽤 괜찮지 않은가.


물약, 여벌의 옷, 식량 따위를 챙긴 아덴은 짐이 당긴 꾸러미를 걸치곤 다시 썰매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움직일 때마다 무기끼리 부딪혀 들려오는 소음에 썰매를 점검하던 운전수들이 아덴을 바라보았다. 용병, 아니면 모험가. 손님을 찾고 있던 운전수들은 아덴에게 다가오며 저마다 인심 좋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어디로 가십니까!”

“저희가 더 싸게 모셔드릴 수 있습니다!”

“어디 가십니까? 가까운 곳이라면 제가 가장 싸게 태워드릴 수 있습니다.”

“야만족의 땅으로 갑니다. 동토(凍土)도 갑니까?”

“...아, 아무래도 그곳은 좀.”


동토(凍土)라는 말을 들은 운전수들은 저마다 아덴의 시선을 피해 떠나기 시작했다. 손님을 찾고는 있었지만,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나같이 똑같은 반응에 아덴이 질려할 무렵,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아덴에게 다가왔다.


“40골드.”


아무런 맥락도 없이 툭 던져지는 말에 아덴이 빤히 쳐다보자, 가만히 서있던 노인은 아덴의 대검을 힐끔 살피곤 다시 입을 열었다.


“...35골드?”

“태워주시는 겁니까?”

“뭐, 아무도 안 하려는 거 같으니까. 난 돈이 궁한 사람이거든.”


시가를 질겅질겅 씹는 노인의 이마에선 식은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혹시 자신이 손님을 잘못 고른 걸까. 그렇게 한참 고민하던 노인에게 아덴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한 것보다 비싼 금액이긴 헀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타시게. 금방 태워드릴 테니.”


아덴이 대답하자 노인은 재빨리 썰매로 향했다. 불룩하게 튀어나온 배, 마치 팽귄처럼 뒤뚱거리며 걷는 모양새는 다급해보였다. 무엇이 그리 겁이 나 그러는 건지, 아덴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썰매에 자리를 잡았다.


#


동토 주변엔 늘 눈이 가득했다. 말이 달릴 수 없기에 사람들은 다른 동물들을 찾기 시작했고, 눈 위에서 가장 잘 움직일 수 있는 동물은 극지 늑대 뿐이었다.


아우우-


포효하며 달리는 늑대의 소리가 주변에 울려 퍼졌다. 짜악, 하며 채찍 소리가 들릴 때마다 속도가 점차 빨라졌다. 수십 년간 썰매를 운전했다는 노인의 말은 틀리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흩날릴 정도로 빠른 속도였지만, 정작 썰매의 흔들림은 미미한 편이었다.


“저 멀리 보이는 곳이 동토의 시작점이지.”

“극지의 창이로군요.”


눈보라가 그친 설원의 시야는 탁 트여있었다. 하얀색 외에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곳이었지만, 저 멀리 보이는 날카로운 첨탑과도 같은 산맥은 분명히 보였다. 극지의 창, 야만족들이 살고 있는 땅의 경계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야만족의 땅엔 아덴이 찾는 사람이 있었다. 마왕 토벌을 도울 인재를 찾기 위해 수소문하던 중에 들었던 소문이었지만, 아덴은 그 얘기를 듣곤 가장 먼저 동토로 향하기로 마음먹었다. 묘한 이끌림이라 해야 할지, 운명 따위를 믿진 않았지만. 동토로 먼저 향해야 할 것만 같은 강한 예감이 있었다.


야만족이라 부르는 것은 사실 그들에 대한 모욕이었다. 유목 민족답게 다른 인간들처럼 한곳에 정착해 도시를 건설하지 않을 뿐, 그 외의 것들은 인간보다 나은 점이 많았다.


특히나 가장 먼저 장점으로 꼽히는 건 전투 능력. 거친 북부에서 살아가는 건, 그것만으로도 천혜의 전투 능력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만타.”


야만족의 언어로 ‘현자’를 뜻하는 단어. 그런 이름이 어째서 최고의 전사에게 붙은 이름인지는 몰라도, 아덴은 아만타라는 야만족이 자신과 함께 해주기를 바랐다. 소설에서 용사가 처음 만났던 동료 또한, 분명 북방 야만족 출신이었으니까.


“북부로 가는 젊은이는 흔하지 않지. 전사의 시험을 볼 생각인가?”

“그런 걸 듣기는 했지만, 치뤄 볼 생각은 없습니다.”

“무기를 차고 있는 걸 보아 관심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군. 뭐, 가끔은 관광하러 떠나는 것도 나쁘진 않지.”

“관광...”


이런 세상에 듣기 힘든 말이었다. 어렸을 때면 몰라도, 최근 들어 처음으로 들어본 그 말에 아덴은 피식하고 웃음을 흘렸다. 눈처럼 새하얀 수염은 바람을 맞아 마치 깃발처럼 나부꼈다. 그럼에도 운전엔 문제가 없는지, 수족처럼 늑대를 다루는 솜씨엔 변함이 없었다.


“이 근방에 자주 오십니까?”

“아니, 용사가 죽기 전이면 몰라도 최근 들어선 처음이지.”

“익숙해 보이십니다. 길도 잘 아시는 것 같고.”

“그래도 내 짬이라는 게 있는데, 이 근방은 눈을 감고도 운전할 수 있지. 보게, 이렇게 말이야.”


정말로 눈을 감고 운전하는 모습은 마치 신기(神技)를 보는 듯 했다. 바닥에서 가끔 튀어나온 돌부리를 피하고, 근방에 있을 괴수들의 영역을 피해 안전한 길로만 향한다. 이대로라면 며칠 안 걸려 동토에 도착할 수 있으리라.


거추장스러운 무기를 벗어던지자 몸이 가벼워졌다. 근래에 하루 종일 걸어 다닌 탓인지, 몰려오는 피곤에 아덴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잠시 자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이지. 더 이상 위험요소는 없어. 장담할 수 있다네.”


호탕하게 웃는 모습은 그야말로 믿음직스러웠다. 아덴이 슬쩍 웃으며 잠드는 그 순간까지, 썰매는 아무런 문제없이 눈 위를 미끄러지고 있었다.


쿵!

난데없이 들려온 굉음에 눈을 떴을 때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잠에 들지도 못한 아덴은 곧바로 검을 쥔 채 주변을 바라보았다. 산맥에서 쏟아져 내린 건지, 썰매 앞에 생겨난 커다란 눈 무더기가 하나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흠, 그러니까...아주 자그마한 문제가 하나 생겼네. 내가 이 주변에 있는 모든 문제를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까먹었을 만큼 아주 사소한 문제지.”


헝클어진 수염은 꼭 곤란해보이는 노인의 감정을 그대로 내보이는 것만 같았다. 아덴이 눈살을 찌푸리자,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쉰 노인이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저기 보이는 저 눈덩이는, 사실 눈덩이가 아니라네.”


꿈틀. 가만히 쌓여 있던 눈덩이가 조금씩 위를 향해 솟아나기 시작했다. 하늘을 향해, 끝도 없이. 더 나아가선 아예 태양을 훌쩍 가려버린 무언가를 보며 아덴은 작게 중얼거렸다.


“...예티로군요.”

“아주 사소한 실수지. 내가 까먹어버린. 지금부터 도망치면 도망은 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주 조금 더 오래 걸릴 것 같네.”

“얼마나 오래 걸립니까?”

“일주일 정도...?”


눈을 가늘게 뜬 아덴이 흘겨보자 노인은 입을 꾹 다문 채 시선을 피했다. 예티가 이 근방에 사는 걸 까먹고 있다가 영역에 발을 들인 탓이었다.


'사소한' 실수라, 실소를 머금은 아덴은 천천히 검을 뽑아들었다. 그 모습에 노인이 어깨를 움찔 떨었지만, 검이 향하는 방향은 노인이 아닌 예티를 향해서였다.


“잡고 가죠.”


잠깐이나마 운이 좋다고 생각했던 것이 문제였다. 생각해보면 아덴은 언제나 운이 없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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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24. 해방 (5) +8 22.01.14 71 11 9쪽
24 23. 해방 (4) +3 22.01.13 58 6 9쪽
23 22. 해방 (3) +1 22.01.12 61 5 9쪽
22 21. 해방 (2) 22.01.11 65 5 9쪽
21 20. 해방 (1) +2 22.01.10 73 7 9쪽
20 19. 소인족 (5) 22.01.08 82 8 9쪽
19 18. 소인족 (4) 22.01.07 81 6 9쪽
18 17. 소인족 (3) 22.01.06 85 9 9쪽
17 16. 소인족 (2) +3 22.01.05 105 8 10쪽
16 15. 소인족 (1) +1 22.01.04 102 9 10쪽
15 14. 용암지대 (3) +1 22.01.03 96 11 9쪽
14 13. 용암지대 (2) +4 22.01.01 175 9 9쪽
13 12. 용암지대 (1) +2 21.12.31 169 17 9쪽
12 11. 아만타 (4) +2 21.12.30 200 14 10쪽
11 10. 아만타 (3) +1 21.12.29 172 14 9쪽
10 9. 아만타 (2) +2 21.12.28 178 14 10쪽
9 8. 아만타 (1) +2 21.12.27 198 18 11쪽
8 7. 야만족 현자 (4) +5 21.12.25 238 21 13쪽
7 6. 야만족 현자 (3) +3 21.12.24 235 19 10쪽
6 5. 야만족 현자 (2) +7 21.12.23 253 20 10쪽
5 4. 야만족 현자 (1) +4 21.12.22 258 22 11쪽
4 3. 북부로(3) +4 21.12.21 293 26 13쪽
» 2. 북부로 (2) +7 21.12.20 345 41 13쪽
2 1. 북부로 (1) +9 21.12.20 522 46 12쪽
1 용사가 죽었다. +41 21.12.20 985 92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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